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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1604년 선조37년 류성룡이 집필했으나,
집필 당시 선조에 대한 칭송만 있을뿐 비하하는 부분은 단 한줄도 남기지 않고 집필하였다.
만약 선조를 비난하는 글이 단 한줄이라도 있었다면 류성룡은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하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1633년 (인조11년)에 그의 아들 류진이 집필하게 된다.
1647년 16권 7책으로 간행되었으며,
1695년 일본 경도(교토)의 대화옥(야마토 야)에서 재 간행되었다.
징비록은 1936년 조선사 편수회, 1958년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2003년 최병헌 교수가
영인본을 출간하여 알려진다.
여러차례 재 간행되면서 징비록 내용이 수정되어 류성룡에게 불리한 내용은 삭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적이었던 서인, 동인 (북인)의 내용은 빠져있고, 류성룡이 대변하였던 남인의
이순신(원래 서인 중 주기학파 소속이었다가 칠천량 해전 패전이후 백의종군 하면서 남서인화) 내용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1580년대 후반 서인정권 (정철, 윤두수 등이 주도하는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1591년 2월 동인 주리학파 정권 (정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릇쳤다며 이산해, 류성룡 등의
정치 공작으로 평북 강계, 강원 강릉, 전남 강진 등으로 유배당함)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동인 주리학파 정권.
1592년 6월 12일 이후 서인정권 (임진왜란 발발 책임과 개전 초기 전쟁 패전 책임을 물어 동인정권 몰락,
몽진책임, 한양 함락 책임 등을 이산해, 류성룡 등에게 묻는다.)
1593년 10월 24일 한양환도 사흘 후 동인정권 (이산해, 류성룡이 정철에게 광해군을 옹립하라고 사주하여
정철이 사주 공작에 걸려 선조에게 고했다가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다시 동인정권이 들어섬.
이후 이산해 ,류성룡은 정철을 강화사절로 명나라에 보내 강화도를 거쳐 오게 하는 정치공작을 벌여
강화도에서 정철을 병사 처리한다.)-전쟁 중에도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정권을 차지할 마음밖에 없었음.
1592년 6월 9일~12일 평양 몽진후 동인정권 전쟁 책임과 개전 초기 패전책임, 몽진 책임,
한양 함락책임 등을 물어 서인정권으로 교체.
1592년 6월 12일 한양 함락당함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
서인 정권 시기에 벌어진 전투.(1592년 6월 12일 한양 함락 이후~1593년10월27일 한양 환도 사흘 후)
육군 및 의병,승병.
1592년 7월 8일 이치 전투(고경명)-이치 제1차 전투 패전, 이치 제2차 전투 황진 승전. 금산전투 승전[황진]
7월7일 웅치 전투(정담, 황박, 이복남)-수성하고 산화/ 이복남 생존. 슬치전투(양대박, 지장군)-승전.
1592년 8월말 상주성 전투(황진)-승전(1개월간 전투를 벌여 9월초 승전)
1592년 9월초 성주성 전투.(최경회,김면)-승전(1개월간 전투를 벌여 10월 초 승전)
1592년 9월초 청주성 전투. (12일 조헌, 영규 산화)-탈환 수성하고 산화.
1592년 10월4일 진주대첩.(김시민 18일 전사, 장윤)-승전(대승)-최경회 성주성 전투 이후,
남원성에서 지원온 임계영, 민여운(태인)부대와 합류하여 2천을 이끌고 진주성 살천으로 들어가
살천 전투 승전 후 왜군 후방을 들이쳐 대군이 오는 줄 알고 왜군이 퇴각.
왜군 사상자 10,300여 명 vs 아군 사상자 1,000여 명.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 (선거이, 김천일, 권율, 처영, 정걸, 허욱, 배흥립)- 초대승.
우희다수가(우키다 히데이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군 3만 명 중
(왜군 1만 5천 사상vs 아군 130여 명 사상)
-처음으로 비격 진천뢰 사용으로 포에 지연식 포탄을 달아 초대승을 거둠.
변이중 (장성/화차 개발)이 고흥에서 만들어온 화차부대 투입으로 초대승.
