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미애의 다므기 여행(최종회)
*다므기: ‘더불어, 함께’의 옛말
선우미애
월간『한맥문학』등단. 중앙일보시조백일장, 금호문화시조백일장, 신사임당주부백일장, 새한국문학상, 동포문학상, 국제펜문학 강원펜문학번역작품상, 춘천여성문학상, 노천명문학상 수상. 춘천여성문학회 사무국장, 강원한국수필문학회·국제펜클럽 강원지부 이사. 강원문인협회, 춘천문인협회, 춘천여성문학회, 강원여성문학회, 국제펜클럽 강원지부, 강원한국수필문학회 회원. 춘천여성문학회·강원한국 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역임. 시집『자연을 닮은 그대는』『섬 같은 사람』『까닭 없이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산다는 것은』(전자 출판) 『봉선화 소녀』 anotherworld123@hanmail.net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뭉클뭉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때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르륵 눈물처럼 남아 있는 여행도 있고, 때로는
인생의 그 어디쯤에서 머물러 미소처럼 떠오르는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또한, 진정으로 남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하는 시간들도
온다. 그래서 나는 낯선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일상에서 떠나 낯선 곳으로부터 오는 적당한 객창감을 즐기는 것 또한
여행의 매력이다.
여행도 병이라 했던가? 그러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걷지도 못하고 여행을 하기에 힘에 부치지 못할 때가 있나니,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돈이 많거나 없거나 그 누구에게도 올 것이고 보면, 몸이 허락하는 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큰 행운이다.
여행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느끼게 하고 자연스럽게 감동을 주고 잃어가는 마음을 찾아가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늘 여행을 꿈꾸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나는 일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봄빛이 창살 가득 들어오는 기분이다. 잠깐의 시간들이지만 내가 여행한 곳들을 순서대로 실을 계획이다. 저절로 오는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여행지를 소개하며 그 마음 따라 함께 공유하고픈 마음에서이다.
생이 짧다는데 그 안에 있는 여행은 또한 얼마나 짧은 것이겠는가? 그 속의 일부를 보고서는 전체를 바라보고 온 듯 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단지, 우리는 산을 다 보지 않고도 산을 이야기할 수 있듯이 여행을 인생에 넣어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인생 또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희망, 춤추는 고흥
― 대자연이 빚어낸 예술 작품 속으로
나뭇가지마다 초록의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5월이다. 이 일 저 일 잡동사니에 매달려 있던 일상에서 벗어나 길을 떠났다. 강원도 춘천에서 전라남도 고흥까지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그래서 나는 간간이 휴게소에 들러 지루함을 달래곤 했다.
살아간다는 것─ 이곳에서 스치는 많은 사람들마다 제각각의 표정이 있다.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며, 어디에서 머무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길을 떠나온 것이다.
그렇게 떠난 길에서 반나절을 지나 고흥 중산일몰전망대에 도착했다. 바다위로 빛나는 햇살의 열정을 껴안고 싶었다. 천혜의 깊은 고요에 지난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하염없는 시간이었다. 석양의 거짓말 같은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누군가는 이곳에서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어스름이 깔릴 무렵, 아쉽지만 다음의 약속 장소를 위해 발길을 서둘렀다.
고흥, 중산 전망대에서
싸락싸락 몸 부비는 운명처럼
바다 갈대숲의 너른 꿈에 부풀어
들썩이는 어깨춤이 이토록 아름다웠노라고
내 젊음의 기억, 곱게 싼 어스름에
소녀의 눈물 타고 흐르는 두 볼이
붉은 그리움의 바다가 되었노라고
지금 울고 있는 사람아
노을빛에 물들어 가는 사람아
산다는 건
망중한, 묵향처럼 피어오르는 질곡의 삶
솔가지 다듬어 한 잔 술에 내리고
층층이 마음 쌓인 벗과 함께
마술을 부리듯이 신비로운 바다에서
오늘의 해넘이를 바라보는 멋이라고
지금 그리운 사람아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 더욱 그리운 사람아
고흥 시내로 들어왔다. 고흥읍사무소에 가니 반가운 기색으로 반겨주는 친정 언니와 형부, 그리고 읍장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시간을 운전하고 온 탓에 근육과 뼈마디가 욱신거렸는데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고흥에서 재배하여 만든 유자차를 마신 후, 읍사무소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거석이 세워져 있었다. 얼마 전, 이 거석에 새겨 넣을 문구를 부탁 받았었다. 그때 보냈던 문구 ‘미래의 희망 춤추는 고흥’이라는 글자가 거석에 새겨져 고흥읍사무소 마당에 자리하고 있었다.
희망이란 것은 손끝에 만져지는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통과하여 바라볼 수 있는 미래의 꿈이다. 맑은 미래의 희망을 안고 신명나게 춤을 추는 마을은 행복 그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희망 춤추는 고흥이다.
