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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4장 6-11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을 때가 이르렀다는 것과, 부활 승천하심으로 더 이상 제자들과 육신적으로 함께 계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것은 근심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없다는 것도 근심될 일이 될 수 있고,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복음을 증거 하면서 많은 환난을 받게 되는 것도 근심될 일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근심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근심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며, 그런 섭리 속에서 택하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을 위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게 될 일이 너희를 위한 일이라고 알리십니다. 이때 너희를 위하여 떠난다는 것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이고,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한다는 것은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란 의미보다는 교회의 완성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은 장소적인 측면보다는 택하신 백성의 수가 완전히 차는 것, 그래서 교회가 완성되는 것과 관련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말씀하시자, 도마란 제자가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알리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으로 너희와 함께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리셨고, 심지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아버지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 36절 시몬 베드로도 알지 못했고, 좀 더 자세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마도 알지 못해 계속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 집에 대하여 언급했기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것 자체는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소망하는 제자들에게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소망한다는 것은 결국 지상왕국을 꿈꾼다는 것인데,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 중심이 될 것인데, 도대체 어디로 가시기에 만날 수 없다고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6절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가는 곳은 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버지 집이요,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예비함으로 너희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할 곳도 아버지 집이란 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계신 곳, 내가 너희를 그곳으로 인도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아버지 집으로 갈 것이고, 내가 너희를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여 들인다고 할 때 예수님은 자신을 길로 소개하심으로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알리십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지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천상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 다 지상에서 살다가 죽어 부자는 지옥으로, 거지 나사로는 천국으로 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부자가 지옥의 고통으로 인하여 물 한 방울만이라도 내 혀에 적셔주기를 간청하게 되는데, 이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이것은 지옥과 천국 사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지상과 천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마련된 그 길을 걸어가다 지옥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주시기 위해, 다시 말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직 하나의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 길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입니다.
소위 이 길을 구원의 길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의 길은 구원의 과정을 포함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과정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이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참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시작과 마침 사이에 있는 과정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로만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대신 다른 것이 들어온다면 구원의 길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고 까지 말하는 겁니다. 무지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가 되시며, 불의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의로움이 되시며, 불결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함이 되시며, 본래는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어야 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함이 되시는 겁니다. 구원의 서정에 속하는 모든 내용을 은혜로, 거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충만해야지,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더한다면 갈라디아서 5장 4절의 경고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 되시는데 거기에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는 게 더해진다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더하는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따라 인간에게 구원의 원인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 인간에게 구원의 원인의 일부라도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다 정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주의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합니다. 조금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가 되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셔야 합니다. 알려주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의 길을 알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전3:11) 영원에 대한 소망은 있을 수 있지만,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형태로 종교가 있을 뿐입니다(롬1:23). 참된 종교요, 유일한 종교를 알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되십니다. 진리가 되셔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무엇이 참된 종교인지 알려주십니다. 지상에 사는 자가 천상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신임을 알려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라고 할 때 그 길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무엇을 보장하느냐?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이 생명을 어떻게 해서 받을 수 있는가? 요한복음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사망에 속한 자가 생명에 속한 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때 구원의 길을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까지 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 그리스도 없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의 시작만이 아니라 그 풍성함도 누리는 것이고,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까지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수의 유대인들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드러내셔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자신이 진리요 생명임을 알리십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제자에게 내가 어디로 간다고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여기서도 결국 너희를 위하여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있다는 것을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이들은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자들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함과 부족함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매우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제자가 나를 버릴 것이고, 특별히 시몬 베드로에게는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는 말씀은 너희가 지금 나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이 거짓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여전히 지상왕국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기보다는 보이는 지상 나라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데 연유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알고 있고, 알고 있는 바를 고백했지만, 여전히 부족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부족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서도 부족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정치적 메시아가 오면 로마로부터 해방하여 다윗 왕국과 같은 나라를 이 땅에 세우리라고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7절 상반부로 대입해서 보자면 너희가 나를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았고 또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입니다(히1:3).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시면서도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면서도 생명을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분리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요,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저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저들이 지금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고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자 도마에 이어 빌립이라는 제자가 요청하게 됩니다. 8절을 보시면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출애굽기에서는 모세에게 이런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하나님의 실체를 보고서 살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때 본다는 것은 그만큼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눈으로 본 것보다 믿음으로 본 것을 더 확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 믿음으로 보는 것이 더 복되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봐야 믿는가? 