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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을 꿈꾸는 ‘목소리’들
-애지 사화집 {혁명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가}
안서현(문학평론가, 애지편집위원)
책이 된다는 것은 얼마간 신비로운 일이다. 시 독자들 가운데에는, 여러 지면에서 이미 접한 시들이라 하더라도 그 시들이 모여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에는 또 다른 의미와 기운이 생겨난다는 것을 느껴본 이들도 많이 있으리라. 한 시인이 한 시기 동안 쓴 시들을 결산하거나 한 주제를 가지고 해온 시 작업의 일단락을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그 ‘의미’이고, 책의 물질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분위기나 아우라(Aura)가 바로 ‘기운’에 해당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화집 역시 매혹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동인이나 문학회와 같은 시인들의 ‘모임’이 시나 글의 ‘모음’을 통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사화집의 ‘의미’라 한다면, 서로 다른 분광(分光)으로 나누어지는 다양한 빛깔의 시적 개성들을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그 시들 전반에 감돌며 그 시집을 에워싸고 있는 어떠한 공통적인 빛이 바로 사화집의 ‘기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시인을 이외에 모두 스물 네 명의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는 애지문학회의 아홉 번째 사화집 혁명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가는, 애지문학회의 아홉 번째 존재 증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모든 사화집이 그렇듯이, 이 시집 역시 단일한 시적 원리나 지향에 의해 통어되고 있지 않고 자유롭고 원심적인 구성과 여러 ‘시의 길’들의 만남과 엇갈림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자체로 시의 복수적 존재태를 현시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시 공동체의 독특한 ‘기운’을 담아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시집의 서문에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라는 시의 한 정의가 표명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시집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기운’이란 아마도 낙천성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절망을 말하기보다는 변혁의 희망을 말하려고 하고, 삶의 우울을 노래하기보다는 차라리 웃음이나 일갈을 통해 건강성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이 시집의 특징인 것이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은 대화성, 혹은 소통 가능성에서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아주 난해한 시는 이 시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사실은 결코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미학적으로 온건하리라는 단정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것은 오히려 ‘함께’ 시를 써온 이들의 시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한다. 시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암묵적) 대화의 무늬에 가까운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도 이 시집은 시의 한 특수한 존재태―공동체에 기반한 시라는―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 시집이 보여주는 낙천성과 소통 가능성이라는 특징은, ‘절망의 현대’, ‘난해시로서의 현대시’라는 최근 시단의 편향성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러한 면에서 하나의 문학공동체 즉 동인이나 잡지나 문학회가 해야 할 역할을, 즉 시단의 한 ‘감성의 분할’을 담당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의 소주제를 통해 이러한 시적 특징들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목소리들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이 세상에는 시인들이 있는 꼭 그만큼 시론들이 있을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백인백답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 시집에 있어서도 다양한 시론들을 찾아내고, 서로 다른 태생과 기원을 가진 시적 언어들이 교호하고 충돌하는 장의 역동성을 느껴보는 것이 감상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다음의 시 역시 그중 하나의 시론, 하나의 시적 발화의 탄생의 장면에 관해 쓰고 있는 시로서 일독해볼 만하다.
손님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소파인지 침대인지 비스듬한 안락의자에 누웠다 천정은 높고 창문은 비좁았다 식은 커피 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종업원인지 바리스타인지 흰 가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지난 풍경들이 연탄가스처럼 스며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묻힌 기억이 몽롱해졌다 균열은 몸을 둘러싼 지붕이 아니라 몸을 촘촘이 떠받들고 있는 기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구겨진 쪽지를 건네주며 생각나는 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말하라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점자처럼 어른거렸다 내 유년시절도 먼지처럼 떠다녔다 물에 빠져 죽은 누이를 위해 지붕이 불타기를 기도했다 흰 연기가 꼬리곰탕처럼 끓어올랐다 썩지 않은 누이가 썩은 지붕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입속에서 오물거렸다 지금까지 내뱉은 말이 자유연상이면 치유가 될 것이고 자동기술이면 詩가 될 거라고 했다 상담료를 지불했는데 커피 대신 껌딱지 같은 책 한 권을 주었다 단물이 빠지기 전에 책상다리에 붙여놓았다
-김연종, 「카우치에서 시를 읽다」, 전문
여기 시를 설명하는 하나의 풍경이 있다. 누군가가 카우치 의자에 앉아 자신의 내밀한 영역에 관해 진술을 한다. “구겨진 쪽지”라는 무의식의 스크린에 적힌 것(혹은 적혀 있지 않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읽고 보이는 대로 말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그대로 “자동기술”의 시, “껌딱지 같은 책 한 권”으로 완성된다. 이것은 정신분석가와의 상담의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가 태어나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기도 하다. 무의식과 언어, 그것이 만나는 지점이 곧 시라는 일종의 초현실주의 시론이다.
