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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의 특급 비밀
박경선 http://cafe.daum.net/packgungsun
쟈니의 시장 구경
“야, 봄방학이다!”
쟈니가 봄방학을 맞았다. 쟈니 엄마도 영어학원 강사 일을 며칠 쉬게 되어 날을 잡았다. 엄마 어릴 때 엄마를 키워주신 양할머니가 경북 성곡마을로 이사 가셨다는 말에 뵈러가려고 쟈니와 엄마가 집을 나섰다. 대구에서 영주 가는 기차를 타고 영주역에서 내렸다. 성곡 들어가는 막차가 30분 뒤에나 온다고 했다.
“할머니 혼자 이사했으니 반찬통 같은 게 많이 필요할 거야. 재래시장 한 번 돌아보자.”
엄마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시장 안을 한 번 돌아볼 참인 모양이었다. 앞장서 걷던 엄마가 쟈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쟈니야, 급하게 돌아다닐 텐데 엄마 뒤를 꼭 따라다녀야 한다아. 엄마 놓치지 말고... .”엄마는 특별히 쟈니에게 다짐을 하면서 그릇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쟈니도 엄마 따라 그릇가게로 들어서려다가 건너편에서 고운 풍선이 온몸을 흔들며 아이들을 부르는 걸 보았다.
“나, 예쁘지?”
“난 날 수 있는 풍선이야.”
“나도!”
그래서 쟈니도 건너편으로 건너가 보았다. 개구쟁이처럼 생긴 꼬맹이가 엄마 손을 잡고 오더니 하얀 동전 하나를 아저씨께 넘기고 풍선을 데려갔다. 쟈니는 꼬맹이를 졸졸 따라가는 풍선 한 번, 풍선장수 아저씨 자전거에 달린 풍선 한 번, 번갈아가며 구경을 하였다. ‘날도 어둑어둑해오는데 아직 풍선을 못다 팔았네. 어쩌지?’ 쟈니는 아저씨가 걱정되어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대머리에 겨우 남은 머리카락 몇 올을 손가락에 걸어 뒤로 넘기던 풍선장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쟈니는 아저씨를 걱정하던 마음이 들킬까봐 씨익 웃었다. 풍선장수 아저씨는 쟈니 코 앞에 풍선을 디밀었다.
“공짜다. 하나 해라. 맘에 드는 걸로 골라라!”
쟈니는 얼떨결에 하얀 풍선을 잡았다.
“야, 깜짝이야. 난 하얀색이라 까만 손이 잡으면 보기 싫을 텐데?”
하얀 풍선이 몸을 살짝 비키며 말했다. 노란 풍선 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쳤다.
“야, 깜짝이야. 난 노란색이라 까만 손이 잡으면 보기 싫을 텐데?”
노란 풍선이 몸을 살짝 비키며 말했다. 빨간 풍선쪽으로 다가갔다.
“야, 깜짝이야. 난 빨간색이라 까만 손이 잡으면 보기 싫을 텐데?”
쟈니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뒤로 돌아섰다. 저만치 사라져가는 엄마 뒷모습을 찾아 뛰었다. 엄마는 가다가 신발가게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마 내 신발을 사주려나 보지.’ 쟈니는 신발도 좋지만 신발가게 옆에 붙어있는 옷가게 옷에도 눈이 끌렸다. 옷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돌아보았다. ‘이 바지를 사 달라 할까? 아니, 아니 난 멜빵바지가 좋은데... .’ 쟈니가 이것저것 돌아보다가 엄마 생각에 얼른 신발가게로 갔다. 그런데 엄마가 안 보였다. 엄마랑 비슷한 보라색 셔츠를 입은 아주머니가 저네 아이 발에 신발을 신겨보고 계셨다. ‘헉, 우리 엄마는 어디 갔지?’ 쟈니는 겁이 더럭 났다. 엄마가 혹시 쟈니 옷을 사주러 옷가게에 들어갔나 싶어 옷가게로 다시 가봤다. 아까 봐둔 옷 사이로 이리 저리 다니며 엄마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엄마가 안 보였다. ‘엄마 손전화 번호가? 참 새걸로 바꾸어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했지. 뭐라더라? 010 하고... .’ 쟈니는 시장통을 몇 번이나 오가며 돌아봐도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엄마 손전화 번호도 생각 안 나고 울먹울먹하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해는 점점 어둑어둑해지는데...... 쟈니는 시장통의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야야, 날이 어둑어둑한데 거기 앉아 있으니 니가 새까매보이는구나. 그래, 와 울고 있노?”
