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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31)
능능기중별하능能能其中別何能, 야월3경호부능夜月三更呼夫能!(특별히 잘하는 게 무엇이냐? 달밤에 서방을 불러들이는 거라오!)
김삿갓은 이날부터 임 진사댁 별당에서 귀객 대접을 받아가며 평양 구경을 맘놓고 다닐 수 있었다.
임 진사는 워낙 시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김삿갓과 어울려 술을 나눠 가며 시를 짓는 것을 무엇보다도 즐거워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임 진사는 김삿갓의 수발을 들리기 위해 '산월'이라는 애송이 기생까지 딸려 주어 김삿갓은 돈 한푼 안 들이고 객고도 맘대로 풀 수 있게 되었다.
기생 산월이는 나이가 17세 가량 되었을까,
비록 나이는 어려도 성품조차 서글서글하고,
무슨 일이든지 막힘이 없어, 재주가 뛰어나 보였다.
첫날밤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자,
김삿갓은 희롱의 말로 수작을 걸어 보았다.
"평양기생하소능平壤妓生何所能
평양 기생은 어떤 재주를 가졌는가?"
산월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다.
"능가능무쌍능시能歌能舞雙能詩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고, 두가지와 함께 시도 잘 짓는다오"
산전수전 다 겪은 노기老妓 뺨칠 정도의 멋진 화답을 한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어 보았다.
"능능기중별하능能能其中別何能
모두 잘한다지만, 그중에 특별히 잘하는 재주는 무엇이냐?"
그러자 이번에는 산월이 "호호호" 소리내어 웃으며,
"야월삼경호부능夜月三更呼夫能
특별한 재주라면, 달밤에 서방을 불러들이는 것이라오!"
산월의 대답을 들은 김삿갓이 "하하하" 소리내어 웃자,
산월은
"희롱의 말씀은 그만 하시고, 이제는 술이나 드사이다."
하고 옆에 마련된 소반을 끌어당겨 술을 따라 주는 것이다.
"자네가 모든 재주에 능하다고 하니,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에 춤이나 한 곡 추워 보이게!"
"어렵지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산월은 바시시 일어 나더니 스란치마의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나더니 바라춤을 나비처럼 나풀나풀 추기 시작하였는데, 몸놀림과 손놀림이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장단이 없어 어색하지 않사오니까?"
"아니다! 더 할 나위 없는 천상선녀의 유희遊戱를 보는 것 같았다."
김삿갓은 춤추기를 끝낸 산월을 와락 끌어당겨 가슴 그득히 품에 안았다. 열 일곱 산월의 봉긋한 유방은 풋익은 두알의 복숭아처럼 탱탱하고 야무졌다.
유취乳臭가 나는듯한 몽롱한 체취는 어떤 향기보다 더 정신을 취하게 하였다.
김삿갓은 그녀가 편안하게 드러눕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육체의 앞부분을 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속으로 끌어 당겼다.
그가 자기 속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살에 닿는 맨살을 느꼈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엉덩이는 그의 손바닥 크기였다.
그가 그녀의 보드랍고 매끄러운 엉덩이를 양 손으로 감싸안고 자신의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놓아 주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좀체 움쭉도 않던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뜨겁고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러운 불길이 깃털처럼 날리듯 자신의 몸 속에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는지, 눈을 감은채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있었다.
그도 그녀의 활짝 열린 자궁속으로 조수에 밀리는 해초처럼 물결따라 너풀 거렸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귓가에 거친 신음 소리를 토해 내며 불덩이를 쏟아내자,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힘차게 껴안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서로 놓아 주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창가에는 달빛이 환히 비치고 있었다. 담 밖에서는 오경五更을 알리는 순라꾼의 딱다기 소리가 들려왔다.
평양에 와서 처음으로 즐겨 보는 기생 외도가 너무도 즐거웠던 김삿갓은 하도 흥에 겨워, 용만곡龍灣曲이라는 옛 시 한 수를 읊었다.
[무기요지백설경舞妓腰肢白雪輕
춤추는 기생의 허리는 눈처럼 가볍고
화연대주월영영華筵對酒月盈盈
술을 마시다 보니 달빛이 휘영청 밝구나
여군환소행인취與君歡笑行人醉
그대와 함께 웃다 보니 술이 취해 오는데
무사순군보오경無事巡軍報五更
순라꾼은 어느새 밤이 깊었다고 오경을 알리는구나.
132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32)
⁹노기老妓들의 화전花煎놀이
하룻밤을 즐겁게 보낸 김삿갓은 다음날부터 혼자 평양 구경에 나섰다.
그리하여 연광정緣光亭을 비롯 부벽루浮碧樓, 망월루望月樓, 풍월루風月樓, 영귀루詠歸樓, 함벽정涵碧亭, 쾌재정快裁亭, 영명사永明寺, 장경사長慶寺 등, 평양에서 이름난 명소는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가보았다.
김삿갓은 발길이 이르는 곳 마다,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정신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경치도 경치지만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은 옛날에 이곳을 다녀 간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자취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시인묵객들은 이름 난 경치 좋은 곳을 다녀가며 시를 남기기 일쑤였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기억하고 현판懸板에 새겨 걸어 놓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걸려있는 현판 시를 감상하는 것은 김삿갓에게는 다시없는 즐거움이었다.
부벽루에는 정도전鄭道傳의 시가 걸려 있었다.
[영명사 절 앞에는 커다란 강이 흘러
놀잇배 타고 와서 부벽루를 찾노라
바람과 피리소리에 날이 저무는데
아득한 물안개가 시름을 자아 주네.]
김삿갓이 돌아 보는 평양의 명소에는 이르는 곳마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가 현판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명시를 워낙 많이 보아 온 김삿갓은 시흥이 자꾸만 솟구쳐 올라왔지만, 정작 자신의 시상을 형상화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따라서 숫제 시짓기를 단념하고 발길을 연광정으로 옮겼다. 김삿갓이 연광정을 자주 오르는데는 볼 때마다 감흥이 새롭기 때문이었다. 연광정은 덕암德岩이라는 수백 척 절벽 위에 날아갈 듯이 솟아 있는 정자다.
연광정은 성종成宗대왕 시절 평안 감사로 있던 허광이 지은 것으로서, 평양에 있는 수많은 명승고적 가운데서도 규모로 보나 건축미로 보나 가장 뛰어난 정자인 것이다.
연광정은 일찍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강화 담판講和談判을 했던 장소로 유명하고,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적진 속에 들어가 왜장을 살해하고 순국절사殉國節死한 평양 명기 계월향桂月香도 평소에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광정은 높은 벼랑위에 우뚝 솟아있는 관계로 눈앞의 전망이 광활하기 이를 데가 없다.
