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목소리와 대답
성소(聖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대개 사제와 수도자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성소가 있는 사람은 신학교나 수도회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누구에게나 생명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고 그에 응답을 드리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부르시는 음성이 바로 하느님의 것임을 안다. 그리고 구원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존재하도록 불러주신 하느님은 바로 나의 삶을 통해 대답하도록 하신다.
그것이 훌륭한 삶이건 잘못된 삶이건간에 …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비심 때문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를 뽑아주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에페 1,4-5 참조). 이 부르심 안에는 어떠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특별한 협력자로서 보다더 가까이 살도록 부르시는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이 부르심도 역시 무상으로 주어지나 온전한 자유의 응답을 요구한다.
첫번째 표지
사제성소나 수도성소는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나타나는 것일까? 각 성소는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즉 제 나름대로의 비밀과 그 고유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서로 비슷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보이나 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르심을 느껴 서서히 성장해 나간다. 사춘기를 맞으면 두려운 마음으로 부모나 신부님에게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부르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아주 막연한 상태이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보다 확고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이 부르심을 느낀다. 마치 이른 봄에 갑자기 눈에 띄는 꽃봉오리 같다고나 할까 … 이 부르심은 갑작스러운 것이나 보다 구체적이고 확고하다.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극복해 나간다.
체사레의 성소는 전자에 속한 것임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아들의 성소는 그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체사레는 어릴 때부터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제대 앞에서 미사를 드리는 사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꿈이 담겨 있었다. 나는 체사레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때 놀라웁기까지 했다. 우리 가족은 대축일 때마다 대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했다. 체사레도 6살 때부터 함께 가기 시작했다. 체사레는 성당의 맨 앞 자리를 좋아했다. 제대와 성당 안의 장식들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보는 것에만 열중했다. 대축일 전례는 아주 길어 어른들도 피곤을 느낄 정도였으나 체사레는 지루한 표정을 보인 일이 없었다. 함께 참석했던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성당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대로 흉내내곤 했다.
아내도 어린 체사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뒀다. 체사레는 어머니의 재봉틀 위를 깨끗이 치우고는 상본과 메달을 가져다가 훌륭한 제대로 꾸며 놓았다. 그리곤 미사를 집전하는 흉내를 경건하게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인내롭게 받아주었다.”
가정의 분위기
이러한 흉내내기는 특별하다고 할 것이 못된다. 어린이들이라면 이런 장난들을 좋아하는 까닭이다. 다만 이런 것들이 어린 마음 안에서 활동하는 은총을 보게 해주는 틈서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린이의 맑고 온순한 마음안에 무한히 커질 하느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부모님의 독실한 신앙과 섬세한 배려를 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은 햇빛을 받아 움이 트고 꽃을 피운다. 그러므로 꽃을 볼 때 태양과 그 빛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어린이가 기도와 사랑에 눈뜨고, 주님께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은 바로 그 가정이 주님의 사랑의 신비를 살고, 주님의 현존의 표시가 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앙의 눈을 뜨는 어린이는 하느님이 자기의 하늘임을 쉽게 인식한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 하느님을 보고 느끼고 이야기하며 함께 산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벌써 그렇게 살고 있는 까닭이다. 어린이와 하느님 사이에는 친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은 그가 앞으로 관대한 대답을 하도록 이끌어준다.
부모들과 사제들은 이런 어린이들이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사귈 줄 아는 비범한 어린이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해 가던 어른들마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체사레는 1956년 6월 6일, 토리노의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드레아도 토리노 태생이었다. 어머니 아녜스 프리제니는 교황 요한 23세의 고향인 소토 일몬테에서 6킬로미터밖에 안되는 곳인 벨가모의 첼라나 마을 태생이었다.
가톨릭 교회 신자의 전통대로 체사레도 낳은 지 3일 만에 세레를 받았다. 주님이 그 어린이 안에 당신 거처를 마련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부모님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해 체사레의 지성과 마음이 선을 향해 열리도록 해주셨다. 이미 체사레는 어릴 때부터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고 말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체사레는 어릴 때부터 기도를 빨리 배워 혼자서 아침과 저녁의 기도를 바쳤다. 나는 그 아이에게 기도를 가르쳐줄 필요가 없었다.