머리가 하얀 호호백발 할머니가 다가오며 물었다. 쟈니는 훌쩍거리며 대충 이야기를 했다.
“그러이, 엄마랑 성곡 막차 기다리는 동안 시장 왔다가 엄마를 잃어버린 기라 이 말이제?”
그 말에 쟈니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할머니가 자꾸 물어서, 쟈니는 손전화나 차비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것, 처음 찾아가는 양할머니 집이라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른다는 것, 쟈니 엄마 손전화도 새로 바꾸어 미처 전화번호도 모른다는 것까지 말했다. 호호할머니 말로는 성곡 들어가는 막차도 벌써 들어가 버렸을 시간이라 하셨다.
“야야, 이 일을 우야꼬!”
호호할머니는 자기 손주 일인 양 옆에 앉아 한숨을 쉬더니 쟈니 손을 잡아끌고 앞장을 섰다.
“야야, 가자. 내가 찾아 주꾸마.”
호호할머니가 쟈니를 데리고 간 곳은 사거리 통에 있는 파출소였다. 할머니가 가시자 파출소에 있던 두 경찰 아저씨도 쟈니에게 이름부터 사는 집까지 꼬치꼬치 물었지만 도와줄 방법을 잘 몰랐다.
“그래, 찾아갈 할머니 집 주소나 전화번호도 모르고 너네 집은 대구인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고? 김 순경, 아직까지 실종 신고 들어온 것 없지?”
한참이 지나자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경찰 아저씨가 훌쩍거리는 쟈니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쩔래? 오늘은 늦어서 더 이상 연락을 못해보겠고... 오늘 우리 집 가서 자고 내일 찾아보자. 꼭 찾아줄게.”
쟈니는 싫다고 했지만 ‘혼자 파출소 의자에서 잘래?’ 묻는 바람에 무서울 것 같아 일어섰다.
“소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오늘 꼬마손님이 있어서 수고 많으시겠습니다.”
파출소에 같이 있던 경찰이 내다보며 배웅해주는 말이 쟈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염치없이 파출소 소장아저씨 댁으로 따라가기 위해 아저씨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탔다.
2. 쟈니의 꿈
“야, 아빠다!”
외딴집 파란 지붕 밑에 파란 대문을 밀고 들어가자 두 남자아이가 뛰쳐 나왔다. 소장 아저씨 뒤에 서 있는 쟈니를 보자 쟈니보다 작아 보이는 아이가 소리쳤다.
“아빠, 깜상 얘는 누구에요?”
그러자 소장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소리를 냅다 질렀다.
“무슨 말투냐? 얘 이름은 쟈니다.”
“쟈니구나. 그래. 쟈니 쟤가 왜 따라 왔어요?”
이번에는 쟈니보다 두세 살 많아 보이는 큰 아이가 나서 물었다.
“엄마 따라 시장 왔다가 엄마를 잃어버렸어. 내일 찾아주려고 데려 온 거야.”
쟈니는 두 아이의 눈총을 받으며 아저씨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저씨가 쌀을 퍼내어 바가지에 담더니 씻고 전기밥솥에 앉히자 작은 아이는 상에 수저를 놓고, 큰 아이는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어 상에 놓았다.
“열이야, 저기 싱크대 서랍에서 쟈니 숟갈 하나 꺼내야지. 광이는 의자 꺼내오고.”
