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권력 실세 꺾은 정치 신예… 13년간 힘 기른 덕분이에요
입력 : 2021.08.04 03:30 조선일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 옥타비아누스 동상(왼쪽), 안토니우스 동상
도쿄올림픽에서 전 세계 선수들이 멋진 경기를 펼치고 있어요. 특히 대한민국 10대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이 국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17세 김제덕 선수는 양궁에서 금메달을 두 개나 거머쥐었고, 18세 황선우 선수는 수영 자유형 100m에서 한국과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어요. '탁구 신동' 17세 신유빈 선수는 단식 2회전에서 무려 41세 많은 58세 니시아리안(룩셈부르크) 선수와 맞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신 선수는 32강에서 탈락했지만, 베테랑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경기하는 모습에 "Z세대(2000년대 초반 출생자)답다"는 평이 나왔어요. 노장의 관록에 맞서는 신예들의 패기가 올림픽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신예가 노장을 무너뜨린 경우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바로 18세에 로마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기원전 63~14년)와 그보다 스무 살 많았던 관록의 안토니우스(기원전 83~기원전 30년)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카이사르의 암살
두 인물의 대결은 로마를 지배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년)가 원로원 귀족들에게 암살되면서 시작됩니다.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죽으면 로마 공화정이 회복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카이사르에게 충성했던 군대가 세력을 장악합니다. 특히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자 집정관(당시 최고 관직)이었던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차지했죠.
안토니우스는 군사적 자질이 훌륭했을 뿐 아니라 외모도 뛰어나 "마치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어요. 신망도 두터웠고요. 그는 카이사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연설을 하며 로마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원로원을 소집해 차분하게 사태를 수습했어요. 이제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모든 권력을 쥔 듯 보였죠.
하지만 이때 뜻하지 않은 인물이 나타납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그의 누이의 외손자로 18세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를 양자 겸 후계자로 삼고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거예요.
18세 신예의 등장
원정을 위해 그리스 아폴로니아에 파견 가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죽음과 후계자 지명 소식을 듣고 곧장 로마로 향했어요. 하지만 아직 안토니우스와 대결하기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그와 손을 잡고 로마를 안정시키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죠.
그리하여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레피두스가 일종의 군사 협약인 '2차 삼두정치'를 체결하고 정치를 합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먼저 군대를 이끌고 카이사르 암살을 주도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처단합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가 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영광이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어요. 이후 로마의 동쪽은 안토니우스가, 서쪽은 옥타비아누스가 나누어 다스리기로 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동방 원정에서 군사·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습니다.
이렇게 잘나가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나면서 무너져 버렸어요. 원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자였던 카시우스를 도와준 것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려고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어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를 만난 자리에서 그녀의 매력에 빠지고 맙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절세 미녀는 아니었지만 능숙한 대화 능력과 아름다운 목소리 등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고 해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간 안토니우스는 시간을 낭비했고, 그러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차츰 세력을 쌓아 갔어요.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결혼 선물로 자신이 정복한 땅 일부를 주는가 하면,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와 동방의 여왕'으로 선포하기도 했어요. 이전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굳건한 동맹을 위해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켰는데, 안토니우스가 미리 작성한 유서에는 옥타비아와 낳은 자식에겐 유산을 남기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이집트에 묻힐 것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어요. 이런 점을 다 알게 된 로마인들은 안토니우스를 배신자로 여기며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악티움 해전의 결투
이렇게 안토니우스가 분별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본 옥타비아누스는 결전의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안토니우스도 로마의 1인자 자리를 놓고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500척의 대함대를 편성했어요. 사실 안토니우스는 자기에게 지상전이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대함대가 있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며 해상전을 고집했죠.
결국 전쟁은 바다에서 시작됐는데, 이것이 유명한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입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크기만 컸지 군사 수는 적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어요. 배를 저을 줄 모르는 마부와 농부 등도 있었다고 해요. 반면 옥타비아누스의 배는 작지만 기동성이 뛰어났고 해상 전투에 능한 수병도 충분했죠. 결국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전쟁에서 참패했고, 이집트로 도망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1인자가 됩니다. 이후 기원전 27년에는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로마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올랐어요.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로맨스는 파국을 맞긴 했지만 '세기의 스캔들'로 불리며 수많은 연극·영화의 소재가 됐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 이전 카이사르와도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해요. 그녀는 로마 권력자들과의 스캔들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지식이 출중하고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등 지적 능력과 외교 수완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해요.
▲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결전을 벌인‘악티움 해전’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서민영·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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