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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낯설고 어색한 세상에 첫발 내딛기>의 줄거리 :
야곱에게 있어서 애굽 이주는 환경상으로 낯선 땅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영적으로도 전혀 새로운 세상 안으로 첫발을 내딛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애굽 이주의 길에서 두려움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사실 환경이 바뀌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근이 덮친 가나안을 떠나 아들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가면서 그런 두려움은 맞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은 이제까지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살 수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낯설고 어색한 세상에 첫발 내딛기
(창세기 46:1~34)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본문에는 야곱의 가족 칠십 명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애굽의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동쪽 부분의 고센 땅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칠십 명이라는 숫자는 며느리들을 제외한 숫자로 야곱과 그의 자손들 육십육 명 그리고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합친 숫자입니다. 이로부터 430년 노예 프로젝트가 본격화될 것입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아직 그 내용은 자세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형제 상봉의 기쁨에 이어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 야곱의 충만한 기쁨이 묘사됩니다. 이제부터 엄청난 노예 프로젝트가 자신들의 후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감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감격적 장면이 있다면 요셉이 수레를 끌고 고센으로 가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즉 야곱과 요셉은 서로 목을 어긋 맞춰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30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을 20년 만에 만났고, 요셉은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눔에 있어서 야곱이 그렇게 사랑했던 요셉은 20년 동안 죽어있었다는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요셉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도 없었고, 무엇인가를 줄 수도 없었으며, 무엇인가를 구할 수도 없었으며, 요셉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무엇인가를 지켜낼 여지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기간에 요셉은 오롯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45장 8절에서 요셉은 형들 앞에서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자리까지 오른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루시려는 계획과 뜻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요셉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도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요셉이 뛰어나다고 해도 일개 유랑민의 열한 번째 아들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펄펄 살아서 움직이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마치 방금 잡아서 펄펄 뛰는 참치처럼 살아있다는 증거요 상징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만나 끌어안고 운 후에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주권을 끌어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할 고백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100%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야곱이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고백한 것은 더는 이 세상에 대해 구하여 얻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끌어안고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고백했듯이 하나님의 주권을 끌어안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살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존재감을 느끼며 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구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을 끌어안듯이 하나님의 주권을 끌어안는 모든 선민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고백입니다. 한편 이 고백과 관련해서 야곱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이상한 점입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떠나며 헤브론으로부터 남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브엘세바에 이르러 제사를 드립니다. 요셉이 살아있음에 감사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면 헤브론에서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으로서 야곱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사는 이제까지 야곱이 드려왔던 제사와는 달랐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이 세상 것을 영광 중에 바라보았습니다.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는 중에 하나님께 그것들을 구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이 영광의 세상 것을 이루어 주시면 그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하나님 자신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드립니다. 야곱은 비로소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가졌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이것을 알지 못했다면 애굽의 바로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광 중에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초강대국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심정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2절을 보면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광경이 사뭇 이상합니다. 창세기 32장 28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35장 10절에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야곱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야곱의 관계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셨을 때 야곱은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관계를 그 사건 이전으로 돌려서 처음부터 야곱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시고자 하십니다. ‘이제 내가 야곱과 제대로 관계하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때 야곱은 백삼십 세입니다. 야곱이 백사십칠 세에 죽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이제 고작 십칠 년이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야 “야곱아 야곱아”라고 부르시며 관계를 되돌리십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관계를 시작했던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관계를 시작하시기 위해 다시 야곱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요셉이 있는 애굽에 내려가는 것이 왜 두려운 일이었을까요? 이제 야곱은 아들들을 통해 요셉이 살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며, 앞으로 5년 더 기근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근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5년이나 기근이 더 지속될 가나안 땅에 머무는 것이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지만, 요셉을 빨리 보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마음이 바쁩니다. 