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문호 시인의 시집 《그 섬에는 별이 뜨고 별이 진다》에 수록된 시에서
삶의 고비를 건너본 사람은 안다
고비를 넘기듯 몹시 괴롭고
얼굴빛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도 있었을 것이다
고열을 동반한 심한 몸살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아
삶이 무너질 고통이 따르는 아픔을 느끼는 것은
험난한 세상 앞에 기죽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라고
대나무처럼 우리 몸도 쓰러지지 않게
단단한 마디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마디> 부분
자연은 말이 없어도 생장해야 할 시기를 용케도 알아 푸른 잎을 내밀며 굳게 닫힌 움을 틔운다. 만물의 생동을 보며 사람들은 꿈과 희망을 품게 된다. 화자가 응시하고 있는 대나무를 보자. 그 생의 험난한 고비마다 툭툭 매듭을 짓고 외길 같은 하늘만을 향해 나아간다. “죽순이 대나무가 될 때까지/ 하늘 높이 자라면서 고비를 넘긴 듯/ 일정한 간격마다 동그란 마디를 만든다”며 일념에 찬 대나무는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위로위로 거침이 없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대나무를 절의를 지킨 기개로 표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화자가 삶에서 비유한 대나무의 ‘마디’란 의미망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속도를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해 가는 사회 환경을 살아가며 스스로 견고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사물성을 통해 내면의 사유를 표상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자기애의 발현이다. 화자는 연약한 죽순에서 단단한 대나무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눈 여겨 본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쉽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일반적인 식물성을 뛰어넘는 생의 반전을 발견한다. 그것의 궁극은 힘들 때마다 더는 쓰러지지 않으려는 단단한 결기를 다짐하는 버팀대인 셈이다. “삶의 고비를 건너본 사람은” 그 ‘마디’가 갖는 의미를 위기를 극복하려 한 의지로 인식 할 것이다. 사람도 살며 위태로운 고비가 있다 그 시기를 잘 넘기면서 다시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다. 대나무의 ‘마디’도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잊는 남쪽바다
물과 물 사이에 있는 모여 있는 섬들은
새벽부터 뱃고동 소리 요란하다
끊임없이 파도를 뒤집으며 바람에 온 몸 맡겨두고
갈매기들이 찍어 놓은 발자국들 따라 간다
그 섬들 사이에서 삶의 무게를 실은 배들이
끊어질 듯 허리를 부여잡고 쉼 없이 거친 물살 가르는
오밀조밀한 섬들 사이에 꼼지락거리며 사는
사람들과 섬들은 사람 몸으로 치면 발가락이다
-<발가락> 부분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남쪽바다/ 물과 물 사이에 모여 있는 섬들은/ 새벽부터 뱃고동 소리 요란하다”라며 화자는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두 지점의 경계가 무용해지고 기어이 바다에서 만나 하나가 되어버린 남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자체가 지역적인 대립각을 완화시키면서 여기저기 들어선 섬들이 발가락처럼 오밀조밀 펼쳐진다는 문장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아무나 발화할 수 없는 시적 상상력이 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체 구조상 가장 아래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발을 떠받치는 발가락이다. 그 발가락이 화자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일부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성향과는 바다에서 하나의 발가락으로 섬들이 형상화된 것이다. 화자는 남해안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섬들마저 신체의 부분으로 친다면 발가락이란 상상도 기발하거니와 고기잡이를 나간 배들이 그 사이로 들고 나는 것을 유별하게 바라본 것이다. 그 물길을 따라 들어온 배가 부려놓은 싱싱한 생선을 활어차에 실어 도시로 팔려 가는 광경을 시적인 문장으로 풀어낸 것 같다. 결국은 우리가 먹고 있는 생선들은 화자가 상상하고 있는 발가락 틈을 기어 올라온 셈이다. 부단히 물길 따라 드나들던 어부들의 뱃길인 셈으로 “울퉁불퉁한 발가락들이 하나둘/ 뭍으로 올라와 등짐을 풀면/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에 연신 혈관은 굵어지고/ 물차들의 뜨거운 피는 더욱 빠르게 정수리로 향한다”라며 활기찬 섬들과 포구를 그려내고 있다. 그토록 열정을 다해 살아가는 포구의 사람들도 간혹은 가슴 안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시간들이 뭉툭뭉툭 솟구칠 것이다.
“그 섬에는/ 별이 뜨고/ 별이 진다/ 사랑이 깊어지면/ 마술에 걸린 듯/ 파란 하늘에서/ 붉은 옷고름을 추스르다/ 그만/ 뚝 떨어뜨린/ 별 하나”(<장사도 동백>)가 봉글봉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그 붉은 동백은 쉽게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마음이 아니라 인연이란 긴 시간을 경유해 당도한 화신이다. ‘당신’이 오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지상의 꽃으로 내려앉은 ‘별 하나’가 생애 딱 한 번의 첫사랑처럼 동백꽃이 피고 진다. 아직도 지긋한 나이를 뛰어넘어 심상 속 비밀 같은 사랑이 몽글거린다면 그 또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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