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작품
남극일기 외 4편
김진열
2개월 후 둘째가 태어난다 얼음과 눈이 덮인 빙하, 영하 30도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손 부장도 박 차장도 극지 탐험을 떠났다 손을 벌릴 유일한 혈육 극락조자리 누나, 지구인이 공유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남편의 사업실패로 제7대륙의 공룡 화석을 찾아 이민을 떠났다
판구조론을 벗어나, 8번째 이력서를 낸 곳에서도 썰매의 끈이 끊어졌다 영하 40도에서 돌아오는 길, 술 취한 남자가 놀이 빙산 크레바스에 빠질 때 탐험대원 지갑 속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욕이 얼어붙어 고드름이 된다 쇄빙선이 멀미를 하고, 폭풍 속에서 회오리치는 친구들의 얼굴이 하늘에서 환청으로 얼어붙는다 기지 도착 전 시계(視界)의 끝까지 흰색과 청색을 이룬 횡단보도, 잔물결이 만드는 작은 파도소리, 멀리 헤드라이트 불빛, 빙하의 붕괴, 뛰어들고픈 충동
현관에 본부를 차린 아내가 쏘아 붙이기 시작한다 지금 그렇게 헤매고 다닐 때야? 영하 50도까지 떨어진다 새끼 펭귄이 슬그머니 물속으로 숨는다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혀 탈출구가 없다 인형을 끌어안고 쓰러진다 백야다
누에는 수의를 입지 않는다
심한 잠꼬대를 받아내는 재봉틀, 몽둥이를 휘젓듯 아침이 온다 뱅글뱅글 도는 여섯 평 남짓한 공간이 자신의 유일한 세상인 여자, 수선할 옷을 보며 손가락으로 이만큼 요만큼, 두루루룩 노루발이 지나고, 바늘은 세월을 꿰맨다 옷 먼지와 빛바랜 실타래 위에 내려앉은 시간들이 형광등 불빛 아래 허옇게 머뭇거린다 찾는 사람 뜸해지면 바라보는 두 군데, 실들이 차지하고 있는 벽면과 출입구다 기둥에 기대 뱉어내는 말, 저 실타래들이 누에고치 같아, 내가 당기면 끝없이 실을 뽑아내는
누에고치가 쪼글쪼글 해진다 6평의 방에 들리는 빗소리는 누에가 사각사각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다 천정을 보고 누우면 저린 통증이 뼛속을 파고든다 8년을 앓다 떠난 남편, 퀵 배달로 오토바이를 타다가 곁을 떠난 아들, 그들은 몇 잠(蠶)을 살다 간 것일까 나는 언제쯤 고치에 몸을 가두고 떠날 수 있을까 깨지 않을 잠에 빠져도 일말의 미련도 없을 생, 언젠가는 닫히고 다시는 열리지 않을 잠(蠶)이다 동그랗게 닫힐 어둠의 집에서 허락된 만큼의 잠(蠶)을 잘 누에가 자신의 관을 짠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힘줄처럼 질겨진 그리움, 솜처럼 젖은 마음이 공원묘지를 걷는다 소복을 입은 누에 한 마리, 내리쬐는 햇볕에 늙어가고, 바람에 말라간다
관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출발하여 11시간 비행, 인천공항이다 빨랫감과 아내에게 줄 향수 한 병, 자료들로 채워진 무거운 가방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날아갔었다 밖은 침침하고 삭막하고 두꺼웠다 이번이 열네 번째, 발을 붙일 수 없는 캄캄한 곳에서 희망은 계속되었다 크지 않은 성과지만 관에서 인정하기에 충분했다 시간은 남아 있어 옷매무새 가다듬고 주먹을 쥔다 여기는 입구, 꿈은 밖에서 계속 된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아내가 서 있다 천정이 낮고 벽이 코앞이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 가득한 관이다 깊고 익숙한 분위기가 아늑하다 어린 시절 방학 때 놀러가서 큰절하면 종이 돈 작게 접어 공책 사라며 쥐어 주시던 큰 아버지께서 관으로 들어가셨다는 아내의 브리핑, 현관은 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출장 가방을 꾸려주는 아내의 뒷모습이 익숙하다 나눌 수 없어 혼자 느끼고 들어가는 통로는 체온을 벗어난 허공으로 나를 내몬다 여기는 원통형 관이 될 것이고 비행기는 걱정 없이 구름 위로 치달을 것이다
12시간을 날아서 도착할 그 곳은 관의 시작, 관의 입구는 또 어떤 한계를 보여줄까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여자의 아버지가 사준 아파트는 평범한 회사원인 남자의 능력 밖으로 넓다 몸 풀기 동작에 고양이자세까지 끝냈다 여자가 쁠리레를 할 때 세탁기는 삐삐삐 세탁이 끝났음을 알린다 집을 떠났을 때가 가장 명랑하다는 남자*가 세탁물을 바구니로 옮긴다 거실에서의 동작은 바뀌어 드미 쁠리레로 이어진다 팔을 집어넣고 빨래를 꺼내던 남자, 윽 소리를 내며 놀란다 여자의 하얀 팬티가 진한 회색으로 변했다
흰 빨래는 희게 해야 한다던 말에, 받았던 상처가 아직 딱지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얼핏 돌아보니 발끝을 바닥에서 끌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펴고 밀어내고 있다 바뜨망 탄듀라고 했던가 불현듯 흰 빨래와 검은 빨래의 구분이 잘못되었을 때 여자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동작을 연상시킨다 큰 숨을 내쉬며 여자의 가위질에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색깔이 바뀐 팬티를 쓰다듬는다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서 설치한 거실의 바 위에 다리를 올린다 입 꼬리를 올려가며 여자의 눈이 노려보는 발끝에 회색 팬티가 걸리는 상상, 남자의 심장이 빨리 뛴다 세탁실에서 빨래를 꺼내던 남자가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 챈 여자의 침묵은 연기다 입 꼬리 더욱 올라가고, 고통은 지그시 누리는 환희로, 뜨겁게 쏟아지는 머릿속 박수를 들으며 백조의 잔걸음이 이어진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남은 빨래를 꺼낸다 빨래 바구니는 팔을 굵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남자는 소리 없이 소파에 앉는다 호두까기 인형 음악이 흐르고 눈을 감는다 좀 전에 여자의 티셔츠를 툭툭 털어서 널었던 것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몸으로 표현한 환상적인 안무였다 일주일 동안 입었던 자신의 팬티 6장을 연거푸 널었던 것은 여자와 보조를 맞춘 발레리노의 턴을 위한 기초였다 그 동작 속에 떠오르는 알라스꽁을 거실에서 꿰면, 몽환적인 스토리는 완성되는가 여자는 빠세 를르베를 연습한 뒤 도도하게 서서 땀을 닦는다