바로 눈앞에는 능라도와 백은탄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데다가, 왼쪽으로는 대동루大同樓와 오른쪽으로는 읍호루揖濠樓도 지척간에 보였다.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용하게 흐르는 대동강물 위에는 사시장철 놀잇배가 무수히 떠 있어서 연광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은 실로 인간세계가 아닌 선경이었다.
연광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때마침 진달래 꽃이 만발한 시절인지라, 그 잔디밭에서는 10여 명의 노기老妓들이 둘러앉아 화전花煎놀이를 하고 있었다. 화전놀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류적인 봄놀이다.
소금으로 간을 넣어 찹쌀가루를 반죽한 뒤 진달래 꽃으로 수를 놓아 전을 부쳐 먹는 놀이인 것이다.
꽃으로 전병을 부쳐 먹는 것은, 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배달 민족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김삿갓은 시인도 아닌 늙은 기생들이 모여 앉아 화전놀이를 하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더구나 화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코끝에 걸리자 별안간 시장기가 동했다. 그리하여 노기들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수그려 보였다.
"지나가던 걸객올시다. 잔치가 푸짐하신 모양이니 걸객에게도 전병 몇 점 얻어먹게 해 주십시오."
노기들은 돌연 나타난 불청객 때문에 적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50이 넘어 보이는 기생이 전병 석 장을 접시에 담아 내밀어 주며 말한다.
"우리들은 지금 막 시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라오. 남은 전병이 석 장뿐이니, 허물치 말고 자셔 주세요." 말투가 지극히 공손하였다.
김삿갓은 그들이 단순히 화전놀이만 한 것이 아니라,
시회를 하였다는데 내심 크게 놀랐다.
평양은 팔도 제일의 "기생의 고장"인지라,
기생들끼리도 "시회"를 하는가 싶어 놀라웠던 것이다.
김삿갓은 전병 석 장을 다 먹고, 빈 접시를 내밀어 주며 고맙다는 말 대신에 이런 수작을 하였다.
"즐거운 시회에 불청객이 훼방을 놀아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여러분이 시짓기 화전놀이를 하셨다하니,
나도 고맙다는 뜻으로 화전놀이에 대한 옛 시를 한 수 적어 놓고 가겠소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일필휘지로 써갈겨 놓았다.
[정관탱석소계변鼎冠撑石小溪邊
솥을 돌로 괴어 놓은 개울가에서
백분청유자두견白粉淸油煮杜鵑
흰 가루를 기름에 튀겨 전병을 부쳐
쌍저협래향만구雙箸挾來香滿口
저로 집어 넣으니 입안에는 향기가 가득하여
일년춘신복중전一年春信腹中傳
한 해의 봄소식이 뱃속에 전해 오네]
김삿갓이 시를 적어 놓고 자리를 막 뜨려고 하는데,
기생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 시는 누가 지었길래, 이렇게도 잘 지으셨습니까?
혹시 선생이 지으신 시는 아니온지요?"
노기 왕초쯤으로 보이는 늙은 기생이 물었다.
그러자,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올시다. 이 시는 명종 대왕때 풍류객 임백호林白湖 선생이 지은 시 올시다."
"임백호 선생이라면, 그 옛날 평양에 도사都事로 오셨다는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바로 그 양반이 지은 시랍니다. 그 양반은 워낙 유명한 퓽류객인지라 평양에 와서도 많은 일화를 남기셨지요."
"그 분이 어떤 일화를 남기셨는지, 이왕이면 그 말씀 좀 들려 주세요." 유명한 시인의 "일화"라는 소리에 노기들은 호기심이 대단해 보였다.
김삿갓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임백호의 풍류기담風流奇談은 한두 가지만이 아니라오.
그가 도사로 평양에 와 있을 때의 일화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33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33)
겨울에 부채를 선사한 이유
평양 감사 다음 가는 높은 벼슬자리인 도사로 임백호가 평양에 왔을 때의 일이다.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관계로 임백호는 수많은 명기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수 많은 기생중에 그가 마음으로 좋아하는 기생은 오직 한우寒雨라는 기생뿐이었다.
왜냐하면 한우는 풍류를 알고 시를 알아 백년지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우는 워낙 지조가 굳은 기생인지라, 몸 만은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임백호는 일 년이 넘도록 한우를 만나 왔지만, 사내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초겨울 밤, 그날도 한우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임백호는 불현듯 한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면서 한우에게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를 읊어 들려 주었다.
[북창北窓이 맑다기에
우장雨裝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오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결국 얼어 자게 생겼네.
이 시조에 나오는 <찬비>는 기생 <한우寒雨>를 일컫는 말임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임백호가 한우를 찬비에 비유하여 즉흥시를 한 수 읊어 댐으로써, 은연중에 한우와의 동침을 요구해 본 것이었다.
명기 한우가 임백호의 그런 심정을 못 알아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한우도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조로 응수하여 임백호의 소원을 흔쾌히 풀어 주었던 것이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로 얼어 자리
비단 이불 원앙베개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소 찬비 맞으셨다니
내 녹여 드리겠소.]
김삿갓이 능란한 입담으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자,
노기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 어떤 기생은 가벼운 한숨조차 지으며 넋두리 하듯 말을 한다.
"옛날 분들은 사랑을 해도 그처럼 멋지게 사랑을 했는데,
요새는 그런 풍류 남아를 볼 수가 없네요."
이어서 또다른 기생이 말을 하는데, "그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임백호의 일화를 많이 알고 계시니, 한 가지만 더 들려 주세요."
김삿갓은 손을 내저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얘기는 그만 하고 댁으로들 돌아가시지요."
그러나 기생들은 누구도 일어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한 가지만 더 들려 주세요."
그러면서 기생들의 시선이 모두, 김삿갓의 얼굴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마지못해 임백호의 일화를 또다시 아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임백호의 일화를 하나만 더 하기로 합시다.
임백호는 평양에 있을 때에 어떤 동기童妓 하나를 무척 귀여워했다오.
그래서 한겨울 임에도 그애에게 부채 하나를 선사한 일이 있는데, 그 부채에 임백호가 손수 써준 시가 유명하니, 그 시를 소개하지요."
그리고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보여 주었다.
[막괴융동증선지莫怪隆冬贈扇枝
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괴히 여기지 마라
이금연소기능지爾今年小豈能知
너는 나이가 어려 아직은 모르리라마는
상사반야흉생화相思半夜胸生火
상사병으로 한밤중에 가슴이 탈 때면
독승염증유월시獨勝炎蒸六月時
한여름 무더위가 비할 바 아니니라.]
기생들은 그 시를 읽어 보고 또다시 탄성을 질렀다.
"선생은 어쩌면 이같은 유명한 시를 좔좔 외고 계세요?
그러고 보니, 선생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 틀림없으신가 보죠? 그렇죠? 선생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시죠?"
