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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 눅 11:1-4
우리 교회가 전주로 이전한 2000년 10월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새벽 기도가 끝나고 개인기도 시간에 슬피 울며 기도하는 나이 많은 권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의 기도는 너무나 애절하고 긴박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냥 죽으면 안 되요, 너무 불쌍해요, 주여,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살려주세요.” 권사님의 기도소리가 얼마나 크고 간절했던지 목사님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필시 권사님 가족 중에 급환으로 입원을 한 사람이 있거나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있나 보다 짐작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권사님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권사님, 누가 지금 위급한가요?” 그러자 권사님이 울먹이면서 “목사님, 너무 불쌍해요, 꼭 살아나야 해요. 목사님도 기도해주세요.” “그럼요, 저도 기도할게요. 그런데 누가 그렇게 위급한가요?” “목사님은 텔레비전도 안보세요? 가을 동화에 나오는 은서가 지금 위급한데요.” 여러분, 웃었습니까?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도 그렇게 감동하고, 사실처럼 받아드리고 진실하게 기도할 수 있는 그 순수한 마음이 부럽습니다. 이 시대를 가리켜 감정이 메마른 시대라고 합니다. 정서가 불안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며 마음들이 굳어져서 남의 슬픔에 동정하지 않으며 남의 기쁨에 박수치지 않는 시대입니다. 마 11:17절에 예수님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신 것처럼 감정들이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인격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먼저 감정의 문을 두드리시기에,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사람은 은혜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 설교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에게 “당신은 왜 기도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성도가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있어 기도생활은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어떤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너무나 자연스럽게 기도의 삶을 사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주님을 자주 봅니다.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주님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새벽 미명에 기도하시는 주님을 수차례 목격할 수 있습니다. 때론 온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먼저 기도하시고, 메시야의 첫발을 내디디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기 전에도 주님은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도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있으면서도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있으면서도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님은 기도로 사셨고 기도로 그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로마서 8:34절을 보세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 믿으세요?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이 왜 그렇게 기도에 집착하십니까? 기도의 능력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큰 가를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2천 년대 초일 것입니다. 장 크레티엥 총리를 비롯하여 기자 및 선거관계자와 승무원을 포함 68명이 탄 ‘에어 캐나다’ 전세 비행기가 연방 총선 유세를 위해 온타리오주 노스베이를 떠나 핼리팩스로 가던 도중 위기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기내의 모든 불이 꺼지고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 조종사가 큰일 났다고 하면서 방송으로 긴급하게 말했습니다. “승객 여러분, 지금은 비상입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다 죽게 됩니다. 비상착륙을 해야 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 기도해 주십시오.” 순간 불안과 초조 절망과 좌절이 기내를 엄습합니다. 모두가 두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비행기는 약 15분 후에 퀘벡 공항에 무사히 비상착륙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조종사의 능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기도의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만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만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평상시에 기도생활을 잘하라고 합니다. 기도를 비상 낙하산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조종사가 비상 낙하산을 펼 때가 어떤 상황입니까? 너무나 위급한 상황입니다. 비행기를 버리고라도 조종사가 살아야 하는 아주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마치 비상 낙하산처럼 사용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 다 해보고 마지막으로 기도를 사용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기도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비상 낙하산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항상 하나님을 묵상하며 쉼 없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적어도 하루 중 기도를 위한 특별시간을 정하여, 그 시간만이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을 시작하기 전, 식사 전후,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당신이 압박을 받거나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 때는 그 즉시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루 종일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하나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온통 하나님께 사로잡혀 사시기 바랍니다. 힘들 때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지 있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세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지체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그러나 여러분이 잘 나갈 때도 기도하세요. 아무 문제가 없는 평상시에도 쉼 없이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즘도 카톨릭이나 루터교, 성공회 같은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기도문을 사용합니다. 몇 개의 기도문을 돌려가면서 읽는 기도를 합니다. 물론 개신교의 눈으로 보면 좀 이상하긴 합니다. 그런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으로 하는 기도는 대단히 전통 깊은 기도의 방법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주의 기도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는 없습니다. 10여 년 전에 중국 연변에 있는 과학기술대학 총장 김진경 박사가 북한에 들어갔다가 40일 동안 억류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안 나오더랍니다. 내일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기도문만 수백 번 계속 외웠다고 합니다. 그는 풀려난 후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주기도문의 능력이 그렇게 대단한 줄 미처 몰랐다.” 여러분, 기도가 잘 되지 않을 때 주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납니다. 문제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형식화 되어 그 깊은 의미를 잃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점에 대해 일침을 놓았습니다. “주기도문은 오늘 이 시대의 순교자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찬송으로 주기도문의 기도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셨습니까? 아니면 주기도문을 암송하셨습니까? 우리가 주기도문을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상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예수님은 보통 때처럼 기도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기도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주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을 겁니다. 그걸 제자들이 보고 주님이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 중 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았을 겁니다. 주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기도할 수 없을까 하고 부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었을 겁니다. 나도 저런 기도를 하고 싶다는 기도에 대한 목마름이 생겼을 겁니다. 기도를 통해 하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나누시는 주님을 보면서 그와 같은 기도의 비결을 알고 싶었을 겁니다. 제자들도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도 그들은 기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들의 기도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주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 없이 인간은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기도에 열심인 민족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는 물론이고, 복음을 전해 듣기 전에도 기도에 열심이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잘못되긴 했지만 기도하는 지성만큼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을 과거에 보내놓고 정한수를 떠놓고 장독대에서 빌던 풍습은, 해마다 입시 철에 고사장 문 앞에서 열심히 비는 학부모들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죤스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왜 기도하는가?하는 질문은 마치 뻐꾸기가 왜 밤에만 우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또 독수리는 왜 끝없이 창공을 치솟아 오르는가? 하는 질문과 다를 바가 없다.” 뻐꾸기가 밤에만 울도록 지음을 받았고, 독수리가 창공을 치솟아 오르듯이 인간은 기도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기도를 요구합니다.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교만 중에 교만은 기도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기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만큼 교만한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그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혹 기도하는 대상만 다르지 기도의 내용은 거의 흡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믿는 바가 달라졌는데 내용이 그대로라면 뭔가 좀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1절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의 뭐라고 요청했는지를 보세요. 당시 각 공동체마다 고유의 기도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카디쉬 기도문이나 18번의 축복 기도로 구성된 테필라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쿰란 공동체는 그들 나름의 찬송가와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 공동체도 그들 나름의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내의 기도문은 그 공동체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느낀 점은 유대교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쿰란 공동체나 세례 요한 공동체와도 구분된다는 점입니다.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공동체의 독특성을 나타내는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무엇을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믿는 지를 나타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기도의 깊이가 곧 신앙의 깊이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곧 신앙의 내용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제자가 예수님께 어떤 부탁을 했습니까?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곧 그들은 단순히 기도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기도가 무엇인지를 어릴 때부터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기도하는 것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에 대한 저술을 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지식은 중요합니다. 기도의 신학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심은 기도 자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기도의 열정이 일어나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절상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입문하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필수적으로 외웁니다. 교회 학교에서는 암송 시험을 치기도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쓰기 시험을 쳤습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 한 사람에는 선생님들까지 포함됩니다. 