그러자 작은 아이 열이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어오고 큰 아이 광이가 의자를 가져와 쟈니 앞에 디밀었다. ‘소장 아저씨가 열이, 광이 아빠구나!’ 쟈니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으며 거울 속에서 울상인 아이를 만났다. ‘울면 안 돼. 어쩌면 밤에라도 엄마가 데리러 올 거야. 흠!’ 쟈니는 이를 악물고 손을 씻고 나와 식탁 의자에 앉았다. 열이 아빠는 쟈니가 어색할까봐 싶어 말을 걸었다.
“쟈니는 4학년이랬지? 몇 살이야?”
“열살입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열이는 일곱 살이니 쟈니에게 형이라 하고, 광이는 6학년이니 쟈니가 형이라 해라.”
“예!”
한꺼번에 대답하는 바람에 모두가 킬킬거리며 크게 웃게 되었다. 웃음 덕에 어색함이 약간 덜해졌다.
“쟈니야, 우리 집에는 여자가 없어. 남자들이 부엌일을 더 잘 하거든. 자, 밥 먹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며 열이 아빠와 아이들이 성호를 그었다. 쟈니도 따라서 성호를 그었다.
“은혜로이 주신 이 음식과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기도를 올린 남자들이 수저를 들었다.
“너도 성당 다니냐?”
열이 아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예, 안셀모입니다.”
쟈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이가 벌떡 일어나 쟈니 목을 끌어안았다.
“뭐? 나도 안셀모야.”
얼떨결에 열이에게 껴안긴 쟈니는 마음이 좀 편해졌다. 깍두기 김치와 멸치볶음과 된장국으로 세 남자가 맛있게 저녁을 먹고 쟈니만 조심스럽게 숟가락질을 했다. 쟈니가 수저를 놓자마자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너, 대구 어느 성당에 다니냐?”
“대곡 성당입니다.”
“너네 부모도 성당 다니시나. 본명이 뭐냐. 그리고 어디 다니시냐?”
“엄마는 젬마요. 아빠는...”
쟈니가 머뭇거리자 아저씨는 쟈니가 말하기 거북한 비밀이 있나싶어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 내일 성당으로 연락하면 너네 엄마 전화번호 금방 알겠다. 안심하고 오늘은 열이랑 광이랑 자거라. 그리고 오늘 설거지 누가 할래. 가위바위보로 정할까?”
아저씨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열이가 쪼르르 설거지통으로 가서 발판을 딛고 오르며 형을 돌아본다.
“오늘은 제가 할게요. 형은 쟈니 형이랑 놀아줘.”
“어쮸! 그래.”
쟈니가 광이 형을 따라 방에 들어서니 가족사진이 책상위에 놓여 있다. 엄마, 아빠, 남자 아이가 나란히 웃고 있다.
“우리 엄마야. 예쁘지? 내 동생 낳다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이 사진엔 광이 형만 있구나.’ 생각하는데 광이가 쟈니 생각을 눈치 챈 듯 설명을 해댔다.
“열이 태어나기 전 사진이라... .”
살짝 귀에 대고 속삭이는 광이 형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광이 형이 책장으로 끌고 가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 책들은 내 것! 저 장난감들은 열이 거야.”
책장에 책이 많았다. 쟈니도 책을 많이 본다.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놀이터에 나가면 짓궂은 아이들이 ‘깜둥이, 깜상!”이라고 놀리기 때문에 책과 친구 하는 게 편해서이다. 쟈니는 물려고 달려드는 개도 무섭지만 놀리는 얘들이 개보다 더 무서웠다. 쟈니가 책장의 책이름을 쭈욱 훑어보았다. ‘톰할아버지의 오두막’ 이라는 책이름에 자꾸 눈이 갔다. ‘내가 감동 받은 저 책을 광이 형도 읽었을까. 느낌이 어땠을까?’ 물어보고 싶지만 침을 꿀꺽 삼켰다.
“쟈니 형! 우리 형 세례명 알아? 알퐁소야. 거꾸로 해 봐.”
어느새 설거지를 끝내고 들어온 열이가 쟈니 옆에 와서 찰싹 달라붙었다.
“거꾸로? 소, 풍, 알!”