김삿갓은 저물어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더러 시인이 아니냐구요? 허허허 ...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걸객일 뿐인 사람이라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몇몇 기생들은 저쪽에서 무엇인가 쑥덕거리더니 별안간,
"맞다,맞다! 삿갓을 보니 그분이 틀림없어!
그분이 아니라면 옛날 시를 그렇게도 잘 알겠나?"
하고 외치며 김삿갓쪽으로 우루루 몰려오더니,
김삿갓을 향해 이렇게 다그쳐 물어 보는 것이 아닌가.
"실례의 질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은 방랑시인 김삿갓 어른이시죠?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선생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틀림 없으시죠?"
134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34)
강촌모경江村暮景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히 들려 오는데 보슬비 내리는 강엔 날이 저문다)
김삿갓은 자신의 신분이 들통나는 바람에 크게 당황하였다.
"하하하, 맞대 놓고 다그쳐 물으시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군요.
나는 방랑객 김삿갓인 것만은 틀림이 없소이다.
내가 김삿갓인 것을 어찌 아셨소이까?"
김삿갓은 어쩔수 없이 실토하며 반문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쌍수를 들어 환호하며,
"존귀하신 어른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어,
다시없는 영광이옵니다."
하고 한결같이 머리를 수그려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기생은 부랴부랴 술까지 따라 올리며 말한다.
"선생이 술을 좋아하신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술잔을 받으시옵소서."
김삿갓은 술잔을 받아 마시며 또다시 반문할밖에 없었다.
"대관절 내가 김삿갓인 것을 어떻게 아셨냐, 말씀이오?"
생전 처음 만나는 평양 기생들이 자기 이름을 알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삿갓의 의혹은 지극히 간단하게 풀렸다. 늙은 기생 하나가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얼마 전부터 임 진사 댁에 기거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임 진사댁 별당에서 저녁마다 선생을 모시는 '산월'이라는 아이는 바로 나의 수양딸이랍니다.
저는 그애를 통해, 선생이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촌수를 따지자면 저는 선생의 장모가 되는 사람이예요. 호호호 '장모'라는 소리에 노기들은 허리를 움켜잡고 웃는다.
김삿갓은 적이 계면쩍어서,
"아, 그래요? 장모님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큰절을 올리기로 하지요."
하고 짜장 큰 절을 올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바람에 모든 기생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 한 기생이, "너는 삿갓 어른같은 유명한 시인을 사위로 두어서 얼마나 좋겠니"
하고 농담을 하자, 장모라고 자칭한 노기는 시근퉁하게 웃어 보이며,
"씨도 안 먹는 소리 그만 하거라. '유명'이 밥먹여 준다더냐? 임 진사께서 특별히 생각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식구는 밥을 굶을 판이었다."
하고 능청을 부려대고 있었다.
그러자 한 편에 앉아 있던 다른 기생은 그 말이 듣기 거북했던지,
"아무리 농담이기로, 너는 어쩌면 그런 농담을 함부로 하고 있니? 애들아! 오늘은 우연하게도 유명하신 선생님을 이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었으니, 우리가 오늘 지은 시를 삿갓 선생한테 보여 드리고 강평을 한번 받아 보면 어떻겠냐?"
하는 엉뚱한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만은 모든 기생들이 정색을 하며 찬성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우리가 지은 시를 이왕이면 삿갓 선생한테 강평을 받아 보면 크게 공부가 될 게야."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허허허, 나더러 여러분의 시를 강평해 달라구요?
시라는 것은 자기가 멋대로 지었으면 그만이지,
내가 무얼 안다고 남의 시를 강평한단 말이오?"
김삿갓은 사양을 하면서도, 그들의 실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 내심으로는 은근히 궁금하였다.
그러자 저쪽 구석에 새침하게 앉아 있던 기생이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간곡하게 부탁한다.
"저희들은 지금 시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선생같은 어른께서 한번 보아주시면 많은 공부가 될 것이니, 꼭 한번 보아 주십시오."
대개는 장난삼아 시를 지은 모양이지만 그 기생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였다. 김삿갓은 술과 안주를 잔뜩 얻어먹은데다가, 이런 부탁까지 받고 보니 그냥 꽁무니를 빼기는 난처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신다면 한번 읽어 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시라는 것은 자기가 직접 지어 보는 데 즐거움이 있는 것이지, 잘 짓고 못 짓고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김삿갓은 그들의 자존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그와 같은 예방선을 쳐놓고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새치름해 보이던 기생이 이런 말을 일러 준다.
"저희들은 오늘 <門>,<竹>,<昏>, 세 글자를 운자로 썼사옵니다. 그런 줄 알아 주십시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편 한 편 읽어 보았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대로 거의 전부가 읽어 볼 가치가 없는 졸작卒作들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깟 것들이 주제넘게 무슨 시를 짓는답시고 ......) 김삿갓은 속으로 그렇게 얕잡아 보고 무심히 읽어 내려오다가 '강촌모경江村暮景'이라는 시에 와서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는 대가大家의 풍모가 뵈이는데 '강촌모경'이라는 시는 누가 지었지요?"
사실 이처럼 훌륭한 시를 발견하게 되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노기들은 좋은 시를 발견했다는 소리에 혹시라도 자기 작품이 아닌가 싶어 김삿갓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나 자기 작품이 아닌 것을 알고 나자 모두들 실망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애들아! '강촌모경'이라는 시는 누가 지은 시냐?"
하고 도중으로 물어 쌓는다.
김삿갓은 처음에는 아무리 좋은 시를 발견하더라도,
그 작품을 특별히 치켜 올리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워낙 시기심이 많아 어느 한 작품을 특별히 치켜 세웠다가는 그들의 우정을 해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워낙 뛰어난 작품을 발견하고 보니 너무도 감격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그 시를 흥겹게 읊어대었다.
[천사만누유수문千絲萬縷柳垂門
실버들 천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
녹암여운불견촌綠暗如雲不見村
구름인 양 눈을 가려 마음을 볼 수 없네
홀유목동취적과忽有牧童吹笛過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히 들려 오는데
일강연우백황혼一江烟雨白黃昏
보슬비 내리는 강엔 날이 저문다.]
135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35)
죽향과의 첫 만남
김삿갓은 똑같은 시를 두 번씩이나 감격스럽게 읊고 나서,
"도대체 이처럼 기가막힌 시를 누가 지었소이까?"
하고 일동에게 물었다.
"강촌모경"이 너무도 훌륭한 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촌모경을 지은 작자를 누구냐고 물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때문에 김삿갓은 불현듯 이 시는 남의 작품을 옮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여러분 중에 반드시 있을 것인데, 왜 들 대답이 없지요? 다른 사람의 시를 옮겨 쓴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준엄한 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저쪽 등 뒤에서 아까부터 새치름하게 앉아 있던 기생이 얼굴을 바짝 들며 항의한다.