어찌 보면 그것도 기적입니다. 몇 십 년씩 예수를 믿었는데,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주기도를 하는데 암송하는 것도 아니고 쓰기 시험에서 틀린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보고 읽더라도 더듬거릴 수 있습니다. 혹 틀리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암송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주님은 기도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의 올바른 태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2천년 동안 흘러오면서 자신의 고백이 아닌 군중의 소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배나 모임이 끝날 때 그냥 의미 없이 외워지는 하나의 형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서 주기도문을 좀 천천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기도문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으로 대체하는지도 모릅니다. 개인기도 시에는 주기도문을 뼈대로 삼아 자기의 말로 살을 붙여서 기도하면 좋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아무튼 더 이상 주기도문이 우리로 인해 순교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주기도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절하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먼저 아버지입니다. 주님은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친밀감이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낯선 용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단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그가 쓴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읽은 성경은 “권세”라고 번역했지만, 공동번역성서나 표준 새번역성서는 “특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 알렸습니다. 로마서 8:14-15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아빠’라는 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학자인 예레미아스는 “아멘, 아멘”의 형식과 함께 “아빠 아버지”란 용어가 예수님의 고유한 언어 구사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있습니까? 도저히 그렇게는 부를 수 없다고요? 사실 저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유교 문화권에 살고 있다 보니 기도할 때도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예로 들어보십시다. “감사합니다.” 하면 충분할 것을 “감사드립니다.”라고 합니다. 그 정도야 큰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감사함을 드립니다.” 여러분, ‘감사’를 드려야지 ‘감사함’은 왜 드립니까? “감사함을 드립니다.”를 더 높이면 “망극하옵나이다.”가 되잖아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께 극존칭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아버지여"하고 부른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 받기를 바랄 것입니다. 아버지의 위대하심이 널리 알려지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의 자녀 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소원하는 게 너무나 당연합니다. 독일의 ‘본’에 ‘베토벤의 집’이 있습니다. 22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하여 박물관으로 보관한 이 집은, 1944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몽땅 불타버릴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관리하던 하셀바하 부부의 9시간 동안의 생명을 건 진화작업으로 불이 가까스로 꺼졌고 유품은 홀부프크성의 지하 보관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1959년에 퇴직하기까지 25년간의 재임기간 중 집을 폭파하겠다는 독일군의 위협과 박봉 속에서도 목숨 걸고, 베토벤의 생가를 지켜내어 1976년 9월 서독정부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이 ‘악성-음악의 성자’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이처럼 그 이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무얼 어떻게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원래 거룩합니다. 그러나 그냥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과 모범된 삶의 모습을 보일 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또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미래적이고 종말적입니다. 주님의 재림하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우리가 끌어당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임하기를 간구함으로써 그 나라를 바라볼 뿐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는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날 한 시에 아버지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성령을 통해 교회에 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만이라도 주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마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다면, 하나님나라는 요원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사명은 너무나 막중합니다.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3절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먹는 문제가 가장 중요함을 인식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하루 이상의 먹을 것을 소유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실감나지 않겠지만,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리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지 “풍요로운 잔치 음식”을 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나 국민들은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일이 없습니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그릿 시내가에 숨은 엘리야를 까마귀를 통해 먹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것 그 이상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해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것 말고도 더 주셨으면, 여러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입니다. 우리는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믿음의 식구들인 교회 공동체,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포함됩니다. 여러분 돈 많이 버세요. 정당한 방법으로 할 수만 있으면 많이 버세요.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은 물질적 축복을 지금보다 갑절로 받으세요. 그래서 잘 먹고 잘 사세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유용하게 사용하세요.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4절상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문 중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말씀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야겠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이웃을 용서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 살아야 인간입니다. 한자에서 인간(人間)을 ‘사람 인’자와 ‘사이 간’자로 쓰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 살 때에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거기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자라 온 배경이 다르고, 배움 수준이 다르고, 설사 그게 다 같다고 해도 사람마다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오해도 생기고, 다툼도 생기고, 미움도 생기고, 원수도 생깁니다. 여기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이는 절대로 더불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식구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필요한 것도 사실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용서를 안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같이 술 한잔하면서 털어버리는데 믿는 사람들은 꽁해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용서가 필요하듯이 여러분이 용서하지 못한 사람에게 용서가 필요합니다. 오늘이 저물기 전에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새날을 맞지 않기를 바랍니다. 용서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미움의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세요. 마태복음 6:14-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4절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이 세상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협조적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한 영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사이를 이간시킵니다. 뒤틀리게 합니다.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게 합니다. 같은 교회에서 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불신하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 배후에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칫하면 악한 영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불의의 병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자 옆에 앉아있던 개가 루터가 식사하는 모습을 열심히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손이 밥그릇으로 가면 눈이 밥그릇으로, 손이 입으로 가면 또 입으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루터가 개에게 감동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고기 한 점을 던져주었는데 정신없이 먹어치우고는 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루터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개가 내 손을 쳐다보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더라면 하나님은 내게 더 크게 감동하셨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만 주시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이란 사용할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혹 지금까지 기도를 의무로만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그 동안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였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소원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하나님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통로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다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버지께 용서받기 위해 먼저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까지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도록, 하루를 기도로 열고 기도로 닫는 성도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한다고 주여, 주여 하였지만, 우리는 언제나 내 욕심만을 구한 자들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조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주기도의 삶을 사는 온전한 기도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눅 11:5-13