우리 가족들은 저녁기도가 끝나면 함께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남편이나 내가 각 단의 신비를 묵상하면 체사레는 계속 기도 선창을 했다. 이것이 그 아이에게 더 깊은 신심을 심어준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이 습관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우리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첼라나 마을로 피서를 가곤 했다. 그곳에는 가르멜 성모님께 바쳐진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기도를 바치곤 했다.
체사레가 8살 되던 해부터 이 성당 기도에 데리고 가기 시작했는데 그 아이는 로사리오 기도만은 자신이 선창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쁘게 양보했다. 마을 사람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체사레의 가녀린 음성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던 그때의 기도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1965년 5월 1일, 열심한 준비 끝에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본당에서 받았다. 동생 까를로와 함께였다.
체사레는 안토니오 라이네리 국민학교를 끝내자 알렉산드로 만조니 중학교에 진학했다.
사제로의 길
모든 아이들은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아주 조심스러운 때를 맞는다. 이때 아이들은 비로소 자신을 형성해 나가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되며, 매일매일 달라지는 것같은 자신의 모습에서 미래를 엿보게까지 되는 것이다.
체사레는 활발하면서도 강한 의지와 고집스러운 면을 가진 활달한 성격이었다.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고 놀이 중에서는 특히 축구를 좋아하였다. 공부를 부지런히 하는 열심한 학생이면서도 가톨릭 액션의 회원이었고, 복사단의 단장 노릇까지 빼놓지 않고 하는 활동가였다.
피노 크라베로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고 있었던 체사레는 이 신부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금은 성아녜스 성당의 주임신부로 있지만, 체사레가 첫영성체 후 죽기까지 10년 동안 그 본당에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체사레와 특별한 우정관계를 지속해온 신부님이다.
체사레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삶에 양분을 주고 잘 이끌어줄 수 있는 사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성을 위해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두가지, 즉 사제와 기도이다.”
젊은이들은 우선 사제와 친구로서 사귈 수 있어야 한다. 사제에게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 특히 어렵고 괴로울 때 이 우정은 지속될 필요가 있다.”
체사레는 자신이 지도신부와 얼마나 깊은 우정을 맺고 있었는지를 임종 전의 짧은 말로 잘 표현해주었다. “영원한 친구 피노 신부님, 안녕히 … 나는 신부님이 정말 좋았습니다. 죽은 후에도 나는 언제나 신부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부모님도 이 조심스러운 기간을 맞아 체사레의 교육을 위해 더욱 마음을 썼다. 아버지는 두 아들과 자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으나 생활 안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엄격하게 가르쳤다. 아버지 자신이 바로 그러한 생활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부모의 좋은 모범은 아이들에게 우리 부모야말로 내 삶의 길에 있어서 훌륭한 인도자라는 깊은 확신을 심어주었다.
엄마, 아시잖아요?
체사레의 중학시절은 빨리 지나갔다. 상급학교에 시험을 보고 진학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주의깊에 살펴볼 뿐 어떤 것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특기할 만하다고 하겠다. 대개는 자녀들의 장래를 미리부터 염려하고 여러 가지 조언과 충고를 주게 마련이다. 그것이 지나치다 보면 본인의 의사는 알아볼 여유도 없이 그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구실로 부모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강요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럴 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유약한 소년들은 이 간섭과 권고로 혼란을 느끼고 괴로와하게 된다. 자신 안에 서서히 성숙돼 오던 계획마저 두려워하게 되고 매력을 잃어버린다.
애매한 태도로 소년은 근심에 잠기고 적극성을 잃어버리게 되며, 그 결과로 자기 의사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타의에 끌려 결정을 내리고 만다. 대개 이런 선택에는 타인을 위한 선, 타인에의 헌신이나 봉사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기주의가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어떤 가정은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이웃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충만히 살도록 이끌어주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소년 소녀들은 참된 행복을 맛보게 된다.
돈 보스꼬 성인은 나환자의 사도 라울 폴레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타인을 위해 살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가장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좋은 모범을 주셨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 “
이 관대한 봉사의 노선 위에서 체사레는 자신의 결심을 성숙시켰다. 그리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기회를 기다렸다.
1970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체사레, 벌써 중학교를 끝냈구나. 상급학교 등록 때도 돼오는데 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니?”