"선생님! 제 이름은 죽향竹香이라고 하옵니다. '강촌모경'은 남의 시가 아니고 제가 직접 지은 시옵니다."
작자가 이름을 밝히고 나서는 바람에 좌중은 잠시 술렁거렸다.
그제사 자세히 보니 죽향의 나이는 30대 중반이 넘었을까, 얼굴도 미인인 십인지상이었다.
"본인 작품이면 진작 말할 일이지, 왜 대답을 주저했지요?"
"선생님이 지나친 칭찬을 해 주셨기 때문에 너무 면구스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죽향은 무척 내성적인 성품이 분명해 보였다.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물었다.
"시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기에 이렇게도 좋은 시를 지었소? 정말 놀랍소이다."
김삿갓이 죽향을 이같이 치켜 올리자, 다른 기생들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늙수구레한 기생이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한다.
"삿갓 선생은 저희들의 시를 모두 읽어 주셨으니,
이번에는 선생님 시를 한 수 읊어 주세요."
"허허허, 나더러 시채詩債를 갚으라는 말씀인가요?
그런 빚이라면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김삿갓은 좌중의 어색한 분위기를 돌려놓기 위해,
기생들과 똑같은 <門,村,昏> 석 자를 써가면서
"연광정練光亭이라는 즉흥시를 두 연이나 써갈겼다.
[절연호흘입고문截然乎屹立高門
깎아지른 절벽 위엔 높은 문이 서 있고
벽만경창파직번碧萬頃蒼波直번
만경창파 대동강엔 푸른 물결 굽이친다
일두주삼춘과객一斗酒三春過客
지나가는 봄 나그네 말술에 취했는데
천사유십리강촌千絲柳十里江村
수양버들 마을은 십리나 뻗었구나.]
[독단목대내하색獨丹鶩帶來霞色
외로운 따오기는 안개 속에 날아오고
쌍백구비거설흔雙白鷗飛去雪痕
갈매기는 쌍쌍이 눈발처럼 휘나른다
파상지정정상아波上之亭亭上我
물결 위에 정자 있고 정자 위에 내가 있어
좌초갱야월황혼坐初更夜月黃昏
초저녁에 앉았는데 밤이 깊자 달이 뜨네.]
연광정 위에서 저물어 가는 대동강 풍경을 굽어보며
즉흥시를 써갈긴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죽향의 시에 대한 화답으로 읊었건만,
그러한 심정을 알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죽향만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날이 이미 많이 저물어 김삿갓은 노기들과 더 이상 노닥거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일동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오늘은 여러분 덕택에 잘 얻어먹고 잘 놀았소이다.
불청객은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이렇듯 인사를 나누고 몇 걸음 옮기다가 불현듯 '가실' 생각이 떠올라, 가까이 있는 늙은 기생을 붙잡고 부탁을 하였다.
"나는 지금 평양에 살고 있을 '가실'이라는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요. 여러분들 중에서 혹시 그런 여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나중에 임 진사 댁으로 연락을 해 주기 바라오."
오줌이 약이 되기도 하는지라, 지나가는 말로 한번 부탁을 해둔 것이었다.
"어마...가실이라는 여인은 삿갓 선생의 애인이세요?
그 여인은 기생입니까, 아니면 여염집 가정 부인입니까?"
"가실이라는 이름만 알았지 나는 일면식도 없는 여인이라오. 다만 어떤 필요 때문에 한번 찾아보고 있을 뿐인데 평양에서 기생으로 지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자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늙은 기생에게만 지나가는 말로 부탁하고 그자리를 떠나버렸다.
김삿갓이 임 진사네 별당으로 돌아오니, 임 진사가 반갑게 맞아주며 말하는데,
"오늘은 어디를 가셨다가 이렇게 늦으셨소? 영명사永明寺의 벽암碧巖대사가 오랫동안 선생을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막 돌아가셨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영명사의 벽암 대사요? 나는 그런 분을 모르는데 그분이 무슨 일로 나를 기다렸다는 말씀입니까?"
"그야 물론, 삿갓 선생이 벽암 대사를 아실 리가 없지요.
그러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삿갓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벽암 대사가 오늘 우연히 내 집에 들르셨기에" "지금 우리 집에 삿갓 선생이 와 계시다"는 말씀을 했더니,
벽암 대사는 선생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하면서
한나절이나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저녁 불공을 드리기 위해 돌아가셨지요. 모르면 모르되, 내일쯤 선생을 만나 뵈러 다시 찾아 오실 겁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벽암 대사가 오시길 기다릴게 아니라 내일은 내가 찾아 뵙기로 하겠습니다. <벽암 대사>라는 분은 어떤 스님입니까?"
"벽암 대사는 시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스님>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도가 매우 높으신 분은 확실합니다."
시를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시인이라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김삿갓은 내일은 영명사로 벽암 대사를 찾아가 볼 결심을 하였다.
136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36)
사람이 영원히 사는 방법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아침을 먹고 나자 영명사로 벽암 대사를 찾아 나섰다. 영명사는 부벽루 서쪽 기린굴麒麟窟 위에 서 있는 절이다.
경내에 들어와 보니, 절은 빈집처럼 조용했다. 영명사는 언제나 조용한 절인지, 누각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었다.
[永明寺中僧不見영명사중승불견
영명사 절에 중은 보이지 않고
永明寺前江自流영명사전강자류
영명사 절 앞에는 강물만이 흐른다.
山空孤塔立庭際산공고탑입정제
산은 비고 뜰에는 탑만 홀로 서 있어
人斷小舟橫渡頭인단소주횡도두
사람 없는 나루터엔 배만 둥둥 떠도네.
이 시를 읽다 보니,
김삿갓은 무아정적無我靜寂에 들어 온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오.
벽암 스님을 만나 뵈러 왔소이다."
마침 눈에 띄는 상좌가 있길래 말을 하였더니,
상좌는 합장 배례를 하더니, 김삿갓을 선실禪室로 안내 해 준다.
벽암 대사는 김삿갓을 반갑게 맞아주며 말한다.
"어서 오십시오. 어제 임 진사댁에 갔다가 선생이 계시다기에 뵈려고 기다렸는데, 오늘은 직접 찾아 주셨군요.
일전에 금강산 장안사에 갔다가 입석봉에서 내려 오신 공허 스님한테서 선생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벽암 대사는 나이가 80은 넘은듯 한데,
어딘가 모르게 거룩한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어제는 임 진사 댁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셨는데,
시생이 만나 뵙지 못하여 결례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방안을 둘러보니,
한쪽 벽에는 다음과 같은 족자가 걸려 있었다.