1593년 3월 진안 죽도 죽산성 전투, 성주봉 성주성 전투(황진,최경회,최원)-승전.
최경회 왜장 후쿠시마 사살하고 언월도 획득. 최원, 최경회, 황진 진안 동향면 성산전투 승전 이후,
거창지레/사랑암에 쉬고 있던 왜군을 격파한 이후, 영덕, 영해까지 추격하여 영덕전투,
울산전투에서 승전하고 왜군 2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귀환.
-후쿠시마 부대 괴멸.(왜군 제6군 중 2개 부대를 괴멸시키는 대승)
1593년 6월 함안 전투(충청 병마절도사 황진,전라 수군절도사 선거이 승전)
1593년 6월21일 진주 제2차 전투 (김천일,황진,최경회 삼장사)-임시 목사 장윤,고종후,임희진,고득뢰 등.
-패전.
패전하였으나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됨-변사정,임계영이 살아나온 관의병들과
김덕령 의병이 남해안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동에서 견제. 이후 진주성으로 들어가 주둔.
수군(해군)
[이순신 1차 출전]
1592년 6월 16일 옥포 해전
1592년 6월 16일 합포 해전
1592년 6월 17일 적진포 해전
[이순신 2차 출전]
1592년 7월 8일 사천 해전
1592년 7월 10일 당포 해전 ->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1592년 7월 13일 당항포 해전 -
1592년 7월 15일 율포 해전
[이순신 3차 출전]
1592년 7월 16일 곽재우 의병군 정암진 전투 승리, 일본군 대동강 도착
1592년 7월 19일 선조와 조선 조정, 의주로 피신
1592년 7월 22일 광해군 분조 설치
1592년 7월 23일 평양 함락
1592년 7월 30일 선조와 조선 조정, 의주 도착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대첩 -> 와키자카 야스하루
1592년 8월 16일 안골포 해전 – 도도 다카도라
[이순신4차 출전] -부산 출정.
1592년 8월 23일 명나라 원군 선발대 참전
1592년 8월 29일 장림포 해전
1592년 10월 5일 화준구미 해전
1592년 10월 5일 다대포 해전
1592년 10월 5일 서평포 해전
1592년 10월 5일 절영도 해전
1592년 10월 5일 초량목 해전
1592년 10월 5일 부산포 해전 –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이순신5차 출전]
1593년 1월 13일 명나라 원군 본대 4만 3천명 압록강도강.
1593년 2월 9일 평양성 탈환
1593년 3월 14일 행주대첩 승리
1593년 음력 3월 14일 웅포 해전
1593년 4월 24일 조선 조정, 평양으로 이동
1593년 5월 9일 명-일 강화회담 타결
1593년 5월 19일 일본군 전면 퇴각 시작
1593년 6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 사신 접견
1593년 7월 4일 권율 조선군 도원수 임명
1593년 7월 27일 진주성 함락
1593년 8월 10일 이순신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 이동
1593년 9월 2일 명군 3만 철수
1593년 9월 24일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종2품에 정헌대부1품을더해 정2품)
1593년 10월 24일 선조와 조선 조정, 서울로 환도.
다음은
동인정권시기에 벌어진 전투.(1591년2월~1592년 6월9일/ 1593년 10월24 한성환도 사흘후)
1592년4월13일 부산진 전투 패전.(정발)
1592년5월14일 동래성 전투 패전.(송상현)
1592년4월20일 순변사 이일,경상 우도방어사 조경 상주 전투 패전.
1592년5월 조인,형대원의 난(순창,남원)
1592년6월5일 용인 전투 패전(이광,곽영)
1592년6월7일 충주 탄금대 전투 패전(신립)
1592년6월9일~12일 동인정권 몰락, 서인정권 들어섬.
1593년10월 27일 동인정권 다시 들어섬 (한양 환도) --->>> 강화시기.
1594년 남원의 변사정,임계영 하동에서 김덕령과 합류.
김덕령은 광주,담양에서 모병한 의병을 이끌고 남해안의 왜군을 토벌하며
변사정,임계영 부대와 하동에서 합류하여 진주성 주둔.
변사정, 임계영 부대는 남원성 지원병력과 진주 제2차 전투에서 살아나온 병력임.