“그래, 내 세례명은 소붕알이다. 재밌지?”
광이 형이 열이를 째려보며 말한다.
“아, 그래서 거꾸로 해보라고 했구나.”
쟈니가 허허 웃자 열이와 광이 형도 따라 웃었다. 그러고 보니 쟈니는 아까 자기 더러 깜상이라고 부르던 열이가 밉지 않다. 열이는 우스운 말을 잘하고 성격이 밝아 보였다.
“저 촉새! 장난 받아주지 마. 장난 엄청 좋아해서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몰라.”
광이 형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열이가 형의 목 뒤쪽에서 두손으로 목을 감싸며 매달렸다.
“형! 내가 설거지 했으니 나랑 놀아줘.”
열이를 광이가 뜯어내어 저만치 던져버리자 다시 다가와서 형의 목에 매달리며 졸랐다. 쟈니가 보니까 열이는 남의 목에 매달리는 버릇이 있는 얘 같았다.
“너네들 내 재미있는 책 보여줄게.”
광이 형이 열이를 목에서 떼어내며 책장 쪽으로 갔다. 그러자 열이가 쟈니 목 뒤쪽에서 두 손으로 목을 감싸며 매달렸다. 역시 열이는 남의 목에 매달리는 버릇이 있는 얘가 맞았다.
“쟈니 형! 저쪽 장난감쪽으로 가자. 내가 재미있는 오토바이 구경 시켜 줄게.”
그 바람에 쟈니는 뒷목이 잡힌 채 장난감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열이는 하나하나 꺼내어 만져보라며 선심을 썼다. 그리고 이것저것 작동법에 대해 설명 해대느라 신이 한껏 났다. 쟈니도 기분이 점점 편안해져갔다.
“쟈니형! 이 중에 딱 한 개만 줄게. 어느 것 가질래?”
그 말에 광이형이 돌아보며 놀렸다.
“쟈니! 너 엄청 잘 보였다. 저 녀석 이때껏 말이야. 자기 것 누구 하나 주는 걸 못 봤어.“
쟈니가 그 말을 들으니 열이랑 더 친해진 기분이었다. 열이가 눈을 찡긋하며 혀를 쏘옥 내밀었다. 진심을 들켜버린 기분을 얼버무리는 얼굴 표정으로 보였다. 쟈니도 덩달아 눈을 찡긋하며 혀를 쏘옥 내밀어 그대로 따라했다. ‘고맙다’는 뜻이었다. 형은 책을 보도 열이와 쟈니는 장난감을 가지고 한참을 놀았다.
“일찍 자자. 내일 쟈니. 엄마 찾아야지!”
광이 현이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펴더니 쟈니에게 베개를 던져주었다. 쟈니가 광이 형 옆 가장자리에 누으려는데 열이가 가장자리로 가며 쟈니를 가운데 누우라고 했다.
“우리 둘다 쟈니 형이랑 자고 싶으니까 쟈니 형이 가운데 누워야 공평한 거야.”
그 말에 광이 형도 머리를 끄덕였다.
“촉새야, 자기 전에 아까 쟈니에게 잘못 한 말 사과해.”
그 말에 열이가 순순히 일어나 앉으며 쟈니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쟈니 형, 내가 촉새라서 미안해! 내 친구 깜상때문에 입에 붙어서 그랬어.”
“내가 설명 할게. 너같이 생긴 얘가 있어. 저 녀석 친군데 엄청 친해서 늘 붙어 다녀. 그래서 그 친구 본듯 반가워서 그랬을 거야. 맞냐?”
형의 말에 열이가 손뼉을 쳐대었다.
“형! 바로 그 말이야. 내 말이.... .”
쟈니는 열이의 진심이 느껴졌다. 광이 형이 표현력 서툰 동생을 잘 챙겨주는 마음도 느껴졌다.
“괜찮아. 그런 소리 많이 듣는 걸. 뭘!”