그 카우치에서 말해지는 것은 주로 죽음이라는 삶의 구멍에 관한 것이다. 죽음은 역시 원초적이면서도 영원한 상처인 것이다. 끝나지 못한 애도 작업―쾌락원칙을 넘어선―의 대상들, 일상의 언어로는 쉽게 발화되거나 의미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애도될 수도 없는 상징계의 잔여물들이 이곳에서 귀환한다. 사실 그 애도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삶의 공백 그 자체에 관한 것이며, 그러한 무한한 애도 작업을 이끄는 것 역시 구체적인 대상이 없으며 무한히 상징계에서 미끄러지는 실재계적인 욕동, 즉 죽음충동이다. 결국 이 ‘카우치 시론’에 따르면, 시는 실재 혹은 죽음충동에 대한 응시의 작업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강사가 앞에서 지명을 한다 A가 느낌만 간단히 얘기 한다
B의 기막힌 해설 이어서 C가 다른 예를 들어가며 발표를 한다
D가 전체를 접목해서 아우른다
강사가 잘 만든 꽃 한 송이를 청중석에 바친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계속 강사의 진행이 이어진다
격려, 열기가 달아오른다
다음이 프리지아 향기를 주장하며 노란색을 펼친다
백합은 커다란 얼굴로 눈길을 끈다
안개는 여기저기 스며들어 꽃들의 들러리를 선다
나는 이파리 몇 잎을 밑바탕에 깔며 정성을 보탠다
모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첨삭이 잘된 작품을 두고 선이 뚜렷한 공작새 모양의 꽃이었다고 말한다
정말 오늘은 유난히 꽃바구니가 잘 만들어진 시간이었어요
강사가 연신 칭찬한다
-박종인, 「의미론적 비유-꽃바구니 만드는 법」, 부분
이번에는 시 읽기의 광경이다. 시 읽기 강좌에 모인 학생들은 저마다 시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말한다. 그것이 한 잎씩 모여 꽃이 된다. 또 그렇게 모인 꽃들이 어울려 하나의 꽃바구니가 된다. 시는 그렇게 여러 겹의 의미들을 지녔기에 마치 한 송이의 꽃과도 같고, 그러한 시들이 모여 다시 의미의 꽃바구니를 이룬다. 그리하여 시는 곧 풍요다. 시의 다층적인 해석 가능성과, 시가 내장하고 있는 풍요로운 의미의 생산성을 강조하고 있는 시, 그리하여 이것은 비유에 관한 비유, 시에 관한 시인 것이다.