(진주성에서 살아나온 최억남을 부장으로 삼음. 해남 방답 첨절제사 고득뢰(남원) 부상으로 전사.)
1596년7월 한현, 이몽학의 난(부여,공주,홍성,청양,예산 등 10주군현)
- 강화시기에 김덕령이 왜군을 토벌했다며 충청 순찰사 신경행의 모함으로 한현,이몽학의 난에 연루시켜
김덕령이 정강이 뼈가 부러지며 춘산곡을 남기고 추곡사 당함.-공주 공산성 청야작전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 충청 순안어사 이시발의 전략이었음.
1597년 7월7일 정유재란 발발(1월 12일부터 시작됨)
1597년 8월12일 남원성 전투 패전(이복남,김경로,오응정,신호,임현,명나라 부총병 양원).
이복남,김경로,오응정,신호 남원성밖 풀더미 속에서 종사관에게 불을 지르라하고 스스로 불속에서 산화.
1597년 8월말 전주성 함락
1597년 9월7일 천안 직산 전투 패전.(조명 연합군 안성 이북으로 후퇴)
1597년 10월5일 진주성 재함락.
1597년12월24일 제1차 울산 왜성 전투(권율)-조선군 1만2천여 명.(무승부).
1598년 9월21일 2차 울산 왜성 전투 패전(권율, 정기룡. 명나라 장수 양호)-
-조명 연합군 2~3만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
1598년 9월 20일 사천성, 순천성 왜교성 전투- 수륙 양동작전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명나라군 제독 유정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고 공격하지 않아
이순신, 명나라 진린의 수군 단독 작전만으로 왜군선 30척 격파 11척 나포, 3천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명나라 수군 30척이 격침당하고 2천이 희생당하였다.
왜군에 포위된 명나라군을 구하러갔던 황세득,이청일 등 조선군 130여명의 중대병력(당시는 대대급)이
진린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동인 주리학파 정권은 서인 중 주기학파, 남인 수군이 공을 세우는 것에 대해 탄압하거나
방해하기에 급급해 했으며, 강화 전략으로 경남 남부와 부산지방의 피해만 더욱 키우고 말았음.
왜군은 전라,충청,경상도 3도만을 할지하여 얻을 요량으로 체제 구축하기 위해 더이상 북상하지 않은 것임.
[항전은 왜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태세에 들어가 약탈할 기회가 줄어들지만, 강화가 맺어지면
아군의 힘이 닿지않는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전역에 약탈이 확산하는 행위가 만연하게 됨].
수군전투
[이순신6차 출전]
1594년 4월 23일 제 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9월 16일 명군 철수 완료, 일본군 잔류
[이순신 7차 출전]
1594년 11월 11일 장문포 해전
1595년 명-일 협상 진행
1596년 명-일 협상 결렬, 일본 재침 준비
1597년 2월 29일 일본 재침 -> 정유재란 발발
1597년 3월 14일 이순신 파직,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1597년 4월 8일 일본군 전면 재침
1597년 4월 12일 이순신 체포 후 서울로 압송
1597년 5월 16일 이순신 석방, 백의종군
1597년 5월 이순신 모친상
1597년 6월 22일 명나라 원군 재투입, 서울 도착
1597년 8월 28일 칠천량 해전 -> 조선 수군 궤멸,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1597년 9월 13일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1597년 10월 5일 진주성 재함락
1597년 10월 10일 일본군 서울 진군
[이순신8차 출전]
1597년 10월 어란포 해전
1597년 10월 벽파진 해전
1597년 10월 26일 명량 해전 ->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1597년 11월 이순신 아들 이면 전사
1597년 11월 17일 일본군 남해안 왜성으로 퇴각
1598년 9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1598년 11월 13일 일본군 전면 퇴각령
[이순신9차 출전]
1598년 8월 20일 절이도 해전
1598년 9월 20일 장도 해전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 -> 이순신(54세) 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1598년 12월 23일 일본군 전면 퇴각 완료
1599년 1월 7일 조명연합군 사천성 입성, 종전
동인 주리학파 정권은 서인중 호남 주기학파와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길 까 봐 서인 원균을 내세워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한다.
