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8)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일서 3:16)
1.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와 군중 속의 고독 : 현대 사회의 실존적 비극
현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오늘날의 시대를 가리켜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고 명명했습니다. 과거에는 가족, 국가, 종교와 같은 견고한 연대(Solid)가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었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가치와 관계가 액체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형태를 바꾸며 증발해 버린다는 뼈아픈 통찰입니다. 이 지독한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의 시대 속에서, 인간은 타인과 깊이 결속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언제든 접속을 끊고 도망칠 수 있는 얄팍하고 가벼운 네트워크의 바다 위를 부유할 뿐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현대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촘촘하게 연결된 소셜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끔찍한 '군중 속의 고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타인은 지옥이 되었고(장 폴 사르트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철저히 '나의 유익'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나에게 효용 가치가 있는 사람과는 교류하지만, 나의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게 만드는 연약한 자들은 가차 없이 '손절'해 버리는 무자비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에로스(Eros)’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핍된 자아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생존 투쟁의 전쟁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세워 올린 바벨탑의 실체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이성과 철학적 계몽을 통해 평등하고 사랑 넘치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두 번의 세계대전과 처참한 빈부격차, 그리고 오늘날의 극단적인 혐오 사회는 인간 내면에 타인을 참되게 사랑할 능력이 철저히 파산되었음을 처절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캄캄한 절망의 한복판에, 예수 그리스도의 벼락같은 새 계명이 선포됩니다.
2. 카이노스(Kainos) :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랑의 기준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코앞에 둔 다락방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여기서 '새롭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을 뜻하는 '네오스(Neos)'가 아니라, 본질과 질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을 의미하는 **‘카이노스(Kainos)’**입니다. 왜 이 계명이 새롭습니까? 구약의 율법(레위기 19:18) 역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이 계명이 우주적이고 혁명적으로 '새로운' 이유는, 사랑의 **'기준'**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기준은 여전히 타락하고 연약한 '나(Self)'를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 자신조차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 자기 혐오와 학대에 빠지는 존재들입니다. 내 수준의 사랑으로는 결코 세상을 구원할 수 없고 참된 공동체를 세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준을 산산조각 내시며, 완전히 새로운 척도를 제시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발을 씻기신 성육신의 하강, 쓸모없고 반역하는 원수들을 위해 자신의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내신 그 십자가의 압도적인 ‘아가페(Agape)’가 이제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이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소유하려는 것이라면, 주님이 명령하신 카이노스의 사랑은 타인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철저히 나를 내어주는 자기 비움입니다. 이 새 계명은 뼈를 깎는 도덕적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윤리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사랑에 완전히 장악되어 성령의 무한한 공급과 충만을 경험한 자들만이 살아낼 수 있는 영적 기적입니다.
3. 필라델피아(Philadelphia) : 본질적 연합, 거룩한 공동체의 탄생
이러한 십자가의 맹렬한 사랑을 근거로 탄생한 전혀 새로운 인류, 세상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의 연합체가 바로 '교회(에클레시아)'입니다. 성경은 이들 안에 흐르는 거룩한 사랑을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형제 우애)’**라고 부릅니다.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 한복판에서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귀족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라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세상의 견고한 장벽들이 십자가의 보혈 아래서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육적인 가족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원한 '새 가족'이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은 이 필라델피아의 절정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독일의 고백교회 목사요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환상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고 맙니다. 그러나 냄새나고 연약한 있는 그대로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마침내 참된 공동체를 세웁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우아하고 세련된 교제를 원합니다. 상처받기 싫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주일 예배라는 종교적 서비스만 소비한 채 미련 없이 각자의 성채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필라델피아는 형제의 가난, 형제의 질병, 형제의 끔찍한 영적 침체와 죄악의 짐을 함께 어깨에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비틀거리며 함께 걸어가는 처절한 영적 연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결코 관념의 허공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곁에 있는 냄새나는 형제의 발을 닦는 수건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거룩한 재정의 흘려보냄으로, 무너진 자들을 위해 밤을 새워 눈물 흘리는 중보기도로 구체화되어야만 합니다.
4. 칼립토(Kalypto) : 율법의 칼날을 꺾고 죄를 덮는 은혜의 신비
이 이타적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무기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선포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자비한 정죄와 폭로의 시대입니다. 타인의 작은 실수와 허물이라도 발견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직성이 풀리는 잔인한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남의 죄를 짓밟고 일어서야 내가 의로워진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여기서 '덮는다'로 번역된 헬라어 **‘칼립토(Kalypto)’**는 죄를 모른 척하고 불의와 타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겉옷으로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의 뒷걸음질이며, 무엇보다 우리의 그토록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당신의 찢겨진 십자가의 피로 영원히 덮어버리신(속죄소, 시은좌)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덮으심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의 뼈아픈 허물과 실패를 보았을 때, 율법의 날 선 검을 빼어 들어 정죄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새 계명의 사람들은 정죄의 칼날을 내려놓고, 기꺼이 자신의 살을 찢어 그 형제의 수치를 덮는 은혜의 방패가 되어 줍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내 안에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자원이 유한하다면 결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메마르지 않는 하늘의 자본, 곧 창조주의 무한한 **‘공급과 충만’**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덮어주신 그 헤아릴 수 없는 은혜가 내 영혼에 충만하게 흘러넘치기에, 우리는 억울함을 감수하면서도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넉넉한 여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5. 결론 : 십자가 아래에서 파편화된 자아를 깨뜨리라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주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명백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화려한 예배당 건물이나, 세련된 설교, 혹은 완벽한 종교적 프로그램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충격을 받고 무릎을 꿇는 유일한 순간은,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자들이 서로의 짐을 지고, 배신자를 끝까지 품어 안으며, 나의 유익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그 '기적 같은 사랑의 연대'를 목격할 때입니다.
이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상처받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자기 보호의 장막을 찢으십시오. 교회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모인 요새가 아니라, 기꺼이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기로 결단한 야전 병원입니다. 내 옆에 앉은 지체의 눈물과 고통을 내 것으로 끌어안으십시오. 내 안에 갇혀 있던 성령의 생수가 형제와 자매의 영혼을 향해 거침없이 흘러갈 수 있도록, 파편화된 자아의 껍질을 십자가 아래서 완전히 깨뜨리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그 뜨거운 아가페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생생하게 박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내어줌으로 오히려 영원히 부요해지는 이 거룩하고 맹렬한 공급과 충만의 신비가, 오늘 우리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 폭풍처럼 쏟아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