인용하지 않은 이 시의 뒷부분에서 이 꽃바구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하면 좋지 않겠어요”라는 삶의 원리가 되기도 하고 “근데 얼마예요”라는 환금 가치가 되기도 하고, “국회에 가져갔”더니 “여기다 저기다 놓으라”는 “자기 주장”과 쟁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상징과 은유로 만들어진 시 혹은 의미로 만개한 꽃이라는 미적/의미론적 존재가, 이 세상에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실용 가치로 ‘번역’되어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하여 ‘꽃의 의미론’이라는 ‘시의 존재론’에서 그치지 않고, ‘서정의 위기론’이라는 현실 진단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하겠다.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마저 이야기를 이야기해
볼
까
여자만 셋이서 낚싯대 들고 금수산에 올라 화석시대이래 먹어온 돌솥밥 시켜놓고 도대체 예쁜 돼지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담 꿉닭의 총각 셰프가 비틀스를 알랑가 몰라 어라, 정통 꼬치가 원조 조개 불러 KISS를 하네 알다마 투다리는 당구 한판을 엣지 있게 치고 있군 꽃미남 세븐한테 종합상조 권유가 먹힐까? 취연에서 술 따르는 황진이가 글쎄 본향교회 권사님이래 3층 옥상에서 나는 조개다 떠벌리는 춘자는 어
떻
고
한 조가비의 달빛만을 톡 떠낸 듯
방제수 같은 입간판들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한밤의 골
목
상
가
-조영심, 「스토리텔링」, 전문
우리가 도시의 간판이나 광고판의 언어 혹은 이미지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철학자답게,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아케이드와 같은 공간에서 부정성―상품들이 구현해내는 욕망의 판타스마고리아―과 함께 긍정성―꿈의 이미지와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도 함께 찾고자 했다. 그야말로 낙천주의적 철학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영심의 「스토리텔링」에서 간판의 파편적인 언어들을 그러모아 만들어낸 이야기는 이 시대의 풍속은 물론, 이 시대의 혼탁한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그 말들이 피워내는 “이야기꽃”은 도시의 활력과 생동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글자의 독특한 배열을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 효과 역시 그러한 생동감의 표현일 터이다. 관찰력과 위트가 돋보이는 시이자, 오늘날의 세계를 구성하는 파편적 언어/이미지와 그것의 이중적 의미에 대한 벤야민적 통찰을 보여주는 시다.
상이한 목소리들, 이질적 감각들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시들 안에서는 다양한 시론의 경연이 펼쳐지는 만큼이나 이질적 감각의 향연도 펼쳐진다.
열쇠가 열리지 않아, 라는 말을
열 시가 열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열 시 십 분의 자세로
일어서고 눕는 계단
바다는 열려 있고
아이들은 닫혀 있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도서관에서 고시원으로
나비가 날지 않는 놀이터
아이들의 홍채 속에서 풀들이 자란다
베어내도 풀들은 자라고
봄을 잡으러
벽속으로 걸어 들어간
청년의 피를 믿을 수 있을까
하늘과 꽃과 새를 책갈피에 끼운 채
새벽 전철을 타고 직장으로
어둠을 안고 집으로
열시 너머 어둠에 기댄
열려라 계단,
너울성 파도가 밀려온다
수평선을 박차고 열시를 허문다
열한 시 십오 분의 각도로
갈채가 쏟아지는 계단
벽속에서 나온 아이들이
사분사분 계단을 연다
-강서완, 「계단 풀기」, 전문
위의 시에서 드러나는 감각은 경사와 폐쇄, 불안과 불통의 감각이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세계, “열리지 않는” 세계는 비정상과 비자연(부자연)의 상태에 놓여 있다. 열시가 되어도 귀가하지 못하고 늦게까지 학원으로 도서관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아이들과 새벽에 출근했다가 “어둠을 안고” 귀가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비정상이다. 자연적인 것, “나비”라든지 “하늘과 꽃과 새”와 같은 것들이 “날지 않”거나 갇혀 있는 모습은 부자연이다. 그러다가 열시 너머, 열한 시 십오 분이 넘어서야 다시 ‘열림’의 시간이 돌아온다. 불면의 도시라는 비정상/부자연의 상태가 깨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이러한 위태로운 경사의 감각으로 도시의 삶의 감각, 비자연의 리듬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피로와 곤비의 삶의 감각을 표현하는 것은 신선하다. 도시의 삶은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이지만 새로운 감각을 통하여 시화해내고 있기 때문에 상투적이지 않은 것이다. 또 이 도시에서는 열시가 넘어야만 “바다”라는 자연의 리듬이 “너울성 파도”를 타고 밀려온다는 두 리듬의 전환과 경계에 대한 상상 역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소리의 길을 이탈한 당신들의 수화는 시끌벅적 조용했지만