강화시기에 왜군을 토벌했다며 전국 의병총대장 김덕령을 죽여 의병들이 쇠퇴하게 만들어
결국 남원성 전주성에 이어 1597년10월5일 또다시 진주성이 재함락당한다.
류성룡이 남인을 본격적으로 대변하는 시기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고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후 삼도 수군 통제사에 다시 임명되는 1597년9월13일 이후 부터이다.
종전후
후일 광해군 등극 -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정권 밀려나고,
영남(낙동강 서안 경상우도) 조식학파 대북정권 들어섬.(성리학의 이단파 정권으로 도교정권)
이순신(1545~1598)
이순신은 한성부 건천동(중구 인현동)출신으로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옥고를 당하고 조광조 등 기호 사림파 70명이 옥사로 유배되어 죽자, 용인 수지면 심곡리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고 부친 이정이 서인 아산지방으로 이주하여 성장하며,
1585년 니탕개의 잔당 침공 전에 직속 상관 이일의 도주로 함북 경흥 조산보 만호 이순신이
연해주 녹도만호를 겸해 출정하였을때 패전책임을 떠넘겨 파직된 종 4품 만호[대령과 준장사이의 직급]
이순신이 패전 책임을 지고 1586년 니탕개의 잔당 소탕작전시 백의종군하였을 때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순신을 발탁하여 조방장으로 삼으면서 중앙으로 보내,
1589년 중앙 선전관 요직을 거쳐 1591년 2월 동인 주리학파 정권이 들어서자 3월 정읍 현감으로 좌천된다.
태인에서 남언경(주기학파/전주 부윤), 김천일 등 다수의 주기학파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근대 이성 철학파이자 근대식 개혁학파 이항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순신은 1592년 2월 고사리 첨사, 만포 첨사, 진도 군수를 거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다.
한성부 건천동은 서울시 중구 인현동 부근이다.
창경궁 홍화문을 기준으로 서쪽인 서대문구 홍은동까지는 서인 거주지역,
창경궁을 기준으로 동북쪽인 성북구 정릉까지는 동인 거주지역.
창경궁을 기준으로 남쪽인 중구 건천동/인현동 부근은 남인 거주 지역이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면 당파 세력 형성을 위해 자기 구역으로 가서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이순신이 1585년에 이미 종 4품 만호였는데,
무슨 7품계를 파격 승진시켜 천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넌센스다.
이순신은 1591년 2월 선전관, 비변사의 핵심 참모 조직인 비변랑에서 종 3품 장군급으로 있다가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정권으로 교체되자 이순신은 7품계 강등되어 종 6품 정읍 현감으로
좌천된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파직(해임)되어 백의종군한 것과 품계를 아에 박탈당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품계를 아에 박탈당하여 "삭탈관직"을 당하면 백의종군도 하지 못한다.
백의종군한다는 것은 이전의 품계는 그대로 경력이 인정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7품계를 파격 승진시켜 천거했다는 말은 허구라는 말이다.
일일이 풀어서 설명해줘야 한단 말인가?
조선시대 천거제도는 과거급제 없이 인재를 학행, 음서제도 등으로 천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천거되면 6품이상으로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선조 시기에 임란의 조짐이 보이자 6품까지 진출한 관리 중에서 세사람의 후보를 올려
그중에서 가장 실력이 나은 사람을 6품 이상으로 진급시켰으며, 정 3품 당상관 이상은
진출하지 못하였다.
(김천일이 학행으로 과거급제 없이 종6품 주부직으로 진출하여 임란 때 정 3품 당상관 까지만 오르고
법적으로 더 이상 오르지 못하자 창의사 자격으로 왕과 비변사로부터
종 2품 예우를 받은 것이 대표적)
이순신은 무과 급제자라 병조, 비변사로부터 이전 품계인 종 4품 만호 자격을 인정받고 있었고,
1586년 전라도 관찰사 이광으로부터 조방장(종4품~종3품)으로 발탁받아 활동하다가
이 경력을 바탕으로 서인정권 때 중앙요직인 선전관(종7품~정3품)으로 복직한다.
