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는 누구인가,’ 타자에 대한 평가속의 나 >
1. OOO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복잡하다. 또한 누구에게 이 질문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대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이 있다. 정치인들이든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이든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한 인물, 사상, 글, 입장에 대한 평가란 이렇듯 언제나 엇갈린다.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또는 트럼프 지배를 악몽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그들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품고서 여전히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유명한’ 사람뿐인가. 아니다.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누군가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단일하지 않고 종종 상충적이다.
2. 왜 이렇게 우리의 평가는 엇갈리는 것인가. 누군가에 대한 평가는 결국 한 사람의 이 세계를 보는 보기 방식과 가치관에 의해서 좌우되기에, 결국 ‘자서전적' 일 수밖에 없다. 즉 타자에 대한 평가란 ‘나’를 담아내는 행위다. 요즈음 한국 신문이나 SNS 포스팅을 읽다 보면 타자에 대한 평가란 결국 자신에 대한 평가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역사에서 지극히 상충적인 평가를 받은 정치인이나 사상가들은 무수하다. 그러한 사상가 중 한 명이 자크 데리다다.
3. 자크 데리다는 갖가지 찬사를 받기도 했고, 무수한 오해에 평생 시달리기도 했다. 2002년 미국의 한 주간지 <엘에이 위클리(LA Weekly)>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는 데리다에게 “당신과 당신의 저작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잘못된 이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 물음에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의미가 없고, 텍스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는 ’회의적 허무주의자’라고 나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틀렸고 어처구니없는 것이며, 35년 전에 시작한 나의 작업을 오독한 것이다. . . 나의 글을 주의 깊게 있은 사람이라면 내가 읽는 텍스트들에 대하여 나는 전적인 존중, 그리고 그 텍스트에 대한 인정과 믿음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4. 이 인터뷰에서처럼 데리다에 대한 이러한 오독과 오해는 그가 살아있을 때나 그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데리다에게 붙여지는 부정적 표지는 셀 수 없이 많다.
• 회의적 허무주의자
• 난해한 이론가
• 사적인 풍자가
• 진리, 정의, 대학, 그리고 중요한 제도들과 가치들의 적
• 반계몽주의자
• 상대주의자
• 반(反)이성주의자
• 컴퓨터 바이러스
• 젊은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위험한 자
• 지적 테러주의자
5. 그런가 하면 데리다 에게 붙여지는 긍정적 표지도 풍성하다.
• 생명의 사상가
• 기도와 눈물의 사람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살아있는 철학자
•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
• 세계 시민
• 경계 없는 사상가
• 아포리아의 사상가
• 차연의 사상가
• 철학자-해체자
• 어떤 질문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상가
• 남아공의 아파르타이드와 인종차별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비평가
6. 2004년 10월 9일, 자크 데리다의 죽음 후,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실은 74살이었던 철학자 데리다의 죽음을 알렸다. 시라크 대통령실은 데리다를 “우리 시대의 지성 세계에서 주요인물 중 한 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후 세계 다양한 신문에 나온 데리다 부고를 살펴보면 두 가지 극단적인 평가로 나뉘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영국 신문 <가디언(Guardian) >은 2004년 10월 11월 자에 영문학 교수인 데렉 애트리지와 철학 교수인 토마스 볼드윈이 쓴 장문의 부고 기사를 출판했다. 가디언은 “자크 데리다, 우리에게 언어의 의미와 미학적 가치들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는 해체 사상의 논쟁적 프랑스 철학자”라는 제목의 매우 긴 부고를 출판했다. 이 부고는 데리다의 중요한 사상만이 아니라, 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한 인간으로, 선생으로, 학자로서의 다양한 데리다의 모습들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가디언의 부고는 프랑스의 <르몽드>에 난 부고와 함께, 데리다에 대한 복합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 부고들이다.
7. 반면 매우 부정적인 부고들도 있다. 이중 <뉴욕타임즈>의 부고는 논쟁을 일으켰던 경우다. 2004년 10월 10일, <뉴욕타임즈>는 작가인 조나단 캔델이 쓴 “자크 데리다, 난해한 이론가, 74세에 파리에서 죽다”라는 제목의 부고를 냈다. 캔델은 이 부고에서 데리다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부고는 ‘해체’ 개념을 근원적으로 왜곡시키는 이해를 담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를 ‘진리와 의미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하면서, 해체는 ‘파악하기도 힘들고 유행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라며 데리다의 주요 사상 자체를 폄하했다.
8. 10월 10일 뉴욕 타임스에 데리다 부고가 나오자, 이 부고에 대하여 문제제기 하는 학자들이 뉴욕타임즈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뮤엘 베버와 케네스 라인하르트의 이름으로 된 그 편지는 <뉴욕타임즈>에 10월 13일 자에 실렸다. 이 편지는 가야트리 스피박과 에릭 산트너 등 300여 명의 학자, 건축가, 예술가, 음악가, 그리고 작가들이 서명을 했다. 이 학자들은 데리다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의 한 명”이며, “아파르타이드와 인종차별에 대한 한결같은 비판자”라고 평가한다. 이어서 데리다를 폄하하는 것은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하이젠버그”와 같이 중요한 사상가들을 부적격한 사상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물론 신문은 데리다와 같이 심오하고 복잡한 사상을 지닌 학자에 대한 해석을 논하기에 적절한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뉴욕 타임즈”와 같이 세계적으로 읽히는 영향력 있는 신문에서 데리다를 그렇게 폄하하고 왜곡하는 부고를 그대로 싣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데리다에 대해 심각한 곡해를 하게 할 기능이 있기에 이러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9. ‘나’는 누구인가. 내가 보는 나,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무수한 ‘나’들이 존재한다. 그 ‘나’는 결코 고정된 존재(being)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존재 (becoming)일 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어떤 특정 인물에 대한 상반된 평가들이 있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의 글이 담아내는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입장 등에 대하여 누구나 동조할 것이라는 기대도 별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는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언제나 오역과 오해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또는 특정인에 대한 상충하는 평가들은 우리의 통제-너머에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인간관, 세계관, 종교관, 가치관 등에 의하여 구성되는 관점과 시선으로, 오로지 '자기만큼' 살아갈 뿐이다.
10. 이 점에서 타자에 대한 평가속에서 우리는 결국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사상과 관점을 이해하고 지지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기대지평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복합적으로 보지 못한 오해와 오역, 또는 상이한 입장을 만날 때, 물론 아쉽지만 크게 슬퍼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 평가속에는 결국 ‘나’의 깊이와 넓이,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나의 이해와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기에 ‘나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무리 입장이 달라도 우리 각자는 간혹 겹치기도 하고 또한 엇갈리기도 하며, 결국 이 세계에서의 삶을 함께 걸어가는 운명공동체로서의 ‘동료 인간’이라는 것—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