고요는 선명해 멀리서도 보였다
고요가 가장 빠른 지름길인 이유와
가장 아름다운 소리인 까닭이 설명됐다
고요가 들리면 내 귀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고요만은 들리는 까닭이 이해됐으나
원근법에 숙달된 내 눈은
먼 소리가 또렷한 이 역원근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리가 아름다우면 눈이 절로 감기는 까닭이 설명됐다
고요를 듣기 위해 눈을 감고서야
눈먼 자들이 어둠속에서 눈뜬 자들보다 더 빨리 길을 찾아내는 이유와
청각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된 까닭이 이해됐다
고요는 중력의 궤도를 벗어나야 제일 또렷하게 들린단다
가장 빠른 길이 가장 먼 거리여서
사이프러스나무가 평생 중력을 역행하다 죽은 이유와
아버지의 영혼이 무거운 몸을 버린 까닭은 설명됐지만,
어느 화가가 자화상을 보고 귀를 잘라버린 이유와
사이프러스나무가 검게 빛나는 까닭과
죽은 아버지가 꿈속까지 찾아오고서도 끝내
침묵하는 궁금증만은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았다
-최용훈, 「소리의 원근법」, 부분
시는 상식적 인지를 깨고 예리한 ‘찔림’과 ‘꿰뚫림’의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감각적 푼크툼(punctum)의 장르다. 위의 시는 시각이 주 감각인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청각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시의 본령에 해당한다. 이 시에 따르면 시각이 원근법을 기본 원리로 삼는다면 청각은 그와 반대되는 역원근법의 세계다. 그리하여 고요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이자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역설적 원리가 통용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직 감각의 전이, 색다른 감각의 위상학 정도를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감각의 문제를 통하여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문제까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서 상이한 감각에 의한 관통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고요’와 ‘아름다움’의 관계, 혹은 ‘고요’와 ‘지름길’의 관계에 대해 쓰는 동안에는 생기지 않는다. ‘고요’와 ‘아름다움’과 ‘지름길’이라는 삼자모순의 관계에 대해 다룰 때, 다시 말해 ‘죽음’과 ‘미’와 ‘가로지르기(충동)’의 관계에 대해 다룰 때 바로 논리적으로 풀리지 않는 신비의 영역의 개입과 침투가 일어난다. 독자들은 그러한 삶과 죽음의 비밀과 불가해성에 의해 치명적으로 찔리게 되는 것이다. 시가 주는 감각의 풍요로움이란 단순한 감각의 전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뒤흔드는 감각의 전율 내지 마비에 의해 온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이제 다시는 정처定處가 되지 말자
덜 자란 나무에
이른 꽃이 신음하는 밤
너무 뜨거워서
나는 어두워진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것
그러므로 새로 당도한 것
모든 말이 씨앗이 된다면
빛을 나르던 심장 속에 잠들어 있겠지
젖은 눈동자의 검은색이 검은색으로 울거나
검게 떠다니는 동안
운석과 운석 사이 침묵처럼
내가 가진 가장 어두운 색을 꺼내 보인다
빛으로부터 건너 온 암시처럼
죽은 별이 내 몸으로 온다
심장이 생겨나고
귓불이 달궈지고
발가락 끝까지 차오르는 투명한 빛
여러 겹의 우주 속에서
또 다른 하나의 순간이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단 하나의 점으로 점, 점, 점
빛의 속도로 태어난 몸
밝기가 변했으므로
별의 목록은 다시 쓰여진다
-황경숙, 「플랑크의 시간」, 전문
별들의 충돌에 의한 새로운 별의 탄생의 장면을 다루고 있는 시다. 이른 꽃이나 ‘나’는 모두 심장 속에 생명의 씨앗만 간직한 채 뜨겁고 어둡다. 그러다 한 순간 죽은 별을 몸에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세계, 하나의 몸, 하나의 별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어둠은 투명한 빛으로 새롭게 채워진다. 이 꽃의 만개 혹은 별의 탄생이라는 ‘생명의 폭발’이 바로 한 플랑크 시간 동안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생과 사, 그리고 시간에 대한 우주적 감각을 펼쳐내고 있는 시다.
