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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月堂 金時習
三歲能綴詩
五歲 通 中庸 大學
人號 神童
公到其廬 曰
余老矣其以
老 字 作 句
金應聲 曰
老木開花 心不老
公 擊節歎賞 曰
此 所謂 神童也
金梅月堂 時習 傳
茸 長 寺
김시습 (金時習)
1435(세종 17)∼1493(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 · 문인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법호(法號)는 설잠(雪岑)
茸 長 山 洞 窈 용 장 산 골 깊고 아득하니
不 見 有 人 來 사람이 오는 것을 볼 수 없구나
細 雨 移 溪 竹 가랑비에 신우대는 여기 저기 피고
斜 風 護 野 梅 살랑대는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小 窓 眠 共 鹿 작은 창 아래 사슴과 함께 잠들고
枯 椅 坐 同 灰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쌓였는데
不 覺 茅 簷 畔 어느새 ~ 억새 처마 아래
庭 花 落 又 開 뜨락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최초의 한문 소설을 쓴
불운한 천재(天才)“
김시습(金時習)은 천재(天才)였다.
조선의 선비들 중에는
수많은 천재(天才)가 있었지만
김시습은 천재가 인정하는
유일한 천재(天才)였다.
아홉 번이나 과거시험에서
장원(壯元,1등)을 차지했다고 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던
천재(天才) 율곡 이이(李珥)가
천재(天才)라는
기록(記錄)을 남긴
유일(唯오직 유一)한 인물(人物)이
김시습(金時習)이다.
율곡은 ‘시습(時習)’이라는 이름 역시
김시습(金時習)의 타고난 천재성에서
비롯됐다고 적었다.
“(김시습은) 태어날 때부터
천품(天稟)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세상에 나온 지 불과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이웃에 살던
최치운(崔致雲)이 보고는
기이(奇기이할 기異)하게 여겨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시습(時習)은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精神)은 놀라워서
글을 보면 ~
입으로 읽지는 못했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김시습전(金時習傳)’
*율곡전서 / 김시습전
이이(李珥)가 김시습에 대하여 지은 전(傳).
작자의 ≪율곡집≫ 권14∼16
'잡저'에 실려 있는
그의 유일한 전(傳)이다.
여기에서 최치운(崔致雲)이라는
사람이 지어줬다는 ‘시습(時習)’은
유학(儒學)의 최고(最高) 경전(經典)인
『논어(論語)』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취(取)한 이름이다.
김시습(金時習)의 타고난
자질(資質)을 보고 유학(儒學)을
크게 빛낼 대학자(大學者)가
될 것임을 예견(豫見)하고
붙여준 이름이다.
김시습(金時習)은
세 살 때 시(詩)를 짓고,
다섯 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통달(通達)
하는 등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천재적 자질(資質)과
행적(行蹟자취 적)을 숱하게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극찬했다.
당시 이름 높은 명사(名士)들이
앞 다투어 이 어린 천재(天才)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급기야(及其也마침내는) ~
세종대왕(世宗大王)의 귀에까지
김시습의 명성(名聲)이 전해졌다.
학문(學問) 잘 하는 사람을
누구보다 아끼고 귀(貴)하게 여겼던
세종대왕은 김시습(金時習)을
*승정원(承政院)으로 불러
*승정원(承政院)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기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행정 부서
시(詩)로 시험(試驗)해 보았다.
그런데 김시습(金時習)의 시(詩)는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김시습(金時習)의 재주에
탄복(歎服 깊이 감탄하여 마음으로 따름)한
세종대왕은 크게 칭찬하면서
훗날 나라의 재목(材木)으로
크게 쓰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김시습(金時習)에게
비단(緋緞)을 하사(下賜줄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친(親)히 보고 싶지만
세상의 풍속(風俗)과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염려(念慮)된다.
마땅히 그 집안에 권하여
재능(才能)을 감추어 ~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그의 학업(學業)이 성취(成就)되기를
기다렸다가 장차(將장차장 次버금차)
크게 쓸 것이다.”