[白雲千里萬里猶是同雲백운천리만리유시동운
구름은 천리만리에 덮혀 있어도 구름일 뿐이고
明月前溪後溪嘗無異月명월전계루계상무이월
달은 앞내에 비치고 뒷내에도 비치나 다른 달이 아니로다.
김삿갓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저 족자의 뜻이 깊습니다. 스님께서 지으신 글이옵니까?"
"저 글은 신라 때 진경眞鏡 선사께서 읊으신 게송偈頌입니다."
"저 글을 보니,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옵니까?"
벽암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삿갓 선생은 저 게송의 뜻을 대번에 알아보는구려. 엔간히 유식한 사람들도 저 족자의 뜻을 알아보는 사람이 극히 드물답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며 그런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문득 문밖에서, "대사님 계시옵니까, 대사님을 잠깐 만나 뵈러 왔습니다."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80쯤 되어 보이는 쪼그랑 할아버지가 문밖에서 연신 머리를 수그려 굽신거리고 있었다.
"어서들어 오십시오." 벽암대사는 서슴지 않고 쪼그랑 할아버지를 방안으로 맞아들였다.
할아버지는 다리가 자유롭지 못한지, 방안에 들어와 앉기까지 무진 애를 쓰는 것이 보였다.
"보아하니, 몸이 매우 불편하신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
벽암 대사가 그렇게 물어 보자, 노인은 몸이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내 나이 올해 90 이올시다.
몸이 괴로운 걸 보니,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요.
대사님은 영험이 대단하시다고 들었는데,
나를 조금만 더 오래 살게 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김삿갓은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구요? 몇 해나 더 살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될 수 있으면 백 살까지는 살고 싶구려!"
김삿갓은 그 대답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자 백암 대사는 노인에게 나무라듯 말한다.
"에이, 여보시오. 영감님은 어쩌면 그렇게도 욕심이 없으시오? 백 살까지 살고 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게 아닙니까?"
노인은 '죽음'이란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인다.
"아닙니다. 이왕이면 백 오십 살까지 살게 해 주십시오."
"좋소이다. 백 오십 살까지 살게 해드리지요.
그런데 백 오십 살이 되는 해의 섣달 그믐날에는
반드시 돌아가셔야만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또다시 당황하는 빛을 보이며
"그렇다면 이백 살까지 살게 해주소서."
그러자 벽암 대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나무란다.
"영감님은 욕심이 왜 이렇게 적으십니까?
이왕이면 영원히 살아가셔야지요. 그 생각은 왜 못하십니까?"
쪼그랑 노인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에이, 대사님두, 사람이 죽지 않고 어떻게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벽암 대사는 이때다 싶은지, 노인에게 자신만만한 설교를 한다.
"중생이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고해苦海에서 반드시 제도濟度되는 법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육신은 비록 죽어 썩어 버리더라도,
영혼은 반드시 극락 세계로 가는 법이지요.
극락 세계야말로 죽음의 고통을 모르는 영생의 세계라는 것을 왜 모르시옵니까 ?"
이렇게 벽암 대사가 순순히 타이르자, 쪼그랑 노인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불교에 귀의해 버리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벽암 대사의 능수능란한 포교술布敎術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사님은 어쩌면 설법이 이렇게도 능란하시옵니까?"
"하하하, 장안사에 계신 공허 스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공허 스님이 삿갓 선생과 시짓기 내기를 했다가 참패를 당했다고 하시던데,
그러한 삿갓 선생께서 내게 "설법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있으니, 이런 영광이 없소이다."
137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37)
부처님과 보살의 차이
김삿갓은 벽암 대사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더니 벽암 대사가 짐짓 손짓을 하니, 상좌가 술을 한상 차려다 놓는다.
"삿갓 선생이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술이 아닌 곡차穀茶를 좋아합니다. 절에 오셨으니, 우리 곡차를 한잔 나누십시다."
벽암 대사는 멀쩡한 <술>을 익살맞게 <곡차>라고 불렀다.
김삿갓도 술을 좋아하지만 벽암 대사의 주량은 끝이 없었다.
그는 마셔도 마셔도 취할 줄을 모르므로, 김삿갓은 너무도 놀라워, "주장관사해酒腸寬似海(술 마시는 배가 바다와 같다)라는 옛 말이 있더니, 스님의 술배는 정말 바다와 같이 크십니다그려!"하고 말하니 벽암대사가 화답을 하는데,
"내 배가 '주장관사해'라면, 시를 잘 지으시는 선생은 '시담대어천詩膽大於天 시를 짓는 담력이 하늘처럼 크다)'올시다."하고 대구對句를 응구첩대應口輒對로 받아넘긴다.
김삿갓은 이왕 고승을 만난 기회에 불교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고싶어, 벽암 대사에게 물었다.
"부처님과 보살은 어떻게 다르옵니까?"
"부처님이란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온갖 미망迷妄과 번뇌를 깨끗이 떨쳐 버리고, 자기 자신 속에서 불성佛性을 찾아내어 자연의 진리를 깨닫고, 다른 중생까지도 교화를 시켜 깨닫게 해준 성인을 부르는 칭호지요.
처음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 한 분만을 <부처님>이라고 불러 왔지만, 그 뒤에는 석가여래를 따르는 많은 선각자先覺者들이 생겨나서, 지금은 그들도 넓은 의미에서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러면 <보살>이라는 것은 무엇이옵니까?"
"보살 이라 함은 위로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구하면서,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시켜 성불成佛하게 하려고 수행에 힘쓰는 불자佛者를 부르는 칭호지요. 사람은 누구나 불성을 타고 났어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수행만 잘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 쉽지, 그만한 수행을 쌓으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신라 때의 고승 부설거사浮雪居士는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심경을 다음과 같은 계송으로 말하고 있어요.
[눈에 뵈는 것이 없으면 분별이 필요치 않고
귀에는 시비가 없는 소리만이 들린다.
분별과 시비를 모두 떨쳐 버리니
마음은 절로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되노라.]
벽암 대사가 읊은 계송을 들은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육기가 먼저 동하는 나 같은 속물은 도저히 부처님이 될 수 없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삿갓 선생이야 말로 부처님의 성품을 선천적으로 풍부하게 타고나신 분일 겁니다."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대사께서는 술이 몹시 취하신가 봅니다."
벽암 대사는 <취했다>는 소리에, 머리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내가 취했다고요? 천만의 말씀이오. 술을 마셨다면 취했을지 몰라도 곡차를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벽암 대사는 이와 같이 익살을 부려 가면서,
"나는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유儒, 불佛, 선仙에 모두 능통한 선생께서 요산요수樂山樂水로 영풍농월詠風弄月로 팔도를 두루 편답하고 계시는 만고의 풍류객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만인의 입에서 널리 회자膾炙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날 밤이 늦도록 두 사람은 술을 마셔가며 혹은 불교를 말하고 혹은 유교와 도교를 논하며 뜬눈으로 밤을 꼬박 보냈다. 그러고도 미진해 김삿갓은 벽암 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아직 참선參禪이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는데, 참선이 그렇게도 좋은 것이옵니까?"
