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서 목사
들어가는 말
인사이트 인터내셔널(Insight International)의 창립자이며 회장인 존 메이슨(John L. Mas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의 기억력이 가장 약하다.”(존 메이슨, 크리스천 생활백서, 65)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보다 상처를 더 많이 기억합니다. 부모 역시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때보다 아프게 했던 때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의 은혜보다 책망 받은 일만 기억합니다. 스승 역시 제자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에 흡족해하기보다 골칫거리인 몇몇 학생들 때문에 이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하는 푸념 섞인 말을 많이 합니다.
결국 무슨 뜻입니까?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사실은 불평거리보다 감사할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지만 사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감사할 것이 훨씬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평이 많을수록, 얻는 것은 더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지 못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한 시간 간격으로 하늘의 축복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목사는 “마귀는 당신을 파멸시킬 때,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갈 필요가 없다. 당신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존 메이슨, 크리스천 생활백서, 65)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의 나의 삶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아니면,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인생의 패러다임을 전환함으로써 감사를 회복하여 더 큰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론
감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1.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빛을 보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를 보고 산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렇습니다. 빛을 볼 수 있다는 것, 해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감사할 것으로 충만합니다. 물질을 많이 소유해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자동차,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해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갖춰지면 좋겠지만, 꼭 이런 것들이 갖춰있어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는 소유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형편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소유가 많든 적든, 상황이 좋든 좋지 않든, 형편이 되든 그렇지 않든, 자족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우리가 겪지 않은 고통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27절까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말해줍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먹고 살 형편이 되어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로 인해 마음 상할 일이 없어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체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체험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어도 감사할 수 있었고, 때로 다른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것이 불평거리였고 원망거리였지만, 오히려 그에게는 감사의 고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는 안목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안목만 달라집니까? 안목이 달라지니까 생각이 바뀝니다. 생각이 바뀌니까 반응이 달라집니다. 반응이 달라지니까 행동도 달라집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를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서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스물네 살부터 13년 동안 거의 침대에서 누워 지냈습니다. 또한 직장암, 파킨슨 병, 결핵이 등뼈를 이루는 뼈마디에 들어가 그의 연골을 파괴시키고 고름이 들게 하는 병인 척추카리에스 등이 계속해서 그녀의 육체를 공격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한 줄기 강렬한 빛으로 쏟아진 것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간의 원죄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쓴 작품이 신문사의 소설 공모에 당선되었습니다. 마흔 두 살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일약 일본 최고의 작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소천하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뿐이었습니다. 그 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한 후 남는 것은 ‘쌓아 놓은 공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강준민, 관계의 법칙, 415)
성도 여러분, 이것이 자족할 줄 아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 다 잃어도 신앙을 얻었다며 기뻐할 수 있는 것, 쌓아 놓는 것이 중요한 삶의 가치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임을 알게 되는 것-자족할 줄 아는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2.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무슨 뜻입니까?
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인생을 즐겁게 살아라.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언젠가는 죽음의 날이 있을 것을 기억하라. 이 세상에는 기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마냥 즐기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역경의 날이 분명 있습니다. 죽음의 날도 있습니다. 슬픈 일도 겪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문제 앞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 감사해야 합니다. 장래 일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오히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은 오히려 실패를 했어도 잘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꼭 실패를 해놓고서 원망하며 저주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받는 자는 그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언 15:15). 쉽게 말해서 이런 뜻입니다. “낯을 찡그리고 살면 세월이 괴롭고 마음이 편하면 하루하루가 잔치기분이다.” 성도 여러분, 힘들다고 하면 힘들고 괴롭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그 날 그 날이 잔치 날입니다.
어너 북스(Honor Books)사에서 출판된 책 가운데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God's Little Devotional Book for Graduates)”이라고 있습니다.
이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독일에서 전문가들은 기차가 시속 24km로 달린다면 위험해져서 승객들이 코피를 흘릴 것이고, 터널을 지날 때는 숨이 막힐 거라고 했다. 미국에서 전문가들은 기차를 도입하게 되면 사람들이 기차를 보고 공포에 질려 미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많은 정신병동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뉴욕 YWCA는 1881년에 여성들을 위한 타자 교육을 발표했다. 그러자 긴장감으로 인해 여성들의 체질이 쇠약해질 것이라는 열화 같은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배를 쇠로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전문가들은 그 배는 뜰 수 없고, 정박할 때 나무로 만든 배보다 쉽게 부서질 것이며, 배 밑바닥이 녹이 슬어 보존하기 어렵고, 쇠 때문에 나침반을 읽을 때 낭패를 겪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저지의 농부들은 쟁기가 땅에 독이 되고 잡초를 더 무성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797년에 성공적으로 발명된 쇠로 만든 쟁기를 거부했다.”(어너 북스,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 204-205)
성도 여러분, 지금 말한 것들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처음 계발될 때에는 어떠했다고요? 모두들 반대했습니다. 불평했습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기보다는 뒤로 물러서려는 자세를 가졌음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오늘날 기차가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컴퓨터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배가 쇠가 아닌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은 바로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감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한결같이 절망의 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집 근처 공원에 잠시 차를 세웁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네 꼬마들의 야구경기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루 쪽 벤치에 앉으면서 그는 1루 수비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점수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14대 0으로 지고 있어요.” 구경을 하던 사람이 묻습니다. “그래? 그런데 넌 그다지 절망적으로 보이지 않는구나?” 그러자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망적이라고요? 왜 우리가 절망적이어야 하죠? 우린 아직 한 번도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요?”
성도 여러분, 절망적이십니까?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격할 기회는 아직도 수없이 주어져 있습니다. 감사하세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늘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절 말씀.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성도 여러분, 과연 헛된 것입니까?
오히려 사람들은 어릴 때와 청년의 때를 동경합니다. 힘이 펄펄 넘쳐날 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분명할 때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다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힘이 펄펄 넘치는 때, 자신감이 늘 넘치는 때가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통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아무나 합니까? 그런데도 한 학년에 수십 명씩 대통령이 꿈이라고 합니다. 그들 모두가 대통령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차츰차츰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되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됩니다. 이 과정을 밟지 못하면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기만 알지 다른 사람을 헤아릴 줄 모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불평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되고, 넉넉지 못했던 가정형편을 생각하며 원망합니다.
성도 여러분,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6장 4절로 5절 말씀이 그 이유입니다.
“4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용사가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모두 악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의지한 나머지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었는데, 바로 그로 인해 홍수의 심판을 겪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힘이 있을 때 겸손해야 합니다. 가진 것이 많을 때 겸손해야 합니다. 지식을 쌓아가고 있을 때 겸손해야 합니다. 믿음의 깊이를 더해갈 때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함철훈 사진 작가는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휘트니 마운틴에서 몸을 낮춤으로 경험한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당한 휘트니 마운틴의 산세에 한동안이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숨을 크게 쉬며 그 산을 오르다 무심코 밟고 가는 발 밑 길바닥에 들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보니 그냥 맨땅인 줄 알았던 흙바닥에 많은 작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위풍당당한 휘트니 산도 아람다웠지만 낮고 이름 모를 들꽃들 또한 연약하고 작은 것이 갖고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강준민, 감사의 법칙, 420)
결 론
패러다임을 바꾸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족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불평합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불평불만 합니다. 성숙한 감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다고 말씀합니다. 힘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똑똑하다는 것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진실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감사할 것이 없으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패러다임을 바꾸세요. 자족함으로써, 최선을 다함으로써, 겸손하게 살아감으로써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