*(율곡전서 栗谷全書)
목 차(目次) :
⓵ 자유로웠으나 자유롭지 못했던 희대(稀代)의 천재
⓶ 평온과 혼란(混亂)이 공존한 시대
⓷ 성군(聖君)도 인정한 재주
⓸ 방랑(放놓을방浪물결랑)길에 오르다
⓹ 아픔을 문학(文學)으로 승화(昇華)시키다
⓺ 후대(後代)의 추모(追慕)
⓵ 자유로웠으나
자유롭지 못했던
희대(稀드물희代)의 천재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당대 최고의 재능(才能)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簒빼앗을 찬奪빼앗을 탈)을
불의(不意)라 여기고
단종(端宗)에 대한 의리(義理)를 지켜
끝내 관직(官職)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世上)에 실망(失望)한
그는
평생(平生) 떠돌이 생활(生活)을 하며
많은 *일화(逸話)를 남기고
그만큼 많은 작품(作品)을 남겼다.
최초(最初)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역시
그의 손에서
탄생(誕生)한 작품(作品)이다.
그의 몸은 누구보다도 자유(自由)로웠지만,
시대(時代)의 아픔을 목도(目睹볼도)한 채
그 정신(精神)마저 자유(自由)롭지는 못했던
한 지식인(知識人)의 삶을
김시습(金時習)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⓶ 평온과 혼란(混亂)이
공존한 시대(時代)
김시습(金時習)이 태어난 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最高)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세종(世宗)의 통치(統治)가
계속되던 시기(時期)였다.
세종(世宗)은
이전(以前) 국왕(國王)들로부터
계속되었던 건국(建國) 초기(初期)
문물(文物) 제도의 정비(整備정돈하여 제대로 갖춤)라는
중요한 과제(課題)를 훌륭하게
수행(遂行)하였다.
집현전(集賢殿)으로부터
뛰어난 인재(人材)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각종 의례(儀禮) 정비(整備),
공법(貢法세(稅) 매기는 법) 개혁(改革) 등을 통해
왕조(王朝) 국가(國家)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다.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편찬(編纂),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製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
과학기술(科學技術)의 발달(發達),
각종 서적(書籍)의 편찬(編纂) 등
문화적(文化的) 성과(成果)
또한 실(實)로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농법(農法) 개량, 무기(武器) 개발,
국토(國土) 개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成就)를 보인
시기(時期)이기도 하다.
세종(世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文宗) 또한
학문(學問)을 사랑하는 군주(君主)였다.
그는 아버지 세종(世宗)이 이루어낸
각종 성취(成就)에 깊게 관여한
인물(人物)이기도 하였으며,
1445년(세종 27)부터는
국가의 중대사(重大事)를 제외(除外)한
각종 서무(庶務)를
처리(處理)를 인계(引繼) 받았을 만큼~
세종(世宗)의 신임(信任)을 얻기도 했다.
이미~ 정치(政治) 수업을
수년(數年) 동안 받은 때문인지,
문종(文宗) 시대(時代)의 정치 또한
안정적(安定的)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편찬(編纂)도 주목(注目)할 만 한
성과(成果)였다.
그러나 문종(文宗)은
몸이 허약(虛弱)하였고,
세자(世子) 또한 나이가 어렸다는 점은
앞으로 찾아올
혼란(混亂)을 예고(豫告)하고 있었다.
1452년
문종(文宗)이 재위(在位) 2년 4개월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病死)하자,
그의 아들 단종(端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王位)에 올랐다.
정치적(政治的) 안정(安定)이
계속되던 시기(時期),
단종(端宗)에게 시간(時間)이
조금 더 허용(許容)되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역사(歷史)를
배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왕궁(王宮)의 법도(法道)를
바로 잡아줄 대비(大妃선왕의 후비)
또한 존재(存在)하지 않았다.
단종(端宗)은 너무 어렸고,
단종(端宗)의 숙부(叔父)들은
너무 재능(才能)이 뛰어났다.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단종(端宗)의 숙부(叔父)들은
하나같이 그 재능(才能)이
뛰어난 인물(人物)들이었다.
그 중 수양대군은 야심(野心)마저
매우 컸다.
결국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실권(實權)을 장악하였다.
문종(文宗)의 유지(遺志죽은 사람이 생전에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를
받들어 ~
단종(端宗)을 보필(輔弼 윗사람의 일을 도움)하던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척살(刺殺찌를척 죽일살)하였고,
이어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등
자신의 형제(兄弟)들을 차례로
유배(流配) 보낸 후
사사(賜死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하였다.
마침내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端宗)에게 선위(禪位)를 받아
조선(朝鮮)의 제 7대 국왕(國王)으로
등극(登極)하기에 이른다.
