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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비만아였던 어린 시절
그 글 밑에는 회원들의 답글이 줄을 이었는데 “그 청년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스스로 ‘내가 했습니다’라고 나설 사람이 아니니 굳이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마라”거나 “대학 다닐 때 인연을 맺은 대구의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는 사람이다”라거나 “주말에는 봉사활동을 하는 훌륭한 청년이다”라는 내용들이었다.
연수동이라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아닌가. 그 뒤에도 나는 간간이 지역신문 등에서 비슷한 미담을 읽었는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모두 같은 한 사람, 바로 이영기(25)씨였다. 우리 가족은 우연한 기회에 한동네에 사는 이영기씨와 친해졌고 지금은 가족이 모두 ‘빵기’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요즘은 밤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잠깐 만나, 송도유원지 근처 노점상 아주머니에게 커피를 사서 마시기도 하는 것이 우리 둘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그동안 이영기씨에게 많은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심 “이제 그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새삼 인터뷰랄 것도 없이 원고를 쓸 자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며칠 전 어느 한산한 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아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사람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교만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한때 프로볼링 선수기도 했던 건장한 체격의 이영기씨가 어릴 적에는 ‘대퇴골두무혈성괴사’라는 병을 오랫동안 앓았다는 것이다(물론 지금은 깨끗하게 나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어머니가 영기를 등에 업고 학교에 다니셨는데, 당시 착용한 보조기는 요즘과 달리 무게가 20kg이나 되었으니 어머니는 65kg도 넘는 영기를 업고 다니신 셈이다. 이야기를 듣던 내 마음이 다 숙연해져서 “너 참 고생 많이 했구나” 했더니 영기는 “고생은… 어머니가 하셨지요”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식당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영기씨에게 짙게 배어 있는 어머니의 향기는 ‘어머니와 딸처럼 꼭 닮은’ 영기의 여자친구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거의 움직이지 못한 생활로 인해 기형적 비만아인 영기를 철딱서니 없는 어린 친구들이 어떻게 대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영기는 “그때 설움을 하도 많이 당해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괜히 도와주고 싶은가봐요”라고 했다.
“몸이 아프면 똑똑하기라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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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어려운 학교에 어떻게 전학을 했어? 인천시장 빽으로도 어렵다는데….”, “시험 봐서 붙었다니까요.”, “그래? 너 그럼, 정말 공부 잘했구나. 그 시험에 붙었을 정도의 실력이면 지금쯤 서울대 교수를 해야지, 왜 이러고 있어?”, “그런데… 중학교에 가면서부터는요. 아, 이거 참, 말하기도 민망하네. 하여튼 중학교 동창생들은 지금도 멀리에서 저 보면 도망간다니까요.”
영기의 지금 체격이 중학교 때의 체격이라고 했다. 전교생 중에서 가장 큰 체격이었다. 병이 다 나아 중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 때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만났으니 그 복수심이 어떠했으랴. 쿵푸·검도·합기도… 운동이란 운동은 다했고 당연히 학교에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짱’이 되었다. 그러나 영기가 ‘짱’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좀 다르다. 힘이 센 친구들이 자기보다 힘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님이 “힘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도 이영기씨의 좌우명이다. 아직까지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상대를 두들겨패거나 친구들을 괴롭혀 돈을 빼앗거나 한 적은 “절대로 단 한번도 없었다.”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놈들이 바로 영기의 밥이었다. “제가 집에 늦게 들어오니까, 부모님들이 거의 매일 저녁 저 찾으러 온 동네를 다니셨어요. 그때 부모님들이 그렇게 애써주셔서 그나마 제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때 볼링선수가 된 이유를 물어보니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죠? 학교에서 수업 일찍 끝내준다고 해서요”라고 말하면서 계면쩍어했다. 그렇게 시작한 볼링선수 생활이었지만 그 속에서 영기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훌륭한 경험을 했다. 어릴 적 소풍 가는 날이면 자신을 산꼭대기까지 업어다주곤 한 ‘존경하는 외삼촌’의 충고를 따라 미친 듯이 연습에 몰두했다. 결국 실력으로 다른 선수들을 모두 따라잡았고 팀의 주장이 되었다. 뚱뚱하던 몸의 살도 그때 싹 다 빠졌다. 처음에는 눈총을 보내던 코치도 영기를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 “열심히 하면 후회가 없다”는 교훈을 영기는 그렇게 깨달았다.
운동선수의 의리?
대학 때까지도 열심히 선수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볼링선수가 아니다. 각 시·도마다 프로볼링팀이 하나씩밖에 없는데 이영기씨가 입단한 팀이 해체돼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팀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선수의 자리를 빼앗는 격이어서 포기했다. 운동선수의 ‘의리’란 바로 그런 것인가….
대학을 마치고 ‘노래방’을 열심히 운영하던 무렵, 어렵사리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대학 때부터 꿈꾸던 드림카 ‘엘란’을 샀다. 유일한 국산 2인승 로드스터인 ‘엘란’에 대해서도 할말이 책 한권 분량쯤은 된다. 차에 대한 취미를 살려 중고차 매매상에서 잠시 경험을 쌓았고, 지금은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자동차 수입관련 전문회사를 세워 꿈에 부풀어 있다. 퇴근 뒤에는 부모님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밤늦도록 일을 돕는다.
이렇게 훌륭한 청년이 요즘은 나를 “종강이 형”이라고 부른다. 그런 동생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런 청년과 한동네에 사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거린다. ‘빵기야,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형한테 빨리 연락해라. 나도 재빨리 ‘정의봉’을 들고 달려가마.’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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