2017년 12월 중순,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문을 열고 1년을 버티는 식당이 10개 중 6개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똑같이 시작해도 성공하는 식당이 있는 반면, 잘 안 되는 식당이 있습니다. 무엇이 식당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지을까요? 혜전대학교 호텔조리과의 강병남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음식점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를 잘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우선 “항상 밝은 표정으로 서비스를 잘 해야 한다.” “판매를 잘 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손익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앞에서 말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맛있어야 한다.” 식당이 아무리 예쁘고 서비스가 좋고 전략이 좋아도, 맛이 없으면 안 갑니다. 그러나 식당이 아무리 허름해도 맛이 있으면, 그 집은 대박이 난다고 합니다. 식당은 맛있어야 하고, 미용실은 머리를 잘 깎아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정성을 다해서 옷을 입고, 감동적인 표현을 쓰더라도, 잘못된 것을 구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바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어느 날 제자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은 그런 부탁을 해올 줄 알고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우리는 이걸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라 하여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주기도문은 암송의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너희가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며 주신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별 의미 없이 주절주절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기도는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터 기도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착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도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은 기도에 대해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저도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도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처음엔 멋모르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하여 끝낼 때 예수 이름만 붙이면 다 기도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가 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그게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 해온 기도의 내용 중에 수정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도에 대해서만은 자신 있으세요? 그래서 기도는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혹 뭘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으세요? 아니면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면서 무조건 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이 하는 기도에 전혀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지나친 자신감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보십시오. 삼층천의 은혜를 체험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런 엄청난 계시를 받은 바울조차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기도자로서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다소 이기적 속성을 안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게 가장 극명하게 표출될 때가 기도할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접하면서 자기가 지금껏 해온 기도에 대해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 줄 아시죠?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사람을 위한 기도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균형을 잡고 있습니까? 균형이 깨져있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위한 간구는 생략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다고 해도 형식적이고 인사말로 하고 지나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또 사람을 위한 간구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우리”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기도는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까? 나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나를 위한 간구에서 우리를 위한 간구로 기도가 조정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개인기도의 대부분은 거의 중보기도로 채워져야 합니다. 기도는 어떤 종교에나 있습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없을 겁니다. 또 기도하는 모습도 같을 수 있습니다. 타종교인들도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손 모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눈감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중에 뭐가 달라야 합니까? 기도의 내용이 달라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행복이 목적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외견상으로 보면 비슷할지 모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분명히 다릅니다. ‘양식을 구하는 것,’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먹고 힘 얻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 단순히 내 마음 편하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혀주신 겁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것,’ 단순히 살아가는데 있어 어려움 없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원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바람은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위해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하고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부족을 아는 것이 채움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자신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인식할 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해버리면 결코 진보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용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기도의 방법이나 자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의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 내용을 점검해 보았고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기도의 방법을 점검해야 할 겁니다. 주님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말씀하신 분량의 무려 세 배나 되는 교훈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가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기도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 모습은 어떻습니까? 기도는 하는데 삶의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삶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분명히 바뀌어야 하는데 바뀌는 조짐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겁니다. 하나는 기도의 내용이 잘못되었고, 다른 하나는 기도의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고, 기도의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 이르시되”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해 주님은 먼저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기도의 방법을 먼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5-7절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주님은 밤중에 떡을 빌리러 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면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9절 이하에서는 직설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반복하셨을까요? 물론 기도의 방법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방법을 바로잡지 않으면 기도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의 자세로 아버지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비유를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잠자리에 이미 들었는데 밤중에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친구입니다. 아무리 친구를 좋아해도 그 시간에 찾아오면 반가울 리가 있겠습니까? 설사 반갑지는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친구는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칩니다. “여보게,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는데 빵이 있으면 세 덩이만 빌려 주게나!” 한두 번 소리치다 말면 그냥 자리에 누워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소리치니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하여 누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발,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을 이미 닫아걸었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이불 펴고 누웠으니 일어나 도와줄 수가 없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시는 조그만 방 하나에 온 식구들이 누워 자던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자다가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또 자칫하면 식구들의 잠을 다 깨우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편이나 기분만 놓고 말하면 친구의 청을 들어줄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계속 바깥에서 소리치는 친구를 두고는 그 날 밤 잠자기는 것은 틀렸습니다. 차라리 빨리 요청을 들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비유의 결론을 간단합니다.
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빵 빌리러 온 사람은 체면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예의 찾을 때가 아닙니다. 왜죠? 찾아온 손님을 홀대하면 사람 축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전체의 망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죠? 정 안되면 라면이라도 끓여주면 되는 요즘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느 때나 돈만 주면 사먹을 수 있는 24시간 문 여는 식당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빵을 새로 굽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럼 손님이 시장한 채 많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는 빵을 얻는 길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계속 두들길 수밖에요.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빵을 줄 수밖에 없는데 그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그가 친구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간청하기 때문에 못 이겨서 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간청함”의 원어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나이데이아’는 부정 접두어 ‘아’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뻔뻔하게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그럽니까?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합니다. 간청하는 기도란 얼굴에 철판 깔고 구하는 걸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지금 영업사원에게 영업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기도의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간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주시면 고맙고, 굳이 안주셔도 괜찮아요.” 그런 자세로 기도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세로 기도하면 백날 기도해도 헛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청하는 기도를 하세요.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 씨름했던 야곱 같은 기도를 하세요. 홍해 앞에서 부르짖었던 모세 같은 기도를 하세요. 다곤 신전에서 최후의 몸부림쳤던 삼손 같은 기도를 하세요. 갈멜산 산상에서 죽기를 각오했던 엘리야 같은 기도를 하세요. 물고기 뱃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 했던 요나 같은 기도를 하세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진액을 쏟았던 예수님 같은 기도를 하세요.
9절 ‘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주님은 계속하여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보세요.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계속된 기도의 방법에 대한 연속된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후에 혹시 못 알아들었을까 봐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누가 주시나요? 하나님이.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누가 찾도록 해주시나요? 하나님이.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누가 열게 해주시나요?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믿으세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사실상 같은 의미이죠? 그럼 왜 주님이 같은 말을 세 번이나 거듭하여 명령하셨을까요? 왜 같은 뜻의 말을 반복해서 명령하셨을 것 같습니까? 물어보나 마납니다.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강조합니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고도 주님은 또 한 차례 반복하고 있습니다.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위 더 피플, We the People’이라는 백악관 웹사이트를 만들어 국민들이 각종 탄원을 올리도록 했습니다. 30일 동안 10만명 이상의 동의가 모일 경우 대통령이 그에 대한 답을 주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제도가 ‘청와대 국민 청원’이라는 것입니다. 30일 동안 20만 명 이상의 동의가 모일 경우에는 장관과 수석비서관을 포함한 정부 관계자의 공식 답변을 30일 이내에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지금까지 수십만 건 이상의 청원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청원에 대한 답변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습니다.
