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가 성경에 없는 개념이라면, 이 교리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삼위일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부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눔) "형, 삼위일체가 성경에 없는 개념이라면, 이 교리는 어떻게 기독교로 유입된거유?"
(나) "바로 그 점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핵심이라네. 이 부분을 요약해서 알려줄게."
1. 삼위일체에서 '삼위(三位)'는 3개의 위격이 있다는 뜻인데,
- 영어로는 'person'이다.
- 라틴어로는 'persona'로서 '인격'을 의미했다. 이 말은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했는데, 당시 'persona'는 2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는 <가면>이란 뜻이고, 둘째는 법적으로 <사유재산과 개인적인 소유물>의 개념이다.
2. 라틴어 <persona>는, 그리스(헬라) 신학자들이 'persona'에 해당하는 '프로소폰'으로 번역하지 않고, <휘포스타시스>라는 다른 뜻의 단어를 도입했다. <휘포스타시스>의 신학적 개념은 '실재' 또는 '본질' 이라는 개념이다. [즉 헬라 신학자들은 '위격'을 '3 persona(세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 왜 그랬을까? 그렇게 번역하면 세분의 인격을 가진 다신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3. <휘포스타시스>는, 정확하게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가리키는 의미다.
- 휘포 = '~아래' (영어의 below)
- 스타시스 = '서다' (영어의 stand)
- 휘포스타시스는 '아래에 서다'란 뜻이다.
* <휘포스타시스>는, '인격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닌 "3가지로 구별된 근원적 존재"라는 뜻이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신약 히브리서 11:1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휘포스타시스)이요" ... 라는 성귀의 '실상'이 휘포스타시스다.
4. 중세에 이르러,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 서방교회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 동방교회로 분열되면서, 삼위일체 교리에 혼란이 가중된다.
- 로마교회 = 삼위는 '페르소나'로, 일체는 '숩스탄시아(영어로는 substance)'로, (성부. 성자. 성령 위격의 구분을 강조)
- 동방교회 = 삼위는 '휘포스타시스'로, 일체는 '우시아(영어로는 esence)'로, (한 본질에 동일한 신성"을 강조)
5. 진짜 문제는, "삼위가 어떻게 일체를 이루느냐"는 신학적 문제로서, 즉 "어떻게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냐"라는 문제인데 결국 ....
- 하느님은 한분 뿐이라는 유일신론 또는 단일신론
- 세 하느님이 계시다는 삼신론의 범주에 머무르게 된다.
6. 그런데, 교부들은 삼위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페리코레시스' 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한다.
- '페리코레시스'는 "상호침투, 상호내재"라는 개념이다.
- '상호침투' = '서로 혼합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 전제
- '상호내재' = '서로 연합해 있다'는 뜻
7. 공재(共在) = 마치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듯, '상호침투'해서
- 성부는 성자 안에
- 성자는 성부 안에
-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실존
8. 초기 교부들은 이 '페리코레시스' 교리를 통해, 세 인격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구분되는 세 분이라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9. 결론. 삼위일체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고 온전히 이해활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를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지적 탐욕"이며, 삼위일체는 "신비"로써 성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눔) "아휴 어지러워. 이해하기는 개뿔^^"
(나) "그렇지? 중요한 핵심은 이거라네. 이 개념이 라틴어 개념에서 헬라어 개념으로 범위가 확장하면서 전혀 다른 개념으로 변질된다는 거지."
(눔) "그렇다면 이는 성경과는 전혀 관계없는 철학의 영역 아뉴?"
(나) "그렇지. 그리고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터툴리안 당시의 개념과도 다르다는 것일세"
(눔) "그런데 신약에는 실제로 삼위를 증명하는 구절이 있는데, 예를들면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주장도 있잖우."
(나) "그건 아버지와 예수의 뜻이 하나라는 의미지 본질이 하나라는 뜻이 아닐세."
(눔) "문제는 왜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를, 형 같은 신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탐구자보다 더 모르느냐는 거유."
(나) "모르는 게 아니지. 이 문제를 들여다 보는 게 매우 불편한거라네. 자네가 집중하는 도(道)의 수행에 대해 누군가 시시비비하려 든다면 자네라고 그걸 바로 받아 들일 수 있나?"
