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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을전후해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좌와 우익 세력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특히 우익 공권력에 의해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백 만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태다.이들 한국전쟁 전후 희생된 민간인의 성격과 유형에 대해서는 다음 항 양민의 개념에서 언급하겠지만 우선 이 가운데 좌파 빨치산 이른바 공비를 소탕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한국 정부군에 의해 제주와경북 문경 이외에 이 글의 주무대인 전남 함평은 물론 경남 거창․함양․산청․전북 고창․순창․남원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수 없이 집단 학살됐었다.
당시 학살된 양민들은 공비와 내통했거나 동조자로 지목돼 공비들의 준동을 차단하려는 작전 수행상 불가피하게 희생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지만 이들은 공비들과 내통했거나 동조자가 아닌 순수한 양민들로서 아무런 심사나 검증절차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살됐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특히 함평군에서는 1950년 12월 6일부터 다음 해 1월 14일까지 40일 동안 해보․월야․나산 등 3개 면에서 대 여섯 차례에 걸친 학살이 대규모로 벌어졌는가 하면 몇 사람씩의 간헐적인 소규모 학살도 여러 곳에서 병행돼 공식적으로 5백 24명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는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발생과정이 공비소탕 작전 중에 빚어졌다는 점, 재판은커녕 간이심사 또는 아무런 선별절차도 없이 무차별 사살되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또한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이 육군 제 11 사단 소속이라는 점도 같다. 1951년 2월 9일 발생한 거창사건은 47일만에 국회에서 폭로된 다음그 해 7월 27일 관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12월 15일 실형선고를 받는 과정에서 그 실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었다. 그러나 이보다 66일이나 앞서 발생한 함평사건은 전연 알려지지 않다가 4․19 혁명 후인 1960년 5월 20일자『한국일보』조간과 석간에 잇따라 보도됨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처음 드러낸다음 제 4 대 국회에 의해 조사가 진행됐었다.그러나 4․19 혁명 후 치러진 제 5 대 국회와 장면 민주당 정권의 소극적인 태도로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은 가운데 다음 해인 1961년 5월 16일 들어 선 박정희의 쿠데타 정권이 유가족과 관련자들을 이적행위자로 몰아 구속․탄압하는 바람에 사건은 다시 수면 아래로 잠겨버리고 말았다.28년 후인 1989년 6월 호 월간『신동아』에「아직도 맺힌 6․25의 恨-함평 양민학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보도되면서 여타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함으로써 이에 힘을 얻어 결성된 유족회가 주동이 되어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원 등이 잇따랐다.특히 1995년 기초 행정단위인 시․군의 자치시대가 도래하면서 민선 자치단체장과 군의회 의원들이 유족들의 민원을 해소하는데 앞장서게 되면서 진상규명 및 보상과 명예회복 운동은 활기를 띄게 된다. 특히 함평에 앞서 명예회복 및 보상과 위령사업을 추진하던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특별법으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1996년 1월 5일 제정 공포되고 아울러 1999년 12월 16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까지 국회에서 통과되어 정부가 본격 개입하게 됨으로써 50주년을 맞게되는 함평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 및 명예회복과 보상문제 역시 급부상하여 이에 대한 특별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상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본고는 현대사의 어두운 장면에 대한 실사구시적 구명을 통해 역사적 警告性과 함께 무참하게 학살된 후 구천을 헤매는 원혼을달래는 한편 그들의 인권을 회복시키는 계기로 삼도록 함평 양민학살사건을 구명하고자 한다.
양민의 개념과 이 글의 범위
이 글의 주제인 ‘함평 양민학살사건’의 구명을 위해서는 그 전제로 ‘양민’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한국군과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는 물론 공비와 좌익단체에 의해 수 많은 민간인들이 법률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살해됐거나 학살되었다. 이들은 비록 민간인이기는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정치성향을 가졌던 좌익 또는 우익적 민간인, 또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수한 양민 등 다양하다. 또 이들을 학살한 주체도 군․경찰․좌익․미군․우익단체 등 갖가지다. 이 때문에 이를 엄격하게 분류하여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지난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선 필자는 편의상 여덟 가지로 분류하되 한국전쟁 전후 남한 내에서 발생한 것들만을 열거한다.
(1) 좌파 또는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국방경비법 등 남한 체제의 실정법에 위배됐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고 대전․대구․부산․목포를 비롯한 각지의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거나 또는 미결수로 재판 대기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후퇴하는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된 민간인들이 많다.
(2) 다음으로 보도연맹회원으로 가입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과 경찰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민간인들이 있다. 보도연맹은 한국전쟁 전 공산주의 또는 좌익활동을 했지만 사안이 경미해 우익으로의 전향을 전제로 한국정부로부터 관용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다.
(3) 함평․거창․함양․산청․남원․고창․군창․제주․문경 등 전연 좌익활동은커녕 동조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지리산이나 불갑산․한라산 등 남한지역 산악에서 활동하는 빨치산 또는 공비를 소탕하는 한국군에 의해 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오해되었거나 보복적 차원에서 학살된 순수한 양민들이 있다.
(4) 또 좌익에 의해 희생된 우익성향 또는 동조자로 오인되어 보복적 학살을 당한 민간인들이 있다.
(5) 미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백 여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6) 또한 보도연맹회원 이외 경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이 많다.
(7) 수복 후 우익진영 단체에 의해 부역자와 그 가족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8) 학살주체가 불명확하거나 특수단체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양민학살 등이다.여기에는 한국군 및 미군에 의해 북한 진주시의 양민학살도 포함된다.또 좌우익으로 갈라진 집안끼리의 감정싸움으로 학살과 보복의 대량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 같이 다양한 민간인 학살이 드러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언급한 양민만을 그 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이들은 좌익도 우익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향을 가질만한 지식이나 의식조차 없었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그 이남에 있던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하지 못해 지리산이나 불갑산으로 들어가 무장활동을 하면서 군․경을 포함한 대한민국 체제에 저항하고 있던 1950년 10월부터 1953년 5월까지 이들 좌익무장세력이 소탕될 때까지 우익이나 우익에 가까운 사람들은 읍 단위 이상의 도시로 피신했고 좌익이나 좌익에 가까운 사람들은 지리산이나 불갑산으로 피해 리 단위 이하의 농촌 마을에는 좌․우익과 전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주로 노약자나 부녀자들만 남아 있었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전연 없는 선량한 국민이자 양민들이었다.26)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양민’은 이들을 말한다.
이 글의 시기적․지리적 범위는 1950년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육군 제 11 사단 제 20 연대 제 2 대대 제 5 중대 병력에 의해 함평군 월야․해보․나산 등 3 개면에서 자행된 양민학살만을 다루기로 했다.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의 역사적 배경
한국전쟁을 전후한 양민학살사건은 태평양전쟁 후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따라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한 이른바 ‘38선’이 획정된 후 남북으로 미국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시작된 반공주주와 공산주의의 대립 즉 우익과 좌익의 갈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안의 수용여부를 놓고 노정된 찬․반탁투쟁으로 인해 심화된 이데올로기의 극한적 갈등과 충돌, 그 연장선상에서 발발한 한국전쟁에 그 원인을 두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하면 1945년 이후 공산주의 체제인 소련의 팽창정책과 이를 저지하여 자국의 세계적 위상을 계속 유지하려던 미국의 대소봉쇄정책과의 충돌에 따른 양극 냉전체제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제 2 차 대전 승리의 주역인 미국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소련의 남하 또는 팽창정책을 저지해야 한다는 세계전략에 따라 남한에서 우세한 공산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자국을 지지하는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기본정책과 북쪽의 위성국가적 단독정부를 기지로 삼아 공산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해 보겠다는 소련 및 좌파세력의 의지가 충돌하면서 좌우익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때 맞춰 표출된 미군정의 식량 및 고용정책의 실패를 업고 일으킨 1946년 9월 좌파의 대규모 파업 및 대구의 10월 항쟁과 단정반대투쟁의 명분을 내세워 발생한 4․3봉기 및 양민학살,그리고 뒤이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 제 14 연대 반란이라는 좌파세력의 저항과 투쟁이 잇따르면서 대립과 갈등은 극한적 상황으로 치달아 ‘죽기 아니면 살기 식’ 투쟁과 살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평화적 투쟁에서 무장투쟁이라는 남로당의 ‘신 전술’에따라 좌파의 무장테러를 수반한 봉기와 반란이 이어지자 정권의 존립자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한 미군정과 남한정부는 극성을 부리는 좌익-‘빨갱이(Reds)’를 무조건 섬멸하지 않으면 남한은 곧 공산화된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1950년 초 미국에서 때맞춰 불어닥친 매카시즘이큰 몫을 하게 된다.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또는 저지를 위해서는 한국인의 희생정도는 무시해도 좋다는 강대국 또는 제국수의적 의식 다시 말하면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약소민족의 인권이나 생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바닥에 깔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4․3봉기에 대처하는 미군정이 한라산으로 들어가 게릴라활동을 벌이고 있던 좌익 빨치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한라산 기슭의 양민들을 수없이 학살하는데서 잘 드러났고 미군정을 답습한 남한정부가 한국전쟁 발발 후 후퇴하면서 형무소에 수감 중인 사상범이나 보도연맹 회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데서 여실히 나타났다.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북한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써 한반도의 남쪽이 공산화된다는 위기감을 가진 미국의 공산주의 섬멸원칙과 정권의 존망위기에 놓인 남한정부의 공산주의 타도 의지는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는 무조건 축출해야 한다는 기본원칙이 세워진 것이다. 어찌됐건 한국정부로서는 생존자체를 위해 좌익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안고 한국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의 퇴각로가 차단되어 갈 길을 잃은 인민군의 패잔병이 북쪽 지원군의 남진을 확신한 나머지 지방토착 좌익세력과 함께 빨치산부대를 형성하여 지리산을 비롯한 남쪽의 산악지대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한국군으로서는 전선방어와 함께 후방을 교란하는 이들의 소탕이 선결과제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 후방 양방에서 공격받는 상황과 함께 치안부재상태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양민에 대한 무차별학살은 물론 수복 후 우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역사적 배경은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있었던 양민학살은 Chalk와 Jonassohn이 네 가지로 분류한 학살동기 중 현실적․잠재적 위협의 제거, 현실적․잠재적 적에 대한 공포심 확산, 3) 신념․이론 또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실행 등 세가지 타입으로 볼 수 있다.어찌 됐건 피학살자들은 ‘국가가 자기국민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행위’에 틀림없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었다.
