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전의 그림이다. 황전이 미술 교재용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라고 한다.

황거채는 황전의 아들이다. 둘은 송나라 궁실에서 근무한 화가로, 그의 그림은 송의 화원 화가의 기본이 되었다. 화려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후 중국의 화조화의 하나의 맥을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진다.

황전(黃筌903-965)
사천성 성도 사람으로 자는 요숙(要叔)이다. 황전이 태어났을 때는 당의 휘종을 따라서 사천(촉)으로 피난 온 화가들이 많이 머물고 있었다. 907년에 당이 망한 후에 서촉은 오대의 여러 왕조의 통치를 받았지만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휘종을 따라온 화가들도 사천에서 살았으므로 촉은 중국회화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태어난 황정은 조광윤에게 화조화를 배웠다.
뛰어난 그림 솜씨로 청년기부터(17세에서 22세까지) 전촉-후촉의 궁중화가가 되었다. 궁중화가는 궁실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왕실의 취향에 따라서 황전의 화조화는 극도로 사실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으로 그렸다. 다시 후당(後唐 925-933) 때도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천에 머물렀다. 32세 때 서촉에서 한림원 대조가 되었고, 그 외에 여러 고위직 벼슬을 하였다. 놓은 벼슬을 살면서 그림을 그린 황전은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들인 황거채와 황거보도 궁중화가로 황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아버지의 화풍을 이었다. 965년에 서촉이 북송에게 항복하였을 때더 황전 부자는 서촉 왕실을 따라서 북송으로 갔다. 북송에서도 화원화가로 활동하였다. 송태조 조광윤이 황전을 높이 예우하였으나 965년에 63세로 죽었다. 그러나 황전은 황전화파라는 화조화에서 하나의 유파를 만들면서 송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황전의 그림을 심괄(송나라 때의 미술비평가)은 이렇게 평하였다.
“황전 일파의 꽃 그림은 오묘함이 채색에 있다. 용필이 매우 새롭고 섬세하여 거의 먹의 흔적인 드러니자않으면 단지 옅은 색으로 그리는데 이것을 사생(寫生)이라 한다.”
황전은 먼저 구륵을 그리고 오채를 칠한다. 고 설명하였다. 황전일파의 그림은 서희의 묵필화와 비교하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황전의 그림을 부귀하다고 하여 황전부귀 서희 야일(黃筌富貴 徐熙野逸)이라고 말한다.
황전의 은 왕실 소유의 진귀한 새와 짐승, 기이한 꽃, 괴석을 그렸다. 그의 그림의 심미취향은 왕공 귀족의 취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부귀를 간접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사생진금도(寫生珍禽圖- 곤충과 조류, 거북 등 모두 스물네 마리의 동물을 그렸다. 필법이 공교 섬세하고, 조형이 정확하다. 채색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새의 자태도 각기 다르다.)가 그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도 선묘의 필법을 부각시키지 않고 형체의 질감을 표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색을 칠하면서 옅은 먹선이 가려지지 않도록 채색한 위에 다시 구륵을 그렸다. 이것은 후대 화가들에게 공필중채화법(工筆重彩畫法)의 하나가 되었다.
황거채(黃居寀)는 황전의 넷째 아들로서 황전화풍을 이어받아서 화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은 산자극작도(山鷓棘雀圖)이다.
황전화파의 화조화는 북송 궁전에서 100년 이상이나 지배하였다. 많은 화가가 황전화풍으로 그렸으나 매너리즘에 빠져서 진전이 없었다
*** 당의 휘종이 황소의 난을 피하여 사천으로 피난을 갔을 때 많은 화가들도 따라갔다. 황제가 환궁을 한 후에도 화가들은 사천에 머물렀다. 오대 시대에는 중국회화사에 사천은 하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송이 건국된 후에 사천화파는 남당 지역을 화가들과 중국 회화의 뿌리가 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좋은글 잘 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