그렇게 말하면서도 쟈니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열이와 광이 형은 뭐라고 위로해줘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광이 형이 일어나 앉으며 손전화기에서 뭔가를 검색하더니 음악을 틀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쟈니가 즐겨듣던 노래였다.
“형, 나 알아. ‘거위의 꿈’ 맞지? 나, 이 노래 무지 좋아하는데... .”
쟈니가 일어나 앉으며 반색을 하자 열이도 일어나 앉아 들었다.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했죠. 참을 수 있었죠.~”
이 노래 가사에서 쟈니가 울컥했다. 아이들이 깜상이라고 놀릴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잘 참아왔는데...
“~그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쟈니는 알았다. 다섯 살 때였던가? 아이들이 깜상이라고 놀려서 화장실 문 잠그고 종일, 때 미는 수건으로 팔 껍질을 벗겨 본 적이 있다. 그래도 껍질만 벗겨지고 속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하얀 색 살갗을 만들고 싶은 게 꿈이었는데 시리고 아프기만 했다.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광이 형이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다가 말했다.
“쟈니야, 이 노래 부른 가수, 인순이 아줌마가 몸짱대회에 도전한 것 아냐?”
쟈니가 고개를 흔들자 광이 형이 이야기 해주었다. 사람들은 건강해 보이려고 일부러 살갗을 태우며 애쓰는데 인순이 아줌마는 자연미로 일등했다는 이야기였다.
“햐! 인순이 아줌마는 공짜로 일등 한 거네? 하하!”
열이가 신난다며 손뼉을 치며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쟤는 공짜 무지 좋아해.”
쟈니 눈에는 그런 열이가 귀엽기만 했다. 엄마가 없는데도 기죽지 않고 명랑하니 참 보기가 좋았다. ‘나도 내일 엄마 찾을 수 있어. 힘 내자!’ 쟈니도 열이 따라 일부러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나도 공짜 좋아해!”
쟈니가 열이를 따라 돌자 광이 형도 ‘하긴 나도!’하며 한 바퀴 돌아앉았다. 하지만 인순이 아줌마나 오바마 대통령이 눈총을 피해가며 얼마나 많이 노력해서 성공했는지에 대해 광이 형이 알기 쉬운 이야기를 몇 마디 해주더니 쟈니에게 물었다.
“쟈니, 너 꿈은 뭐냐?”
뜻밖의 질문에 쟈니가 당황하며 형에게 대답을 넘겼다.
“형 꿈은 뭐야? 형이 먼저 말해봐.”
“내 꿈은 작곡가야. 지금은 음악 듣기를 좋아하지만... ”
이번에는 쟈니가 대답할 차례였다. 얼버무려 넘어갈 수가 없었다.
“형, 내꿈은 비밀이야!”
이렇게 말하고 나니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그래서 쟈니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형한테만 말할 게. 어릴 때 꿈은 내 살색 하얗게 만드는 게 꿈이었어. 흰 우유 많이 먹으면 하얗게 될 줄 알고 우유를 너무 먹어 배탈이 나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어.”
“형, 그게 비밀이야?”
열이가 대수롭잖다는 듯이 끼여들었다.
“내겐 비밀이야. 이건 더 나쁜 비밀인데... 날 깜상이라고 놀리는 얘들에게 초콜렛 우유를 엄청 많이 사줬어. 그 우유 먹고 저네들도 깜둥이 되어 보라고.”
“햐! 나도 초콜렛 우유 좋아하는데...”
열이는 군침을 삼켰고 광이 형은 ‘우윳값만 날렸구나?’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문득, 쟈니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손전화기에서 음악을 찾았다.
“너 바람의 빛깔 노래 아냐?”
쟈니는 ‘바람도 빛깔이 있냐?’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광이 형이 오연준 아이의 노래라며 들려주었다.