함평양민학살의 원인과 서막
제 11 사단 창설과 견벽청야작전
한국정부는 산악지대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발호하고 있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1950년 8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국방부 일반명령 제 54 호에 의거 육군본부 직할부대인 제 11 사단을 창설했다.그 동안 전투경찰대에 맡겼던 후방의 공비토벌을 군에 넘겨 본격적으로 소탕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경험은커녕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신병 1만여 명으로 구성된 제 11사단은 10월 14일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여 사단본부를 차리는 한편 9연대를 10월 6일 상주에, 13연대를 10월 5일 전주에, 20연대를 10월 10일 광주에, 공병대대를 10월 11일 남원에 배치하게 된다. 공병대대를 제외한 3개 연대는 지리산전투사령부, 전북지구전투사령부, 전남지구전투사령부로 각각 호칭을 바꾸어 지리산과 그 주변 산악지대의 공비소탕을 맡도록 했다. 그러나 작전지역은 교통․통신이 극히 불편하고 도로사정이 취약한 산악지대의 오지인데다 이들 지역이 좌익게릴라들의 세력 하에 있거나 발호하고 있던 지역이라는 점 등 갖가지 열악한 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공비들이 기습할 지 모르는 불안과 함께 공비와 양민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은 전투경험이 없는 장병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특히 주민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낮에는 국군과 경찰에 다가서지만 밤에는 식량과 부식 그리고 정보를 요구하는 공비들을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라는 이율배반적 통치를 받고 있는 셈이 되었다. 여기에 지휘관이 광복 전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개석군과 광복군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최덕신 준장이었다. 최덕신은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는 공비들을 가장 빨리 그리고 손 쉽게 소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대의 춘추전국시대로부터 내려온 중국의 전통적 작전개념인 ‘견벽청야작전’을떠 올렸던 것이다.
한 때 장개석군에 복무하면서 그들이 원용하던 ‘견벽청야작전’ 개념에 익숙해 있던 제 11 사단장 최덕신은 이 작전의 광범한 실패의 내면을 외면한 채 희소한 성공의 측면만을 의식하여 공비소탕 작전상 그들과 주민을 격리시키기 위해 공비가 출몰하는 지역을 말끔히 쓸어버릴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한 단순한 판단이 사단본부에서 연대․대대를 거쳐 일선 중대단위 지휘관들에게 하달되는 동안 해석의 과오와 과잉수행으로 허다한 무리와 부작용을 낳게 된다. 거창사건의 경우 제 11 사단 제 9 연대 제 3 대대장 한동석 소령은 연대작명 부록으로
(1) 작전지역내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2)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3)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경우 소각하라는 세 가지 사항을 하달 받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원면 주민들이 대부분 노인․부녀자․어린이들이었기 때문에 차마 사살할 수 없는 상태여서 주춤하고 있던 차 항명으로 다스리겠다는 오익경 연대장의 호통을 받고 명령을 어길 수 없어 학살을 단행한 것’이라고 군법회의 법정에서 진술했었다.바로 이 ‘견벽청야 작전’의 명령은 이같이 함평․거창을 비롯한 함양․산청․남원․고창․순창 등 지리산과 불갑산 주변에서 전개된 공비소탕작전 과정 중 수많은 양민들을 무고하게 희생시키는 비극을 낳는 국가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불갑산지구사령부
한 때 압록강까지 치달았던 남한군과 유엔군은 중국군과 북한군에 밀려 경기․강원도 지역에 형성된 동․서부전선에서 필사적인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전선은 다소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같은 북한군 및 중국군의 남하(南下)는 이에 앞서 감행된 유엔군과 남한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퇴각로를 차단 당하여 미처 후퇴하지 못한 채 지리산․불갑산을 비롯한 남쪽 곳곳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부대를 형성하고 있던 인민군과 지방토착 좌익들을 고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이 무렵의 남한 내 총 입산자수는 5만~8만 명이었으나 나중에 졍규 인민군이 거의 북상길을 택함으로써 그 이후인 1950년 10월 말에는 2만 5 천명으로 감소되었다.
불갑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갑산은 한국전쟁 전인 10월 항쟁․4․3 봉기․제 14 연대 반란 등 일련의 투쟁을 벌이던 좌익들이 군경에 쫓겨 들어간 후 한국전쟁 발발로 인민군이 남진해 올 때까지 무장 게릴라활동을 계속 벌였던 전례가 있어 당연히 빨치산의 거점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함평․영광․장성․나주․무안․목포․고창 등 인근지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치에 앞장섰던 좌익은 물론 부역자와 가족 및 동조자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유지들을 강제로 인도한 사람들로 불갑산 특히 모악산 골짜기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소백산맥의 한 자락인 불갑산은 해발 515m의 연실봉을 정상으로 삼고있는 산이지만 모악산을 비롯해 우뚝우뚝 솟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겹쳐있어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할 뿐만 아니라 영역이 넓어 사람이 은신하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다. 이 같은 지형을 이용하기 위해 전남 서남지역의 각 군 당 및 무장빨치산으로 형성된 좌익세력들은 이 용천사와 그 앞 계곡으로 집결해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불갑산지구사령부’를 구성하고 용천사에 본부를 두었다.46) 그러니까 불갑산 내 주 피난처는 용천사 앞 모악산 자락의 계곡이었다. 특히 모악산은 영광과 함평의 경계를 이루는 산허리로서 비단 해방 후나 한국전쟁 당시에만 좌익 빨치산부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나 대한제국 말엽에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병들이 숨어들기도 했던 곳이었고 때로는 소규모 의적들의 은거지이기도 했다. 지리산은 물론 백아산․백운산 지역의 당 및 빨치산들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이 곳에는 한 때 노동당 전남도당과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사령부가 와 있기도 했다.