체사레는 웃었다. “어머니, 아시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 “
어머니와 아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순간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나 이제 너무나 명백해졌다. 잘 아는 영혼을 교육시킬 때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체사레의 집안에는 늘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으므로 교회 안에 또 하나의 새로운 부르심을 오직 하느님의 선물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돈 보스꼬 성인의 말씀 중에 이러한 말이 있다. “주님께서 어떤 가정에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는 그 가정에서 사제 한 사람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체사레의 부모님은 바로 이런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신학교로
1970년 10월 5일 체사레는 쿠네오 시 브라 신학교에 입학하는 동시에 교육전문학교에도 등록을 했다. 1년 동안 이 신학교에 다녔는데 그 기간은 여러 모로 중요한 체험을 하게 해주었다.
체사레는 교내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음으로써 이 기간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남겼다. “브라 신학교에서 나는 처음으로 신학교 생활을 체험했다. 이 첫 체험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들을 안겨주었다. 잊을 수 없는 많은 친구들도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깊이 남아 있는 것은 기도에 관한 것이다. 나는 학교의 담 안에서야 비로소 깊이 기도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룻동안 정확하게 짜여진 기도시간에서 나의 모든 생활을 주님께 바치는 법을 알게 되었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보다더 생생한 일치를 갖게 되었고, 나를 불러주신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내게 가장 큰 기쁨의 때였다.”
소년시절부터 기도에 대한 사랑이 특별했던 그였다. 이제 그 뛰어났던 기도가 보다 더 높은 단계로 높여지고,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체사레는 또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사제들처럼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기로 개인적인 결심을 했다.
1971년 브라의 신학교는 토리노 시로 이전했다. 체사레는 신학교를 계속하며 교육전문학교의 과정도 충실히 따랐다.
그 당시 신학교에서 체사레를 가르쳤던 신부들은 소년시절의 체사레에 대해 똑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솔직하고 활발한 소년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총명함과 강한 의지력으로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주장도 강했다. 그러나 의견이 엇갈렸을 때는 언제나 자기 편에서 먼저 화해를 청하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체사레는 이상적인 사제상을 향해 쾌활하고 만족한 모습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소년이었다.”
체사레는 죽기 한 달 전인 1976년 3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좋아하는 것도 많았고 취미 거리도 많았다. 그러나 이것들과도 작별해야 한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피아노와 오르간도 좋아했지만 그것도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여러 종류의 잡지도 애독해 왔고 지금까지도 어떤 잡지는 계속 보고 있는 중이다. 등산도, 여행도 좋아했다. 긴 여행은 금지되었으나 아직 가벼운 산책은 허락되고 있다.
공부도 좋아했다. 강의시간은 내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었는지 … “
체사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언제나 선행의 기회를 찾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주님께대한 사랑이 표현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본당에서의 활동도 대단했다. 미사 때 독서자로, 또 오르간 반주자로, 복사단 단장으로, 어린 복사들을 도와주고 … 주말이면 꼬톨렌고의 집을 방문하여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겸손이 필요한 봉사였으나 기쁘게 해냈다. 죽기 며칠 전 꼬톨렌고의 집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볼 때 이 모든 봉사가 순수한 사랑의 행위였음을 느끼게 된다. “꼬톨렌고 집에 갔을 때 나는 깊이깊이 느꼈다. 특별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직함을 볼 수 있다. “어떤 날 내 친구와 함께 체사레를 데리고 길을 가고 있었다. 내 친구는 맞은 편에서 오는 어떤 사람을 보자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게 일러주었다. 그러자 체사레가 당돌한 태도로 그 친구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 로사리오 기도를 하세요. 그러면 남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거예요’ 함께 길을 가던 우리는 부끄러우면서도 놀랐다. 체사레는 이런 아이였다. 남에 대한 험담을 듣는 것만도 견디지 못했다.”
1974년 7월, 교육전문학교를 수료했다. 신학교 과정도 신학 준비과정을 끝내고 신학대학으로 진학하는 단계였다. 1974년 10월 7일, 드디어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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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계와 건축
소년들은 청춘시대로 접어들기 전 위기를 겪는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불안과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춘기 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쳐들기도 한다. 생명의 의미, 사랑에 대한 불확실성들이 다시 한번 혼란의 고뇌를 맛보게 한다. 이미 내렸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선택, 결단에 대해서도 다시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앞으로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으로 나가야 할는지 심각한 물음을 되풀이해 간다.