페이건이란 사나이가 감히 버킹엄 궁전에 침입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여왕이 잠에서 깨었습니다. 사나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탄원을 들어 주십시오” 여왕은 침착하게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앉았습니다. 호위병을 부르지 않고 침범한 사나이의 말을 듣겠다는 자세였습니다. 페이건에게는 4남매의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내는 가출하고 직업마저 회사의 감원 정책 때문에 나오게 되고 사회복지기관에 호소하였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자기를 정신병자로만 몬다는 내용입니다. 사나이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여왕은 호위병을 불렀으며 사나이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직업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엉뚱한 사건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의 탄원과 호소와 간구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마이클 페이건은 엄청난 무례를 범한 것입니다.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탄원의 길을 추진한 그 간절함에 여왕이 감동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언제까지 구하라구요? 받을 때까지입니다. 언제까지 찾으라구요? 찾아낼 때까지입니다. 언제까지 두드리라구요? 열릴 때까지입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까? 구하는데도 빨리 응답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찾는데도 자기가 생각하는 때에 찾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드리는데도 늦게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세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돈을 넣으면 몇 초 내에 물건을 내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카드를 넣고 몇 자 입력하면 돈과 명세서가 몇 초 만에 나오는 현금지급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자신의 뜻이 분명하신 분입니다. 확고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를 끝내기가 무섭게 응답해 주실 수도 있지만, 우리 당대가 아닌 자식 대에 가서 응답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분의 주권입니다. 그분께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써 행해야 할 것은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은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시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위임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달라는 대로 다 주셔야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노예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도 전혀 생각이 없는 노예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한 것을 무조건 들어주어야 한다면 하나님은 로봇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도 지능이 전혀 없는 로봇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마 우리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생각한 대로 잘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 불평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은근히 하나님을 부리려고 했던 것 아닙니까? 주님은 이 점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11-12절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주님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건 유치원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요즘은 시대가 악해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어디 그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행동입니까? 자기를 짐승같이 대했던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법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구요.” 그래요.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죽일 수 있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독을 머금고 있는 뱀을 주겠습니까? 자식이 알을 달라고 하는데 물렸다 하면 치명적인 전갈을 줄 아버지가 세상에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악한 존재인줄 아십니다. 그러나 자기 자식에게만은 선한 존재임을 아십니다. 자식 귀한 줄은 알고 자식에게는 어떻든지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줄 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서 악한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도저히 대조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렇지 않다는 말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래도 하늘 아버지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잘 보시면 13절은 두 개의 문장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가 뭡니까? “하물며”입니다. 우리 “하물며”를 강조해서 1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을 주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13절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성령을 받는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성령을 받는다고 했습니까? 구하는 자입니다. 아무나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라고 했으니까 “너희”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다 맞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 조건이 뭐예요? 하나님의 자녀여야 하는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요? 기도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을 기도해야 한단 말입니까? 성령입니다. 기도할 제목이 많겠지만 성령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을 구하는 기도가 몇 번째 순위에나 듭니까? 비교적 좀 우선하는 편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는 것만큼 더 절실한 기도 제목은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언제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어디서나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좋은 것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을 잘 보세요. 좋은 것과 성령이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다. 확실합니까? 마태복음 7:11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이라는 말 대신에 마태가 사용한 말이 무엇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령은 좋은 것 중의 좋은 것이요,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주시는 것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받기 위하여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재일교포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인 손정의 씨가 한국에 투자를 하면서 신문지상에 그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에피소드가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는 1974년 미국에 가서 어학연수 6개월을 했는데, 바로 그때 눈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에 돌아간 후 당장 미국으로 유학가겠다고 졸랐습니다. 그때 마침 아버지가 병환으로 피를 토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주변에서 만류했죠. 그러나 그는 고집을 부렸고, 기어코 떠났습니다. 미국에 가서 10학년에 편입했는데, 영어가 안 됩니다. 그래도 1주일 동안 밤을 새워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제 11학년에 올라가겠다고 요구합니다. 허락받은 후 그는 11학년 교과서를 3일간 동안 공부합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시 교장선생님을 찾아갑니다. 이제 학교에 더 이상 다니지 않고 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치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어이가 없는 듯 교장선생님은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내심 합격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느덧 검정고시일입니다. 시험지를 펴보니 앞이 캄캄합니다. 무엇보다 영어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감독관에게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온지 얼마 안 되어 영어가 딸리니 일영 사전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옥신각신하다 감독관이 교육청에 연락해서 허락을 받아줍니다. 그런데 오후 5시가 되니까 종료 종이 울립니다. 또 손을 들고 요구합니다. 사전 찾느라 시간이 모자라니 시간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자정까지 시험을 봤고 마침내 합격한 후 대학에 진학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경청 기도와 강청 기도를 균형 있게 구사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금식하고 작정하여 기도해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방법도 중요합니다. 기도의 자세도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주님은 벗에게 떡 빌리는 비유를 통해서 간청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개 취급을 당하여도 물러나지 않았던 가나안 여인 같이 강청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한 번 구해보고 관두는 것이 아니라 얻을 때까지 구하라고 했습니다. 몇 번 찾아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찾을 때까지 찾으라고 했습니다. 좀 두드려보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열릴 때까지 두드리라 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좋은 것 중에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인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구하는 것이 응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찾는 것이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두드리는 것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 여러분의 생애가 복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계속해서 귀찮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옵소서. 응답이 지체될 때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주실 줄 알고 감사함으로 계속 구하게 하옵소서.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이렇게 믿음으로 구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그분 자신의 인격이신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정말 좋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축복이 성도들에게 함께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 / 눅 11:14-23