또 이들은 ‘불갑산 빨치산사’를 두어『불갑산 빨치산』이라는 기관지를 1951년 2월 8일자 13호까지 발행했고 군공유공자 표창식을 갖는 등 사령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이 곳에서 멀지 않은 장성의 태청산(593m)은 불갑산보다 높지만 산만 덜렁 있어 은폐하기가 어려워 불갑산 본부의 지부역할만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불갑산에 모여든 인원은 수천에서 수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빨치산 또는 각 군 당과 도당본부 요원들은 용천사 부속건물을 이용했고 나머지 좌익요원들은 군경의 명령에 따라 소개지역으로 비워있던 해보면 광암리 등 주변 마을에서 생활했다. 그나마 집은 물론 창고․측간․외양간․닭장이라도 차지하지 못한 일반 피난민들은 나무와 나무사이에 막대기를 걸친 막간을 만들어 이슬․비․눈․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그도 못한 사람들은 가마니와 볏짚을 깐 다음 짚 마름이나 담요를 덮고 겨울을 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나 많던지 걸어다닐 수조차 없었다.하나의 ‘산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보급은 처음에는 열차나 공공기관을 기습하여빼앗은 관수품으로 충당하는 한편 입산자 가족들이 선의로 제공한 것으로 충당하기도 했고 어떤 경우 좌익적 성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주민들이 자진해서 제공하기도 했다.51) 그러나 차츰 군경의 감시가 심해 가족이나 친지로부터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들녘에 있던 볏단을 훔쳐다 손으로 타작해서 발동기를 이용한 정미기로 방아를 찧어 밥을 지어먹었고 나중에는 마을을 털어야 했다. 가능하면 인민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빨치산 수칙을 어기지 않으려 했으나 살기 위해서는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두끼나 한끼로 때우는 일이 예사였다. 그것도 없으면 나무 열매나 풀뿌리를 씹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실제 무장한 공비는 5백 명 안팎이었다. 불갑산 대토벌작전에 돌입하게 되는 한국군 쪽에서는 처음에 완전무장군 5백 명, 비무장군 3천 명으로 추정했으나 나중에는 그나마 3백 50명으로 줄여서 잡고 있다.불갑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나윤주의 고백적 수기인『누가 반역자냐』에는 ‘불갑산사령부 밑에는 완전무장한 5백여명의 정규군 병력과 칼과 죽창을 쓰는 보조 무장대원이 7백 명을 넘는 엄청난 숫자였다’고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장공비와 보조 무장대원 이외 비무장 좌익조직원까지 합치면 2천여 명쯤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2천 여명의 대원 가족과 동조자들, 타의 또는 강제로 이끌려 온 사람까지 합치면 1만 명 이상, 조금 과장해서 수만 명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숫자가 몰려 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 5 중대의 학살만행이 극성을 부리자 해보․월야․나산․장성군 삼서면 내의 좌익 아닌 일반 농민들까지 목숨보전을 위해 이 곳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불갑산은 더욱 북새통을 이루었고 인구가 수만 명이라는 설도 여기에 근거를 두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불갑산에 진을 치고 있던 좌익 빨치산들은 한국군의 토벌작전이 옥죄어지자 보급품 조달과 전투력 극대화를 위해 들녘에 쌓여있는 볏단이나 무 배추를 훔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 동네 심지어 왕복 30km 길도 멀다하지 않고 내왕하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협박하거나 살해를 일삼으면서 식량과 부식을 마련해야 했다.좌익 빨치산들은 한국군의 토벌작전에 맞서기 위해 실탄과 무기를 확보하고 아울러 자신들의 보급투쟁을 겸해 이따금 한국군 부대를 기습하고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월야지서도 수복 즉후인 11월 30일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월야지서는 일정기간 낮에만 근무하고 밤이면 제 5 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해보면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주로 불갑산에 가까운 함평경찰서 월야지서․장성경찰서 삼서지서․영광경찰서 묘량지서와 불갑지서가 주 공격대상이었다. 공비들은 1951년 1월 17일 대낮, 그 동안 제 5 중대 주둔으로 불가능했던 해보지서를 이 중대가 작전상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을 기화로 습격하는 등 기회만 있으면 관공서 특히 지서습격을 서슴치 않았다.
어찌됐건 이 지역은 밤에는 좌익, 낮에는 우익 세상이었다. 주민들은 밤에 오는 공비들을 밤손님이라고 부르며 무섭고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응해줘야 했고 낮에는 남한 군경의 요구대로 도로보수공사나 땔감 사역에 동원되고 심지어 밤이면 경찰지서 경비를 위한 보초병 노릇까지 해야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정부의 통치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낮에는 남한군과 경찰로부터의 갖가지 징발과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고 밤이면 좌익게릴들에게 재산과 목숨을 맡겨야 하는 불안과 공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좌익게릴라들의 기습과 국군의 토벌작전이 번갈아 가해지면서 대규모 양민학살의 비극이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 5 중대 주둔
제 11 사단 제 20 연대는 창설지 경북 영천에서 전남지역 공비토벌 명령을 받고 삼랑진․진주를 경유하여 10월 15일 광주에 도착해 광주여자중학교에 본부를 차린 다음 10월 23일 함평을 수복하게 된다. 이 10월 23일의 함평읍 수복기록은 함평군사에 나온다.60) 그러나 육군본부가 1954년 발행한『공비토벌사』에는 함평읍 진입작전에 대한 기록이 없다. 또한 함평양민학살사건의 주체로 드러난 제 20 연대 제 2 대대 제 5 중대가 학살사건 발생시기를 전후해서 어디에 주둔했으며 어떤작전을 펼쳤는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제 5 중대가 언제 그리고 함평군 어디에 주둔했다가 양민들을 학살하게 되는가?
육군본부가 발행한『共匪討伐史』제 3 장, 제 2 절, 제 2 항의 ‘제 20 연대 전투’ 항목 중 제 5 중대가 불갑산 포위작전에 투입될 때까지의 기록을 보자. 제 5 중대를 포함한 제 20 연대 병력이 10월 4일 전남지방으로 배치된 후 10월 31일까지 주로 담양․장성․영암지방에서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들어 있어야 할 10월 23일의 함평읍내 수복작전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 제 20 연대의 제 1, 제 2 대대가 11월 6일부터 12월 6일까지 주로 순창․화순방면에서 작전을 벌이는데 여기서 제 2 대대의 화순지방 진출이 눈에 띈다. 여기에도 제 5 중대 또는 제 2 대대의 함평으로의 진출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12월 18일부터 다음 해 1월 24일까지 제 2 대대는 함평․장성․나주, 제 3 대대는 화순지역에서 작전을 벌인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12월 18일 제 5 중대가 ‘함평군 해보면 구계리에 속출하여 준동 중인 공비를 소탕했다’는 최초의 함평진출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제 5 중대는 다시 1월 24일 장성․나주방면에도 진출하고 있으나 함평에서의 여타 작전상황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제 20 연대 전체가 전북의 회문산 작전에 투입되어 1천 3백 50명의 공비를 소탕하는 작전을 벌인 다음 제 5 중대는 다시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로 돌아와 진지를 구축한 후 2월 20일 불갑산 포위 작전에 투입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 20 연대는 광주를 중심으로 광산․장성․담양․순창․영암․화순․나주․함평․영광․고창 등 광범한 지역을 작전관할로 삼고 공비소탕작전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빨치산은 장성 쪽에서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 5 중대는 언제 함평에 나타나 공비소탕작전을 벌이며 양민을 어떻게 학살하게 되는가? 이에 대한 상황은 오직 피해자 또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면 해보면 금덕리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최초의 양민학살이 자행되는 1950년 12월 6일 이전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에 주둔한 사실이 분명한데도 이같이 기록이 없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이에 대해 정확하고 소상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알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특히 제 5 중대가 1950년 11월 하순 이후 이 곳에 주둔하면서 공비 소탕작전을 펼친 사실이 분명한데도 그러한 내용의 공식기록이 군은 물론 경찰쪽에도 없다는 점이다.
다음 항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제 5 중대는 1950년 12월 2일부터 3일 동안 시목마을 앞에서 공비들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전사한 2명의 화장 및 장례식이 사흘 후인 5일 해보초등(국민)학교에서 벌어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12월 2일 이전부터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에 주둔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곧 바로 다음 날인 12월 6일 장교․동촌 마을을 시작으로 다음 해 1월 14일까지 월악산 주변 7개 마을을 비롯해 외치리․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해보면 모평 과 쌍구룡 그리고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서 집단으로 양민을 학살한 것은 물론 크고 작은 인명을 학살한 부대가 제 5 중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주민들 역시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국방부 정훈국 소속 함평지역 선무공작대(대장․김병두)원으로서 동삼면(나산․해보․월야 3개면을 지칭)지역 파견대장으로 학살현장에 있었던 윤인식(尹仁植․1923~2000)은 ‘함평양민학살을 자행한 부대는 국군 제 11 사단 제 20 연대(연대장․대령 박기병) 제 5 중대(중대장․대위 권준옥)가 분명하고 중대본부는 해보면 금덕리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1950년 12월, 월야지서장이었던 이계필(1925~1999) 역시 자신의 관할지역인 동촌․장교․남산뫼․외치마을에서 있었던 양민학살사건을 저지른 부대는 제 5 중대 병력이며 중대장은 권준옥 대위로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피해주민들로부터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 제 5 중대가 해보면에 등장한 것은 언제인가? 공식 기록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주민들은 11월 하순으로 보고 있다. 당시 월야지서장이었던 이계필도 ‘국군이 우리(경찰)보다 앞서 들어 왔었다. 우리 경찰이 월야에 들어간 것은 11월 하순으로 기억된다’고 말했었다. 또한 그는 나산․해보․월야지서 중 월야가 제일 나중에 접수됐으나 공비들의 발호가 심해 얼마동안은 낮에만 근무하고 밤이면 해보로 철수하기도 했는데 공비들이 11월 30일 밤 비워있던 월야지서를 습격해 방어책(柵)을 조성하기 위해 쌓아두었던 목재에 방화했던 것으로 보아 ‘지서가 들어온 것은 그 이전인 11월 하순이었음이 분명하고 5중대는 그보다 앞서 주둔했다는 것’이다.윤인식 선무공작 대원 역시 11월부터 주둔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권준옥 중대장도 남산뫼에서 정병오 호국군 소위를 즉결 처형하면서 ‘우리가 들어온 지 벌써 오래됐는데 여태까지 나오지 않았다’ 운운했던 것으로 보아 11월 하순 이전에 진주했음을 시사했었다. 특히 당시 군인들이 들어와 부녀자를 농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어 학살작전 때 처녀들이 유부녀로 가장하기 위해 머리를 올리고 아기를 업고 나왔던 점으로 보아 진주시기는 상당히 앞선 시기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권준옥 중대장의 연락병이었던 김일호 일병은 ‘부산에서 5중대가 창설된 후 광주를 거쳐 해보면 주둔지에 도착한 것은 10월 중순 쯤’이라고 증언하고 있어 11월 이전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10월 23일 제 20 연대가 함평읍을 접수했기 때문에 20연대 예하부대인 제 2 대대병력 또는 제 5 중대가 바로 해보면으로 진출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제 5 중대는 속칭 문장장터인 해보면 금덕리 407-39번지를 본부로 삼았었다. 지금은 2층 콘크리트 건물로서 1층에는 현대미용원이 들어 있다. 당시는 초가지붕의 건물이었던 이 곳에 본부를 정하고 그 뒤쪽 장터바닥에 지하참호를 파놓고 기거했다. 이 곳에서 1km 남짓 떨어진 유정자라는 마을에는 제 1 소대가, 고두마을에는 중화기소대가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곳곳에 초소를 설치해 공비들의 기습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 곳은 불갑산과 직결되어 있는 비녀봉(156m)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비들은 이따금 비녀봉에서 봉화불을 피워놓고 중대본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나중에 비녀봉의 반대편 끝자락에 위치한 모평마을 학살은 전 날밤 이 같은 봉화불과 총격 때문에 저질러졌었다.
