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문학상 수상자 대표작 선집
심영희
한국수필가협회(이사장 최원현) 또 하나의 사업으로 이번에는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자대표작 선집이 출간 되었습니다. 그동한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편집위원, 기획위원님들의 노고로 한국수필의 역사적인 선집이 탄생했습니다. 감사와 찬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제27회 한국수필문학상 작품이자 세 번째 수필집 제목입니다)
정겨운 내 이름 대관령
심 영 희
동쪽을 바라보니 구산이 보이고 성산도 보이네 더 멀리 강릉시내에는 빌딩과 아파트도 많고 사람도 많이 다니는구나 그뿐 아니라 동쪽바다에는 금방이라도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파도가 하늘을 향해 날고 하늘의 구름은 또다시 파도를 삼켜버리고 파도는 구름을 삼키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답니다. 한참을 내려다보다 싫증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그쪽에는 시퍼런 산이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나는 찬바람과 안개에 뒤덮여 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40년 전 나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송아지 색 골덴바지에 예쁜 수가 놓여진 털 스웨터를 입은 소녀는 가끔씩 버스에서 차창을 통해 나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당당히 강릉여중에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얼마 후 합격통지서를 받아 든 소녀는 숨가쁘게 고개를 넘어 집으로 달렸습니다. 시골 아이가 대처에 와서 시험에 합격했다고 대견스러워 하시던 큰아버지의 너털웃음소리를 떠올리며 기세 등등하게 부모님 앞에 합격통지서를 내 놓은 소녀는 그때부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집과 가족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서러움이었습니다.
아직도 하얀 잔설이 남아있는 3월, 소녀는 고향을 뒤로하고 나를 만나 이별의 인사를 하고는 강릉시내로 가더니 다음날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는 매주 토요일이면 나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 출발하는 평창행과 봉평행 버스에는 일반손님보다 주말을 맞아 외지에서 공부하다 집에 다니러 가는 남녀학생들이 좁은 차 안에서 아우성입니다. 그 속에 그 소녀는 꼭 끼어있었습니다.
한달 쯤 지난 어는 토요일 버스에는 그 소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무척 궁금했는데 다음날 새벽 첫 버스에 그 소녀가 앉아있지 뭡니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더니 토요일 오후 대청소를 끝마치고 차부(버스터미널)로 갔는데 표를 못 사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기다렸는데 버스가 만원이어서 차를 못 타고 이번 주일에는 집에 못 가는구나 하고 되돌아와 고향집에 가고 싶어 밤새도록 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일요일 제천행 첫 버스로 집에 도착해 가족들을 보자 그만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말았습니다.
달래주시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께서는 근엄한 목소리로 “너 오늘부터 학교 가지 말아라. 즐거운 일만 해도 모자라는 세상에 그렇게 서러운 일을 왜 하느냐”며 아버지 특유의 사랑법을 쓰셨습니다.
아침 점심 먹고 나니 또다시 강릉으로 가야 하는 소녀는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몇 가지 반찬과 책가방을 들고 완행버스에 올라 밖에 서계신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고 어머니는 밖에서 손을 흔들며 모녀의 이별은 시작되었습니다. 버스가 멀어져 안보일 때까지 장승처럼 서서 손을 흔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끝까지 보려고 버스 뒤로 달려오며 눈물을 흘리는 딸, 두 모녀의 만남과 이별은 주말마다 그렇게 되풀이 되었습니다.
주말마다 차멀미에 시달리던 소녀가 어느 날은 버스 안에서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일요일 오후 집을 떠나 강릉으로 가던 소녀는 대관령 고개를 굽이돌 때 올라오는 멀미를 참지 못해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청년이 가방에서 보자기를 꺼내주며 닦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강릉까지 가면서 보자기를 빨아서 학교 오가는 길에 갔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다음날 하교할 때 보자기를 들고 공업사로 찾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용접공으로 철공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보다 대여섯 살 많았을 것이니 아마 그 청년도 지금쯤 회갑을 전후한 나이에서 그 분야의 최고 기술자가 되었거나 공업사 사장이 되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착한 성품으로 보아 복 많이 받아 잘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단발머리 소녀는 나와 7년이란 세월을 만났습니다. 봄눈 녹아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방긋 웃고 여름이 가까워서야 피는 산벚꽃에 환성을 지르며 붉게 물든 가을산과 나무 위 하얀 눈꽃을 보며 기염을 토해내던 소녀 영동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던 6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소녀는 감나무 가지를 들고 걸어가다 공병대 군인 차라도 만나 운 좋게 타게 되면 감나무를 차에 그냥 놓고 내려와서는 아쉬워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대관령 굽이 진흙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주말이면 반은 차를 타고 반은 걸으면서 끈질기게 고향집을 찾아다니던 소녀의 모습은 70년대를 맞으며 뜸해졌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 “정겨운 그 이름 대관령”이 매일 메아리 쳤습니다.
그 소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년에 몇 번은 나를 찾았습니다. 정말 반갑고 정겨웠습니다. 바다에 갈 때도 친척집에 갈 때도 동문회에 참석할 때도 어른이 된 그 소녀는 나와 정겨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끌어안았습니다.
아마 어른이 된 소녀는 어른인 지금보다 옛날 그 소녀시절을 동경하듯이 지금의 확 트인 고속도로보다 굽이굽이 돌아가던 대관령 옛길을 동경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산허리 휘어감은 안개, 참나무를 칭칭 감은 다래넝쿨, 자동차가 굴렀다 하면 대형사고였던 낭떠러지, 자동차 높이보다 더 높았던 도로변 양쪽에 쌓였던 하얀 눈, 이 모두는 대관령 특유의 모습이며 재산입니다.
전설처럼 전해오던 옛이야기 한 토막, 버스가 대관령을 넘어가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남학생이 앉아있는 창문에 매달려 차가 갈 수 없자 차 안에 탔던 손님들이 의견을 모아 그 학생이 화근이라고 대관령에 혼자 내려놓고 갔는데 출발 조금 뒤 버스가 굴러 승객모두가 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새싹이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 주위에는 국사서낭당도 있어 소녀의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오기도 했고, 공군부대가 있어 씩씩한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기도 하고 더러는 인근 처녀를 꼬셔 결혼을 하기도 했답니다. 요즈음 확 트인 고속도로에는 바람이 세차서 자동차가 움직인다고 대형사고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소녀도 이 고속도로를 이용할 텐데 하루빨리 안전한 도로가 되도록 만들어 달라고 졸라보겠습니다.
40년전 순진한 그 소녀를 만났을 때처럼 난 요즘도 그런 순진한 소녀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매일 매일 해바라기를 하며 그런 소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 소녀 있으면 나에게 연락 주십시오.
정겨운 내 이름 대관령입니다. “정겨운 내 이름 대관령”을 아시나요.
(2002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