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아들
(광화문에 지휘부를 설치한 혁명군)
혁명군은 광화문 앞에 지휘부를 설치했다.
시간은 4경((四更-1~3시).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다. 간밤의 변란은 소리 소문없이 도성에 알려져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방원은 도평의사사(都評義使司)에 들어가 있는 조준과 김사형이 마음에 걸렸다.
방석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궁문 밖에 나와서 교전한다면 수적으로 열세인 혁명군이 물러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합좌(合坐)한 여러 정승들이 방석이 거느리는 군사들 뒤에 있게 될 것이므로 혹시 방석을 따를까 염려되었다.
"우리 형제가 노상에 있는데 여러 정승들이 도당(都堂)에 들어가 앉아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 즉시 운종가(雲從街)로 옮겨라."
정승들과 군사를 이끌고 운종가로 퇴각했다. 작전상 후퇴다. 운종가는 현재 종로를 이르는 말이다. 예조(禮曹)를 동원하여 백관들을 모이게 하는 한편 대궐에 밀사를 파견했다.
임금과 세자를 호위하고 있는 왕당군을 와해시키기 위해서였다. 혁명군의 위세에 겁을 먹은 친군위 도진무(親軍衛都鎭撫) 박위와 조온이 휘하의 무장 병사들을 이끌고 투항해 왔다.
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장과 수방사령관을 겸임한 직책보다 더 높은 장수가 투항해 왔으니 상황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투항한 박위가 혁명군의 군세를 보니 별것이 아니었다. 위장전술에 속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괜히 겁먹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처신을 잠시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처분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뜻은 날이 밝으면 혁명군의 군세가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다. 어둠에 쌓인 혁명군의 실체가 약한 것으로 드러나면 여러 사람의 마음이 붙좇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방원이 그를 도당(都堂)으로 가게 했다.
회안군이 기회주의자는 없애야 한다고 정안군에게 강력히 청했다. 그는 도당으로 가는 노상에서 혁명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방원이 궁성을 숙위(宿衛)하는 군사를 다 나오도록 하라고 조온에게 명했다. 조온이 즉시 패두(牌頭)를 대궐에 들여보내 숙위하는 군사를 나오게 했다.
궁궐 안 근정전 이남의 군사는 다 나와서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렸다. 이로서 왕당군은 무장 해제되었다. 조온은 궁 밖으로 나온 군사들에게 각기 제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상황이 종료된 셈이다.
우왕좌왕하는 궁내 대신들
여명이 밝았다. 태조 이성계가 도승지 이문화와 좌부승지 노석주를 불렀다. 이문화가 대궐에 도착하니 세자 방석과 방번, 이제, 이화, 이양우, 심종과 장사길, 장담, 정신의 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러 군(君)과 추상(樞相), 대소내관들과 아래로 내노(內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갑옷을 입고 칼을 가졌는데 조순과 김육, 노석주, 변중량은 갑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몰라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조준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광화문 건너편에 있는 도평의사사(都堂)를 출발하여 입궁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도당(徒黨)을 결합하고 비밀히 모의하여 우리의 종친원훈을 해치고 우리 국가를 어지럽게 하고자 했으므로 신 등은 일이 급박하여 미처 아뢰지 못하였으나 이미 주륙(誅戮)하여 제거되었으니 성상께서는 놀라지 마옵소서."
태조 이성계는 묵묵히 들었다. 간밤의 변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제가 그때 임금의 곁에 있다가 말했다
.
"여러 왕자들이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과 남은을 목 베었으니 화(禍)가 장차 신에게 미칠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시위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공격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화(禍)가 어찌 너에게 미치겠는가?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임금이 만류했다. 태조 이성계는 이미 대세를 읽고 있었다. 곁에 있던 이화도 말렸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이 죽었다니 판세는 이미 드러났다고 판단했다. 이제가 칼을 빼어 허공을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이화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임금 후보자는 도망가고
이 무렵, 영안군 이방과는 아버지 병환의 쾌유를 빌며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齋戒)를 올리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이방과는 형 이방우가 사망한 이후 맏이노릇을 하고 있었다.
재계도중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몰래 종 하나를 거느리고 궁성을 빠져나와 풍양(豐壤)에 있는 김인귀(金仁貴)의 집에 숨어 있었다.
방원이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아냈다. 그가 돌아온다는 말을 전해들은 방원은 궁성(宮城) 남문 밖까지 나아가 그를 맞이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임금에게 청하여 방원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방원이 굳이 사양하면서 영안군을 세자로 삼기를 청했다.
"당초부터 의리를 수립하여 나라를 세워 오늘날의 일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이것이 정안군의 공로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영안군이 사양했다. 이에 방원이 더욱 굳게 사양했다.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적장자(嫡長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다.
"너의 뜻이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맡도록 하겠다."
형제간에 내부 교통정리는 끝났다. 방원은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백관들을 거느리고 소(疏)를 올리도록 주문했다.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나시오
"세자는 장자(長子)로 하는 것이 만세의 상도(常道)인데 전하께서 장자를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웠으며 정도전 등이 세자를 감싸고 여러 왕자들을 해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처지에 있었으나 다행히 천지와 종사의 신령에 힘입어 난신이 형벌에 복종하고 참형을 당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적장자(嫡長子)인 영안군을 세자로 삼게 하소서."
-<태조실록>
방원은 방석을 세자로 삼은 아버지에게 원 위치에서 다시 출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과실로부터 출발한 오늘의 변란은 정당하다는 항변이 스며있다. 방석을 세자로 한다는 세자책봉식이 있던 날부터 울분을 삭이며 세월을 보낸 방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한 맺힌 응어리가 녹아있다.
방원은 '만세의 상도를 벗어난' 아버지의 결정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과(過)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하소연이 아니라 혁명군 총수가 임금에게 던지는 정치적인 추궁의 목소리다.
상소라는 형식을 빌어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혁명군이 지정한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가라는 최후통첩이다.
대궐을 포위한 혁명군은 세자 방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임금의 즉위와 세자책봉은 국체의 근간이며 권력의 줄기다. 세자를 내놓으라는 것은 국체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며 권력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왕자의 난이란 말인가?
이날 밤 방원의 거사는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충효(衝孝)가 아니라 임금을 향한 신하의 쿠데타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