병사 2명의 전사와 중대장의 복수심
5 중대는 이 곳에 주둔한 후 작전 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처음에는 태청산이 보이는 장성군 삼서면 쪽으로 자주 출동하고 있었다. 이는 5 중대가 광주 쪽에서 해보면으로 진주해 오면서 삼서면을 동시에 진주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초순, 장성 갈재터널을 통과하던 군용열차가 빨치산의 기습을 받았을 때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투입된 병력이 2 대대로 추정되는데 제 5 중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빨치산은 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 대상지역이던 백아산을 피하면서 동시에 보급사업을 하기 위해 갈재에서 열차를 기습했고 이에 성공한 빨치산부대는 출동한 군 병력과 교전하면서 불갑산으로 빠져나갈 때 노령산맥 끝자락에 있는 태청산 쪽 길을 택했을 것은 명확관화 한 일이다.
이 때문에 이 빨치산부대를 추격하는 작전상 5 중대의 일부가 태청산 아래까지 진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처음으로 장교와 동촌마을에서 양민을 집단학살 한 직후 다시 삼서면 쪽으로 진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어찌됐건 5 중대 병력은 12월 2일 아침 24호 국도를 따라 삼서면 쪽으로 전진할 무렵 월야면 계림리 시목마을 앞 속칭 한새들녘 앞 쪽에 이르렀을 때 시목마을 뒷동산에 은거하고 있던 공비들의 공격을 받아 일대 교전이 벌어졌다. 주민들은 종일 교전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날 한새들녘 지하보 부근에서 교전하던 김추길․송기봉 일병 등 2명의 병사가 전사하게 된다.불과 2개월 전 급조된 부대여서 전투경험이 부족한 나머지 노출된 장소에서 응전하다가 전사자를 냈던 것이다. 그리고 전투는 다음 날인 3일과 4일에도 계속됐다. 3일의 교전은 전날 전사한 병사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졌고 4일 교전은 공비들이 전사한 병사의 시체에서 군복과 무장을 모두 수거해 갔을 뿐만 아니라 시체를 끔찍스럽게 난도질한데 대한 보복적 차원에서 계속 공격이 가해지는 등 연 3일 동안 같은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에서 2명의 부하가 전사했다는 사실은 제 5 중대장 권준옥으로 하여금 ‘견벽청야작전’이라는 미명 하에 함평양민 학살 만행을 저지르는 결심을 굳히게 한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12월 5일 권준옥 중대장 이하 전 장병들은 사흘 전 전사한 두 사병의 시신을 해보초등학교 교정에 마련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장하는 장례절차를 밟았다. 이 날 장례식에 참석한 장병들 앞에서 권준옥 중대장은 ‘너희들의 주검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가 善戰을 통해 공비를 소탕하여 하루 빨리 치안을 회복함으로써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의미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바로 다음 날 집단 양민학살사건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그는 철저한 복수를 다짐했던 것 같다. 그 것도 두 사병을 전사케 한 공비들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무 죄도 없는 양민들을 향한 복수심을 견벽청야작전개념에 접목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각오가 함평비극의 씨앗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권준옥 중대장은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서 보여준 한동석 대대장의 경우처럼 ‘작전지역내의 인원 전원 총살․모든 건물과 보급품 소각’이라는 상급부대의 명령에 대해 한번쯤 재고해 보지도 않고 복수를 위해 이와 유사한 ‘견벽청야 작전’ 개념을 더욱 확대 해석하여 공비와 양민을 선별하지 않은 채 무차별 대량학살로 이끌어버린 함몰된 인간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함평 양민학살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같은 견벽청야 작전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그 후임 중대장 이영오 중위가 지휘한 1951년 1월 23일 이후의 제 5 중대는 학살만행을 전연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빨치산들의 승전축하 잔치(?)는 권준옥 중대장에게는 불 위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어 복수심을 더욱 부채질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배경은 ‘견벽청야작전’ 명령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해 12월 22일부터 다음 해 1월 6일까지 전북 고창군 심원면, 해리면, 공음면, 상하면에 진출한 같은 제 20 연대 제 2 대대 제 6 중대 병력도 무려 7백 50명 이상의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두 사병의 장례식 날 밤 공비들은 동촌마을과 신기마을 사이의 동산에서 이틀 전 5중대와 교전하여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크게 올렸다며 돼지를 잡아놓고 동촌과 신기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징과 꽹과리를 치며 시끌벅쩍하게 떠들며 자축연을 벌였다.무리들의 한 가운데에 모닥불인지 봉화불인지 알 수 없는 장작더미 불을 피워놓고 빙 둘러앉거나 서서 떠들어 댔다. 인근 마을에는 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함께 꽹과리․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고 훨훨 타오르는 장작더미불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억지로 불려온 주민들은 물론 꽹과리 소리 등 시끌벅적함을 집에서 듣고있던 마을 사람들은 어딘가 불안하기만 했다. 이미 가까운 곳에 국군과 경찰이 진주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불안은 다음 날 새벽 적중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보복사건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과와 보복의 두 마리 토끼
함평학살의 또 다른 원인은 적 사살과 무기노획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과를 올려 상부에 보고하려는 데도 있었던 것 같다.
“1․4후퇴가 며칠 지난 1월 7, 8일로 기억됩니다. 장성군과 함평군 경계지역인 월야면 계림리 시목마을 뒷동산에서 군과 경찰의 합동 작전회의가 열렸어요.경찰로서는 오직 한 사람 나만 참석했었는데 그때 ’하루에 공비 50명 이상 사살, 무기 50점 이상 노획‘을 지시하더군요. 아마 이런 지시 때문에 더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월야지서장이었던 이계필의 증언이다.
그러나 이 지시는 이 때 처음 내린 것은 아닌 듯 하다. 왜냐하면 월야면 동촌마을이나 못갓 등 7개 마을에서도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서면 괭이와 삽을 수합했었기 때문이다. 이 것들은 나중에 노획무기로 보고되었던 것 같고 학살된 민간인도 공비사살 숫자로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기가 없는 우리는 항상 군인들을 따라다니며 불지르고 사람을 나오라고 외치는 역할을 했었는데 괭이나 삽․쇠스랑․도끼 등을 줍는 역할도 했지요. 중대요원들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우리는 마을에 들어서면 우선 삽이나 괭이부터 챙겨야 했어요. 나중에 이것들을 노획무기라고 전화로 보고하는 것을 보았지요.”
이 때 희생됐던 사람들 중 일부를 ‘유격대 요원 사살’로 기록하고 있는 데서도 나타난다. 전과와 보복이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양민학살의 전개과정
새벽에 들이닥친 長橋와 東村마을의 피울음
1950년 12월 6일 음력으로 10월 27일. 이날은 1951년 2월 9일 거창 사건이 터지기 66일 전이다. 동쪽에서 뿌옇게 동이 틀 무렵, 거의 동시에 일단의 군인들은 정산리 서촌마을 뒤 야산에서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속칭 진다리)와 동촌마을을 향해 소총을 쏘아대며 접근해 왔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는 한편 주민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외쳐댔다. 두 마을에는 10여 가구와 8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사례1)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수색하면서 주민들에게 ‘살고 싶으면 마을 앞 논으로 모이라’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사람들은 쫓겨 나오다시피 밖으로 나와 마을 앞 논바닥에 웅크리고 서 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 중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남자들을 따로 갈라 몇 줄로 세워놓은 채 논두렁에서 느닷없는 기관총 사격을 마구 가해버렸다. 순식간이었다. 강영주와 두 살된 그 아들 안종필만이 극적으로 살아났다.
사살을 끝낸 20여명의 군인들은 확인사살까지 한 다음 마을을 떠나 같은 시각에 장교마을과 함께 학살작전(?)이 진행되고 있던 동촌마을로 향했다. 이들은 a) 작전지역내의 인원은 전원 사살하라, b)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모두 소각하라, c)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하면 모두 소각하라는 최덕신 사단장의 견벽청야작전 명령 3개항 중 ‘전원 사살’과 ‘가옥 소각’이라는 2개항을 시행했던 것이다.