그러자 벽암 대사는 대뜸 다음과 같은 선시 한 수를 적어 보였다.
[一默禪心淸일묵선심청
한번 참선을 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對物最分明대물최분명
모든 사물이 분명하게 보인다
猶如風過竹유여풍과죽
이것은 마치, 마치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지나감과 같나니
竹中不溜聲죽중불유성
대나무는 바람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
이 글을 읽은 김삿갓은 참선에 대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아리송하였다.
마침 그때, 상좌가 손님이 찾아 오셨다고 문밖에서 알린다.
"어떤 손님이 아침부터 찾아 오셨는고!"
벽암 대사는 방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아니, 일영一影 보살이 이게 웬일이야. 어서 들어와요."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러나 찾아온 여자 손님은 방안에 들어올 생각은 안하고,
"아침부터 무례하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혹시 <김삿갓>이라는 분이 여기 와 계시는 것은 아니온지요?"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138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38)
김삿갓을 찾아온 일영 보살은 죽향이었다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고 멈칫 놀랐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누가 찾아왔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자기를 찾아올 여인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벽암 대사는 일영 보살이 김삿갓을 찾아온 것을 알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한다.
"일영 보살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삿갓 선생>을 찾아온 모양이구먼그래 ?
허기는 일영 보살 같은 미인이 나 같은 늙은 중을 찾아왔을 리가 있을라구.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면 지금 나와 마주 앉아 계시니, 그 분을 만나 보고 싶거든 이리 들어와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을 돌아보며,
"삿갓 선생은 무슨 염복(艶福)을 그렇게나 많이 타고나셨기에, 평양에서도 시를 잘 짓기로 소문난
일영 보살을 아침부터 찾아오게 만드셨소 ?"
하고 농담을 걸어 오는 것이었다.
"일영 보살이오 ? 나는 그런 분은 알지도 못합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다는 겁니까 ?"
김삿갓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그때, 일영 보살이라는 여인이 방으로 들어와 김삿갓에게
합장배례를 하는데 보니, 그녀는 며칠 전에 연광정에서 화전놀이를 할 때에 시를 가장 잘 지었던
노기 <죽향>이가 아닌가.
김삿갓은 춤이라도 출 듯이 반가웠다.
"아니,이게 누구요 ?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소이까 ?"
불명(佛名)으로는 <일영>이라고 부르는 노기 <죽향>이, 영명사로 김삿갓을 새벽같이 찾아오게 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연광정에서 화전놀이가 있었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죽향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노기로 부터 ,
"김삿갓이라는 양반이 <가실>이라는 여인을 찾고 있던데, 너희들 중에 혹시
그런 여인을 알고 있거든, 그 양반에게 알려드리도록 하거라 !"
하는 말을 듣고 죽향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가실이라는 이름은 죽향 자신의 본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에 부랴부랴 김삿갓이 지낸다는 임 진사 댁을 찾아가 보니 공교롭게도 김삿갓은
조반을 먹기가 무섭게 구경을 나갔다는 것이 아닌가.
죽향은 김삿갓을 찾기 위해 연광정, 을밀대, 부벽루, 등등으로 그날 하루를 김삿갓을 찾아 헤매었다.
그래도 김삿갓을 만날 수가 없어, 다음날 또다시 임 진사 댁을 찾아가니,
<김삿갓은 어젯밤 영명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죽향은 체면 불고하고
그 길로 새벽같이 영명사로 벽암 대사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자기를 찾아온 죽향이라는 기생이 <가실>임을 알고 크게 기뻤다.
그리고 죽향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시를 잘 짓는 죽향이 아닌가 ? 자네 본명이 <가실>이란 것이 틀림이 없단 말인가 ?"
죽향은 울먹이며 대답한다.
"제 이름이 분명이 <가실>이옵니다. 제가 비록 열 다섯 살때에 사리원에서 어머니 슬하를 떠나기야
했지만, 제 이름이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나이까 ?"
"자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당신 딸이 사내놈과 배가 맞아 평양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하던데,
그 같은 사실이 있었던가 ?"
하고 따지 듯이 물었다.
죽향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소리없이 흐느껴 울다가, 대답을한다.
"어머니 슬하를 떠나기는 했지만, 사내와 배가 맞아 평양으로 온 것은 아니옵니다."
"그런데 자네 어머니는 어째서, 아직도 그렇게 알고 계신가 ?"
죽향은 대답을 하지않고 다시 한동안 흐느껴 울더니,
"어머니는 팔자가 기구하여 열 아홉 되던 해에 첫 번째 남편을 병으로 잃고 ,저의 아버지와
재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다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 슬하에 4남매를 건사할 요량으로
부잣집 영감님과 재재혼의 혼담이 오갔습니다."
죽향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김삿갓은 지난날 무하향 주모 , 천 씨(千氏)의 말을 되새겨 보면서,
죽향의 다음 말에 침을 꿀꺽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재재혼의 혼담이 막바지에 이른 때 , 부잣집 영감님이 저희 집에 왔다가 당시 열 다섯 살이었던 저에게 남모르게 추파(秋波)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너무도 어려서 무섭기도 하였지만,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그 영감님의 유혹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죽향의 말을 들은 김삿갓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말 없이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된 것 이로구만."
"예, 마침 평양으로 떠나는 동네 오라버니가 있어서 그를 따라 평양으로 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평양에 와서는 어떻게 기생 노릇을 하게 되었던가 ?"
김삿갓은 죽향이 어떤 연유로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평양에 와서는 ,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평양 명기 묵향(默香)의 집에서 부엌 살림을 하며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 묵향이 너무 늙어 퇴물 기생으로 전락하게 되자 ,저를 내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삿갓으로서는 <가실>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리하여 얼마 전에 자신이 만났던
죽향의 어머니 , 무하향(無何鄕) 천 씨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네 어머니는 일곱이나 되는 자식, 어느 하나 하고도 생활을 하지 못하고 ,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네. 이제라도 자네가 홀로 된 늙은 어머니를 보살피는 , 늦은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나 ?"
죽향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소리없이 흐느껴 울다가, 이번에는 벽암 대사에게 간곡하게 부탁을한다.
"스님 ! 삿갓 선생을 저희 집으로 모시고 가서, 어머니 소식을 좀더 소상하게 알아보고 싶사옵니다.
스님께서 허락해 주실는지요 ?"
벽암 대사가 흔쾌히 대답한다.