1591년2월 비변사를 장악한 동인 주리학파 정권으로부터 정읍 현감으로 좌천되어
주기학파 이항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주기학파의 사상은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철학이었다.
1591년은 서인정권에서 동인정권으로 교체되어 중앙요직인 서인 선전관들이 요직에서 물러나고
동인으로 채워지는 시기이다.
이순신도 이때 중앙 요직 선전관, 비변랑에서 지방 한직으로 7품계 강등되고 좌천되어
정읍 현감으로 가게된다.
선조 시기 호남인은 호남지방으로 좌천되었고 호남 동부 지방인은 김해, 부산지방까지 일부가
발령받았으며, 비리 관련자만 북한 국경지역으로 좌천되었던 시기였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자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의 사상을 흠모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용인 수지면 심곡리로 은둔 생활을 들어가자,
부친 이정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아산으로 들어가 아산에서 이순신이 성인이 된다.
개혁파 조광조의 사상을 이백록, 이정이 신봉하여 이순신도 이 영향을 받아
주기학파 사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가 있다.
기호 사림파 당시에는 당파 형성 초기 시대였기 때문에 조부 이백록이
중구 건천동/인현동에 사는 남인 중에 호남인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정읍)에서 올라 갔으니 그대로 자리잡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산해, 류성룡이 잘한것은 정읍 현감으로 몰아낸 것이 최고로 잘한 일인 것 같다."
서인을 지방 한직으로 몰아낼 때 이순신도 정읍 현감으로 좌천된다.
결코 추천했다거나 천거했다는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다.
훌룡한 장수가 되려면 먼저 행정 실무 능력을 쌓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종 6품이 가는 현감직으로 간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종 3품 장군급에서 6~7품계 강등되어
좌천되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국난을 대비하여 훌륭한 주기학자가 있는 곳으로 밀려난 것은 행운 아닌 행운이었으며,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맹모 삼천지교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중앙 요직인 선전관에서
종 6품 정읍 현감으로 가면 강등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것도 추천이라면 추천한 것이라 말할수 있는지 정말 의심스럽다.
중앙 요직인 선전관을 동인으로 채우기 위해 비변랑등 비변사 핵심 요직에서 서인, 남인들을
대거 지방 한직으로 몰아내는 인사 조치였다.
중앙 요직인 선전관에서 이순신을 정읍 현감으로 밀어냈는데 그곳엔 근대식 개혁학파인
주기학파 이항이 제자들을 길러 내었던 곳이었다.
(김천일이 이항의 제자 중 한명,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 신립 휘하의 황박,정담,김경로,황진,송상현,
송대창,이복남,선거이 등 수많은 문관, 무관들이 이항의 제자이며, 1591년 2월 고향으로
모두 좌천되어 호남을 방어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
김경로는 남인 지역인 김해부사, 송상현은 동래부사로까지 좌천됨.
장수급으로 성격이 가장 옳곧았던 황박[웅치전투 제1방어선 주장]장군은
김제로 그냥 낙향해버림.)
이순신은 이후 전라도 남해안 고사리 첨사(종3품),만포 첨사,진도 군수(종 3품 당하관)를 거쳐
전라 좌수사(정3품 당상관)로 부임한다.
원래 육군에서 수군으로 가면 승진이 아니라 좌천되는 것이다. (수군은 누구나 가기 싫어했기 때문).
(군수는 원래 종 4품인데 전라도 군수만 종3품 당하관 품계임/조선 왕조 탄생지로 군수 이상부터
한직급 우대 받음.
또한 호남지방의 곡물중 특히 특산물에 가장 많이 의존했기 때문.)
이순신은 조부가 남인지역에 자리잡았지만 서인 기호 사림파에 가담하였고
정읍으로 7품계 강등당하며 좌천될 때는 서인에서 동인 주리학파 세력으로 권력이 교체되어
죄가없이 좌천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리학적 예의상 원래 출신지였던 조부(관직이 있을 때)
또는 현조부의 고향으로 좌천당했던 것이며, 유교질서는 현조부까지 제사에 모시고
현조부의 본향과 관향을 제향하는 유교적 질서가 있었다.
(벼슬이 없을때-현조학생 부군신위)(벼슬이 있을때-현조 000관직명 성씨 이름 부군신위).
