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이씨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성주(星州)은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성주의 옛지명으로, 본래 고대 육가야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인데 신라때 본피현이라 하다가 757년에 신안현으로 개칭하여 성산군에 속하였다. 그후 벽진군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로 개칭하였다가 경종때 광평군이 되었으나, 그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때 성산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에 성주군으로 개칭되었다.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때 재상을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아우 돈유(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손위하자 마의태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극신(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고는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그 지방에 살며 대대로 호족을 이루었고, 순유의 12세손 장경(長庚)이 크게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 고종때 그의 어머니가 꿈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낳았는데, 장경은 장성함에 따라 도량과 재주가 뛰어나서 존경하며 따르는 자가 많았다. 강양군 이약이 성주쉬(지금의 군수)로 부임하여 장경의 인품을 보고 자기 딸과 혼인시켜 살게 하였는데,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어, 이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크게 명성을 떨쳤으므로 나라에서 삼중대광 좌시중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에 추증하고, 경산부원군에 추봉하였으며, 그의 손자 승경(承慶: 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특별한 공적을 세웠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경을 중시조로 받들고 처음에 농서이씨로 칭관하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성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성주이씨는, 중시조 장경(長庚)의 아들 5형제가 가문의 5대 인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의 기틀을 다졌다. 각 계통별로 두드러진 인맥을 살펴보면, 장경(長庚)의 맏아들 백년(百年)이 봉익대부로 밀직사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인기(麟起)는 평양부윤으로 많은 치적을 남기고 향리에 돌아와 아버지 백년의 뜻을 따라 유교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성산군에 봉해졌던 원구(元具)의 아들 숭인(崇仁)은 목은(이색), 포은(정몽주)과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정도전과 함께 목은 이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도은 숭인(崇仁)은 주요 관직을 역임한후 밀직제학에 올라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한때 경산(京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지밀직사사와 동지춘추관사에 올랐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에 의해 배소에서 살해당했다.
도은과 정도전은 목은의 동문으로 다정했던 사이였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됨으로써 도은은 절개를 지켰고 정도전은 새 왕조에 귀부한 변질된 자가 되어 세상에 더없는 앙숙으로 변하였다. 태종때 도은을 죽였다는 말이 임금귀에 들어가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황거정의 훈작(勳爵)을 삭제, 서인으로 삼고 자손은 금고(禁錮)시켰다.
백년의 아우인 천년(千年)의 아들 승경(承慶)은 원나라에 유학가서 태자첨사를 지내며 나라에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그의 부친 천년(千年)과 조부 장경(長庚)에게 농서군공을 추봉하였다.
낭장 겸 중군지후를 역임했던 만년(萬年)의 현손 지활(智活)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거창의 박유산(朴儒山)에 들어가 망월정을 짓고 매일밤 북녘을 바라보며 단종을 사모하는 시를 짓고 통곡하였다. 그후 단종이 영월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일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통곡을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성주이씨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인맥을 형성한 문열공 조년(兆年)은 충혜왕때 정당문학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올라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포(褒)는 광정대부로 도첨의평리를 역임했다. 인복(仁復)은 주자학에 밝았으며, 공민왕때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가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문장이 탁월하여 사은사로 원나라에 다녀와서 [고금록(古今錄)]을 편수했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직(稷)은 개국3등공신으로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대제학을 거쳐 판사평부사로서 왕명을 받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뛰어난 문장으로 시명을 떨쳤던 그는 성산부원군에 진봉되고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흥안군에 봉해졌던 제(濟)는 이성계의 셋째 딸인 경순공주와 혼인했고, 왕자의 난때 죽음을 당했다. 남편이 죽자 경순공주는 아버지 태조앞에서 울면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어 절로 들어갔다.
세종때 병조판서를 역임했던 발(潑)의 현손 항(恒)은 일찍부터 무사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무예를 익히다가, 백부의 꾸지람을 듣고 각성하여 30세에 이르러 박영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아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호남오현(湖南五賢)>의 으뜸으로 추앙 받았다.
태종의 딸 숙혜옹주와 혼인하여 성원위에 봉해졌던 정녕(正寧)의 아들 집은 전라도 관찰사와 이조참의, 부제학, 대사간,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나치게 청렴하고 사청(私請)을 거절하여 송나라 포증(包拯)이 법관으로서 사정이 없었기에 지옥의 염라대왕에 비유하여 붙여졌던 별칭인 <포염라(包閻羅)>로 불리웠다.
대사헌 언충(言忠)의 증손 광적(光迪)은 삼조에 걸쳐 60년 간이나 입사했던 명신으로 90세에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영의정 직(稷)의 현손 충건(忠楗)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이조정랑을 지냈고 호당(湖堂)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구한말에 와서는 제국신문사 사장을 지낸 종일(鐘一)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손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가 옥고를 치루었고,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한 공으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아 성주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이씨(星州李氏)는 남한에 총 37,251가구, 153,1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집성촌 ★
경남 사천군 사남면 총전리, 전남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 경남 남해군 남해읍 평현리 전남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 경북 칠곡군 동명면 금암동, 석적면 포남동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신전리, 경북 금릉군 지례면 울곡리, 충북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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