희망이 사라지고 없어진 인생을 우리는 ‘막장인생’이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은 강원도 황지에 있는 탄광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수 백 미터를 내려간 깊은 땅 속에서, 온도는 40도가 넘는 깊은 곳에서 정해진 하루 8시간의 노동을 합니다. 한 번 들어가면 8시간 동안은 밖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온 몸에는 땀과 탄가루가 범벅이 되어서 아프리카의 흑인은 비교가 안 됩니다. 탄가루가 날리는 막장 안에서 먼지를 반찬으로 삼아 점심을 먹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일하면 탄가루가 폐에 쌓여서 진폐증이라는 직업병을 앓게 됩니다.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광부의 일생입니다. 이런 막장 인생을 살던 광부의 아들이 글을 썼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공표 되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가끔씩 '나는 커서 광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난 어차피 광부가 되었으니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커서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 하신다." 여러분, 아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 말씀은 희망 없는 막장 인생에 대하여 광부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절규가 아닐까요? 오죽하면 거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할까요? 이들 대부분은 이렇게 희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희망을 잃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어디를 보아도 탄가루가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아득하기만 합니다. 숨을 쉴 수 없으며,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어떤 종류의 탄가루가, 얼마나 짙게 덮여 있나요? 우리의 앞을 가리고 있는 탄가루 때문에 희망도 포기하고, 삶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런 형편에 처하여 있으면서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습니까? 희망을 포기하고 막장인생이나 잘 살라고 할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희망을 포기하고 막장인생이나 살다가 그렇게 가야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절반은 찾은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희망이 없음에도 희망이 없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주시는 분이 여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희망을 주시는 분이 여기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만나는 주님은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주님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히셨습니다. 특히 당시 지도층 인사들과 자주 갈등을 빚곤 했습니다. 사회 지도층과는 물론이고 종교 지도자들과도 심심찮게 충돌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게 재연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왠지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습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과 갈등이 일었습니다. 그들이 누군지를 누가가 꼬집어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일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림을 받지만, 자신의 삶을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게 뭐겠어요? 말씀하시는 주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입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목적으로 주님을 몇 차례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덫에 걸려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이 방법을 달리했습니다.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주님을 귀신들린 사람으로 몰았습니다. 마치 전에 우리나라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먼지 털다가 털다가 안 되면, ‘간첩’으로 ‘빨갱이’로 ‘좌익’으로 몰아서 매장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도 자신이 변할 수 없어 변화를 외치는 설교자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기도에 대한 말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시며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이 뭡니까?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주님은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유를 들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간청하라고 했습니다. 응답이 떨어질 때까지 구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 기도의 결과로 귀신들린 자를 고친 것처럼 비쳐집니다. 사실 주님이 기도의 응답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아니겠지만, 주님은 늘 기도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가 되기를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신앙의 기초이면서도 뼈대요 틀입니다. 다른 것 다 잘해도 기도 없고 말씀 없으면 그만입니다. 기도와 말씀 없이 잘할 리도 없겠지만, 혹시 얼마간 잘한다고 해도 그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승부 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즐거움에 빠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4절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이제 본격적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건의 발단부터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귀신이 들려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못하게 되었는지 중간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되, 말 못하게 된 것이 귀신들림 때문임은 분명합니다. 그가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왔을 리는 없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를 찾아가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그를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자 그의 입이 열렸습니다. 그 동안 입이 있으되 말을 하지 못했던 그가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굳었던 혀가 풀려 예수님과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말하지 못하는 사람과 우리와 닮은 점이 없을까요? 입은 있으되 말하지 못하는 사람과 혀는 있으되 기도하지 못하는 우리와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흉볼 때는 혀가 풀립니다. 이웃과 다툴 때는 입이 열립니다. 어려운 쌍시옷(ㅆ) 발음도 잘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만 서면 기도문이 막힙니다.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혀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게 혹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나님 앞에서 말문이 열리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입이 열리고, 여러분의 입술이 떨어지고, 여러분의 혀가 풀려서 주님과 맘껏 대화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원 없이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소원을 아뢰기를 바랍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여러분의 기도문이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하늘 문이 열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에게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처한 현실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도하지 못할 환경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수 없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기도하기 싫어하는 성도가 있을 뿐입니다. 사탄은 어떻게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훼방을 놓습니다. 사탄에게 붙들려 맹인이 되면, 교회는 나오나 주님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나면,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기는 하나 말씀은 듣지 못하게 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나면, 예수는 믿고 신앙생활은 하나 기도는 못하게 됩니다. 사탄은 참 간교합니다. 똑같은 방법으로만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듭니다.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부분을 유혹하여 들어옵니다. ‘성경만 읽으면 되지 기도는 적당히 해라.’ ‘기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누구 봐라, 생전 기도 안 해도 교회 잘만 다니지 않느냐?’ 얼마나 그럴듯하게 속삭이는지 모릅니다. 마귀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마태복음 26: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바울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4: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베드로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러분, 마귀를 이기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사탄을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깨어 기도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게 주님의 방법이고, 이게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방법이고, 또한 우리들의 방법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주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이 설명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사실만 간단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기적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무리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놀랍게’란 ‘기괴하고 이상하다’는 뜻입니다. 원어 ‘다우마조’ 역시 ‘이상히 여기다’는 뜻입니다. 성서에서 ‘놀랍게 여기다’는 말은 긍정적으로 쓰일 때가 있고 부정적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쓰인 것 같습니까? 긍정적으로 쓰였습니다. 단순히 놀랐다는 표현이기 보다는 ‘칭찬했다, 칭송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우러러보았다는 말일 거고, 그런 능력을 예수님한테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15-16절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이런 일이 있으면 주위에 배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칭찬받고 있으면 꼭 뒤에서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사실을 두고 이의를 제기한 게 아닙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어떤 꼬투리를 잡았습니까? 누구의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만 보면 상대방이 인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 상대방이 인정받으면 여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이유를 답니다. 꼭 문제를 삼습니다. 우리 안에 은근히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교인들에게 물었더래요. "여러분 중에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당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때 맨 뒤에 앉아 있던 나이가 가장 많은 할아버지가 손들었습니다. 놀란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할아버지는 정말로 없단 말입니까?" 그 때 할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옛날엔 나도 많았는데, 이젠 다 죽어서 없어!" 그렇습니다, 남을 칭찬하는 것에 대해 인색하고, 남이 높아지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지 않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게 발전하면 시기심으로 나아갑니다. 시기심은 미움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미움은 언젠가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먼저 입술의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아시죠?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파멸하는 길이라는 걸요.