남자의 시선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행복이 빵처럼 부푼다
*세익스피어의 말
달에는 문이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과
일일이 눈을 맞추는 달
별의별 가슴을 다 들여다본다
먼저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며
강가에 앉아 눈시울 붉히는 남자
한 모금 한 모금
소주병이 남자를 마신다
달은 슬그머니 구름 속에 얼굴을 묻고
남의 집 담을 넘는 사람
딱하고도 가여운 처지에
자칫 엉덩이를 받쳐줄 뻔 했던 밤도 있다
아픈 가슴들 쓰다듬어주느라
달의 구두는 뒷굽이 낡았으나
얼굴은 맑고 부드럽다
간밤에 떨어진 별들이
위로 받고 싶어 다리를 끌며 찾아오면
달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가 닫는다
빛도 차단하고
시끄러운 소리도 멀게 하는 문
등을 들썩이며 잠든 별은
달의 품에서 편안하게 쉰다
달의 창문이 스르르 열리면
밤하늘에 걸리는 등불
우주의 문이다
당선 소감
김진열
농익은 시간 한 켠에 는개 자욱한 날이 들어있다.
초등학고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엿장수 할아버지한테서 얻어다 준 슈피리의 소설 하이디가 유일한 내 소유의 동화책이었다.
누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의 두꺼운 책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읽고 또 읽고 빠져서 살았다.
4학년 때 분교였던 학교에 도서관이 생겼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고
재미난 이야기를 쉬지 않고 지어내던 열두 살의 나를 떠올리면
나는 나를 믿을 수 있다
아내로 엄마로 사는 동안 나는
너무 멀어 들리지 않는 별의 말이었다.
자물쇠 채워져 손길 뜸했던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린다.
별이 손나팔을 만들어 말을 내보낸다.
마주치는 표정, 힘겨운 울음들을 놓치지 않고 싶다
대답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목도꾼이 되어 볼 참이다
애지 신인상 당선은 기쁨이다
길을 가르쳐준 마경덕 선생님과 이종섶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조옥상형과 신영애, 최혜옥, 하순희 쌤 오래 기억할 것이다
시와 열정과 따뜻한 밥, 그리고 한 잔의 술을 공유하는 문우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오늘날은 전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다 먹고도 버릴만큼의 식량이 남아돌지만, 그러나 지구촌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만성적인 기아와 빈곤에 시달린다. 승자독식구조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 때문이며, 자본주의 사회, 즉, 풍부한 사회가 구조적으로 재생산해내고 있는 빈곤의 신화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만성적인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소수의 부자들의 특권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와 만인의 행복은 너무나도 완벽한 허위와 너무나도 완벽한 사기 위에 기초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난한 인간들은 부자들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다 바쳐야만 하고, 부자들은 그들의 특권을 위해 대부분의 인간들을 만성적인 기아와 빈곤의 상태로 몰아넣지 않으면 안 된다.
[남극일기]외 4편을 응모해온 김진열 씨의 시세계는 가난한 인간들의 삶의 애환
을 노래한 시들이며, 신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산문시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가난의 대물림, 출신성분의 대물림, 비단실을 짜야만 하는 육체노동의 대물림을 노래하고 있는 [누에는 수의를 입지 않는다], 실직과 구직 사이에서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 젊은 가장의 절규를 노래하고 있는 [남극일기], 집도 관, 공공기관의 직장도 관, 비행기도 관, 죽음도 관이라는 [관], 신분의 차이, 즉 남편과 아내의 역전된 관계를 노래하고 있는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자칫 도둑의 엉덩이를 받쳐줄 뻔했던 밤을 노래하고 있는 [달에는 문이 있다]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김진열 씨의 인식의 깊이는 빈부의 문제와 신분의 차이와 삶의 현장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주목하고, 그의 시적 재능을 말들의 경연장으로 연출해낸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과 함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구조는 메아리 효과를 낳게 되고, 이 메아리 효과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으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며, 시인의 앎의 깊이와 정비례한다. 많은 아는 자가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고, 많이 아는 자가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를 쓰게 된다. 말과 삶은 하나이고, 말의 축제는 삶의 축제이며, 시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무한한 정진을 기원한다.
애지신인문학상 심사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글 반경환) 일동
첫댓글 김진열샘. 신인문학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