김시습(金時習)이 태어난 시기(時期)는
세종(世宗) 대(代) 이후
정치적(政治的) 안정(安定)과
문화적 번영(繁榮)이 계속되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과 함께
평온(平穩평온할 온) 속에
잠복(潛伏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음)해 있던
혼란(混亂)이 분출된 시기(時期)였다.
그야말로 격동(激動)의 시기(時期),
당시 인물(人物)들에게는 인생(人生)을 건
정치적 선택(選擇)이 중요(重要)했다.
김시습의 선택(選擇)은 무엇이었을까?
⓷ 성군(聖君)도 인정한 재주
김시습(金時習)은
1435년(세종 17)
서울 성균관(成均館) 근처에서 태어났다.
본관(本貫始祖가 난 곳)은 강릉(江陵)으로
신라 김주원(金周元)을 시조(始祖)로 한다.
김주원(金周元)은
*명주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하였으며,
*溟州(명주) :
①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의 옛 이름
②큰 바다 가운데 있는 섬
*食邑(식읍) : 옛날에 국가(國家)에서 특(特)히 공신(功臣)에게 내리어
거두어 조세(租稅)를 개인(個人)이 받아쓰게 한 고을
신라(新羅) 왕위 계승의 후보자였을 정도로
세력가(勢力家)였다.
그 둘째 아들
김헌창(金憲昌)은
아버지가 왕위(王位)에 오를 것을
불만(不滿)으로 여겨서
난(亂)을 일으켰다가 전사(戰死)하였으나,
그의 가문(家門) 전체가
처벌(處罰)받지는 않았고
이후로도 세력(勢力)을 유지(維持)하였다.
김주원(金周元)의 증손(曾孫)
김양(金陽)은
신라 민애왕(閔哀王44대왕) 대(代)에
왕실(王室)에 내분(內紛)이 있자
*청해진(淸海鎭)에서 거병(擧兵군사를 일으킴)하여
*淸海鎭(청해진) : 전라남도(全羅南道)의 강진(康津),완도(莞島)에 있었던
군사(軍事) 기지(基地). 신라(新羅) 42대 흥덕왕(興德王) 3(828)년
궁복(弓福 ;張保孝)의 청에 따라 설치(設置)
*신무왕(神武王)을 옹립(擁立임금을 받들어 모심)하였다.
*신무왕(神武王): 재위기간 839년 1월~9월
[출처]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신라(新羅) 45대 신무왕(神武王)
김시습(金時習)의 가문(家門)은
신라(新羅), 고려(高麗) 대(代)의
명문(名門)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의 7대(代) 조(祖)
김칠초(金七貂)부터는
무반직(武班職)을 주(主)로 맡아,
김시습(金時習)의
할아버지 김원간(金元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내고
*五衞部將 (오위부장) : 중앙군사 조직인 오위(五衞) 속하는 각부(各部)
군사를 거느리던 장수. 수효는 25인, 품계는 종6품이다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음보(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충순위(忠順衛)에 봉해지는 데에 그쳤다.
*忠順衛 : 조선 시대에 둔 삼위의 하나.
왕족이나 관리 또는
관리들의 자손이나 친족들로 조직한 군대로
충무위에 속하였다.
무반직(武班職)을 지내면서 점차
한미(寒微찰한, 작을미)해진
집안에 비해 ~
김시습이 타고난 재능(才能)은 매우 뛰어났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은
이웃에 살던
최치운(崔致雲)이 지어준 것인데,
『논어(論語)』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句節)에서 따 온 것이다.
김시습의 탄생(誕生)과 관련하여서도
명륜동 성균관 북쪽 반궁리(泮宮里)
김일성(金日省) 집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는 등
유학의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관련된 *일화(逸話)가
*일화(逸편안할 일, 달아날 일 話 )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흥미 있는 이야기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자질(資質)이 공자(孔子)와
비견(比肩어깨를 나란히 함)될 정도로
대단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다.
두 살에 불과(不過)하였을 때,
이미 외할아버지에게서
시(詩)를 배우기 시작했고,
세 살이 되자 직접
시구(詩句)를 짓기에 이르렀다.
김시습(金時習)은
다섯 살 때에
이색(李穡)의 후손
이계전(李季甸)에게서
『중용(中庸)』, 『대학(大學)』 등
성리학의 기본 경전(經典)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시문(詩文)으로 이름난
조수(趙須)에게서도 글을 배웠다.
김시습(金時習)의 뛰어난 재주는
서울 저자거리에 널리 퍼졌으며
마침내 조정(朝廷)에까지 알려졌다.