사례 2) 80여 가구쯤 되는 동촌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대부분 초가집인 데다가 초겨울 가뭄이 계속되던 때라 지붕이 바짝 말라 있어 비록 눈이 쌓여 있었지만 불을 대기가 무섭게 활활 타올랐다. 추수 후 미쳐 타작을 못한 채 마당에 쌓아놓은 벼 비늘에도 예외 없이 불이 붙었다. 어느 할머니는 불과 몇 분 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먹고 살아갈 볏단에는 왜 불을 지르느냐’고 악을 써 댔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주민들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이 집 저 집에서 빠져 나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길 아래 논바닥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50대, 60대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할머니와 어린이도 끼어 있었고 5, 6명의 부녀자도 섞여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일부 젊은이들은 마을 뒤로 달아나 버렸고 부녀자들은 불이 붙어 있는 집에서 살림살이를 끄집어내야 한다면서 나오지 않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 앞에 하사관과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논바닥보다 약간 높은 길이나 논두렁 위에 선 그들은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 장교가 부하에게 무어라고 외치는가 싶더니 ‘따따따’ 기관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논바닥에 서 있는 주민들을 향해 총탄이 일제히 발사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머리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모두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장교의 명령을 받은 10여명의 사병들은 쓰러져 있는 시체사이를 돌아다니며 발로 툭툭 차보고 꿈틀거리면 다시 총을 쏘아 댔다.
위 사례 1)이나 2)의 상황이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 순간 군인들은 이미 숨진 장교마을 김순란(1929년 생)의 젖을 빨고 있는 두 살배기 아기 박양님을 향해 총 뿌리를 겨눠 사살하기도 했다. 또한 미쳐 숨지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재차 확인사살하는 것이었다.이 때 희생된 사람들은 장교마을에서 22명, 동촌마을에서 33명이다.
작전을 끝낸 군인들은 이 마을을 떠나 장성 쪽으로 가는 24번 도로를 따라 전진해 갔다. 이들은 월야면 계림리 죽림마을과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월곡마을 경계선을 따라 태청산을 바라보며 행군하다 갑자기 마을로 뛰어들어 총을 쏘아대며 주민들을 두 마을 가운데에 있는 논바닥으로 나오라고 위협한 후 모여든 주민들에게 사격을 가해 월곡마을 17명, 죽림마을 4명 등 모두 21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삼서면 대도리쪽으로 행군을 시작한 군인들은 바로 월곡마을 앞 대도천 봇믈이 넘치자 두 사람의 20대 남자 임봉수와 김용선의 등에 업혀 한 사람씩 건넌 다음 현장에서 이 두 사람까지 학살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함평 양민학살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일단의 병력은 그 뒤 월야면․해보면․나산면 일대에서 이와 비슷한 ‘작전’을 몇 차례 더 펼쳐 500명이 넘는 많은 인명을 학살하게 된다. 이 부대가 다음 해 1월 14일까지 저승사자로 둔갑하여 월야․해보․나산면 일대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제 11 사단 제 20 연대 제 2 대대 제 5 중대이고 중대장은 육군대위 권준옥이었다.
7개마을의 남산뫼 대 학살
동촌마을 사건 다음 날인 12월 7일(음력 10월 28일) 아침 8시쯤 제 5 중대 병력은 월야면 월악리 내동․못갓․성주 마을과 바로 이웃인 월야리 순촌․송계․동산․괴정 등 7개 마을을 덮쳤다. 이 마을들은 동북 쪽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64m의 월악산 서․남 자락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특히 동래 정씨와 진주 정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는 집성촌이기도 하다.
군인들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총을 쏘아대면서 동네를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도 불을 지르라고 강요했다. 정순도는 자기 집에 지르기도 했다. 군인들과 이장 정대섭(그 후 작고)은 ‘도로를 복구하러 가니까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나오라’고 외쳐댔다.
이들 마을에서 가까운 도로는 광주~영광간 국도. 밤이면 공비들이 군 작전을 방해하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도로를 파헤쳐 차단시키고 낮에는 경찰 쪽에서 동원해 복구하는 파괴와 복구가 되풀이되던 때였다. 군인들은 만약 ‘집에 남아 있다가 발각되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주민들이 삽이나 괭이를 찾으며 허둥대자 괜찮다며 그냥 모이라는 당초의 도로 복구작업 명령과 상반된 명령을 하기도 했다. 이 때 어느 군인은 중대장이 시키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나오라고 외쳐대는 정맹모 노인에게 다가가 ‘외치지 말아요. 나오는 사람은 모두 죽어요’라며 가만히 만류하기도 했다.
이렇게 외치던 정맹모도 이 날 딸과 함께 희생됐다. 비록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군인이지만 양민을 집합시켜 학살하려는 중대장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며 피해를 줄이려는 양식을 발로했음이 분명했다. 다른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마을 앞 남산뫼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순촌․못갓․내동․동산․송계․괴정․성주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남산뫼로 올라갔다. 젊은 여자나 처녀들을 보면 군인들이 욕을 보인다는 소문 때문에 일부 처녀들은 급히 머리를 올리고 이웃집 아기를 둘러 업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송계마을 뒷동산이기도 한 남산뫼에서 앞 뒤로 내려다보이는 2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 7개 마을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서 하늘을 덮어버릴 듯한 기세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을 주민 ‘7백여 명안팎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중대장 권준옥 대위가 주민들 앞에 서서 군인과 경찰가족 또는 유가족은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또 군인에게서 온 편지를 갖고 있는 사람도 나오라고 했다. 이 때 정묘남(鄭卯男․66)은 경찰가족으로 신고하여 대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경찰가족은 남편이 경찰로서 후퇴했다고 말했는데도 학살당했다. 마침 그때 아래 3)의 사례처럼 무시무시한 광경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미쳐 피난하지 못해 숨어 있었다는 호국군 장교를 즉결처분해 버린 것이다.
사례 3) 정병오(당시 22, 3세)가 증명을 내 보이며 자기는 ‘방위군(또는 호국군) 소위인데 후퇴를 못하고 이 마을에 숨어 있다가 여러분들(국군을 말함)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곳에서 2km 쯤 떨어진 월야면 계림리 시목마을 사람으로 집에 있으면 공비들에게 신분이 탄로 날까 봐 이 마을 처가댁에 숨어 있었습니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중대장 권 대위는 권총을 빼들고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서라’고 명령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 젊은이 뒷통수에 총 한 발을 쏜 다음 연거푸 두 발을 다시 쏘았다. 젊은이는 피를 뿜으며 쓰러지면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숨져갔다.
살벌한 광경이었다. 아니 광적이었다. 어떻게 해서 미쳐 후퇴하지 못한 호국군 장교에 대해 그동안의 경과를 한 마디 들어보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즉결처분하는 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대장은 17세 이하와 45세 이상을 별도로 분리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군인들은 17세 이하와 45세 이상을 상대로 별도의 조를 짠 뒤 마을로 내려가 아직 타지 않은 집에 불을 지르라며 내려보냈다.
이제 남산뫼에는 17세 이상 45세 이하의 남녀 젊은이들만 남아 있었다. 이들은 널다랗게 움푹 패인 구덩이 같은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 가운데는 부녀자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이날 군인들은 동촌마을에서와는 달리 집집마다 수색했기 때문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나와 있었다. 어린이를 업은 아낙네도 상당수 있었다.
주민들이 모여 있는 윗쪽의 묘소에 3정의 기관총이 월악산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때 월악산에서는 공비들이 산발적으로 총을 쏘는가 하면 꽹과리와 징을 치면서 만세를 부르며 군인들을 위협하는 척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사례 4) 이 때 갑자기 웅크리고 앉아 있는 주민들에게 ‘엎드려’라는 구령이 떨어졌다. 그러자마자 병사들의 M1소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을 뿜었다. 3정의 기관총도 함께 불을 뿜었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엎드렸으나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얀 옷에는 피가 튀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총소리가 멎었다.
한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총탄이 퍼부어지고 나서 권준옥 중대장은 큰소리로 외쳤다. 확인사살을 통해 전멸시키기 위한 사례 5)의 상황을 벌인 것이다. 그의 잔인성과 패륜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사례 5)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일어나라. 여러분은 하느님이 돌봐서 살아있는 것이니 모두 살려주겠다.” 50여명이 일어났다. 군인들은 이들을 방금 쓰러진 시체더미 옆 빈 자리로 모이게 했다. 중대장은 다시 ‘엎드려’하고 외쳤다. 이번에는 소총에서 총알이 쏟아져 나왔다.
살려주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확인사살의 절차였던 것이다. 정달모는 ‘어쩐지 일어나고 싶지 않아’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중대장은 또 다시 외쳐댔다.
사례 6) “이번에는 꼭 살려주겠다. 살아있는 여러분은 진짜 명당집 자식이고 또 하느님이 돌봐준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일어나라.” “정말 일어나라. 살려주겠다” 이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한 번 속았던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되풀이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자 이 번에는 정말이겠지 하고 일어나는 사람이 한 두 명씩 생겼다. 모두 10여 명이었다. 중대장은 또 다시 큰 소리로 외쳐댔다. “여러분은 진짜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살려주겠다. 동네에 빨리 가서 불을 꺼라” 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10여명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뛰기 시작했다. 뛰어가는 10여명을 향해 이번에는 기관총알이 쏟아졌다.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쓰러졌다.