“사람들만이 생각할 수 있다/그렇게 말하지는 마세요/나무와 바위 작은 새들조차/세상을 느낄 수가 있어요/자기와 다른 모습 가졌다고/무시하려고 하지 말아요/그대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요/달을 보고 우는 늑대 울음소리는/뭘 말하려는 건지 아나요
그 한적 깊은 산속 숲소리와/바람의 빛깔이 뭔지 아나요/바람의 아름다운 저 빛깔을/얼마나 크게 될지 나무를 베면/알 수가 없죠/서로 다른 피부색을 지녔다 해도/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죠/바람이 보여주는 빛을 볼 수 있는/바로 그런 눈이 필요한 거죠/아름다운 빛의 세상을 함께 본다면/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쟈니는 왠지 눈물이 났다. 오연준 아이의 목소리가 햇살처럼 쟈니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 했다. 가사도 쟈니를 위로해주는 가사인 것 같았다. 광이 형은 쟈니의 등을 도닥거려 주며 말했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네 꿈 이야기 들려줘.”
“형, 이 노래 너무너무 좋아. 나 이 노래 배우고 싶어. 내 잠들 때까지 계속 들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형은 ‘바람의 빛깔’노래를 계속 듣도록 반복을 눌러 손전화기를 쟈니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세 아이는 이 노래를 처음에는 색색하게 들었는데 밤이 깊어지자 차차 꿈나라로 끌려갔다.
3. 눈속의 흰 돼지
쟈니는 제주도 ‘흑돼지구경하는 집’에서 머리를 두 갈래로 쫑쫑 땋은 계집아이를 만났다. 계집아이가 흑돼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맛있는 흑돼지에요?”
“저건 맛있는 흑돼지가 아니고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귀한 흑돼지야.”
그 바람에 쟈니가 신이 났다. 어느새 쟈니 온몸이 검은 털이 박힌 흑돼지로 변해있었다. 다리도 네 개이고 엉덩이에 꼬리도 생겨나 돌돌 말려 있다. 귀도 돼지 귀에, 코도 두 구멍이 동그랗게 뜷린 들창코 돼지가 되어 있다. 그리고 둘레에는 검은 돌, 구멍 뻥뻥 뚫린 못난이 돌들이 빙 둘러쳐져 있다.
“피이! 흑돼지를 왜 보호해요?”
계집아이가 엄마를 돌아보며 묻자 엄마가 대수롭잖게 대답해준다.
“흑돼지 수가 점점 줄어드니까 보호하는 거지.”
그때 한 떼의 남자 얘들이 몰려오더니 쟈니를 보고 손가락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깜둥아, 으이, 깜상!”
쟈니는 흑돼지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사람 소리로 말할 수는 없지만 돼지 말로 꿀꿀거렸다.
“야, 너네들 보고 백인이나 흑인이 ‘노란둥이야, 황색아’하고 놀리면 기분 좋겠냐. 응? 꿀꿀!”
그래도 남자 애들은 우리에 갇힌 흑돼지들을 보고
“깜둥아 꿀꿀!”
“깜상아, 꿀꿀!”
하며 놀려대는데 재미를 부쳤는지 나중에는 합창을 해대었다. 쟈니가 화가 나 씩씩거리자 어느새 열이와 광이 형이 옆에 와 선다. 쟈니가 돌아보니 열이와 광이 형 몸도 차차 검은 털이 박힌 흑돼지로 변해갔다.
“열이야 멋져. 광이 형도 멋져!”
쟈니가 감탄을 하며 찬찬히 뜯어보니 열이 다리도 광이 형 다리도 네 개로 변해있고 엉덩이에 꼬리도 생겨나 돌돌 말려 있다. 귀도 돼지 귀에, 코도 두 구멍이 동그랗게 뜷린 들창코 돼지가 되어 있다. 쟈니와 열이와 광이 형 둘레는 검은 돌, 구멍 뻥뻥 뚫린 못난이 돌들이 빙 둘러쳐져 있다. 그 돌우리에 갇혀 열이가 소리 쳤다.
“야, 이 바보들아! 흑돼지는 값나가는 천연기념물이야. 너네가 천연기념물이 뭔지 알기나 하냐? 난 아는데!”
열이가 이렇게 소리쳤지만 남자 얘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고
“흑돼지들이라서 그런가? 엥가이 시끄럽게 꿀꿀 거리네.”
