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구 주안2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인천기계공고 2017년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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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기계공고의 시작은 알다시피 1940년에 개교한 인천공립직업학교이다.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인천에 있었던 중등 교육기관은 남녀 합해 6개교였다.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공립상업학교와 인천여고의 전신인 인천공립고등여학교, 제물포고의 전신인 인천공립중학교와 박문여고의 전신인 인천소화고등여학교가 있었다. 동산고의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와 마지막으로 인천기계공고의 전신인 인천공립직업학교가 있었다. 나머지 5개의 학교가 해방 이후 인문계 위주로 교육과정을 편성한 것과는 달리 인천공립직업학교는 실업계 학교로서 꾸준히 기능인을 양성하며 지역과 사회에 수많은 일꾼들을 배출해 왔다.
1976년 기술인력 양성 위해 전국 네 번째 특수목적고로 지정 인천은 지리적으로 서울에 가깝고 항구를 통하여 원료의 수출입이 용이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로서 적합했다. 그러나 각종 기계, 제강공장이 왕성히 들어서는 것에 비해 기술 인력은 매우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기술자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의해 1940년 5월, 3년제 인천공립직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인천공립직업학교는 4년제의 갑종 공업학교(1944)로 발전하였다가 해방 직후 1946년 미군정하의 새로운 학제개편에 따라 6년제 총 24학급의 인천공립공업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5년 뒤인 1951년, 제2차 교육법 개정에 의해 인천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되면서 현재의 3년제 공업고등학교가 되었으며 이후 1976년 3월, 정부 차원의 방위산업 육성의 필요에 따라 부산기계공고, 성동기계공고, 충남기계공고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특수목적고로 지정되어 고등산업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기술 인력 양성을 목표로 인천기계공고로 교명이 바뀌게 되었다. 개교 첫해에는 숭의동에 있던 대화소학교의 빈 교실에서 수업을 했지만 이듬해인 1941년부터는 현재의 주안동 교사에서 수업을 진행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940년대 인천공립직업학교 당시의 학생 복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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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당시 인천최초로 부정부패에 항거인천기계공고는 인천에서 기능인 양성을 위한 특수목적고등학교로서 유명하지만 1960년 4∙19 당시 인천에서 가장 먼저 불의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했던 학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인기공(인천기계고등학교 이하 인기공)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수봉산과 성광고(현 선인고)로 시위 행진을 계획했는데 제물포역에서 인천동부경찰서 형사대와 맞부딪혀 투석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 감금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학생들의 시위행진은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도 실렸다. 당시 인천시내 대학교와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추진하지 못하던 부정부패에 대한 항거를 인천에서 최초로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인기공 학생들의 시위는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의 학생운동을 기념하는 4∙19 기념탑이 인천기계공고 본관 현관 앞에 건립되어 있다.
| ▲1961년 7월 15일 건립된 4∙19 기념탑. 5명의 학도판화는 당시 인천기계공고의 5개과를 상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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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기계공고의 두드러진 활약상으로는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의 11연패 우승의 주역으로 기술 한국을 세계에 크게 알린 업적을 들 수 있다. 국제기능올림픽 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페인에서 처음 시작되어 격년제로 개최되었는데, 한국에서는 1967년에 처음 참가했고, 인기공은 1979년 대회를 시작으로 2015 대회까지 금 25개 등 모두 39개의 메달을 획득하면서 기능올림픽 11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또 국제대회 참가를 위한 전국대회에서도 인천시가 종합우승을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2015년까지 치러진 전국대회에서 금 57개 획득을 비롯하여 금탑 4회 수상의 빛나는 실적을 쌓아 올렸다. 인천기계공고로 바뀐 첫해인 1976년에 입학하여 현재 모교에서 교사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는 백상현 선생님은 인기공이 기능올림픽에서 큰 성과를 얻게 된 동기로 무엇보다 실력 있는 젊은 교사들의 체계적인 지도를 꼽았다. 특히 1970년대 당시 인기공을 졸업하고 모교에 교사로 온 선배들이 기능올림픽을 대비하여 학생들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지도했는데 그게 학창 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다고 한다.기능올림픽 11연패 신화예를 들어 선반 CNC라는 종목이 있다면, 주어진 재료를 기계로 깎아서 누가 얼마만큼 정밀하게 만들어서 조립까지 했는가를 측정 항목에 따라 채점을 하여 승부를 가리는데, 대회에 나가 직접 경기를 치렀던 선배들에게서 아주 생생한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밤늦은 시간까지 실습실에서 연습했던 것이다. 당시 선배 교사들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기 교사로 부임한 경우가 많았는데 나이 차가 적게는 1~2살 정도였으며, 학생들과 부대끼며 열정적으로 가르쳐서 그분들이 인기공의 초창기 기능올림픽 성과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국제기능올림픽 11연패 신화 이를 바탕으로 많은 입상자들을 배출하면서 경험자의 전문성이 후배들에게 꾸준히 이어지고, 지도 교사와의 협업이 보태어지면서 인기공의 11연패 신화가 가능했다고 백상현 선생님은 회상했다.
▲1987년 11월 30일 세워진 유공탑. 전국기능경기대회 및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입상자를 배출하도록 힘쓴 학교 선생님들의 공적을 기리는 탑이다.
인천기계공고는 스위스 도제식 직업교육을 운영하는 시범학교로 현재 학교와 기업을 오가며 배우는 산학일체형 도제학교인 금형도제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간정보 특성화고등학교로서 현장실무 위주의 산업 맞춤형 인력 양성에 힘쓰고 있다. 또 학교기업 스쿨모터스를 운영하며 자동차 정비와 관련된 현장 적응력과 전문성을 키우면서 학교기업 운영을 통해 교육재정에 재투자를 모색하는가 하면, 인천 지역 연고 산업에 적합한 자동차 부품, 도시건설산업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특성화 산업 분야를 선정하여 맞춤형 교육과정도 편성하여 특성화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인천기계공고는 과거 197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맞물려 인천뿐만 아니라 타시도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학생을 선발하여 공업화 분야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을 뿐 아니라 어렵게 살던 시절, 오직 학교 교육만으로 현장 실무 역량을 갖춘 뛰어난 학생들을 양성했다. 그들은 졸업 후 다양한 기업에서 활약하거나 창업하여 지금도 국내 유수의 기업을 경영하는 많은 동문들을 배출하였다. 지금은 인천 시내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지만, 1941년 당시만 해도 논바닥 일색이었던 주안동 일대에 전답 1만 평을 매입하여 직업학교로 출발했다. 인천기계공고는 이렇게 인천의 실업계 학교의 대표격으로 자리매김하여 지금도 명실상부한 특성화고등학교로서 인천 최고의 공업학교라는 자부심을 갖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글, 사진 이동구 인천광성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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