마침 그 때 월악산 공비들은 꽹과리와 만세소리로 더욱 기승을 부렸고 하필이면 중대장의 방면명령을 받은 10여명이 월악산 쪽 길로 달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전원 사살을 목표로 했던 권준옥 중대장으로서는 더욱 열을 올려 모두 사살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이날 총알을 한발도 맞지 않고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양채문 등 3명이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총알을 맞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그러나 총알을 맞고 살아난 사람도 정남식 등 10여 명 쯤 된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 든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이날 젊은이들이 대량으로 희생당하는 와중에서도 어느 선량한 군인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서울에서 6년제 서울공업중학교 5학년생이던 정일웅(1932년 생)은 당시 19세였다. 그때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의 아들이었던 정일웅은 명주옷을 입고 있었으나 중학생 신분이라 머리를 빡빡 깎고 있을 �였다. 군인이나 경찰가족이 있으면 나오라고 할 때 학생증을 내보였으나 거부당한 채 움추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 � 중대장 연락병으로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김일호 일병이 갑자기 ‘너 이리 나와’ 해서 불려 나가는 바람에 살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외치마을 청년들의 실종
남산뫼 사건이 있은 지 이틀 후인 12월 9일 제 5 중대는 1백 여가구가 살고 있는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을 덮쳤다. 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마을 바깥 외치재 도로로 나오라고 외쳐댔다. 어제 밤 공비들이 마을 앞 도로 세 곳을 파괴했으니 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 밖으로 나온 주민들에게 가족단위로 큰아들․작은 아들․아버지․어머니․딸 순서로 줄을 서라는 명령을 했다. 그들은 어제밤 공비들과 짜고 마을 앞 도로를 파괴한 동조자를 찾겠다며 ‘마을 사람들을 살리려면 자진해서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강제로 동원돼 길을 파괴한 사람도 있기는 했으나 동조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비들의 파괴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또 그들로부터 학살당하는 것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 5 중대장 권준옥 대위는 사례 7) 처럼 아무런 이유나 선별절차도 없이 즉흥적으로 사람을 즉결처분함으로써 마치 사람 죽이는 일을 취미로 여기는 듯 했다. 얼마나 인명을 경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례 7)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서 있을 때 갑자기 ‘땅’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군인 중에 누군가가 당시 19세이던 정기복씨의 복부에 총을 쏘아버린 것이다. 정기복은 아직 숨지지 않고 온갖 고통을 호소하며 일어나려다 쓰러지고 또 일어나려다 쓰러지곤 했다.
이를 지켜보던 그의 형 정복만(1921년 생)이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나도 대한민국 사람이고 명색이 부면장인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며 군인들에게 항의하고 나섰다. 정복만은 아무죄도 없는 동생이 난데없이 총을 맞고 꿈틀거리며 죽어가고 있으니 분통이 아니 터질 수 없었다. 이 때 22세의 권준옥 대위는 권총을 빼들고 ‘너도 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중대장이 동생을 쏜 것으로 직감한 그는 당돌하게 항의했지만 권총을 들이대며 쏘아버리겠다고 발악하는데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소리도 못하고 주저앉아야 했다. 바로 그때 권준옥 대위는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동생 정기복에게 다시 세 발의 총을 쏘아 절명시키는 것이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 광경이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 가는 동생을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례 8) 군인들은 몽둥이를 내리 찍으며 한 집(1가정)마다 1명씩을 뽑는 것이었다. 모두 20명의 청년들이었다. 군인들은 이들을 데리고 문장 쪽으로 떠났다. 이들을 데리고 가던 권 중대장은 ‘자기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기흥이 잽싸게 ‘제가 잘 압니다’고 말했다. 중대장이 ‘왜 잘 아느냐’고 물었다. 정기흥은 ‘삼도교 교사로서 출퇴근하면서 중대장님에게 직접 검문 받은 적이 있어 알고 있다’고 말하자 돌려보내 주더라는 것이다. 또 학생이던 정태진은 학련단체에 친척이 있다고 말해 살아났다. 그리고 나머지 18명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들의 행방은 묘연한 채 그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식의 소식을 알 수 없는 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은 40여 일이 지난 후 5 중대가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 곳에 없음을 확인한 후 수소문한 끝에 해보면 금덕리 속칭 두루 샘 골에서 학살당한 시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청년 15명과 학생 3명 등 18명이었다. 이 가운데 청년 15명은 머리에 도끼로 찍힌 흔적이 있었고 학생 3명은 죽창으로 찔려 있었다. 이들은 두 사람씩 씨름을 시킨 후 승자가 패자를 먼저 도끼나 죽창으로 찌르게 하는 방법으로 끔찍하게 학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이날 5중대 병력의 일부가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 속칭 시리뫼 마을까지 진출하여 김담봉 등 21명을 학살했다. 이날 마을사람 1백 여명은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이문초등학교(지금은 폐쇄) 운동장에 집결해야 했다. 군인들 중 장교인 듯한 한 사람이 손에 든 종이쪽지를 보며 불러낸 23명을 따로 학교에서 가까운 나산강변으로 끌고가 총으로 쏘아 집단학살했는데 이 중 2명이 극적으로 살아났다. 이날 사정마을에서의 학살은 사전에 좌익활동자 또는 부역자 명단을 입수해 사살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주민들의 말이다.
성대마을 주민들의 쌍구룡 참상
제 5 중대 병력은 1950년 12월 31일 오전 10시쯤 눈이 2cm 가량 수북하게 쌓여있던 날 총소리를 내면서 해보면 대창리 성대마을을 포위했다. 군인들은 온 마을에 불을 지르면서 죽지 않으려면 모두 나오라고 명령했다. 주로 해보면 광암리 운암마을을 비롯해 사방 각지에서 군경의 명령에 따라 소개되어 온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날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지르며 큰 소리로 ‘죽지 않으려면 마을 앞길로 나오라’고 외치자 죽지않기 위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몰려나왔다. 온 동네에 완전히 불을 놓아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본 군인들은 앞길로 나온 마을 사람들을 1km쯤 떨어진 쌍구룡으로 가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쌍구룡 못미쳐 지금은 폐교된 해보중앙초등학교 정문 자리 도로변 배수로에 멈춰서게 했다. 그 아래에는 조그마한 방죽이 있었다. 맞은 편 도로 위쪽 언덕배기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례 9) 주민들은 군인들의 지시에 도로의 배수로 언덕에 쭈그리고 앉았다. 우선 남자들을 골라 방죽 쪽으로 내려가라 명령하고 그들이 내려가면 총을 쏘아댔다. 그러자 장진섭(1902년 생)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왜 죽이느냐’고 항의하자 어느 군인이 즉석에서 대검으로 가슴을 찌르고 총을 쏘아 즉사시켰다. 이 때 또 누가 ‘군인가족도 죽이느냐’고 항의하자 그 때서야 군인들은 군인과 경찰가족을 나오라고 해서 돌려보낸 다음 40여명의 남녀를 골라 닥치는 대로 총과 칼로 치고 찌르며 50m 쯤 떨어진 방죽 옆 밭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곡차곡 앉혔다. 방죽 좌우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서슬 퍼렇게 둘러 서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마을 사람들은 아우성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나오라 해놓고 죽일 작정이오’ ‘살려 줍쇼’ ‘우리는 아무 죄도 없소’ ‘어머니’ 아버지‘를 외치며 통곡하고 절규하는 것이었다. 이 때 권준옥 중대장이 권총을 발사했다. 신호가 울리자 좌우에 서 있던 군인들이 기관총과 소총으로 일제히 사격했다. 한 순간이었다. 사병들은 쓰러져 있는 시체를 일일이 들추어 확인하면서 아직 숨지지 않은 사람을 다시 사살하고 다녔다. 그리고 나서 남아있는 어린이와 부녀자 몇 명만을 앞세우고 면소재지로 향했다.
이 자리에서 희생된 사람은 윤양중(1929년 생) 등 35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서 쌍구룡 학살이 왜 저질러졌는지 그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동촌이나 남산뫼는 물론 뒤에 저질러 지는 모평마을 학살에는 조그만 하지만 이유가 분명 있었다. 두 사람 사병의 전사와 공비들의 승전잔치 또는 월악산 발호에 대한 보복이거나 중대본부 공격에 대한 응징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쌍구룡 학살은 표면적으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모평마을의 피바다
5중대는 다음 해인 1951년 1월 12일(음력 12월 5일) 또 다시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 들이 닥쳤다. 1백1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파평 윤씨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집성촌이자 농촌으로서는 비교적 넉넉한 편의 반촌이었다.
아침 9시 반쯤 군인들이 모평마을 일대를 완전 포위한 채 덮쳐들었다. 그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주민들에게 마을 앞으로 모이라고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훨훨 타오르는 자신들의 집을 뒤돌아 보며 발을 동동 굴렀으나 군인들의 성화는 잠시도 멈춰있게 하지 않았다.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아낙네는 이불과 쌀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오기도 했다. 주민들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에서 해보와 나산간의 도로 옆에 있는 쌍구룡 쪽으로 나가는 3백m 길을 걷고 있었다. 혹은 위쪽 산기슭 샛길을 걷는 사람도 있었다. 눈이 무척 많이 온데다 추위가 극심했던 날이다.