믿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본다는 것은 더더욱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청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를 알았고, 또 보았다고 말씀하시니까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겨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족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9절로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7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임을, 자신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입니다(히1:3). 그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알아 간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 간다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 말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르는가? 모르지 않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물론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알려주시지만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모른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알지만 충분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부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본 자로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말은 아버지를 알고 본 자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그러나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없는가? 참된 믿음 안에서는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만 보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본 그리스도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멀리서 내다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구약 시대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여 오시지 않았을지라도 본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만이 하나님을 본 자들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믿음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로 있는데도 어찌하여 너는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 있지 않느냐? 단지 육신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믿음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 그런 측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도 왜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10절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표현은 구별되는 두 위격이 하나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때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다고 하니까 삼분의 일은 성부, 삼분의 일은 성자, 삼분의 일은 성령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면서도 성부 역시 성자 안에 거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분으로 계십니다.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이 계시면서도,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계시고, 또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계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만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인성을 취하여 오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분이시요, 아버지 또한 아들 안에 계시는 분으로 계시기에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시작하면서부터 알리는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고 선포합니다.
이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즉 질문한 빌립에게 믿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 말은 빌립에게, 나아가 지금 열한 명의 제자들이 여기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만 하더라도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부가 성자의 근원이시라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아리우스라는 이단이 말한 것처럼 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말할 뿐입니다. 성부도 영원하신 하나님이요 성자도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할 때 성부가 전 신성의 근원으로,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신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성자로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 다시 말해 그의 말씀이나 그가 행하시는 일은 그 스스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 사실을 요한복음에서는 누누이 강조하셨던 겁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그가 내 안에서 말하고 행하시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자주 드러내셨던 겁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믿음이 있다고 해서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연약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지만 부족하고 연약하여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0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어느 정도 저들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하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구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흔들립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아이의 아버지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9:24)라고 늘 구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자면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모세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엘리야, 엘리사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타났다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냐? 그들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아들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분이십니다. 또한 세례 요한의 증거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증거도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런 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며, 38년 된 병자도 낫게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역사도 나타내셨고,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의 눈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친히 하셨습니다. 스스로 하셨다고 할 수 있지만, 늘 아버지로부터 능력을 받아 행하시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은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는 자로 있고, 그것으로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저들에게 주어져 있지만 더욱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연약하고 부족한 저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요, 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주어 영생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생명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지혜, 그리스도가 빠진 의, 그리스도가 빠진 거룩, 그리스도가 빠진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빠진 지혜, 그리스도가 빠진 의, 그리스도가 빠진 거룩, 그리스도가 빠진 구원을 말합니다. 저들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를 빠뜨렸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만 말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무엇인가를 더한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빠뜨리는 것입니다. 유일한 중보자인데, 유일하다는 것을 빼버린다는 겁니다. 아니 유일하다는 것도 남겨놓지만 유일하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덧붙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가르침은 결코 구원의 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은 계시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고 할 수 있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본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본 자들은 예수님이 계실 때뿐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로는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우리는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본 자들보다 더 확실하게 보는 자들, 그들이 믿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5절 후반부에 가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다시 말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자면 성부 안에 성자가 계시고, 성자 안에 성부가 계십니다. 다른 두 위격이지만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어디까지 확대되느냐?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설명할 때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라는 말로 설명하십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처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인 우리와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연합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살아갈 때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삶을 살도록 우리는 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무엇을 말하는 것은 참된 종교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시고, 그리스도가 길이 되시고, 그리스도가 시작과 과정과 마침이 되시는 것!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