여지없이 배꼽시계가 울릴 시간에 맞추어 식당으로 갔다. 각종 해산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고흥의 하늘에 어둠이 찾아왔다. 숙소를 향해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운치 있는 길이었다. 해안을 따라 가면서 무게 없이 흘러 보낸 시간들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내가 머문 곳은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해양낚시공원 안에 있는 펜션이다. 드넓은 하늘을 담고 있는 바다는 하르르, 별빛이 내려와 황홀경에 빠진 듯 춤을 추고 있었다. 달빛과 별빛을 경계로 하고 있는 이 마을은 여느 곳과는 다르게 소박하고 정겨웠다. 문득 인생을 한 편의 시(詩)로 여겼던 중국의 문필가 임어당이 생각났다. 인간의 삶에는 목적이나 의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는 아침과 저녁으로 오가는 하루의 일상을 대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았다. 오늘 같은 밤, 자꾸만 그가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대자연의 밤바다에 흠뻑 매료된 탓일 것이다.
황토로 된 방에서 짐을 풀었다. 노곤함이 몰려왔다. 밤하늘의 어둠을 이불 삼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깊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이다. 어젯밤 걷고 싶던 다리가 떠올라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왔다. 바다를 향해 곧게 뻗어 있던 다리 위를 걷고 싶었다. 새벽 공기와 미묘하게 섞인 바다 냄새가 신선하게 뇌를 자극했다. 쇳덩이처럼 차갑고 무겁던 마음이 바다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침 해가 퍼질 무렵이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주인아저씨가 배를 태워주겠다고 하셨다. 평소에 나는 배를 무척 무서워하는데 그날은 덥석 배에 올랐다. 이건 여행에서 오는 덤인지라 놓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엔진 소리를 내며 배는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도의 섬 끝을 향해 갔다. 자연은 인간의 삶에 대해 엄살도 부릴 수 없을 만큼 그대로의 정직한 모습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10시에 소록도에 가기 위한 일정이 있어 서둘러 배를 돌려 나와야 했다.
거금도 해상 펜션에서 15분 정도 차를 타고 나오니 소록도가 보였다. 어린 사슴의 모양을 하고 있어 ‘소록도’라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이곳에 국립소록도병원이 개원된 것은 1916년이다. 어느덧 99주년이 되어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했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소록도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나라를 빼앗은 일제 아래에서 수만 가지 파란과 격동의 세월을 보내온 이곳은 하늘마저 짙은 그늘을 뒤집어쓴 듯 표정이 없다.
병원장님의 배려로 소록도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나라 없는 설움으로 비운을 겪은 환자들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아팠다. 붉은 적막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로 시작하여 잔혹하게 휘도는 병실이 그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이 섬에 강제 수용되어 치료를 위한 약조차 먹지 못하며 비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일본인들은 한센병이 전염병이라는 잘못된 이유로 가족과 강제로 격리해 노동을 시켰다. 그들의 눈물로 쌓아올린 벽돌에서 애잔함의 감촉이 아렸다. 그날따라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이 이들의 못다 푼 한을 말해주는 듯했다.
소록도는 바다와 함께 이루어져 섬 전체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고통의 할큄이 있었으니 소록도는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눈물의 섬이다.
소록도
살이 썩는 아픔보다
손가락 마디마디 잘려가는 아픔보다
마음 문드러지는 고통을 견뎌온
굽이굽이 아린 인생길
칠흑 같은 어둠을 휘감아 돌고 나니
외로움이 끔찍하게 달라붙어 목을 조인다
파르르 몸을 떨며 날아가는 고단한 나비
지나는 바람에도 마음 조아리니
아픔 서린 작은 섬 하나, 어린 사슴의 눈망울이다
소금기에 절여진 슬픈 역사의 기억과
물리고 뜯겨온 아슴한 세월을
하늘도 바다도 알 수 없다
반쯤 눈을 뜨고
올망졸망 하늘을 보니
별의 파편이 된 사내가 울먹인다
그 가냘픈 영혼
한 입 베어든 초승달이 외롭다
소록도 섬을 나왔다.
한참을 지나다보니 전망대 아래로 다랑이 논이 한눈에 들어왔다. 농사짓는 땅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 산비탈을 깎아 논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숲속에 오솔길이 생겼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고흥은 가는 곳곳마다 대자연이 빚은 예술작품이었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춘천으로 오는 길 내내 고흥의 정취가 아른거려 언제든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겹겹이 아름다움을 껴입은 곳을 만나기도 한다. 그중 한 곳이 고흥이다. 이번 여행의 울림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첫댓글 멋진 여행이었네요. 정말 여행 만큼 좋은 공부는 없는 것 같아요. <춤추는 고흥> 너무 좋습니다. 시인도 매일 춤추세요^^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