했다.
“뭐라고? 너네들 인순이 아줌마가 몸짱 대회에서 일등 한 것 아냐? 다른 사람들은 일부러 살갗 태우느라 애 쓰지만 인순이 아줌마는 자연미로 일등한 것 알아? 공짜로 일등 한 것!”
쟈니는 열이가 꿀꿀거리며 내 지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우습기만 했다.
“저 녀석, 광이 형이 한 소리 그대로 따라하네.”
“내 동생, 앵무새야. 몰랐냐?”
광이 형이 동생 열이를 앵무새라 하자마자 열이는 앵무새로 변해 쟈니 말도 따라했다.
“흰 우유 먹으면 하얀 몸 되고, 초콜렛 우유 먹으면 까만 몸 되면 좋겠지. 좋겠지?”
목청 터져라 외쳐대는데 하늘에서 흰 눈발이 펑펑 날렸다. 그래서 까만 돼지우리에 갇힌 쟈니와 열이와 광이 형도 하얀 눈에 덮혀 하얀 몸으로 변해버렸다. 물론 돼지우리 밖에서 놀려대던 아이들도 눈으로 덮혀 노란 몸이 하얀 몸으로 변해버렸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자꾸 자꾸 뿌려줍니다. 꿀꿀!”
노란 돼지, 까만 돼지들이 모두 눈속을 뒹글며 하얀 돼지로 변해갔다. 눈 노래도 재미있고 눈위에 뒹굴기도 재미있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와서야 걸어 다닐 수가 있어야지.”
어디서 나타났는지 눈 치우는 차가 와서 서더니 노란돼지, 까만 돼지들을 눈차에 싣고 가려고 삽질을 해대었다.
“난, 눈이 아니야. 난 노란 돼지야.”
노란 아이들이 몸을 흔들어 눈을 털어내더니 달아났다.
“난, 눈이 아니야. 난 까만 돼지야.”
까만 쟈니도 몸을 흔들어 눈을 털어내며 달아났다. 파란 바람이 쟈니 뒤를 따라왔다. 귀에 익은 노래소리도 따라왔다.
“바람의 빛깔이 뭔지 아나요/바람의 아름다운 저 빛깔을/얼마나 크게 될지 나무를 베면/알 수가 없죠/서로 다른 피부색을 지녔다 해도/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죠/바람이 보여주는 빛을 볼 수 있는/바로 그런 눈이 필요한 거죠/아름다운 빛의 세상을 함께 본다면/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어요.”
4. 봄눈 온 날 아침
“야 쟈니 형, 일어나!”
누가 쟈니의 어깨를 흗들어댔다. 쟈니가 눈을 뜨니 햇살이 창문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떡 일어났다. 옆에 엄마가 없었다. 아니 어젯밤에 함께 잔 광이 형도 없었다.
“우리 아빠하고 형아하고 먼저 밥 먹고 갔어. 밥 먹고 내가 아빠 파출소에 데려다 줄게. 그러면 쟈니 형 집 찾을 수 있데.”
쟈니를 들여다보고 열심히 설명하며 쟈니를 안심시키려는 열이 마음이 읽혀져 고마웠다. 쟈니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왔다. 그사이에 열이는 밥상을 차려 쟈니 앞에 디밀었다. 둘이 밥을 먹으며 쟈니가 어젯밤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럼, 간밤에 우리가 흑돼지가 된 거야? 그래서 지금 돼지 냄새나는 거야? 흠흠!”
열이는 쟈니의 윗옷 소매를 잡아 당겨 냄새를 맞는 시늉을 해대었다. 그리고는 한 수 더 뜨느라 목을 만지며 능청을 떨었다.
“어젯밤에 엄청 꿀꿀거렸더니 목이 다 쉬었네. 헤헤!”
흑돼지 이야기를 하면서 두 흑돼지는 밥 한 공기를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내가 설거지 할게.”