급기야(及其也마침내는) ~
1439년(세종 21)
정승 허조(許稠)가
김시습(金時習)을 찾아오기에 이른다.
70세의 노정승(老政丞)이
다섯 살의 신동(神童재주와 슬기가 남달리 뛰어난 아이)을
시험(試驗)하러 찾아온 것이다.
허조(許稠)가
‘늙을 노(老)자’를
이용해 시(詩)를
지어달라고 하자,
김시습(金時習)은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은 것이다
(老木開花 心不老)’라는
시구(詩句)를 읊어보였다.
허조(許稠)는
어린 김시습(金時習)의 당돌한 재주에
감탄(感歎마음속 깊이 느끼어 찬탄함)하였다고 한다.
(경암선생 실기 3권 p.34의 내용)
梅月堂金時習 三歲能綴詩 五歲通 中庸大學人號
神童公到其廬曰 余老矣其以 老字作句 金應聲曰
老木開花 心不老 公擊節歎賞曰 此所謂 神童也
金 梅月堂 時習 傳
어린 김시습의 명성(名聲)은 더욱 높아져,
마침내 국왕(國王)
세종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에 승정원(承政院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기관)으로 하여금
시험(試驗)해보도록 한 후
매우 감탄(感歎)하여 비단을 선사하니,
어린 김시습이 비단(緋緞) 50필을
풀어서 서로 엮은 뒤 ~
허리춤에 묶고 끌고 나갔다는
*일화(逸話)는 매우 유명(有名)하다.
태어나서 살아온 곳이
성균관(成均館) 근처이기에
김시습(金時習)의 이웃에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學者)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열세 살이 되기까지
김시습(金時習)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반(金泮),
*겸사성(兼司成) 윤상(尹祥)에게서
*兼司成(겸사성) : 2품 이상의 타관(他官)이 겸임하던 성균관(成均館)의 한 벼슬
성리학 경전(經典)을 배웠다.
순탄(順순할순坦평탄할탄)해보였던
김시습의 일생(一生)에
불행(不幸)은 별안간 찾아왔다.
⓸ 방랑(放놓을방浪물결랑)길에 오르다
1449년
김시습(金時習)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모친(母親) 울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金時習)은 이후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나,
*侍墓(시묘) : 부모(父母)의 거상(居喪) 중(中)에,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 동안 사는 일
이를 마치기도 전에 그를 돌봐주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짧은 시간 동안 연속(連續)으로
잃은 슬픔은 매우 컸다.
아버지의 재혼(再婚) 문제도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계모(繼母)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關心)을 주지 않았다.
이 때 김시습(金時習)은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머물며
불교(佛敎)를 통해 마음의 안정(安定)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以後) 그는~
한 때 출가(出家)하기도 하는 등
불교(佛敎)와 깊은 인연을 쌓았는데,
그 인연(因緣)이
바로 이 때 시작한 것이다.
점차~
마음의 안정(安定)을 찾은
김시습(金時習)은
과거(科擧) 공부에 매진(邁힘쓸매進)하는 한편,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家庭)을 꾸렸다.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幸福)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때는 ~
문종(文宗)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하고
단종(端宗)이 즉위(卽位임금의 자리에 오름)한 해,
그는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하였으나
낙방(落榜매질할 방)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해
마침내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실권(實權)을 장악(掌握)하였다.
김시습의 스승 이계전(李季甸)은
수양대군의 거사(擧事)에 적극 참여하여
일등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단종에게 선위(禪位)를 받아
국왕(國王)의 지위에 올랐다.
이 때 김시습(金時習)은
북한산(北漢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과거(科擧)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왕위 찬찰(簒奪) 소식을 듣고는
크게 충격을 받아
방(房) 문(門)을 걸어 잠근 채
사흘 동안이나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그는 ~
책(冊)을 불사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때의 출발(出發)이
평생(平生) 동안의 방랑(放浪)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단종(端宗)의 밑에서
벼슬살이 한 번 하지 않았건만,
김시습(金時習)은 마음으로
단종(端宗)을 국왕(國王)으로 모신 채
평생(平生)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살았다.
*處士 (처사) :세파의 표면(表面)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선비
정국(政局)은 계속 흉흉(凶凶흉할 흉)했다.
1456년(세조 2) 6월에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圖謀꾀할 모)하다
발각되어 사형(死刑)에 처해졌다.