예수님을 싫어하는 자들의 반응이 크게 둘입니다. 첫 번째 반응은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 왔다고 합니까?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서 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기적을 행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예수님에 대해 ‘두고 보자’는 입장입니다. 좀 더 두고 보면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고, 그 후에 입장을 정리해도 늦지 않다는 신중한 입장입니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귀신의 왕이라 불리는 바알세불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언제부터 바알세불을 귀신의 왕으로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가장 유력한 견해는 열왕기하 1:2절에 나오는 ‘바알세붑’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알”은 일반적으로 ‘주’로 해석되고, “세불”은 ‘높은 곳’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다른 이름이 바알세불이라기보다는 그 뜻만 따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두고 보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하늘로서 오는 표적”입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친 것만 갖고는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좀 더 확실한 무엇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징표를 보여 달라는 것이죠. 성서에도 보면 하나님께 표적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 기드온, 히스기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대단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징표를 요구했습니다. 원래부터 유대인들은 표적 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표적이 나타나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유대인이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죠? 1:22-23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반응은 오늘날도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무조건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신화적 존재라고 합니다.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도 다 가짜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것을 두고 베드로가 잠이 덜 깨서 착각했다고 합니다. 잠결에 잘못 봤다는 것이죠. 성서를 이리저리 짜 맞춘 책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기독교의 경전이지 인류의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이나 아무 종교나 잘 믿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그래도 기적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기적 자체까지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실존을 부인하지는 않았는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것까지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여러분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서 그렇게 말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참 속이 탑니다.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어야 말이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은 하지만 실재로 꺼내서 보여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묘책이라도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말씀을 잘 보세요. 대답하지 않으셨네요? 그럼 그게 답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재주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나오면 그를 위해서 더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고구마 전도법으로 말하자면 아직 생고구마니까 기도의 불을 더 때라는 말입니다. 저 영혼만은 내가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며 기도해 왔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보여줘야 믿겠다며 억지를 부릴 때 낙심하지 마세요. 아직 덜 익었으니까 좀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7-18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이제 예수님의 반론을 들을 차례입니다. 먼저 그들의 논리적인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속 싸움하는 집안이 제대로 되겠어요? 남편도 똑똑하고 아내도 똑똑해서 둘이 매일 다투기만 한다면, 그 가정이 버텨지겠어요? 둘 다 똑똑하다고 목소리 높이면 그 가정 오래 못 갑니다. 또 내전이 끊이지 않는 나라가 제대로 유지되겠어요?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몇 년간 내전을 겪고 나면,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지고 맙니다. 좀 약한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잖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며 이렇게 반박하십니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만약에 너희 말대로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는 셈인데 그럼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는 것입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는 격이 되는데 그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우기고 있습니다. 19절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이어서 실제적인 허구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혹 백보 양보해서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해도, 그럼 귀신을 쫓아내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귀신 쫓아내는 것을 예수님 혼자만 하신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축사 사역이 예수님의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서도, 귀신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들도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이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자신을 귀신 쫓아내는 전문가들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이단이나 사이비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 세우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 가는데 그래도 우리가 이단이냐?”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데 그래도 우리가 사이비냐?”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래도 이단일 수 있고, 그래도 사이비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예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행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병 고치는 일은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치유가 진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것이 참 종교의 진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20절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을 단순히 반박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펴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서는 “하나님의 손”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어를 보면 ‘닥튈로스’로 “손”이 아닌 “손가락”으로 말했습니다. 영어성서도 “the finger”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란 단어는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여러 가지 재앙을 보면서 애굽의 요술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출애굽기 8:19절상을 보세요.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여기서 “권능”으로 번역된 ‘에쯔바’는 손가락을 의역한 것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창조를 주의 손가락으로 하셨다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8:3절을 보세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아마 당시 성경을 번역할 때 손가락이라고 하면 좀 거북하니까 손으로 번역했던 것 같습니다. 공동번역성서나 표준새번역성서는 “능력”이라고 의역을 했습니다. 20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칫 기적 그 자체에 관심을 빼앗기기 쉬운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닙니다. 기적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기적 중심적인 신앙은 정말 위험합니다. 기적을 바라는 신앙은 왠지 안정감이 없습니다. 신앙은 말씀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적은 하나의 사인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제까지 세상의 주관자요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통치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표식입니다. 말 못하는 자였던 사람은 그 동안 귀신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로 말미암아서 사탄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임하였느니라”의 원어 ‘프흐다노’는 ‘앞서오다, 방금 도착했다, 도달하다’는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미래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 됩니다. 현재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 현재적인 의미로 보입니다. 그 결정적인 단서가 “너희에게” 입니다. “너희”는 미래의 청중들이 아닌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청중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나라가 아닙니다. 절정에 도달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그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데 헌신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다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의 전생애는 하나님 나라로 요약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2천 년 전에 싹을 틔웠고 새잎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무성해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활짝 꽃 피울 때가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21-22절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당신은 누구 편인가’ 주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껏 사탄은 강한 자였습니다. 그와 대결할 만한 세력은 없었습니다. 그는 무장을 하고 자기 소유를 지켰습니다. 그 소유가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그가 그 동안 지켜오던 모든 재물은 이제 새로운 승리자의 몫입니다. 그 승리자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되었고 사탄의 나라는 탈취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이 쫓겨난 사건은 하나의 예증에 불과합니다. 그 와중에 중립지대란 없습니다. 주님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고, 사탄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영역이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의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23절상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중립을 선언하는 사람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중립지대에 있는 사람더러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생각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면 피곤합니다. 들어가든지 나가든지 해야지, 문턱에 서 있는 것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하든지, 주님을 거스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설 것인지, 세상 편에 설 것인지 어느 하나를 결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또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세상 편에 서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사십니까? 세상을 위해 사십니까? 성령님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그 중간은 없습니다. 그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23절하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흩어진 양떼들을 모으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전도자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흩어진 양떼들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에 동참하지 않는 자를 주님 반대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 아닙니까? 그렇담 전도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 반대편에 서는 것이란 말이 됩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지오반니 파피니의 이야기입니다. 본래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믿음이 독실한 그의 어머니에게 인육을 먹여보라고 일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칼로 자기의 허벅지 살을 잘라 요리해 아들에게 먹였습니다. 병이 차츰 낫기 시작하자 그는 그 고기를 또 한 번 먹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 몰래 자기의 살을 베려다가 그만 동맥을 잘라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는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지난번에 먹은 고기도 어머니의 살이었군요!” 어머니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나는 죄 많은 몸으로 너를 구했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몸으로 우리를 위해서 살을 찢기시고 피 흘리셨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이 통치하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씨가 심겨졌습니다. 그 씨가 조금씩 자라 지금은 꽤 무성해졌습니다. 주님 오실 때가 거의 다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그 나무에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그때는 주님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때입니다. 그때 모든 인생은 두 갈래로 나뉠 것입니다. 예수께 속했던 사람과 사탄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사람과 자신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실은 그때 거기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죠? 지금 여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 편인가?’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의 흩어진 양떼를 모으는 사람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예수님 편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흩어진 양떼를 모으는 자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늘 백성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우리들 가슴에 품은 생각을 내뱉을 때 어떤 생각이었는지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른 것은 아니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에 살면서 이런 저런 수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그 중에도 빛으로, 소금으로 살려고 애썼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정성을 받아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 눅 11:24-26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 하나의 물방울이 생겼습니다. 그 물방울이 뭉쳐 북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라인강을 타고 북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동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다뉴브 강을 통해 흑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남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로네 강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물방울은 똑같은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극히 미소한 방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수 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다른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이 갈라지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차이가 점점 뚜렷해지다가 결국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또 한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이 후회 없는 인생, 낭비 없는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방향을 잘 잡아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이 펼쳐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들의 삶은 진정 보람 있고 축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를 아끼시며 병자를 고쳐주시며 외로운 자를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가슴을 가지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리고는 이웃집 아들을 의심했습니다. 걸음걸이를 보아도 안색을 보아도, 말투를 들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습니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골짜기를 지나다가 그는 잃었던 도끼를 찾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보니 동작과 태도가 전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때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주인은 정의와 진실에 가까운지 한 번 돌아봐야겠습니다.