(눔) "하긴 그려. 자기 영역에 대해 누군가 다른 말을 하면 매우 불편해지지."
(나) "바로 그걸세. 예를들어, 난 요즘 에디오피아 성경 80권에 대해 탐구를 준비 중이라네. 거기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이 바로 '에녹서'로서 창세기에서 간단하게만 언급된 '하느님의 아들'과 '네피림' 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기록돼 있다네."
(눔) "오 그래요? 형은 대단하슈, 그걸 또 이제 탐구한다니.."
(나) "근데 이보다 더 충격적인게 뭔지 아나? 바로 예수의 12세에서 30세 까지 신약에서 빠진 부분이 에디오피아 성경에 기록돼 있다는 사실일세. 난 이를 접하고 상당한 충격에 빠졌었다네."
(눔) "오 그래요? 그런데?"
(나) "그러나 이를 접하고 보니, 이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로마교회 교부들이 에디오피아의 예수 이야기를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유가 이해되더란 말일세. 이미 확립된 예수의 정체성이 흔들린단 두려움 때문이지."
(눔) "아니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다는 거유?"
(나) "사실 에디오피아 이야기를 경청한다고 해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가진 신념이 흔들릴 수 없다네. 그런데 예수가 본래부터 신성을 가진 존재라고 여겨 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처럼 이미 자기가 받아 들인 신념 외에 다름 신념을 들여다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고 싶은걸세."
(눔) "형 고마워요. 늘 형과 얘기하면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는 기분이 든단 말이유. ^^"
(나) "나도 고맙네, 늘 잘 들어줘서. 이제 시간이 넘 지났으니 다음에 또 얘기함세."
삼위일체를 위해 성경의 온갖 부분을 가져와 설명하는 크리스찬들의 글과 유투브를 집중해서 읽고 보고 있다. 요즘엔 성경에 눈을 뜨는 크리스찬들이 증가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그런데 ....
이들은 잘 나가다가 결론 부분에 이르면 꼭 자기들의 교리 내로 결국 안착시킨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대다수는 삼위일체에 대한 공부가 덜 되어 있음에도, 신약의 각종 성구들을 끄집어 내서 삼위일체를 강조하려 애쓴다. 이는 자기 신앙을 위해 가장 나쁜 방법으로 변호하는 것과 같다.
삼위일체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신비의 영역을 성경 구절 내에 은밀하게 내재시키지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신학의 논쟁일 뿐이다. 성서는 자신이 읽는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들은 도그마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한 '고난'이란 의미다.
자신의 직장 일이 풀리지 않거나 아들 대학 입시가 맘 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게 '고난'이 아니란 거다. 크리스찬이란, 이런 영적 싸움에서 용기를 내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두려움이 '고난'이라는 뜻이고, 그것을 받아 들인 사람이란 뜻이다. (끝)
.
[참고 - 단지 참고사항임]
1. 삼위일체론의 역사와 이단 시비, 올바른 삼위일체의 이해와 흔한 오해
https://blog.naver.com/ksw2kms/223869324633
2. 삼위일체 교리, 어떻게 발전했고 오늘날의 결론은 무엇인가?
https://whatistrinity.com/?p=126
3.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https://brunch.co.kr/@hanachurch/145
4. 칼빈의 삼위일체론, 그 형성과정과 중요성
(The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of Calvin's Doctrine of Trinity)
김재성 교수 (조직신학)
https://sermon-jesus.tistory.com/17956601
5. 아리우스 논쟁에 관한 신학적 고찰
https://m.blog.naver.com/violett/222954722898
첫댓글 🫠😃🤔 삼위일체 논쟁은 이스라엘인 크리스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족인 그리스나 로마와 그외 지역의 크리스찬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을 유념해서 들여다 봐야한다.
이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적 차이 그리고 그들이 가진 신에 대한 관념이 새로운 신에 대한 관념과 부딪히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논란이 결국 공의회라는 모임에서 압도적 다수에 의한 결의로 끝맺음을 한다는 것.
이 과정은 전혀 성서적이지 않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는 모두 재해석을 통해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