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복음 15,21-28 |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을 마치시고 갈릴래아 호수로부터 50-60km 떨어진 지중해 주변의 도시 티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십니다. 티로와 시돈은 항구도시들이고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 7 장 24 절을 보면 그곳으로 가셔서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휴식을 위해서, 또는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잠시 군중에게서 떨어지기 위해서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지내시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땅을 들어가시지 않고 그 경계선 지역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21 절과 마르코 7 장 31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 지역으로 돌아가셨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가나안 부인’, 마르코복음 7 장 26 절에서 ‘수로보니게’ 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이 구절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속하기 전 이름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그녀의 옛 조상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스라엘의 옛 원수의 자손이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메시아에게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나와’는 가나안 여인이 자기가 살던 이방 땅에서 나왔다는 의미이기 보다 자신의 집에서 나와 또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을 잠시 떠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여자는 ‘주님’이라는 말과 ‘다윗의 자손’이란 말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여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소망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고 이 말들이 다윗 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니 자신도 따라서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소문이 이방인들의 지역까지 전파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지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그들이 경멸하던 육체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알아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9 장 27 절 참조.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라는 말씀은 가나안 여자는 고통 당하는 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애끓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자비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신 예수님께 무엇을 청할 수 있는 민족적 특권이나 그녀 자신의 어떤 공로가 없었다. 단지 그녀는 예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만 기대했던 것이다.
이방인이 예수님께 찾아온 것도 파격적인 일이지만 이처럼 이방인 여자가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한 것은 더욱 놀라운 사건이다. 이렇게 참된 구원을 희망하는 사람은 이러한 인위적인 장애를 넘는 용기와 열정이 요구된다.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라는 말씀에서 ‘호되게’에 해당하는 ‘카코스’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가나안 여인의 딸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가나안 여자의 딸이 실제로 어떤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진짜로 마귀가 들린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중병에 걸린 것일 수도 있다.
‘소리 질렀다’는 가나안 여자의 간절함을 나타낸다. |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가나안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거나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냉담한 감정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다. 구속사적으로 중요성을 가지신 침묵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침묵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1)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불신과 이방 여인의 믿음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수 있다. 2) 이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당신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 그 여인이 단순히 예수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인지, 아니면 진실로 예수님이 메시아 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으셨을 것이다. 3) 구원의 역사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즉 구약성경이 유대인에게 주어졌고(요한 4:22-26)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도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한편 예수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정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간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금방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2) 우리의 소망하는 바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못된 간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느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게 예수님의 침묵은 당신의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침묵’을 ‘거절’로 이해하고, 그 여자를 돌려보내자고 건의한다. 제자들의 속마음은 그냥 쫓아버리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즉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고 그냥 보내십시오, 또는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십시오. 이 둘 중 하나였을 것이고 어느 쪽이든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다. 제자들이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시끄럽고 귀찮다는 뜻이다. 그래서 침묵하는 예수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소리를 지르며 귀찮게 따라오는 그녀를 보내기 위한 이기심에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 구절은 ‘구원의 순서’를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한다. 즉 하느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에 온 민족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사도들을 전 세계로 파견하시게 되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좁은 뜻으로 생각하면 유대인들을 뜻하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구원의 순서 하느님의 은총은 하느님을 믿고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너는 하느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느냐? 먼저 하느님을 믿어라.’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양’이라 표현했던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제키엘 34:10)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오히려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길 잃은 양’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이 겉으로 보기에는 냉정한 거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여자의 믿음을 이끌어 내기 위한 시험이다. |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의 냉대와 거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 절하였다.
이 여자가 엎드려 절한 것은 그 여자의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과 간절함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는 거절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간청한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말은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자는 더욱더 간절하게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자녀들’은 하느님의 자녀들 즉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는 이스라엘 백성,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축복을 가지고서,라는 의미이고 ‘강아지’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라고 불렀다.
앞의 7 장 6 절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라는 구절이 있다. 성경에서 ‘개’라는 말은 모두 악한 것을 상징하고 그것을 비꼬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탈 11:7; 판관 7:5; 마태 7:6; 필리피 3:2)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이방인을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시편 59:6).
예수님이 사용하신 ‘강아지’는 ‘들개’ 나 ‘거리를 돌아다니는 개’ 가 아니라 집안에서 기르는 반려견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멸시의 뜻을 약화시키고 부드럽게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신다. ‘좋지 않다’는 줄 수 없다는 뜻이다. ‘빵은’ 하느님의 구원, 하느님의 은총을 뜻한다.
만일 여자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거나 간절함이 덜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기분 나빠하면서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시험이 되는 것이다. |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여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더욱 간절하게 자비를 요청한다.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여자는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한다. 즉 가나안 여자는 유대인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이 선택되지 못한 민족이고 하느님 은총에 대한 권리가 없음을 인정한다.
이처럼 자신을 ‘강아지’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큰 겸손의 행위로 여겨졌다(사무엘 상 24:15; 열왕하 8:13). 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심하게 비하하는 경우에 자신은 ‘죽은 개’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사무엘 하 9:8; 16:9).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말씀은 팔레스티나 지방의 지역에서는 식사하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먹기 위해 개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특히 그 지역의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빵을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히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나안 여인은 사실상 자신이 강아지 취급을 받는 이방인으로서 메시아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일부를 힘입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강아지 수준의 이교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하느님 은총의 부스러기 정도는 청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적용된 비유를 놓치지 않고 유효 적절하게 이용한 것이다.
구원의 순서가 이스라엘 먼저, 이방인이 나중이라고 해도,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은총을 미리 조금 얻어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부스러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특권과 비교할 때 아주 적은 양의 은총과 자비를 뜻한다.
여자의 말에는 자녀들이든 강아지들이든 모두 다 주인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믿음이 들어 있다. 즉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하느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존심을 버린 겸손함, 끈질김, 간절함 등이 바로 기도할 때 필요한 자세이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고, 거절당하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아, 여인아’, ‘아’라는 말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 확신과 아울러 겸손과 인내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두 번째 이방인이다(8:10).
이방인 백인대장의 이야기와 이 구절의 이야기는 몇 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 백인대장의 하인, 가나안 여인의 딸 모두에게 예수님의 은총의 힘이 베풀어졌다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 백인대장의 믿음만 한 것이 없으며 ’ , 여기서는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병 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 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경우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인대장과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의 개념이 신약적 개념 즉 이스라엘에서 모든 민족에게로 넓혀짐을 의미한다. 즉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 의미로 변화된 것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과 겸손을 칭찬하셨고 그 여자는 바라던 것을 얻었다. 그러나 믿음을 인정받고 칭찬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제는 강아지의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은 ‘네가 바라는 대로 네 딸은 나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첫 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두 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지만 세 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간청에 마지못해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믿음을 알고 계셨다.
하지만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조차도 부정한 메시아를 참 메시아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녀를 위해 이미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 일이 이루어짐을 표현한 것이고 무시와 냉대 속에서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를 보면 병자나 병자 가족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많다. 그것은 순전히 자비심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 여자의 간절함만 보셨다면 믿음과 상관없이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여자에게 까다로운 시험을 주셨고 그 여자를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믿음도 은총이다. 그 여자의 믿음도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인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는 딸이 낫기만을 바라고 왔지만 돌아갈 때에는 딸이 낫게 되는 은총도 받고 참된 믿음을 갖게 되는 은총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간청에 소극적, 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그 여자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고,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는 뜻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시려고 생각하신 바로 그 시간에 딸이 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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