이러한 야곱에게 두려움이 끼어들 틈이 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부터 야곱이 무엇인가를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대체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야곱은 요셉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보다 더 강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요셉은 20년 만에 만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77세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다 만난 후 53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야곱은 지난 53년 간 이름으로만 부르던 여호와 하나님을 재발견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의 증거요 상징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향해서는 아무것도 구할 필요가 없었구나.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시고 이끌어 가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족하다는 고백을 하고 이 세상을 향해 구하기를 졸업하게 되자 이제 야곱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20년 만에 요셉을 다시 살아있는 자로 만남과 동시에 53년 만에 이름 뿐이던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재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야곱의 두려움이 생깁니다. 야곱은 백삼십 년 동안 영광의 세상 것을 보며 살아왔습니다.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영광의 세상 것으로 삼자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과 판단이 생겨났습니다. 이로부터 계획하고 뜻하고 추구하였고 실제로 얻게 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까지 이겨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야곱의 주체성이란 자기 스스로 이 세상 것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고, 나쁘다고 여기는 것을 거부하면서, 얻은 것은 지키고 얻지 못한 것은 얻겠다고 이를 악물고 싸우며, 모든 방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기존의 주체성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이 세상을 향했던 자발적인 주체성의 결과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해서 자기의 주체성이 조금도 발휘될 수 없었던 요셉의 삶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20년 간 요셉이 죽었다고 믿었기에 조금도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자기 주체성대로 살아온 결과와 자기 주체성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결과를 비교해 보면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보아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야곱은 이상한 마음의 과제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든 사람이든 어쨌든 그 상대방과 최선이 되려면 야곱에게서 요셉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20년 동안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던 것과 똑같이 눈으로 보고 마주하는 상대를 죽은 상태로 관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에는 바로 이러한 생각이 들어왔고 이로부터 어떤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이 르우벤을 볼 때 최선은 20년 간 요셉을 죽었다고 여겼던 것처럼 르우벤을 죽은 상태로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함께 사는 르우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르우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다고 여겼던 것처럼 르우벤이 죽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이것이 르우벤에게도 가장 좋은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입니다. 사업을 할 때 사업에 가장 좋은 일은 마음이 사업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20년 간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업을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이 세상 것에 대해 100%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요셉을 만난 뒤로는 칼로 무 자르듯이 세상에 대해 주체성을 발휘하기를 그만둡니다. 야곱에게 요셉은 하나님 주권의 증거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는 방식은 상대하는 대상이 요셉처럼 죽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고, 사건을 대하는 방식이고, 문제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창세기 46장까지 오면서 보았던 인물들 중 야곱은 세상을 향해 가장 열정적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랬던 야곱이 이제 세상을 향한 열정을 제로로 놓고 살아야 하고, 그렇게 되어도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경험적 진리 앞에서 처음으로 발을 내딛게 됩니다. 다만 야곱에게는 그렇게 살아온 백삼십 년 간의 기질이 있습니다. 야곱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증거요 상징입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는 ‘과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세상이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제 야곱은 애굽으로 이주하고 있습니다. 다만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삶의 터전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고, 내가 판단하지 않고, 내가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않고, 그래서 좋음을 추구하고 나쁨을 거부하고, 얻은 것은 지키려고 하고 빼앗긴 것은 되찾으려 하는 일련의 주체적인 인격성이 하나도 개입되지 않아도 정말로 삶이 괜찮은가?’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요셉의 삶을 보자. 내가 가장 사랑했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에 대해 하나님은 나의 주체적 모든 역량이 다 동원되어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자리까지 요셉을 이끌어 가셨다. 이 증거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야곱은 자기 주체성대로 백삼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은 ‘이제 내가 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고, 내가 판단하지 않고, 내가 끌어당기거나 거부하지 않아도 삶이 가능한가?’라고 두려워합니다. 낯설고 어색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100% 삶이 이끌려 가는 이상하고도 낯선 세상에 들어와서 제일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상대하는 사람을 마음에서 죽은 것처럼 여기면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색하기 짝이 없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아 야곱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이란 처음으로 관계를 돌리자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루스 들판에서 야곱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이제까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왔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루스 들판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던 하나님과 개인적인 첫 만남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로 돌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루스 들판에서 야곱은 형 에서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고 있는 중에 사닥다리 환상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때 지금 느끼는 낯설고 어색한 세상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28장 15절을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에게 다 적용되었습니다. 요셉이 죽은 줄로 아는 동안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계획을 다 이루고 계셨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결과를 보고 루스 들판에서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야곱의 마음에서는 자기 삶이 죽어야 했고, 자기 미래가 죽어야 했으며, 자기 인생이 죽어야 했습니다.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랬다면 바로 앞에 섰을 때 백삼십 년을 험악한 세월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과분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살지 못했기에 백삼십 년 만에 자기의 주체성을 버리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제일 어려운 일은 내가 지금 마주하는 상대 앞에서 주체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남편이라고 해봅니다. 