이때 다시 한번 여러 음성이, 여러 가지 형태의 매력이 소용돌이처럼 밀려와 혼란과 방황을 겪는 가운데 그 앞에는 수많은 길이 열린다. 사랑, 자유, 정의, 신앙의 길이 … 그러나 그 어떤 길도 헤쳐나가기가 두려운 어둠에 싸여 있음을 본다.
젊은이의 내면은 더욱 뒤얽혀든다. 위대한 이상과 속된 이기심이 풀릴 수 없는 실꾸리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겉으로는 힘과 용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떨쳐버릴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의 고통스러운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방황은 길지 않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싱그러운 봄바람이 어둡던 방안에 새로운 생기를 넘치게 하듯 젊은이 안에서도 갑작스러운 힘이 용솟음치게 되는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힘은 흔히 하찮은 사건을 통해서 올 때가 많다. 그냥 지나쳐버릴 때가 많은 작은 만남, 한 번의 기도, 어떤 시선, 어떤 미소, 한 마디의 말, 작은 표양 … 이러한 작은 것들이 젊은이의 마음안에 갑자기 스며들어와 생명이 바로 사랑임을, 바로 거기에서 위대한 힘이 솟구친다는 것을 깜짝 놀랄 만한 사건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대변혁을 일으켜 마음은 온 세계를 다 끌어안아도 부족할 만큼 넓어지고 커진다. 어려움도 잊는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원대한 희망으로 갖가지의 훌륭한 계획들이 세워진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감동스럽고 관대함과 선의로 넘쳐 흐른다. 온 세계가 바로 자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악도 불행도 모두 수용되고 실망하지 않는다. 어려움도 있지만 금시 사라지리라는 희망이 더크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의 기쁨과 정열을 사그러뜨릴 수 없는 것이다.
목적지를 향해
체사레에게도 행복한 이 기간이 지나갔다. 목적지를 향한 마지막 단계에서 이미 받아들인 결단을 기쁘게 확인했다. 모든 이들을 보다더 뜨겁게, 보다더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해 택한 길임을 확인했다. 주님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충만히 살기 위해 무상의 헌신을 바치는 것이다. 사람, 시간, 장소에 대해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그의 내면에서는 사제직에 대한 생각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모양으로 이 사제직을 수행하게 될지, 자신을 바쳐드리기 위해 어떤 길로 주님이 인도하실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주님은 부르심을 주실 때 무조건 세상을 떠나 조용하게 준비된 장소로 오라고만은 하시지 않는다.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만 하신다. 나와 함께 걷자고 재촉하실 뿐이다. 우리를 부르셔서 어디로, 어디까지 데리고 가실 것인지는 그분만이 아신다.
제자들이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을 때 “와서 보라”고 대답하셨던 주님의 말씀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자를 부르실 때 그분은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익 따위는 처음부터 아예 무시해버린다. 그보다는 말씀을 살고 체험케 하는 방법을 쓰신다. 우리로서는 그분께 완전히 맡겨드리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부르심은 한 시간이나 하루 동안만 대답하면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한 번만 힘차게 대답하면 이것으로 끝까지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부르심이란 일생동안 계속 대답을 거듭해야 하는 생생한 현실이다. 주님은 매일 내 뒤를 따르라고, 매일 ‘네’라는 대답을 하라고 부르신다.
이 주님의 길은 내가 그 길로 들어서서 걷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어떤 길인지 알게 된다. 사랑이 없이는 어렵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에만 어렵고 힘든 산길 앞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체사레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신학교 시절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슬라이드를 제작한 일이 있었다. 그때 산을 오르는 장면의 사진이 있었는데 체사레는 이런 설명을 붙였다.
“각 사람의 삶은 하나의 길과 같다. 사람들은 그 길의 시작도 기억하지 못하고 끝도 볼 수 없다. 나의 삶도 역시 그런 길일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부분만 볼 수 있다. 보다더 잘 보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 흙먼지가 일고 돌멩이가 구르는 험한 길이어도 피곤해 하거나 쉬어가는 일 없이 계속 걸어가야 한다.”