사례 10) 사람들이 길을 타고 쌍구룡 쪽으로 가는데 산 쪽에 설치돼 있던 기관총에서 불을 뿜었다. 동촌이나 내동 7개 마을과는 달리 모여 앉기도 전에 길을 따라 나산~해보 간 24호 국도가 있는 쌍구룡 쪽으로 줄줄이 걸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본능적으로 엎드리고 길 양쪽 질퍽질퍽한 논바닥으로 굴러내렸지만 총부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 논바닥에 무명 흰옷을 입은 시체들이 즐비하게 쏟아졌다. 온통 피투성이었음은 물론이다. 거기에 신음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병사들이 달려가 소총을 쏘며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제 6 대 국회 특위가 1960년 6월 8일 조사한 이 곳의 희생자는 50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게 주민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2백에서 2백 50여 명이라는 것이다.
좌익 빨치산이 전 날 밤 비녀봉 쪽에서 5 중대 본부를 향해 심한 총격을 가해 왔었다. 사거리가 멀어 중대본부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봉화불을 피워놓고 만세를 부르며 총을 쏘아대고 있었으니 5 중대로서는 아예 준동하는 공비들의 근거지를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을 갖고 비녀봉 끝자락 마을인 상곡리 일대에서 초토화작전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마지막 학살, 소재마을의 비극
월야․해보․나산 등 동삼면에서 진행됐던 제 5 중대의 양민학살 사건은 이 밖에도 모평에서 산내 쪽으로 가는 길가에서 쉬고 있던 70대 노파 3명을 사살했고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나서 즉결처분하는 등의 만행이 산발적으로 저질러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51년 1월 14일(음 12월 7일) 낮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을 거쳐 소재마을에 이르기 전 이웃 계동마을에서 주민 7명을 사살하고 동네에 불을 지른 다음 이 마을로 들이닥친 것이다. 이 날도 예외 없이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마을 앞 논으로 나오라고 외쳐댔다.
사례 11) 이미 월야․해보에서의 양민 학살사건을 듣고 있던 터라 건장한 남자들은 이웃 계동에서 총소리가 나고 불길이 오르자 ‘큰 일 났다’며 모두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러나 늙은 노파나 임신부 그리고 10세 미만의 어린이들과 다리가 불편한 안수복(安秀福․당시 28세) 등 24명은 도망치지 못하고 군인들에게 붇잡혀 마을 앞 논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기관총과 M1소총이 불을 뿜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그리고 확인사살이 이어졌다.
사례 11)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정유례 등 4명은 살아날 수 있었다. 그녀는 맨 처음 마을에 도착하여 불을 지르며 마을 앞으로 모이라고 큰소리로 외치던 어떤 병사로부터 들릴락 말락한 작은 목소리로 ‘빨리 도망치세요. 나가면 죽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이 먹은 여잔데 어쩌랴 싶어 그냥 나갔다가 큰일 날 뻔했다. 총을 맞고도 간신히 목숨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날 김증산(金甑山․1892년 생) 노파 등 18명은 피투성이 속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다른 2명은 이 때 입은 총격부상 후유증으로 나중에 숨졌다. 천만 다행으로 살아남은 정유례 노파는 오른 쪽 어깨에 입은 총상으로 뼈가 부셔져 살만 붙어있는 상태의 불구자로 한 평생을 살다 2년전 작고했다.
학살의 중단과 사병들의 거부반응
나산면장의 항의와 학살의 중단
소재마을 학살사건은 1950년 12월 6일부터 이 날까지 40일 동안 벌어졌던 제 5 중대의 견벽청야 작전이 중단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용기있는 목민관의 대처 때문이었다.
이날 면사무소에서 이장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이오섭 나산면장은 소재마을의 학살소식을 접했다. 이미 월야․해보면의 학살소식을 전해듣고 있던 그는 이대로 방치하고 있으면 더욱 큰 화가 면내에 확산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즉각 현장으로 달려가 사실을 확인한 다음 함평경찰서 나산지서장 나병오 경위를 설득해 그와 함께 다음 날인 1951년 1월 15일 경찰과 청년방위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보로 8km 떨어진 해보면 금덕리 소재 제 5 중대 본부로 권준옥 중대장을 찾아갔다. 그는 전 날 소재마을 학살사건에 대해 항의하고 나섰다.
“나는 나산면 장입니다. 어제 화를 입은 우리 소재마을 주민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아닌 선량한 백성들입니다. 죽임을 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면민들을 죽이려거든 차라리 나를 죽이십시오. 면민 없는 면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의 가슴을 내 밀었다.
당돌한 항의요 애절한 호소였다. 그러자 권 대위는 화를 버럭 내면서 권총을 빼들고 ‘건방진 자식, 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 면장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쏠 테면 쏘시오’라며 대들었다. 그러자 권 대위와 다른 군인들이 합세하여 이 면장을 군화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는 등 뭇매를 때렸다. 그리고 동행한 나병오 지서장이 차고 있던 권총을 빼앗았다.
이 항의는 곧 군 당국의 반성과 자괴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40일 동안 함평군 월야․해보․나산 등 동삼면 일대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었던 제 5 중대의 ‘견벽청야작전’ 다시 말하면 양민 학살작전을 중단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날의 항의소동 후 이 곳에서의 학살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8일 후인 1월 23일 제 5 중대장이 교체돼 권준옥 대위가 연대 병기장교로 옮기고 이영오 중위가 새 중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공포의 제 5 중대’는 불갑산 작전에 투입되는 1951년 2월 20일까지 단 1건의 양민학살사건도 일으키지 않는 ‘얌전한 5 중대’로 돌변하게 되었다.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한 젊은 목민관의 ‘용기있는 항의’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다.
학살명령에 대한 거부반응
제 5 중대가 함평에서 저지른 양민학살사건을 일별했거니와 이 같은 학살사건은 학살명령을 수행하던 부대 원들에게도 당위성이 부정돼 거부반응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날 아침 군인들이 들이닥치더니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사람들을 쌍구룡 쪽으로 가라고 그래요. 나는 남편과 며느리 그리고 어린 3남매를 데리고 이불보퉁이를 머리에 얹은 채 집에서 나왔어요. 아마 우리 식구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나왔는지 마을 앞에는 사람이 별로 없을 때였지요.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서 쌍구룡 길가에 닿으니 어느 군인이 다가와 ‘이대로 있으면 당신들 모두 죽으니 빨리 도망가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고 있던 이불보퉁이나 옷가지들을 모두 팽개치고 허둥지둥 나산면 이문리 쪽으로 빠져나갔는데 모평 쪽에서 요란하게 총소리가 울려요. 그때서야 무슨 일이 생겼구나 짐작하고 이문리로 달려갔지요”
1월 12일 모평마을 학살사건 당시 남순애가 어느 군인의 귀띔을 받고 멀리 피함으로써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증언한 내용이다. 그녀는 군인들이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으면 영락없이 자신도 총알받이가 되었을 거라며 순간적인 행운을 두고 50년을 덤으로 살고 있음을 천운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분명 도망가라고 일러준 그 사병의 양심이자 중대장의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이 같은 거부반응은 몇 곳에서 나타났었다. 이미 앞에서 벌어졌던 남산뫼 대 학살 현장에서 김일호 일병이 일면식도 없는 정일웅 학생을 사살대열에서 빼내 목숨을 구해줬다든지 같은 남산뫼 학살 당시 못갓마을 골목에 들어선 어느 사병이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으로 나오라고 주민들에게 외치는 정맹모 노인에게 ‘외치면 안돼, 나오는 사람은 모두 죽어’라고 힐책했던 일, 또 뒤에 저질러 졌던 소재마을 사건 때 불을 지르고 빨리 나오라고 외치던 군인이 정유례 노파에게 다가와 귀에다 대고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여기 계시면 죽습니다. 어머니 같으셔서 말씀드립니다’며 귀띔해 주던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는 거창양민학살사건 주도자였던 제 11 사단 제 9 연대 제 3 대대장 한동석 소령이 ‘신원면에 들어왔을 때 노인과 부녀자 등 비전투원들만 눈에 띄어 작전지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총살하라’ ‘모든 가옥과 보급품은 소각하라’는 연대본부로부터의 작전명령을 ‘차마 수행할 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명령불복종으로 다스리겠다는 연대장의 질책을 어기지 못하고 사살을 감행했다’는 진술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는 일부 사병들이 지휘관의 사살명령에 대해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에 따라 가능하면 피해를 줄여보려는 양심의 명령을 작게나마 실현해 보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미미했지만 그러나 뜻이 담긴 은근한 행동에 의해 부대장의 정당하지 못한 명령이 거부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대보름작전과 불갑산 빨치산의 궤멸
그러나 제 5 중대는 음력 대보름인 1951년 2월 20일에 실시되는 불갑산 대 토벌 작전에 투입돼 불갑산의 빨치산 근거지를 궤멸시키는 주력부대 역할을 하게된다. ‘대보름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에서 국군은 이날 새벽 3시 함평군 해보․나산․신광면, 장성군 삼서․삼계면, 영광군 묘량․불갑면 등 7개 방면에서 불갑산을 일제히 포위․진격하는 대 토벌 작전에 나섰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불갑산에는 공비나 빨치산은 물론 좌익활동을 했거나 좌익 쪽에 가까운 사람들만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한국군과 경찰이 진격해옴에 따라 우선 총격전에 대한 두려움과 우익인사의 감정적 보복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단 피신을 하고 보자는 입장이거나, 좌익들이 함께 산으로 가지 않으면 가족들을 몰살하겠다는 협박에 따라 입산한 사람들도 많았었다. 특히 제 5 중대의 학살 만행이 계속되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불갑산 밖에 없다며 많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몰려들었다. 그러니까 5 중대 만행 이후 불갑산의 인구가 거의 두 배로 늘어나는 바람에 발길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붐볐다.
