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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종말/이스라엘의 구원
제 목: 다니엘의 칠십 이레
교 회: 지구촌 교회
설 교 자: 이동원 목사
본 문: 다니엘서 9장 24∼27절
논 지: 이 예언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이스라엘의 구원을 나타낸다.
설교요약: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있다.
성경에는 많은 중요한 예언들이 나옵니다만 그 중에서도 본문의 예언은 특히 중요합니다. 두 개의 기둥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는 본문을 가리켜서 “이것은 성경 예언의 등뼈가 된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기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과 종말에 관한 증언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 가운데 가
장 중요한 예언인 것입니다.
본문의 예언들은 중요한 예언이면서도 난제를 안고 있는 어려운 예언입니다. 우선 이 어려움은 본문에 나타난 칠십 이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칠십 이레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24절).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성은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입니다. 그 백성과 그 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펼치실 특별한 기간을 가리켜 본문은 칠십 이레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자면 칠십 이레는 칠십 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사실상 칠십 주간이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칠십이 일곱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이레가 “주간”이 아니라 “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490년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펼쳐지는 데 필요한 기간이라고 합니다.
490년, 즉 칠십 이레는 다시 크게 세 단계로 나뉘어집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25절).
처음 일곱 이레가 지나간 다음에는 육십이 이레가 계속되고 그 다음에 한 이레가 더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27절).
세 단계로 나뉘어진 기간을 지나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섭리와 경륜을 성취해 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칠십 이레 동안에는 여섯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24절).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을” 것입니다. “거룩한 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
니다.
이것이 여섯 가지 사건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첨가할 수 있다면 26절의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사건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합니다. 본문의 예언이 이스라엘은 물론 전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강림과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칠십 이레 동안 일어날 일들과 해석학적 문제들
본문에 접근할 때 부딪히게 되는 해석상의 난제는,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문자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학적인 이론들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칠십 이레의 기간을, 문자 그대로 490년이라는 특정한 기간으로 보기보다는 세 단계로 나누어 그 기간 동안에 세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합니다.
그들은 최초의 일곱 이레가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는 기간에 대한 상징이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25절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도심부)와 해자(도시
변두리)가 이룰 것이며”(25절).
이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한 이레를 예루살렘 성의 멸망 사건으로 취급합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
라”(26절).
여기에서 “한 왕의 백성”이란 로마를 상징합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침략을 받아 팔레스타인 땅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기록했던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들 가운데 무려 110만 명이나 죽임을 당했고 9만7천 명의 유대인들이 노예로 끌려갔으며 예루살렘 성은 주께서 예언하신 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다 무너졌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상징적 접근은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의 성경학자들이 본문을 상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접근합니다.
저도 본문의 경우 문자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좀 더 성경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24절).
여기에서 “기한을 정했다”는 그 자체가 문자적으로 특별한 햇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때 상징적 접근보다는 문자적 접근이 본문 해석에 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지 6,70년이 지나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 끝에 다니엘
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기간이 70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 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490년간의 섭리 기간을 정하셨다는
계시까지도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알고 싶어 했던 것은 포로 기간이 언제까지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후에 이루어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징계와 또 그것과 관련된 메시야의 오심과 죽으심과 역사의 종말에 관한 놀라운 사실까지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본문 해석에서 대두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난제는 “그 예언이 실현되는 시발점이 어디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25절).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예언의 출발점입니다. 이때부터 일곱 이레가 지나고 육십이 이레가 지나고 한 이레가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의견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어도 좋다고 공포한 주전 538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고레스의 칙령이 내려질 때 성전 재건의 명령은 있었지만 성을 재건하라는 명령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전 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즉 도시의 중건에 관한 것입니다.
둘째, 아닥사스다 왕 제 7년인 주전 457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에스라서 7장12절을 보면 그 배경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을 주신 일은 없었습니다.
셋째,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때가 주전 445년 혹은 444년3월말부터 4월초 사이의 어느 기간입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그때의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간을 정하고 내가 또 왕에게 이르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營門)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느 2:5-8).
느헤미야가 기회를 정확하게 잡아 기도하고 접근했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왕의 마음을 움직여 느헤미야가 그의 조국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중건할 수 있도록 허락을 내리게 합니다. 이때부터 일곱 이레, 즉 약 49년 내지 50년이 지나 느헤미야의 영도 아래 예루살렘 성이 대충 중건된 해가 주전 396년입니다.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이 다시 복구되어 완성된 이 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
한 의미를 지닙니다.
첫 일곱 이레 후 육십이 이레, 즉 434년이 지난다고 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시작해서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를 계산해 보면 주후 37년 내지는 38년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해와 약 4,5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왜 이렇게 격차가 생기는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의 달력은 그
당시만 해도 1년을 360일로 계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달력대로 계산한다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시작해서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즉 483년이 지나면 173,880일이 됩니다. 이것을 다시 365일로 계산한다면 주후 32년이나 33년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보통 A.D. 33년에 있었던 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신약학자 가운데 헤롤드 훼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육십이 이레가 지난 해가 주후 33년3월30일로 나왔습니다. 또한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입니다. 그날부터 닷새째 되던 금요일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25절).
훼너는 예수님의 탄생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종려 주일에 초점을 맞추어 그 기간을 그 시간과 일치시켜 주후 33년3월30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26절).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놀라운 예언입니다.
마지막 한 이레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것을 앞의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바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후 33년에 7을 더하면 주후 40년이 되는데 그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이 한 이레를 주후 33년으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난 때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괄호(parenthesis)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이 괄호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은 유대인을 다루신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섭리하셨다고 생각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오시고 하나님의 율법이 계시된 땅의 사람들인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채 상당 기간을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대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기억에서 망각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만큼 전한 후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흥의 기간을 주시고 그 백성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마지막 한 이레를 남겨 두신 것입
니다.
한 이레는 칠년입니다. 그 칠 년 동안 유대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고 또 그들을 둘러싼 놀라운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26절).
문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한 왕”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적그리스도는 부활한 로마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그런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경제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유럽 각국들이 어느 날 정치적인 목적으로 결속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로마 제국의 영화를 다시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어느 날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성읍과 성소를 훼파할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강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진노가 황폐케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27절).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마지막 7년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능력이 많은 한 인물에게 메시야의 소망을 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와 언약을 맺고 그를 통해서 자기들의 꿈을 성취해 보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3년 반만에 그가 결정적으로 변심하면서 그들의 제사의 권리를 빼앗을 때 비로소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가 그들의 메시야가 아니라 2천년 전에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리스도가 그들의 진정한 메시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이스라엘 민족이 중요한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질 그 시침을 향해 가고 있는 놀라운 시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께서는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