"일영 보살이 어머님 소식을 그렇게도 알고 싶어하는데, 내가 왜 훼방을 놓겠는가 ? 어서 댁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게. 삿갓 선생 ! 일영 보살은 나의 교화로 불문에 귀의한 나의 불제자올시다.
두 분이 이토록 기이하게 만난 것도 전생의 인연이니, 일영 보살을 정성껏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그 길로 김삿갓은 죽향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죽향의 집은 대동문 가까운 산기슭에 있었다. 그다지 큰 집은 아니었지만, 뜰이나 방이나 모두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인상 깊은 것은 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족자였다.
...
이 몸은 윤락하여 기생이 됐을망정
어진 낭군 만나 길이 섬기고 싶었소
님의 마음 반석처럼 굳지가 못해
오래지 않아 딴 여자로 옮겨 갔구려.
妾身倫落屬娼家 첩신윤락속창가
願得賢郞送歲華 원득현랑송세화
不識郞心磐石固 불식랑심반석고
暫時移向別園花 잠시이향별원화
...
김삿갓은 그 족자의 시를 읽어 보고 죽향이 어떤 성품의 여자인지 대번에 짐작할 수가 있었다.
죽향은 김삿갓을 좌상대청에 모셔다 놓고, 술을 권하며 김삿갓이 만난 죽향의 어머니의 소식을 더
듣기를 원했지만 , 김삿갓은 더 이상 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죽향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했다.
"내가 자네 어머니를 이곳 평양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 보았는데, 자식은 여럿을 두었으나,
가까이 부양하는 자식은 하나도 없이 고향에서 홀로 늙어가는 모습이 여간 쓸쓸하게 보여졌네,
지금이라도 자네가 고향으로 돌아 간다면 어머니가 크게 반겨주실 것이네. 그리고 형편을 살펴서
고향에서나 이곳 평양에서나 , 어머니와 함께 생활 한다면 좋을 것 같네. "
죽향은 언제나 시름에 잠겨 있는 얼굴이었건만,어머니를 만나러 갈 생각을 굳혔는지,
딴사람이 된 것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수 일내 준비를 마치고 고향으로 어머니를 찾아 뵙겠습니다.선생님도 함께 가시면 어떻겠사옵니까 ?"
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구름처럼 세상을 떠돌 뿐 , 한 번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가는 법이 없다네. 자네가 고향으로 떠나는 날, 나도 평양을 떠날 생각이니까 그동안이나 자네 집에 머물러 있게 해 주게나."
김삿갓은 임 진사 댁에 다시 찾아갈 생각이 없었다.죽향이 고향으로 가기 전까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자 죽향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저희 집을 내버려두고 가기는 어디로 가시옵니까. 제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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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139
이별과 눈물의 대동강.
김삿갓은 죽향을 무리하게 가까이 할 생각은 없었다. 시와 마음이 통하면 그만이지,
나이 어린 풋내기들처럼 구태여 살을 섞어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김삿갓은 비록, 죽향과 살을 섞지는 않았지만, 바라만 보아도 서로간에 마음이 통하고 보니,
그날부터 두 사람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죽향에게 농담삼아,
"우리들은 마치 홀아비와 과부가 한집에 모여 살고 있는 것만 같네그려."
하고 말했더니, 죽향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받아넘기는 것이었다.
"옛날 시에, 화소성미청(花笑聲未聽 : 꽃은 웃어도 웃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이요, 조제누난간
(鳥啼淚難看 :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볼 수 없다)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하옵니까. 삿갓 선생만은
소첩의 심정을 충분히 알아 주시리라고 믿고 있사옵니다."
진실로 변죽을 두두리면 복판이 울리는 멋진 대답이었다.
김삿갓은 죽향이 고향으로 어머니를 찾아가는 준비를 하는 중에 때때로 이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사흘만에 ,죽향의 고향 출발의 날이 밝아왔다.
마음이 통하는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짧은 사흘이었다.
김삿갓은 배낭을 먼저 짊어지고 나서며 ,죽향에게 말한다.
"자네를 대동강 나루터까지 전송하고 나서, 나도 관서 지방으로 떠나기로 하겠네."
그러자 죽향은 도리질을 하면서 말한다.
"아니옵니다. 선생을 전송해 드리고, 저는 나중에 떠나겠습니다."
"아니야. 자네는 여자고, 나는 사내 대장부가 아닌가.자네를 전송하기 전에는 나는 발길이 무거워
떠날 수가 없네."
두 사람은 서로 전송하겠다고 승강이를 하다가,결국은 죽향이 먼저 떠나게 되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대동강변에 있는 나루터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죽향은 나룻배에 오를 생각은 안 하고 , 김삿갓의 얼굴만 눈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배에 오르게나 ! "
죽향은 그래도 배에 오르지 않고, 김삿갓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시 한 수를 읊는다.
...
대동강상별정인 大同江上別情人 대동강에서 정든 님과 헤어지는데
양유천사미계인 楊柳千絲未繫人 천만 올의 실버들도 잡아매지 못하오
함누안간함누안 含淚眼看含淚眼 눈물어린 눈으로 눈물 젖은 눈 바라보니
단장인대단장인 斷腸人對斷腸人 님도 애가 타는가 나도 애가 끊기오.
...
그애말로 애 간장이 녹아나는 시였다.
거기에 대해 김삿갓도 한마디 응수가 없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눈앞에 펼쳐진 대동강 풍경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
취금난희대심부 翠禽暖戱對沈浮 푸른 새는 강물에서 정답게 노닐고
청경란산야미수 晴景欄珊也未收 난간에서 바라보니 풍경은 아름답건만
인원만수산북입 人遠만愁山北立 님 보내는 시름은 북쪽 산에 어리고
노장유견수동류 路長惟見水東流 멀리 떠나가는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네
수양다재앵제역 垂陽多在鶯啼驛 꾀꼴새는 버드나무숲에서 울어 쌓는데
방초무변객의루 芳草無邊客倚樓 나는 다락에 기대 풀밭만 바라보노라
초창송군자애반 초창送君自崖返 그대를 보내고 나 혼자 언덕에 남으면
나감낙월하정주 那堪落月下汀洲 달이 질 때 설움을 무엇으로 달래랴.
...
죽향은 김삿갓이 읊는 이별의 시를 듣고, 옷소매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없이 흐느낀다.
아직까지 잠자리조차 같이해 본 일이 없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서로 미치면,모든 것이 통 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지금 대동강가에서 이별을 앞에 두고, 가는 사람은 죽향이요, 보내는 사람은 김삿갓이었다.
죽향과 김삿갓은 좀처럼 헤어질 줄을 몰랐다.
"배가 떠날 모양이니, 어서 배에 오르게."
김삿갓이 배에 오르기를 재촉하자, 죽향은 눈물을 씹어 삼키며,
"선생은 이제부터 어디로 가시옵니까 ?"