체사레는 쾌활한 성격으로 감수성도 예민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결혼을 포기하고 가족도 완전히 떠난 독신생활이 큰 희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쁘게 극복했다. 사제생활은 개인적인 감정관계나 결혼생활을 떠나는 것이지만 그대신 모든 이들에게 무상의 사랑으로 관대한 헌신을 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여자 친구와 즐겁게 어울릴 때 체사레는 맑고 깨끗한 사랑으로 모든 이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고독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고독은 부르심의 음성을, 아름다운 찬미가를 더 잘 알아듣기 위한 침묵이었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길을 가야 할 때에는 자신이 스스로 하는 포기가 아닌 주님이 주시는 포기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설계를 하나, 건축을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내 스스로 택할 수는 있으나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을 따라갈 때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라는 주님 말씀을 거듭 듣게 되는 것이다.
체사레는 주님의 이 말씀을 누구보다도 일찍 체험해야 했다. 1974년 9월 초순의 어떤 날, 갑자기 무릎 쪽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었으므로 간단히 약을 바르는 것으로 그쳤다. 그때가 가족들과 함께 체라나 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다시 토리노로 돌아와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그 간격이 빨라지고 마비증세까지 나타났다. 특히 앉았다가 일어설 때 더욱 심했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괜찮아지곤 했으므로 그때까지도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11월이 되자 다리가 붓기 시작했다. 불안한 기미를 느끼며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정밀검사를 했다.
11월 18일 진찰결과가 나오는 날, 어머니 혼자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의 말은 어머니 마음에 날카로운 칼끝처럼 박혔다. “체사레는 형제가 있읍니까?” “동생 까를로가 있지요. 그런데 왜 그걸 물으시나요? 제발 알려주세요. 아주 대단한 병인가요? 말씀해주세요.” 의사는 확실한 대답을 피했다. “가능한 대로 힘껏 해보겠습니다.”라는 말 뿐이었다.
진찰결과가 담긴 봉투를 내주면서 간호원은 주치의에게 먼저 그 내용을 보인 다음에 보라는 주의를 주었다. 어머니는 두려움에 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는 체사레는 즉시 그 결과를 보고 싶어했다. 말릴 사이도 없이 봉투를 열어서 엑스레이 사진을 햇빛에 비춰보았다. 비전문가인 그의 눈에도 왼쪽 대퇴부에 생긴 종양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돌아와 그 사진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난치의 병에 걸린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더욱 굳어졌다. 체사레는 진찰결과를 알려주는 하얀 종이 위에서 자신의 꿈이 모두 사라지고 그대신 새로운 모습의 내일이 나타남을 보았다. 그 무서운 절망의 내일이 …..
또 한 번의 ‘네’
이러한 불행을 만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더욱 강한 의지가 솟구치거나 더욱 굳센 신앙에 의존하게 되는 반면 깊은 실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어떤 위로도 동정이나 가식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가장 사랑하는 이들의 존재도 아무 희망을 주지 못한다.
또 주위의 사물까지도 모두 달라져 보인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집이 갑자기 남의 집처럼 느껴지고, 가까왔던 친구들도 먼 타인이 돼버린다. 흥미와 매력을 느끼던 일도 사람도 모두 시들해져버린다.
그대신 밀려오는 것은 패배자가 된 듯한 고독 뿐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꿈과 희망으로 빛나던 내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제의 추억만으로 내일을 메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격심하게 밀려드는 현실의 고통을 자꾸 잊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고통을 뒤로 미루고 잊어버리려 할 때는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빛마저 뺴앗겨버린다.
그러므로 이때야말로 아주 귀중한 순간이다. 이때야말로 십자가의 ‘네’를 대답할 순간이며, 이렇게 응답함으로써만 절망을 이기게 될 것이다.
체사레는 이렇게 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제관으로 달려간 체사레는 피노 신부를 찾았다. “피노 신부님,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무슨 얘긴가? 그럴 리가 없어.” “분명합니다. 너무 악화돼서 회복의 가망도 없답니다.” 체사레는 눈물을 삼켰다. “암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저도 죽겠지요.”
성당으로 가서 미사에 참례했다. 여느 날과 같이 오르간 반주를 하며 신자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마음이 밝아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어머니에게 고통스러운 빛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머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세요.. 많이 먹을께요.”
저녁식사 후에도 체사레가 먼저 권하여 가족이 함께 카드놀이를 했다. 이 극적인 하루도 여느날처럼 로사리오 기도로 마쳐졌다.
2년 후 죽기 직전 텔레비젼 인터뷰 방송시간에 기자는 그 소식을 들은 순간의 심경을 이야기해달라고 청했다. “처음에는 순간적이었지만 몹시 실망했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을 때 즉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었읍니다. 특히 저를 불러주신 주님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분은 틀림없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어 더욱 힘이 솟구쳤지요.”