-그래서 지방을 쓸때도 고조,증조,조부모,부모 맨 앞에 현조부가 붙는 것임.
현조부에 제향하는 관습은 고조, 증조, 조부모, 부모가 여기 저기로 흩어져 옮겨 살았을 때
현조부를 기준으로 삼아 그 사람의 출신 이력과 승진, 좌천, 제사, 학파, 당파색, 정치적 성향 등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뜻이다.
보통 조부, 증조부가 고향을 떠나 타지방에 정착했을 경우에는 현조부의 관향을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제사를 지낼 때도 현조부가 살았던 관향을 향해 제향한다.
위의 글을 확인했다면
동인이 이순신을 비호한 것이 아니라 중앙요직에서 어떻게든지 서인 중 호남 주기학파와 남인 등을
몰아 내려고 했음을 알수가 있는 것이다.
중앙권력을 장악하려면 가장 먼저 선전관 요직을 장악해야만 한다.
선전관 요직을 동인으로 채우려고 이순신까지 밀어 내고 정읍 현감으로 보내 버렸는데,
정읍에는 근대식 개혁학파인 주기학파 이항이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던 곳이었다.
주기학파는 가장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정읍 태인의 이항이 실질적인 대부였다.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학파 원균을 내세우다가 실패하고
사태가 갈수록 커지자 어쩔 수 없이 재기용하여 전쟁을 치룬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게 되자, 그때 가서야 류성룡 등이 동인에서 남인으로
분열하게 되는 것이다.
이순신이 큰 공을 세우자 길들이기 위해 잡아 들이고 백의종군 시키며 전쟁을 수행하게 하여
이순신이 삶에 미련을 버리고 노량해전에서 전사로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동인이 권력을 장악했으면 동인 병력을 내세워 전쟁을 주도했어야 하는데
싸울 병력이 서인병력과 호남 관의병,남인 수군밖에 없었다.
서인병력은 선조를 지키고 수도를 방어하기위해 있었고, 호남 관의병과 남인 수군만이 전쟁을 치룬다.
[이순신의 부인 방수진은 전남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이라고 서간첩(書簡帖)에서 밝혀졌다고 함.
이순신은 육군에서 시작했고, 조부 이백록이 주기학파의 전신 기호 사림파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성 이남 남인 출신이라기 보다는 서인 주기학파(태인의 이항)로 활동했으므로
조부와 현조부가 정읍 출신일 가능성이 아주 높음.
서인 이광이 나주 이남의 남인을 관찰사의 군사 핵심 참모인 조방장으로 일부러 발탁할 가능성이
아주 낮았기 때문임].
전국 의병총대장 김덕령이 강화시기에 왜군을 토벌하여 강화를 위반했다며
한현, 이몽학의 난에 연루시켜 죽게 만들었다.
김덕령은 진주성에 주둔하며 남해안 고성, 곤양, 통영, 사천, 함안 등지에서 왜군을 격퇴시킨다.
김덕령이 죽자 의병 조직은 관군화 정책으로 급격히 쇠퇴하고 전라, 경상 방어사로 나눠 배속시킨다.
의병의 관군화 정책으로 전쟁의 주도권은 의병에서 관군으로 넘어간다.
동인 주리학파/이황학파의 학문적 철학인 인간성 회복주의, 도덕원리주의, 서원주의 철학은
대실패 할 수밖에 없는 철학이었고, 역시 주리학파가 추구하였던 도교적인 이상주의, 신비주의,
초월주의 철학은 학문적,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결코 전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철학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머리속 이성에는 근대 이성 철학파인
주기학파/이이, 이항학파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성혼, 박순, 김인후 등 40여 명)가 추구하였던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철학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이상주의, 신비주의, 도덕 원리주의, 서원주의가 자리잡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상주의를 추구하면 뜬구름 잡는 환상주의에 젖어 황금 만능주의에 빠지기 쉽고,
서원주의, 신비주의에 빠지면 이성을 서원, 교회에 맡겨 스승/목사가 대리 해탈시켜 주길 바라거나,
대리 구원해 주길 바라는 비이성주의적인 삶만을 살아가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