하고 울성으로 묻는다.
"나는 원래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몸,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기가 어려울 걸세."
죽향은 그 말을 듣자, 설움이 북받쳐 올라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별의 시를 이렇게 읊는 것이었다.
부디 평안히 가시옵소서 去去平安去 거거평안거
끝없이 머나먼 만리길을 長長萬里多 장장만리다
하늘에 달이 없는 밤이면 江天無月夜 강천무월야
외기러기 슬피 울으오리다 孤叫雁聲何 고규안성하
죽향은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조그만 돈주머니 하나를 김삿갓의 배낭 속에 쑤셔 넣어 주며,
"이것은 몇 푼 안 되지만, 술값으로 보태 쓰시옵소서."
마지막으로 그 말 한마디를 남기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나룻배에 뛰어올라, 숫제 외면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앞을 가려 김삿갓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죽향아 ! 부디 잘 가거라 ! 오늘의 우리들의 이별은 처음이자 마지막 이별이 될 것이다.)
마음 속으로 그렇게 뇌까리며 발길을 돌리는 김삿갓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
*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 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가버린 내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울어 검은눈을 적시나
..
140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140)
돈이 갖는 마성魔性
김삿갓은 죽향이 타고 있는 배가 시시각각 멀어져 가는 모양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부랴부랴 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는 산속에 파묻혀 버리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이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오니, 산골짜기에는 철쭉꽃이 붉게 피어 있었고, 숲속에서는 온갖 새들이 청량한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훈훈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이별의 슬픔을 달래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어 오는 것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만남 뒤에는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부모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조차, 영원이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만고의 이치가 아니던가.
김삿갓의 끝없는 방랑의 발길은 계속 이어졌다.
평안도는 워낙 산수가 험한 곳이어서, 안주安州로 접어 들었지만 산은 점점 더 험악하기만 하였다.
산이 험한 곳에는 인가가 드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험한 산골에도 인가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김삿갓은 밥을 굶은 채 진종일 걷다가,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서야 어느 촌락에 닿았다.
안락촌安樂村이라고 부르는 그 마을은 옛날에 전쟁을 많이 치른 지역인지 마을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니, 유관儒冠을 쓴 늙은이가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며 팔자 걸음을 하면서 유유자적 걸어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늙은이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정중히 수그리며 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었는데 이 마을에서 자고 갈 만한 집이 없겠습니까?"
그러자 늙은이는 김삿갓의 행색을 위 아래로 훝어 보더니
"개천가에 객줏집이 있으니 그리 가보게."하고 씹어 뱉듯
한 마디 내던지고 저쪽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뭐 저런 늙은이가 있어!)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멀어져 가는 늙은이의 뒷모습을 한동안 멀거니 지켜 보고 있었다.
머리에 유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 딴에는 선비랍시고 행세하는 것 같은데,
수 많은 인생의 풍파를 겪은 늙은이의 태도도 아니고,
선비의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예 도 갖추지 못한 늙은가 아닌가.
선비의 행색을 꾸렸으면 행실도 선비다워야 옳은 일이 아니겠나? 진짜 선비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의가 발라야 한다.
그 늙은이는 김삿갓의 남루한 옷차림만 보고 사람을 업신 여겼는데, 그것은 사도士道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다.
김삿갓은 쓰디쓴 웃음을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겨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주인을 불렀다.
"지나가는 나그네 올시다. 하룻밤 자고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인 아낙네는 부엌에서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며,
"일 없시요! 우리 집에서는 밥을 다 해먹었으니,
밥을 얻어먹고 싶거든 내일 아침에나 오시라요!"하며
숫제 거렁뱅이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두 집 세 집 대문을 더 두드려 보았으나
매정하게 거절해 버리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허허, 인심 한번 고약하군!)
집집마다 그 모양 그 꼴이니,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돈을 주는 객줏집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늙은이가 알려준 대로 개천가에 있는 객줏집으로 찾아 들어가니, 주인 아낙네는 김삿갓의 옷차림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우리 집에서 자려거든 돈을 먼저 내노시라요.
우리 집에서는 선금을 받지 않으면 손님을 재워주지 않씨요." 하고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돈타령부터 꺼내 놓는다.
김삿갓은 부아가 치밀었다.
"에이, 여보시오. 나는 조선 팔도를 두루 돌아다녀 보았지만, 객줏집에서 선금을 내라는 소리는 처음들어 보오."
김삿갓은 자신의 행색을 보고, 선금을 내라는 소리에 은근히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주인 아낙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돈을 먼저 내고 싶지 않으면 다른 집으로 가보시라요.
우리 집에서는 재우기 전에 돈부터 받는다오! "
"평안도 객줏집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돈을 먼저 내야 재워준답디까?"
"우리 집에 왔으면 우리 집 방식에 따를 일이지,
쓸데 없이 남에 집 얘기는 왜 물어 보시나요?
남에 집 일을 알아보고 싶거든 그 집에 가서 알아보시라요 !"
마을의 이름은 '안락촌'이건만
마을의 인심은 조금도 안락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어쩔 수 없이
선금을 주고 객줏집으로 들어올 밖에 없었다.
대동강변에서 죽향이 이별할 때
배낭에 찔러 넣어 준 돈은 자그마치 백 냥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때는 "나도 백 냥 부자가 되었으니,
이만하면 한동안 돈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하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돈이란 것이 애써 벌어 본 사람이 아껴쓰는 법인데
김삿갓은 애써 돈을 벌어 본 바 없으니 쓰는 것 조차 아껴 쓸 줄 몰랐던가. 그동안 안락촌에 이르기까지 돈을 흥청망청 썼던 관계로, 객줏집에 선금을 치루고 났을 때에는 돈이라고는 닷 냥밖에 남지 않았다.
(평안도 땅으로 들어와서는 밥을 공짜로 얻어먹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은데, 돈이 이렇게도 없어 가지고서는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김삿갓은 오십 평생 '거지 생활'을 해오면서도,
돈 걱정을 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인 듯 싶었다.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어서,
돈이 워낙 없을 때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건만,
돈이 있다가 없어지고 보니, 돈 걱정이 새삼스러워졌다.
돈이 가진 마성魔性을 느끼는 순간,
김삿갓은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부인곤부빈곤빈富人困富貧困貧
부자는 부자대로 걱정 빈자는 빈자대로 걱정
기포수수곤칙균飢飽雖殊困則均
배가 부르나 고프나 걱정하기는 같도다
빈부구비오소원貧富俱非吾所願
부자도 빈자도 나는 원하지 않고
원위불부부빈인願爲不富不貧人
빈부를 떠나서 살아가고 싶노라.]
김삿갓은 이와 같이,
부와 빈을 초월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141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