주님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고 사탄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영역이란 없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중립지대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지혜로운 것입니다. 주님 편에 설 것인지 세상 편에 설 것인지에 대한 결단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세상을 동시에 사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고 성서는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하는지에 무관심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백 마디 말보다 주님의 말씀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듣고, 친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됩니다. 주님 편에 섰다가 세상 편에 섰다가 하면 모두에게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만 섬기겠다는 결단이 있을 때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만 듣겠다는 생각을 굳힐 때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했습니다. 혹시나 싶어 다시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습니다. 그걸 보고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나중의 형편이 처음의 형편보다 훨씬 심각해졌습니다. 이게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주님이 왜 빈 집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신앙에 적극성을 띠라는 말입니다. 부인의 손에 끌려서 겨우 교회 나오는 수준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주일 성수 하지 않으면 벌받을까봐 억지로 교회 나오는 수준은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아까운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십일조 하는 수준은 뛰어넘으라는 말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신앙생활을 계속 할 거냐는 겁니다.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빈 집이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 회개는 했지만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은 빈집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첫걸음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바울도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0:21절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회개와 믿음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됩니다만, 우리가 살펴본 말씀을 놓고 볼 때 회개가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그러나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순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늘 붙어 다니는 ‘바늘과 실’ 같은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회개가 무엇입니까? 원어 ‘메타노이아’는 ‘생각하다, 재고하다, 가책하다, 뉘우치다, 반전하다, 마음을 바꾸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생각하고 재고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가슴으로 가책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음만 고쳐먹는다고 회개는 아니란 사실입니다. 회개를 지적(머리)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반성하고 사과하고 재고하는 것과 회개를 같은 수준으로 보면 안 됩니다. 또 회개를 정적(감정)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가책하고 뉘우치며 눈물 흘리는 것과 회개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진정한 회개는 깊은 자기반성이 따라야 합니다. 참된 의미의 회개란 뉘우침의 뜨거운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회개의 전부가 아닙니다. 회개는 의지적이어야 합니다. 생각과 마음의 변화에 대한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회개는 성서가 말하는 회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회개는 실제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가던 방향에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라면, 믿음은 죄에서 돌아선 다음에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께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짧은 생애를 살면서 일생동안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났고 사역도 그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이해했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회개에 대한 요한의 메시지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그 동안 말씀에 무관심하고 설교를 들어도 시큰둥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약탈을 일삼는 군인들은 물론이고, 당시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던 세리들까지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믿기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본 많은 백성들은 심중에 ‘혹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의논할 정도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앞을 다투어 요한을 추종했습니다. 스스로를 요한의 제자로 불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요한이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했는데도 그들은 들은 척 만 척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요한에게서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해 철저한 회개는 했으나, 예수님을 믿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본문의 상황과 연관시켜보면 더러운 집을 청소는 했지만, 새로운 주인을 모시지 못한 빈집 상태로 두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예배의 자리에 섭니다. 어떤 날은 말씀이 들려옵니다.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감동을 받습니다. 참회의 기도 시간에 별로 할 말이 없던 사람이 과거의 죄가 깨달아집니다. 지난날의 잘못이 뉘우쳐지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합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안 돼.”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 수 없어.”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죄에서 떠나야 해.” 너무나 강력한 성령의 도전 앞에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며 어금니를 깨물어 봅니다. “이제는 주님 맘 아프게 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으리라.” 때로는 어떤 집회에 참석했다가 특별한 은혜를 받습니다. 강사님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자기 마음속을 후벼 팝니다. 너무나 아파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짐합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어봅니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리라.” “다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리라.” 기도하고 “아멘”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버립니다. 마음 아파했습니다. 속으로 뉘우쳤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과거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집회가 끝남과 동시에 결심도 끝나고 맙니다. 집에 돌아오면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던가 합니다. 사흘이 못되어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22절을 보세요.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회개하고 나서 똑같은 죄를 다시 짓는 것을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이라 합니다. 돼지가 씻고 나서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돌아가 눕는 것이라 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후서의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붙잡히지는 않았습니다. 또 의의 도를 알기는 합니다. 그러나 의의 도를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 마음에 회개는 했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은 소제하고 수리했으나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과 같습니다. 일시적인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빈 집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소제하고 잘 수리해 놓아도 아무도 들어와 살지 않으면, 금방 먼지가 쌓이고 쥐들의 놀이터가 되어 흉가가 되고, 머지않아 폐가가 되고 말겁니다. 우리나라에 성경을 귀신 쫓아내는 주문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축사사역을 전문으로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귀신은 물을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24절을 들고 있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가 물 없는 곳을 찾아다닌 것을 볼 때 귀신은 물을 꺼린다는 것이죠. 그럼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귀신으로부터 안전하겠네요? 여기서 물 없는 곳은 광야를 말합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귀신이 광야에 거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아사셀 양’을 광야로 내보내는 것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문맥을 무시하는 성서 해석은 위험합니다. 자기들의 주장을 펴기 위해 성서를 적당히 이용하는 이들은 위험분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말씀을 훼손하는 자들입니다. 다른 교회들을 심하게 공격하는 이들을 일단 의심해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귀신 쫓아낸다는 사람들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본뜻이 무엇입니까? 빈 집을 그 대로 방치해 두면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귀신들려 고생하는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그 귀신을 쫓아내주었습니다. 쫓겨난 귀신은 살 집을 찾았으나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안식처를 얻지 못하다 혹시나 싶어 옛날 집으로 돌아와 봤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더럽혀놓았던 집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게 아닙니까? 소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리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했겠죠.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귀신이 한 말입니다. 24절에서 귀신이 한 말을 찾아보세요.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잘 보세요. 귀신이 아직도 그 집을 자기 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에게 있다가 쫓겨나갔던 귀신입니다. 그런데도 그 귀신은 그를 자기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자기 사람이었던 사람을 쉽게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악령은 끝까지 자기 사람이라는 주장을 폅니다. 물러갔다가도 다시 찾아옵니다. 항복했다가도 다시 쳐들어옵니다. 그러나 새로운 주인이 있으면 괜찮습니다. 새로운 주인은 마귀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는 집이면 또 들어옵니다. 