열이가 책가방을 챙긴다며 방으로 들어가자 쟈니는 수월하게 설거지를 했다. 늘 집에서 설거지를 맡아 한 덕이다. 설거지라야 밥그릇 두 개와 숟가락 두 개와 젓가락 네 짝! 먹다 남은 김치와 된장국은 뚜껑 닫아 냉장고에 넣고 행주를 찾아서 식탁을 닦고, 물에 씻은 행주는 꼬옥 짜서 싱크대에 걸었다. 돌아보니 쟈니 집 부엌처럼 정겹다. ‘하룻밤 잤다고 정이 들었나 봐!’ 쟈니가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양치질을 하는데 열이가 소리쳤다.
“야, 눈이다!”
“눈? 아직도 꿈속인가?”
쟈니도 나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꿈속처럼 푹푹 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봄나비처럼 폴폴 날리는 눈이 내렸다.
“형, 깜상이라고 놀린 그 아이들 엄청 밉지? 나도 깜상이라고 놀려서... .”
그 말에 쟈니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뭐, 친해지면 다 괜찮아. 미움도 눈 녹듯 다 녹아버려!”
하며 쟈니는 열이와 어제 저녁에 들은 노래를 생각나는 대로 흥얼거리며 걸었다.
“바람이 보여주는 빛을 볼 수 있는/바로 그런 눈이 필요한 거죠/아름다운 빛의 세상을 함께 본다면/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눈이 폴폴 휘날리는 길을 걸어 두 아이는 열이 아빠 파출소에 들어섰다.
“쟈니야!”
아저씨 앞 의자에 앉아있던 아빠가 달려 나와 쟈니를 얼싸 안으며 맞았다.
“아빠!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이 녀석아, 네 엄마가 전화로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어. 너를 누가 유괴해 갔다고. 그래서 밤새 차를 몰고 왔어. 도대체 어쩌다 엄마를 놓친 거냐?”
경기도 미군 부대에 다니는 아빠가 까만 얼굴에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다니러 오는 아빠라도 아빠의 새까만 얼굴을 보면 정이 떨어졌다. ‘엄마는 황인종인데 왜 하필 내가 아빠를 닮아서...’하는 생각이 들어서 피하고 싶어했다. 아빠는 모른다. 쟈니가 아빠 살색 닮은 껍질을 벗긴 일도 모르고, 아빠 살색이 싫어 하얀 우유를 많이 먹어 배탈이 난 일도 모른다. 그토록 싫어했던 아빠가 장장 네 시간을 차를 몰고 달려오시다니.
‘세상 아빠들은 자기 아들이 아빠를 싫어하는데도 자기 아들을 사랑하시네!’
쟈니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빠를 바라보았다.
“다행입니다. 우리는 대구 대곡성당에 전화 걸어서 연락처를 알아보고 연락드리려던 참이었는데요. 이렇게 새벽같이 와주셔 만나니 참 반갑네요.”
“소장님, 고맙습니다. 우리 쟈니를 찾아주셔서”
쟈니의 아빠가 군인답게 열이 아빠에게 거수경례를 척 붙였다.
“아닙니다. 우리 집 두 녀석이 모처럼 친구가 생겨 좋았던 모양입니다.”
“예, 정말 고맙습니다. 댁의 사모님께도 감사하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우리 쟈니를 밥 해 먹이고 재워주고 이렇게 탈 없이 돌려주시니...... .”
쟈니 아빠의 인사말에 열이 아빠는 ‘예, 뭐!’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촉새 열이도 벙글거리던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쟈니는 아빠가 몰고 온 까만 짚차에 타면서 열이와 열이 아빠를 보며 눈을 깜빡하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에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절을 했다. 열이와 열이 아빠도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늘도 쟈니 아빠는 모른다. 하룻밤 사이에 친해진 이 세 사람만 아는 비밀이 또 하나 있다는 걸. 그리고 쟈니 마음속에 생긴 -‘나도 어른이 되면 자기 자식을 무조건 사랑해주는 멋진 아빠가 되어야지!’- 또 하나의 비밀이 생겼다는 사실을. (18. 5. 4. 금) 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