빨치산 불갑산지구사령부 요원들은 물론 일반 좌익들도 한국군 토벌대가 언젠가는 진격해 오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미 ‘대보름 작전’을 개시한다는 소문도 듣고 있었다. 특히 한국군 당국은 무고한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대보름 작전’의 소문을 퍼뜨려 선량한 입산자들로 하여금 슬그머니 빠져나가도록 유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좌익들은 그럴 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며 이탈 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누구든지 달아 날 눈치만 보이면 감쪽같이 처치해 버리는 잔혹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작전상 후퇴할 경우의 루트를 미리 짜 놓고 있었다. 그러나 5 중대의 학살만행 이후 입산했던 일부 사람들 특히 불갑산 주변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군의 작전개시 예고에도 불구하고 불갑산에서 빠져나가기를 기피한 채 불갑산 자락에 토굴을 파고 그 속에서 은신한 상태에서 토벌군의 총격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군은 이날 동이 틀 무렵 7개 방면에서 진격해 들어갔다. 제 20 연대 제 2 대대 병력은 유갑열 대대장 지휘 하에 새벽 6시를 기해 3백 50명의 무장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불갑산을 완전히 포위하고 옥죄어 갔다. 7개 방면에서 출발하여 불갑산을 향해 공격을 가하던 한국군은 일제히 사격하며 포위망을 압축해 갔다. 이 같은 공격이 가해지자 무장게릴라들은 잽싸게 빠져나갔지만 불갑산 특히 모악산 주변의 산비탈과 계곡에 흩어져 있던 하얀 옷 입은 비무장 민간인들은 우왕좌왕 헤매고 있었다. 한국군은 귀순을 권유했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은 갈 길을 잃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목격자들은 ‘시체가 산을 덮어 버렸다’고 말했다.불갑산 작전에서 희생된 사람은 1천 5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날 빨치산들은 한국군에 대항해서 불갑산 봉우리와 용천사 부근에서 버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퇴각하여 태청산에다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좌익들은 끈질기게 도전과 응전을 반복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조선인민유격대 불갑산지구사령부 예하 5, 6개 군당과 그 산하 면당은 각기 행동하면서 재기를 시도했으나 한국군의 막강한 전투력과 간단없는 공격으로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군․면당과 유격대원들은 지리산으로 향했거나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고 유일하게 장성군 삼서면 당만이 자신의 관할지역을 사수라도 하려는 듯 태청산에서 계속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태청산은 장기적으로 체류할 곳이 못되었다. 삼서면 당은 태청산이 계속 한국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대보름 작전 한달 후인 3월 23일(음 2월 16일) 장성군 삼서면 석마리 녹사태라는 마을로 이동했다가 한국군과 경찰의 포위 공격을 받아 이 마을 주민 1명과 함께 30여명의 공비가 사살되고 나머지 대부분이 도주함으로써 불갑산의 빨치산 조직은 궤멸하고 말았다.
결 론
이상에서 함평 양민학살 사건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함평 양민학살의 직접적 원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제 11 사단장의 무모한 견벽청야 작전명령과 이를 왜곡한 인간성․도덕성이 함몰된 제 5 중대장 권준옥 대위의 패륜적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후임 중대장은 양민학살사건을 전연 저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같은 부대 내의 사병들도 중대장의 이 같은 반인륜적 명령에 대한 거부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인명이 파리목숨보다 못할 만큼 너무나 경시되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Helen Fein의 주장처럼 ‘국가의 헤게모니 신화에 의한 계산된 살인행위’인 것이다.함평사건 두달 후 발생하는 거창사건이 국회의원 신중목의 용기있는 폭로로 세상에 드러나는 점을 새삼 높이 평가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당시 들끓은 국제적 여론과 유엔의 압력 때문에 얼만큼 밝혀져 군법회의까지 진척됐을 정도로 이승만을 비롯한 그 수하들의 부도덕한 횡포는 극에 달했던 것이다. 이들도 권준옥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함몰된 인간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의 양민학살사건은 거창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함평을 비롯한 모든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성숙된 자세로 수습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은 OECD 회원국이 될 만큼 지구상에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상위그룹의 국가로 부상하여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부만 가지고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경제외적인 문제 즉 정치․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성숙된 자세가 표출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권문제는 중요한 바로미터다. 심지어 민주발전과 남북화해 그리고 인권신장에 헌신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에 따라 세계는 지금 한국의 인권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피울음을 곱씹으며 죽어간 채 50년 동안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수많은 원혼들의 한을 어떻게 씻어주는 지의 여부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 과제를 풀지 않고 어떻게 선진국 또는 일류국가로의 도약이 가능하겠는가! 정부와 군과 국민은 과거를 씻고 성숙된 국가발전으로의 도약을 위한 기본적 틀을 짜기 위해 가슴에 맺힌 백성들의 억울함이나 아픔을 풀어주고 위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여기에 함평사건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모든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1)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한 재해석이다. 이 법 제정 당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구절 중 ‘등’자를 왜 삽입했는 지를 재검토한다면 함평사건도 포함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 위의 ‘등’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도 해결할 수 없다면 거창사건과의 형평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함평사건에 대한 특별법 제정은 당연하다.
3)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민간인 학살사건의 총체적 해원의 전 단계로서 양민학살의 대표적 주체인 육군 제 11 사단 예하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 중 거창사건 관련 특별법에서 제외된 함평․고창․순창․남원․나주 등 전라도 지방의 사건에 대해 우선 특별법을 제정하고 시행령에서 조사가 끝났거나 끝나는 지역의 순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안이다.
4) 이미 특별법이 제정된 거창 및 제주 4․3 사건을 제외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포괄적인 특별법을 제정하고 국회․정부․군․민간인 대표들로 구성된 특별기구에서 모든 학살 또는 인명피해 사건을 조사한 후 드러난 결과가 합당한 사건부터 우선 순위를 매겨 명예회복과 보상 및 위령사업을 펼치거나 사건현장에 표석을 세워 ‘역사의 장소’를 표지해 망각되지 않도록 진행하는 방안이다. 여기에는 아래의 세 가지 단계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① 학살주체가 군에 있는 사건부터 처리해야 한다. 1950년 10월 공비토벌을 위해 창설된 육군 제 11 사단을 비롯해 제 8 사단 등 군의 공비토벌 작전과정에서 저질러진 양민학살사건이 가장 광범한데다 국가폭력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②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한 사건의 해결이다. 경찰과 우익단체가 공비로 오인하여 학살했거나 수복 후 부역자 처벌이라는 명분하에 법적 절차없이 학살을 자행한 사건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고 그 구조 또한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상과 규모를 파악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③ 학살주체와는 관계없이 남쪽 체제의 실정법에 저촉되어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거나 미결수로 대기 중 형무소에 수감상태에 있던 이른바 사상범에 대한 무단 처형사건의 진상조사다. 여기에는 보도연맹 회원으로 가입했다가 정부가 후퇴하면서 학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상이나 규모도 포함되어야 한다.
5) 위의 4) 안처럼 총체적 특별법으로 해결하더래도 좌익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사건의 문제가 남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우익인사 또는 선량한 국민들이다. 대한민국 체제에 참여하고 협조 또는 동조했거나 그 백성들이라는 이유로 희생된 사람들이다. 이들을 보호하고 방어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희생 또는 피해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대한민국에 있으므로 그 해법도 서둘러야 한다.
6) 군․경 어느 쪽이 주체이든 관계없이 공비토벌 과정에서 희생된 공비 및 민간인들에 대한 전면적인 파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북한체제 이른바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나머지 남한체제에 저항했던 공산주의자․인민군․좌익․빨치산․공비의 신분으로 사살된 사람들과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들과 어울려 산에 머물러 있다가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여 역사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이는 그들의 이념이나 투쟁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먼 후일의 역사와 후손을 위해 역사청산작업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이미 20세기부터 나타났지만 21세기의 역사는 이념의 통합화(Uni-Ideologize) 현상으로 달리고 있다. 우리도 세계사의 흐름을 따라 한 가닥씩 통일운동의 바탕을 마련하는 역사적 과업에 착수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