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한국 방송 시스템을 설치했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마주하면서 나는 역이민을 생각할 정도로 빠져들었다. 한국은 매력이 넘쳤다. 특히 도심을 벗어나 산속이나, 바닷가, 또는 소도시 외곽에다 취향에 맞는 집을 짓고 즐기는 모습은 이민 와서 내가 하고 싶었던 장면이었다. 방송이란 특성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삶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우리말이 자유로운 모국이 아닌가.
한편, 눈 뜨자마자 휴대전화기를 통해 접하는 정치 뉴스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뿐이어서 대조되는 조국의 양면을 소화하느라 머리와 가슴에서 열이 난다. 그런데도 나는 휴대전화기를 놓지 못하고 수시로 불안한 뉴스에 달려든다. 조국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 나는 이민 생활 20년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에 밀착해 있다. ‘관심’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누구보다도 애국자일 것이다. 주로 분노와 답답함을 토로하면서 조국을 염려하는 내 애국심이란 것이 20불에 얽힌 넝의 모국 사랑 앞에서는 ‘척’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2년 전, 딸과 함께한 베트남 여행길에서 회사* 장애우 직원 넝 덕분에 난감한 상황을 잘 넘어간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해 넝이 준 20불짜리 지폐 덕분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파(Sapa)의 몽(Hmong)족 여인들의 ‘현금’ 사랑에 있었다.
하롱베이를 거친 다음 소수 민족의 원시적인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사파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다.
블렉몽족마을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아침 일찍이 트레킹 행렬에 줄을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등성이마다 빼곡히 들어선 논이 펼쳐 쳤다. 고봉준령을 물결무늬로 수놓은 산 위의 논은 정말 장관이었다. 인간이 자연과 싸워서 얻은 최고의 전리품이 있다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곳에서 나는 가장 나약한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하늘이 땅보다 가깝다는 원주민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어디선가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온몸에 팔찌, 귀걸이 등의 악세사리를 걸치고 전통 문양의 가방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결에 떼를 지어 주변을 에워쌌다. 그러고는 노골적으로 그것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나와 딸의 픽업을 도와주고 새벽부터 호텔 앞에서 기다렸다가 산행길의 지팡이 노릇을 해 준, 몽족 여인도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직접 짰다는 숄더백을 내밀며 강매를 시작했다. 오가는 정리라 여겨 그리 인색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심 후에 바로 공항으로 갈 예정이었기에 부러 베트남 화폐와 달러를 다 써버린 후였다.
사정 이야기를 하고 딸의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남아있던 잔돈푼을 여인의 까만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나 여인은 한사코 돈을 받지 않았다. 나름 성의를 보인 것인데 의아해서 이유를 물었다. 여인의 설명은 물건이야 언제든 만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 놓은 상품으로 현금을 더 챙기는 게 이익이라는 요지였다. 픽업에 대한 수고비는 출발 전에 충분히 치렀다. 불필요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더는 댓거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식당까지 따라와 끈질기게 매달렸다. 결코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여행의 끝이 어둡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가방을 다시 뒤져 보는데 그때 마침 지난해 연차 휴가를 떠나는 나를 조용히 불러 건네주던 넝의 20불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아차 하면서 지갑 깊숙이 넣어두었던 지폐를 찾았다. 고이 접어 나빌레라! 정말 곱게 접힌 20불짜리 지폐 한 장이 몸을 드러냈다. 여인은 빛나는 달러를 손에 쥐고서야 물러났다.
남베트남 출신인 넝은 25년 전, 12세에 난민으로 호주에 왔다. 말을 더듬고 행동이 굼떠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다. 성품이 온화하고 웃음이 많아 누구와도 잘 울리는 그녀는 회사에서 만난 신체 장애우 폴과 결혼해서 두 아이까지 두었다. 고향 베트남에는 10여 년 전에 한 번 다녀왔다고 한다. 나는 점심시간에 기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넝을 종종 발견한다. 그녀에게 종교는 삶의 중심인 듯 보인다.
넝이 일하는 부서는 장애 정도가 심한 친구들이 많은 곳이다. 그들은 대체로 타인에게 인색하고 자기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한 편이다. 그래서 소통의 울타리가 높다. 그들을 돕는 날이면 나와 그들 간에 적잖은 기 싸움이 오가는데 중간에서 조화롭게 섞일 수 있도록 중재하는 이가 바로 넝이다.
넝은 내가 휴가 동안 베트남 여행을 계획 중이란 말을 흘려 듣지 않고 있었다. 휴가 떠나기 전날 퇴근하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어눌하게 말을 꺼냈다.
“Lan! 휴가 잘 보내. 그리고 베트남 간다며? 베트남 공항에 내리면 아이들이 막 달려들 거야. 너무 놀라지 말고 이 돈을 그 아이들에게 주어. 그럼 괜찮을 거야.”
수줍은 듯 고운 손으로 20불짜리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가슴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25년 전, 난민이 되어 떠나온 고국에 넝은 무슨 애정이 남아있던 것일까. 넝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조국은 어떤 모습이기에, 언제 어떻게 전달될지 모를 자신의 성의를 내게 맡기는 것일까. 어쩌면 넝은 공항에서 달려들 아이들에게서 12살 때 조국을 떠나오던 자기 자신을, 지금 자라고 있는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넝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있다고 자부하는 나는 내 조국을 위해 무엇을 생각했는지 부끄러움이 목울대를 건드렸다. 그해 나는 베트남에 가지 못했고, 다음 해에 베트남에 가서는 넝의 당부를 잊고 있었다. 베트남은 공항에서부터 하노이 시내, 하롱베이 등 어디를 가도 그 지폐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넝의 조국은 넝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자본화되었으며, 전통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의 보고인 사파도 바쁘게 달라지는 중이었다. 아직 전기가 없는 곳이지만, 달러의 힘이 대신 빛을 내고 있어 ‘원시’와 ‘자본’이 함께 어우러진 새로운 문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있는 자연의 질서 때문에 가슴 한쪽이 쓰렸으나, 넝의 20불이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 해 준 몽족 여인에게는 차라리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요즘 넝은 8살이 된 딸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치고 있다. 넝을 통해 지구촌 한구석에서 베트남의 역사 한 자락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도 다음 주에는 한국 음식 몇 가지를 만들어서 동료들과 나누어야겠다. 나는 이곳에서 유일한 ‘코리언 걸’이 아닌가.
*Disability Services Australia
[출처] 넝과 20불|작성자 시드니 코리아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