새로운 길을 통해 1974년 12월 27일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더욱 정밀한 검사를 한 결과 암인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1975년 1월 15일, 어떻게 치료해 볼 방법이 없었기에 퇴원을 해버렸다. 그때부터 갈바리오를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고통을 이기기위해 수없이 많은 의사를 찾았고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갈바리오에로의 길은 더욱 험해질 뿐이었다.
같은 해 4월과 8월, 두 번에 걸쳐 루르드를 다녀왔다. 12월 3일부터 24일 사이에는 성년의 대사를 받으러 로마로 간 김에 또 새로운 치료도 받아 보았다. 병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다가는 다시 심해지는 증상이 계속될 뿐 희망은 점점 엷어져 갔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의 주위를 항상 둘러싸고 있던 부모님의 애정, 신부님의 사랑, 친구들의 우정과 관심,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도와 믿음이 꼭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더욱 굳게 했다. 모든 불가능을 극복하여 사제가 되리라는 신념에도 변함이 없었다.
텔레미젼 인터뷰에서 방송기자는 또 이렇게 질문했다. “병의 악화로 신학교를 중단하게 되었을 때의 느낌도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도 버려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를 이 길로 불러주신 주님께서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방법이라도 써주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회복이 불가능한 이 병은 몸에서 모든 기력을 빼앗아버린다. 체사레는 19개월간이나 이 병에서 자신을 지켰다. 종양은 대퇴부에만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재빨리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환자의 의식은 더욱 명료해져 이 진전상태를 생생히 느끼게 된다. 그래도 체사레는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1976년 3월 8일에 암이 전신으로 퍼졌을 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 … 나는 항상 친구들과 어울리며 큰 기쁨 속에서 살고 싶어했다. 나의 성격은 고독이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언제나 친구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나는 친구들의 사랑을 끝없이 원하고 있다.”
사실로 그는 외로울 틈이 없었다. 그의 병상 곁에는 어린이에서부터 어른들까지 방문객이 끊일 사이 없었고 모두 그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했다. 체사레는 한결같이 미소로 답했다.
어떤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방문했을 때 체사레는 병원에서 방금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너무 피곤해서 소파에 그대로 쓰러지다시피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아프지 않은 듯 함께 갔던 동생에게 농담을 하면서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체사레의 영적 삶도 눈에 띄게 진보하였다. 기도안에서 주님의 뜻에 온전히 승복하는 관대함이 그를 더욱 변화시켜 나갔다.
1975년 7월 11일, 체사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너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여간 기쁘지 않다. 너의 편지야말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표지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서 함께 계셔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너의 편지는 내가 꼭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 도착해서 더 기뻤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정말 위로를 받고 싶었다. 며칠 후면 또 새로운 치료를 위해 입원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암 증세는 더욱 깊어져 간다. 당연한 진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실망의 유혹이 마음을 파고들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필요한 순간마다 위로를 보내주신다. 신뢰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믿는다.
남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미소를 지으라는 너의 권고에 진심으로 감사할 뿐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 “이 병은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그러나 신앙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 이 고통이야말로 삶을 더 잘 살기 위한 좋은 훈련이 된다. 방문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게 된다. 인내를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성숙됨이 분명하다. 남에 대한 대접도 더 잘하게 된다. 남에게 진심으로 미소를 던져주고 있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야말로 미소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체사레의 이 마지막 이야기는 어떤 사람도 감동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고통당하는 이를 위로해주며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고통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은 바로 나일 때가 많다. 나야말로 모든 어려움과 희생을 피하여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에 참된 행복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의 미소는 네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에 행복이 있음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소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소를 보게 될 때까지는 모른다는 것이 당연하다. 참된 미소를 보게 될 때 고통이 얼마나 위대하고 귀중한 현실인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고, 바로 나 때문에 고통을 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고통을 받는 이가 미소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자기만의 힘으로, 자기 혼자서는 십자가 고통을 평화와 기쁨으로 바꿀 수 없다.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신 그분에게로 가서 그분이 주실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체사레는 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게 가장 크게 도움이 된 것은 기도생활이었다. 기도야말로 어떤 상황에 처하든 힘을 얻게 해준다. 주님께서 현존해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급박한 상황 안에 함께 계셔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친구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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