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영] 미스 코리아 살인사건 19-20.
육감과 다수의 설전 2.
검사는 사진이 남형사에게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문을 꺼냈다.
"에,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방금 본 사진은 직업상의 비밀취득에 해당되므로 그 어떤 것에 연계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아, 남형사, 그럼 진의 죽음과 사진과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얘긴가?"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박만하는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으로 해서, 때를 맞춰 지금 그 사기꾼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돌려주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미스코리아의 당선금, 방송국과의 테이프 거래, 사실 테이프 액수도 비공식적으로는 그 액수를 훨씬 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퀸서울과의 투고료, 정말 귀신 같은 솜씨로 한밑천 단단히 잡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언제든지 돈이 될 수 있는 필름이 있습니다. 아마 강여사님한테도 금품을 갈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권중혁 의원님이 장관직에 입각했을 경우는 액수가 더 뛰게 되어있습니다. 정말이지 박만하는 시기를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이 자신에게 더 이상의 이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게걸스럽게 다 먹어치우고 나서는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한 겁니다. 권중혁 의원이 궁지에 몰릴까봐 퀸서울에 폭로기사를 쓰고는 미스코리아 진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적인 동기를 못 박듯이 문장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사건이 종결되거나 잠잠해진 뒤에 권의원님과 강여사님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죠."
남형사는 목이 탄듯 잠시동안 말을 중단했다.
"그런데 진이 출산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또 한 분 있었습니다. 박만하가 최초로 안 인물이라면 열흘 후쯤, 그러니까 윤보애양이 진에 당선된지 열흘 후쯤에 금지선 변호사님이 저와 똑같은 경로를 통해서 진이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걸 확인해 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 사실을 꼭꼭 숨기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금지선 변호사의 심리입니다."
"남형사, 도대체 핵심이 뭔가?'
국장은 회의실이 울릴만큼 큰 목청으로 말했다.
"윤보애양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했다는 것 자체가 자살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여자라면 선발대회에 절대 출전할 리가 없습니다. 저는 전면적으로 재수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저 역시도 미스코리아 진이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라고 확신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착각하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윤보혜는 출산 경험이 없는 여자가 확실합니다."
회의장은 또 한번 술렁이고 있었다. 오부장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남형사에게 질문을 했다.
"자네가 직접 확인까지 해놓고 그런 소리를 하면 누가 믿어주겠나?"
"저도 처음엔 진이 미혼모라고 단정지었지만 박만하가 투고한 퀸서울을 읽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파라티온이 든 화장품 샘플 운운한 대목 말입니다. 진이 분명히 칵테일을 마시고 숨졌습니다. 그런데 현장에는 샘플이 없었습니다. 핸드백에 넣고 다녔다고 했지만 진의 유품인 핸드백에도 샘플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에서도 물론이구요. 그것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살을 했다면 파라티온을 담은 샘플이 현장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진이 칵테일이 날라올 쯤에 자기를 향해 계속 찍어달라고 해서 그렇게 찍었더니 결국은 자살을 암시했다는 대목 역시 거짓임에 분명합니다. 즉, 박만하는 파티가 있기 사흘 전에 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최초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이 전화를 건 시기는 일주일 전입니다. 강여사님의 진술에 의하면, 미스코리아 선과 쇼 프로 녹화를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강여사님이 파티 얘기를 하면서 캠코더 기사 얘기를 꺼냈답니다. 그러자 진이 자기가 잘 아는 기사가 있다면서 그 사람을 쓰면 어떻겠냐고 해서 강여사님은 흔쾌히 허락했답니다. 그 자리에서 진은 박만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대목 역시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투고 내용을 하나 하나 따지고 든다면 기사는 온통 거짓 투성이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투고 내용을 전부 뒤집어봤습니다. 먼저 미스코리아 진이 과연 출산 경험이 있느냐는 건데, 저는 이 점에 대해서는 금지선 변호사의 침묵을 제일 먼저 꼽고 있습니다. 만약 금변호사가 진의 과거를 추적해 들어간 결과 엄청난 비림을 발견했다면 지금까지 잠자코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그리고 두번째, 진이 낳은 아들의 행방입니다. 진이 주안에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후에 강여사의 의상실에 취직을 했을 때 그녀는 진에 당선되기까지 강여사가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생활해왔습니다. 젖먹이 아기를 돌봐줄 수 없는 생활을 해온 진이었습니다. 아기와 접촉을 하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물론 4개월 동안의 공백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면 산부인과의 윤보혜양은 어떻게 된 걸까요?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름이 같다고 해서 그 산모가 진이었다는 건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진이 경리로 일했던 D기획 사장의 증언은 음미해 볼 대목입니다. 제가 사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경리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진이 윤보애였다는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경리는 텔리비전까지 봤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답니다. 사장 역시 경리였던 윤보애와 진이 닮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박만하가 퀸서울에 이 대목을 언급했는데, 이 내용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장이 믿으려고 하지않아 진의 과거를 추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추적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만, 3년씩이나 같은 사무실에서 마주쳐오던 사장이 진을 못알아 본다는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증언인, 진이 세들어 살던 여주인의 말입니다."
남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회의실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저는 여주인이 세를 살던 처녀가 임신을 하게 되어서 나갔다고 했길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처녀가 진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고 없습니다. 그 여주인 역시 미스코리아 대회를 봤지만 셋방 처녀하고 닮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럼 윤보혜 말고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검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남형사를 보며 물었다.
"비슷한 체격의 여자가 경리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지면 진의 출산 여부는 자연적으로 진위가 가려지게 됩니다. 또 진이 자신의 과거를 생각나는대로 적당히 둘러대서 얘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진의 과거는 강여사님의 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또한 추적 과정에서 실수나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남형사는 말을 마치고 의자에 앉으면서 옆자리의 윤형사에게 시선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일어났다.
"1과의 윤주희 경윕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는 강여사님으로부터 진의 과거를 들었습니다. 이 진술을 근거로 해서 남형사가 진의 과거를 탐문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금지선 변호사님 역시 강여사님의 얘기대로 D기획을 찾아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박만하씨의 경우는 약간 다릅니다.
그는 퀸서울에서 진을 처음 본 인상, 그리고 두번째 봤을 때의 미모 또한 볼품없었다고 썼습니다. 왕관을 쓴 진과 고구마를 먹고 있는 윤보애하고는 공주와 추녀처럼 큰 차이가 있었노라고 스스로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박만하씨가 착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박만하씨가 의도적으로 진과 경리를 동일 여자로 탄생시켰는지도 모릅니다."
윤형사가 보충설명을 하고 자리에 앉자 검사는 혼란스러운듯 양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진이 미혼모가 아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이 자살할 이유는 없는 거지......"
검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부장,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소."
국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부장을 불렀다. 오부장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진의 과거가 깨끗하다면 자살이 아니고 독살이 분명합니다. 저 역시 재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부장은 장과장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