청소만 되어있지 빈집이면 얼씨구나 싶어 자리를 차지하고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은 청소되어 있습니까? 깨끗한 심령입니까? 그래야 합니다. 더러운 심령이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엔 더러운 심령이었을 수 있습니다. 온갖 죄와 허물로 오염된 심령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자로 선 지금까지 그런 심령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더러운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깨끗이 소제하시기 바랍니다. 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두시면 안 됩니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쳤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빈집으로 두면 귀신이 찾아와 그건 내 집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순식간에 악령의 처소로 만들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통치하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을 전적으로 주장하게 하십시오. 한 사업가의 이야기입니다. 사업에는 성공했으나 산다는 게 재미가 없었습니다. 즐기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도박에도 손 대고, 맘에 든 여인과 동거도 했습니다. 그러자 사업이 흔들렸고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싫어졌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앞을 지나다가 찬송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겠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그의 마음속에 흘러들었습니다. 짓눌려 있던 심령이 해방되어 영혼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님을 모실 때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을 때 평안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으실 때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과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 나오는 것과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과 예수님을 마음의 보좌에 앉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불행하게 살기를 고집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심령에 모심으로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불안하게 사는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아 평안을 누리겠습니까?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기쁨과 담쌓고 살기로 작정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마음의 보좌에 앉히심으로 기쁨의 나날을 살겠습니까?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빈 집이 무엇을 뜻합니까? 둘째,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사람은 빈집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심각한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을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보기도 하고, 발버둥을 쳐보기도 하고, 몸부림을 쳐보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을 자기 편한 데로 이용하여 쉽게 죄짓는 자리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죄 짓는 것을 죽는 것만큼 두려워하십니까? 죄 짓지 않으려고 힘쓰고 애쓰고 용쓰십니까? ‘예수 믿는 누구도 그러는데 뭐, 그 사람에 비하면 이건 죄도 아니야’ 하며, 죄 짓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다 부정직해도 나 한 사람이라도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악한 길을 걸어가도 나 한 사람이라도 바른 길을 걷길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아무리 세상이 암흑천지라 해도 나 한 사람이라도 작은 촛불을 밝히길 원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휩쓸려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 자기 유익을 따라 어떨 땐 하나님을 따르고, 어떨 땐 세상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넘쳐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간 죄악의 물결에 대해 역류하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게 뭡니까? 적극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를 죄에서 지키려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믿음생활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능동적으로 고쳐나가야 합니다. 성공적인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일 앞에서 능동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나는 교회 생활을 원한다면 좀 더 능동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가 훌륭한 연주자가 되겠습니까? 물론 틀리지 않게 연주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틀리지 않게 연주하려고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틀리지 않게 연주하는 것에 만족하거나 그게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 때 찬양하는 성가대원이 틀리지 않게 하는 것에 기뻐한다면 되겠어요? 곡을 틀리지 않게 부르는 것에 목표를 두고 연습하고, 예배 때 성가대석에 선다면 좋은 찬양이 나오겠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찬양을 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적자 안 내는 것에 만족할 수 있습니까? 손해만 안 보면 된다는 목적으로 장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차라리 자선 사업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흑자를 얼마나 내느냐, 장사는 하는 사람은 이문을 얼마나 남기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돈을 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싫어하시는 것을 하지 않은 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까? 그냥 신앙생활을 한 것이지 신앙생활을 잘한 것은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모든 것을 탐내지 말지니라.” 이 계명을 잘 지켰다고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잘한 것으로 칭찬받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무엇을 안 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하고 내놓을 때 기뻐하십니다. “지난 한 주간도 별일 없어서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 하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지 마라”고 하기 보다는 “~하라” 할 때 그 아이가 진취적이 된다고 합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일반적으로 어떻게 합니까? “거짓말하지 마라”고 곱게 타이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으로 거짓말하면 관두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고 겁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25절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거짓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4:28절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4:29절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하나 적극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은 빈 집과 같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정도에 머물며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빈집과 같습니다. 빈 집은 위험합니다. 언제라도 악령이 틈탈 수 있습니다. 마귀가 주인 없는 빈 집이라는 것을 알면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인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소년법정의 김귀옥 부장판사는 자신의 재판정에 선 한 여학생을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피고인 A양(16세)은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A양은 2009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와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청소년 법정에 선 전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법대로 한다면 무거운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습니다. 김판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피고는 일어나 봐" 하고 말하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뼛쭈뼛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김 판사가 말했습니다. "자,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하지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습니다. "자, 내 말을 크게 따라 해봐.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큰소리로 따라 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가슴 아픈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입니다. A양은 본래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입니다. 그런데 2009년 초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급속하게 바뀌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까지 받아야 했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범행에 빠져든 것입니다. 김판사는 방청석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습니까? 아이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학생을 격려하면서 김판사는 그를 법대 앞으로 불러 세우고는 손을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너'임을 잊지 말라고,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격려했습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의 판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A양이 새로운 존재로 회복되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앞길이 평탄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A양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슴 절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험이 또 있을까요? 어느 신학자는 구원을 '받아들여짐의 체험'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받아들여짐을 체험한 사람,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김귀옥 판사를 통해 A양의 손을 잡아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손이 되어 상처 입은 이들을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메마른 땅에 물을 대는 마음으로 사는 삶,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모심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갖기를 바라십니다. 옛 삶을 청산하고 믿음으로 새 삶을 개척해 나가길 원하십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망하십니다.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길 요구하십니다. 빈 집의 위기에서 벗어나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이 때, 우리 마음에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이 통치하도록 세월을 아끼고, 깨어 기도하고, 늘 하나님을 찬송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함으로 성령 충만함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