이 시가 경험하게 하는 새로운 시간 감각, 아주 짧지만 그 안에 엄청난 가능성을 안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감각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시간 감각을 뒤흔들고 있다. 또한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생명이 깃드는 공간, 정처(定處)가 되기 위한 뜨거운 인고의 시간과 신비로운 탄생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시는, 한 생명과 사랑의 정처가 된다는 것, 한 꽃과 별과 사람이라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뜨겁고 신비로운 일인지를 새삼 돌아보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목소리들, 손들이 만나는 자리
이러한 감각의 갱신은 존재의 혁명의 선행 조건이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감각들은 항상 더 그 다음으로의 전개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사회의 혁신이다. 이번에는 이 사화집의 목소리들과 감각들이 들려주고 빚어내는 목소리들과 감각들의 만남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생겨나는 정치적 가능성에 주목해보자.
이 나라에서 더는 못 볼 줄 알았는데
2013년, 그 하 무덥던 폭염의 끝자락에서
역모라 불리는 반역의 불씨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네
께름칙함이야 없잖지만 한편 뿌듯함도 느껴졌네
웬, 요즘같은 시절에 저리 홀홀한 문장을 접하게 되다니!
벌겋게 눈뜨고 혁명이 살아있다 하네
북에 동조하거나 지령을 받은 내란음모란 말이지
대통령 선거 같은 데는 조금도 개입하지 않는 의기로운
공안당국께서 재빠른 수사를 하시는 통에
에크! RO의 원대한 계획이 미수에 그쳐버렸네
‘모든 현대의 혁명은 자유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그간의 모든 혁명이 자유를 목표로 하지 않았는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한다 그랬듯
실패한 내란음모도 엄밀히 말해져야 하네
낭만과 냉소가 교차하는 이 정치적 대열에서
혁명이 숨죽이거나 죽은 사회는 너무 노곤할 것 같네
-민경환, 「혁명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가」, 부분
이 시집의 건강성이 두드러지게 빛나는 시편이다. 시는 언어와 감각과 삶의 영구혁명인 까닭에, 시의 영혼은 늘 ‘혁명’이라는 말에 끌릴 수밖에 없다. 위 시의 시적 주체는, RO라는 조직 자체에서가 아니라 “역모”와 “반역”이라는 사라진 말이 되살아난 것, 그 “홀홀한 문장”을 다시 접할 수 있게 된 것에서 ‘혁명의 말’/‘말의 혁명’이라는 충분한 혁명적 의미를 찾고 있다. 비록 실패한 “내란음모”라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시의 뒷부분에서도 민주주의가 바로 혁명의 가능성을 회복시키는 길이며, 동시에 혁명이 바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회복시키는 길이라는 것, 또한 그러한 민주주의와 혁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해와 혐의”를 불러오는 말들이 되살아나야 하며, 나아가 “노골적 색다른 꿈과 비아냥도 그 중의 한 목소리”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되살아나야만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결국 이 시의 메시지는 말의 가능성과 목소리들의 다양성 그 자체에 대한 옹호라 할 수 있다. ‘말과 목소리의 혁명의 시’인 것이다.
또한 이 시는, 그 자체로 불온한 ‘위반적 언술’을 통하여 이러한 ‘전복적 언어의 필요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혁명의 언어로 쓰여진 혁명의 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혁명’이라는 말조차 낯설어진 시대이자 이러한 시조차도 “오해와 혐의”를 불러오고 “마녀사냥”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후퇴한 시대를 말하고 있는,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의 혁명의 시’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담아내고 있는 혁명의 시’라 할 수 있겠다.