내가 남편을 상대할 때 하나님의 주권은 남편의 머리털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이 물 샐 틈 없이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상황에서 남편을 상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기에 내 주체성이 남편에게 개입되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던 것처럼 내 마음에서 눈앞에 있는 남편이 죽은 상태와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나로 인해 막히지 않고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남편을 보면서 ‘당신 이래도 되겠어?’라고 말한다면 벌써 주체성이 개입되고 판단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능해?’라고 말할 때 그 마음은 내가 좋아하는 돈을 벌어오지 못함을 무능하게 여기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줄 수 없는 것을 무능하게 여기고, 내 방식대로 자녀들을 교육하지 못함을 무능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 주체성이 개입될 때 하나님의 주권은 방해받습니다. 남편은 나의 태도에 반응할 것입니다. 설령 남편은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100%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남편은 그러한 나의 태도에 반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남편을 이끌어 가시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야곱이 백삼십 년 동안 세상을 향한 주체성의 달인으로 살아왔듯이, 우리에게도 이 세상을 향한 주체성의 발동은 체질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던 것처럼, 내 마음에서는 남편이 죽은 상태로 상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세상으로 처음 발을 내디디면서 ‘이래도 될까? 정말로 제삼자가 되어도 될까? 마주하는 가족들이나 마음에 담고 살았던 사람들을 구경하듯이 관계해도 될까? 이래도 인생이 되고 삶이 될까?’라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요셉이라는 하나님 주권의 증거가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난생처음 맞이하는 자기의 열정적인 세상을 향한 주체성이 죽고 도저히 그 주체성을 발휘할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자기 주체성으로 상대할 대상이 없는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육체적으로 맞이하는 모든 대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끌리게 됩니다. 야곱은 백삼십 년 만에 이런 낯설고 어색한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낯설고 어색한 세상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며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야곱의 마음속에서 요셉이 죽었듯이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육체로 상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 마음에서 그 사람을 죽은 것처럼 상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루스 들판에서 야곱에게 사닥다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는 한 요셉을 죽은 자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야곱의 경우는 요셉이 실제로 죽었다고 여겼기에 마음에서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사람을 마음에서 죽은 자처럼 상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이 땅에 머물러 있으면 절대로 지금 상대하는 사람을 죽은 자로 여기며 관계할 수 없습니다. 내 주체성이 그 사람과의 관계에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방해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하늘로 빼내야만 합니다. 마음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만 몸으로 상대하는 사람이 마음에서 죽은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0년 동안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은 죽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주체성의 달인이었던 야곱의 관여가 차단되었습니다. 야곱의 관여가 차단되었기에 100% 하나님의 주권만으로 요셉의 인생은 이끌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내 마음속에서 죽은 자처럼 여겨짐으로써 내 주체성이 그를 향해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주권은 내가 상대하는 사람에게 내려올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사닥다리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여야만 이 세상에서 몸으로 상대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내 마음속에서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럴 때 몸으로 만나는 상대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거침없이 실행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어색하고 낯섭니다. ‘나의 주체적인 생각과 판단과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지 않아도 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두려움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요셉의 인생은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이요 증거가 됩니다. 성경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인물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말씀 속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벽하게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신다는 것에 대한 상징이요 증거입니다. 이 요셉이라는 증거가 예수님에게서 완성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끌어안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끌어안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끌어안음으로써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면 세상에 대한 주체성을 발동하던 내가 죽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닥다리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야곱이 끌어안은 요셉은 하나님 주권의 상징이자 증거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끌어안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살 필요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어도 된다. 이 세상은 내 속에서 죽어있어도 된다. 내가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은 내 마음에서 죽어있어도 된다.’라는 고백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가능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한 육체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내 주체성이 발동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여러분 마음속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던 것처럼 내 속에서 삶이 죽어도 괜찮을까?’라는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야곱도 그러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백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 이상한 세상에 대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인생을 품고 살아갑니다. 육체로 만나는 모든 대상을 마음에 품고 주체성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상대하는 모든 자들이 마음에서 죽음으로 주체성이 조금도 발휘될 수 없이 살아가는 이상한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과정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색하고 낯설 수 있지만 하나님의 확증이 주어진 세상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끌어안고 족하다고 말하듯이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을 끌어안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나의 주체성이 더 이상 발동될 필요가 없을 만큼 족하다는 고백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도 영광의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며 그 하나님께 내 주체성을 100% 투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이 마음에서 죽게 된다면 요셉에게서처럼 하나님의 주권은 펄펄 살아서, 내가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에게 미치고 그들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음으로 당연히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져야 할 이 세상을 가장 편안하고 가장 능숙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