지방(地方)에 머물던 김시습(金時習)은
이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와서
그들의
충절(忠節)을 지킨 채 죽어가는 것을
목도(目睹볼도)하였다.
이들 사육신(死六臣)은
온 몸이 토막나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죽었으나,
분노한 세조(世祖)를 두려워 한 나머지
아무도 나서서 그들의 시신(屍身)을
수습(收拾거둘수 주울 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 나뒹굴던 이들의 시신(屍身)이
사라졌다.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한 사람은
바로 김시습(金時習)이었다.
그는 사육신(死六臣)의 충의(忠義충절과 절의)를
추모(追慕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하여
그들의 시신(屍身)이 훼손(毁損)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하여서
노량진에 매장(埋葬묻을 매)하였으니,
현재(現在)의 사육신묘(死六臣墓)가
바로 김시습(金時習)이
이들의 시신(屍身)을 매장(埋葬묻을 매)한 곳이다.
김시습(金時習)의 몸은 비록
자유롭게 방랑(放浪)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만은
사육신(死六臣)과 함께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해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단종(端宗)에 대한 절의(節義절개와 의리)를 지켜
평생(平生) 관직(官職)에 나아가지 않은 이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
사육신(死六臣) 사건의 여파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降내릴강等)되어
영월에 유배(流配)되어 있던
단종(端宗) 또한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자신의 처사(處事일을 처리함)가
너무 가혹했음을 뉘우친
세조(世祖)는 이듬해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에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단종(端宗)을
제사(祭祀) 지내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시습(金時習)은
동학사(東鶴寺)로 가서
단종의 제사(祭祀)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⓹ 아픔을 문학(文學)으로
승화(昇華)시키다
단종(端宗)을 제사 지낸 후,
김시습은 승려(僧중승侶) 차림을 한 채
각 지방(地方)을 유람(遊覽)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발길은 관서(關西) 지방을 거쳐
관동(關東), 호서(湖西), 호남(湖南) 등
전국(全國) 각지(各地)로 이어졌다.
그는 유람(遊覽)의 감회(感懷)를
시(詩)로 읊었는데,
이 때 지어진 수 많은 시(詩)가
아직도 그의 문집(文集)에 전하고 있다.
평생(平生)의 방랑(放浪)길에 나선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김시습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남자(男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만일 도(道)를 행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자기 한 몸만을 깨끗이 한다는 핑계로
인륜(人倫)을 어지럽히는 것이
부끄러운 행위이지만,
만일 도(道)를 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기 한 몸만을 선(善착하고 올바름)하게
하는 것도 용납(容納)할 수 있다.”
숙부(叔父)가 ~
조카의 왕위(王位)를 찬탈(簒빼앗을 찬奪빼앗을 탈)하는
유학(儒學)의 도(道)를
행(行)할 수 없는 세상(世上)에서
자신(自身)이 할 수 있는
행위(行爲)란
없다는 사실(事實)을
김시습(金時習)은 깨달았다.
이 난세(亂世)에서 오로지
자기 한 몸만이라도 깨끗이 하며
방랑(放놓을방浪물결랑)하는 것 또한
시대(時代)를 염려(念慮)하는
지식인(知識人)의 한 행동(行動)이
될 수 있을 거라 판단(判斷)한 것이다.
자신의 몸은
자유(自由)롭게 하였으나,
정신(精神)만은 시대(時代)로부터
한 번도 자유(自由)롭지 못했던
김시습(金時習)의 일생(一生)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방랑(放浪)을 계속하던 김시습은
1463년(세조 9)
책(冊)을 사기 위해
서울에 잠시 올라왔다가,
왕실의 어른이자
불교(佛敎)에 심취하였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내불당(內佛堂)에서
*內佛堂 (내불당) :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경복궁(景福宮) 안에 세운 절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언해(諺解한문을 한글로 풀이함) 사업에
잠시 참여(參與)하였다.
이후 김시습(金時習)은
경주(慶州)로 내려가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거주하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요청으로
원각사(圓覺寺)*낙성회(落成會)에 참여하여
*낙성(落成): 건축물을 완공함
세조(世祖)에게서 비로소
*도첩(度牒)을 받았다.
*도첩(度牒) :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發給)하던 신분(身分) 증명서(證明書)
명실상부한 승려(僧侶)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세조(世祖)와의 인연(因緣)은 이것 뿐,
도성(都城) 밖으로 떠나가는
김시습(金時習)을
세조(世祖)가 명(命)을 내려
불러 세웠으나
그는 사양(辭讓)하고
도성(都城) 밖으로
기어이 떠나고야 말았다.