혁명적이다
번데기의 명상은
악몽처럼
지루하다
변화는 힘들다
거칠고 메마른 바닥을
오랫동안
애벌레로 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김현식, 「우화」, 전문
생활의 지속보다 어려운 것이 존재의 변화라는 것을 각각 우화(羽化)라는 생명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시다. 흔히 변혁이나 혁명을 한순간에 천지개벽하는 것, 다시 말해 짧은 시간성과 강렬한 운동성에 의한 혹은 그것들을 동반하는 것으로 상상하는데, 실제로는 “악몽처럼/ 지루”한 “명상”에서 ‘혁명적인 것’이 비롯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긺’과 ‘정지’라는, 새로운 혁명의 시간성/운동성이다. 이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변혁을 위한 긴 인내와 노력의 필요일 터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새벽부터 한달음에 달려온
단원고 유가족들 중 세 어머니가
그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듯
그냥 지나치지 않고 대절버스에서 내려와
우리들 왼쪽 가슴 윗도리에
노란 리본 배지를 일일이 달아주고
차가운 손 따뜻이 잡아주던 손
수의에까지 호주머니를 달려고 무시로
무람없는 자본주의의 손톱을 날카롭게 벼리는
참사의 공범자들, 온 국민이 낯을 들지 못하고
무조건 미안합니다, 석고대죄해도
벼룩의 간만큼도 위로가 안 될 손이
되레 위로하고 눈물 닫아주던 손
죽음보다 더 아픈 것은 잊히는 것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잊지 마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대쪽 같은 마음으로 부탁하고 다짐하며
왜?를 들이부어 그랬구나!를 퍼 올리는
납득과 진실의 마중물 되자고
오월과 사월이
울컥, 철과 자석처럼 맞잡은 손
처음 본, 34년 전 금남로에 낯익은 손
손수건 젖은 그 손
-김정원, 「손」, 부분
세월호 공판을 앞두고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시위하던 손이 세월호 유가족의 따뜻한 손과 만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시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러한 손들이다. 부정과 불의에 대하여 항거하는 손과, 위로할 수 없는 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위로를 건네는 따뜻한 손이다. 그 손들을 통해 다짐되는 ‘기억’과 그 손들을 통해 퍼올려지는 ‘진실’의 힘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러한 손과 손의 맞잡음을 다시 오월과 사월의 손잡음, 세월호와 광주의 손잡음으로 바꾸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월호 사건을 광주민주화항쟁과 연결시켜 역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위로할 수 없는 죽음 앞에, 기억을 위한 윤리와 진실을 위한 투쟁이 요청된다는 점, ‘그랬구나!’라는 이해를 통한 공감과 납득을 통한 합의의 공동체를 도래할 수 있게 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세월호와 광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손잡음은 “공범자들”로서의 “국민들”에게 ‘삶의 윤리적 변화’와 ‘공동체의 역사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시론들과 감각들과 변혁의 몸짓들을 담아내고 있는 시들이 애지 사화집 혁명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가에는 빼곡이 수록되어 있다. 흔히 혁명이 없어 시가 완성되지 못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삶과 정치의 변혁의 가능성을 찾아내어, 그에 관해 노래하는 시인들이 아직 있다. 시가 삶 그 자체를 바로, 그리고 직접 바꿀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시가 변화의 가능성을 일깨워줄 수는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그러한 건강한 낙천성에 기반하고 있는 이 시들은, 시의 세계에마저 만연해 있는 절망과 냉소를 넘어서서, 우리 시단에 드물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긍정성을 회복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더니즘 시학의 등장 이후로 통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시와 삶의 관계, 시와 사회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도 ‘마중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시집은 그 자체로 영원한 시의 ‘복수성’을 보여주는 폴리포닉한 ‘목소리들의 공간’이면서도, 그 안에 시적인 꿈의 ‘공통성’, 다양한 말과 의견이 공존 가능한 민주주의적인 ‘목소리들의 공간에 관한 꿈’을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집에 관해 한 마디로 이야기해본다면 바로 ‘시의 복수성과 꿈의 공통성 사이의 모순성의 희망가’, ‘목소리들의 공간을 꿈꾸는 목소리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지문학회의 이러한 희망가가,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