그의 절개(節槪)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시습(金時習)의
단종(端宗)에 대한 절개(節槪)는
어린 시절(時節) ~
세종(世宗)에게서 받은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금오산실(金鰲山室)에서 기거(寄居)하면서
김시습(金時習)은
문학(文學) 활동(活動)에 주력하였다.
최초의 한문소설(漢文小說)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은거(隱居세상을 피해 숨어 삶)하기를 수년,
세상에도 변화(變化)가 생기기 시작했다.
1468년
세조(世祖)가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하고
예종(睿宗)이 즉위(卽位임금의 자리에 오름)하였으나,
한 해만에 ~
예종(睿宗)이 다시 승하(昇遐),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한 것이다.
세상(世上)의 변화(變化)는
김시습 일상의 변화(變化)로 이어졌다.
1472년(성종 3)
금오산에서의 은거(隱居)를 끝내고
서울로 옮겨온 것이다.
서울에서도 김시습은
수년 동안
문학(文學) 활동(活動)에 주력하였으며,
도교(道敎)에도 관심을 가졌다.
1481년(성종 12)에는
돌연 환속(還俗)하여
조부와 부친(父親)의 제사를 지낸 후,
안씨를 아내로 맞아
다시 가정(家庭)을 꾸렸다.
이 시기(時期)
그는 성리학(性理學) 연구(硏究)에도
마음을 쏟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상(世上)이 변화(變化)하자~
다시 유학자(儒學者) 본연(本然)의 모습으로
돌아가 조정(朝廷)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을 잠시 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1483년 49세 때에
재혼(再婚)한 안씨와 사별(死別)하였으며,
폐비(廢妃) 윤씨(尹氏) 사건(事件)으로 인해
다시 세상(世上)이
혼란(混亂)스러워지자
*두타(頭陀)의 행색으로
*頭陀(두타) :
①번뇌(煩惱)와 의식주(衣食住)에 대(對)한 탐욕(貪慾)을
버리고 깨끗하게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修行)
②산야(山野)를 다니면서 밥을 빌어 먹고 노숙(露宿)하면서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닥는 일. 그런 승려
다시 방랑(放놓을방浪물결랑)길에 오른 것이다.
만년(晩年나이가 들어 늙은 때)에 그는
강원도 양양(襄陽)에 잠시 머무르다가
1493년(성종24)
부여(扶餘)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로 거처를 옮겼다.
그 해 3월
59세의 나이로
김시습(金時習)은 무량사(無量寺)에서
방랑(放놓을방浪물결랑)으로 점철(點綴꿰멜 철)된
한 생(生)을 마치고 만다.
⓺ 후대(後代)의 추모(追慕)
김시습(金時習)은
평생(平生) *처사(處士)로 방랑(放浪)하며
*處士 (처사) :세파의 표면(表面)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선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단종(端宗)에 대한 절개(節槪)를 지킨
그의 충정(忠貞충성스럽고 절개가 굳음)은
후대(後代)에 널리 인정(認定)받아
생육신(生六臣)으로
추앙(推仰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받기도 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의 수많은 작품(作品)은
이세인(李世仁), 이자(李耔),
*윤춘년(尹春年) 등의
노력으로 간행(刊行)되기 시작하였으며,
1582년(선조 15)에는 마침내
왕명(王命)으로 그의 유고(遺稿)를
정리(整理)하고,
율곡 이이(李珥)가 전기를 지은
*매월당집(梅月堂集)이 간행(刊行)되었다.
*『매월당집』의 책머리에
이자와 이산해(李山海)의 서(序)와
*윤춘년과 이이(李珥)의 「김시습전」이 실려 있다
‘유학(儒學)에 마음을 두었으나
불교(佛敎)를 실천(實踐)하였다’는
율곡 이이(李珥)의 평가(評價)나,
‘유학(儒學)을 실천(實踐)하면서
불교(儒學)의 자취를 남겼다’는
평가(評價)처럼
출가(出家)하여 승려(僧侶)로 살았던
김시습(金時習)의 행적(行蹟/行跡)이
문제(問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學者)들은
김시습(金時習)의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를
높이 평가(評價)하며 찬양(讚揚)하였다.
집필자 : 이민정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콘텐츠
(끝)
첫댓글 금오신화
(조선중기 문신 윤춘년이 필사한 필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