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장지마을2] 우동의 어제와 오늘
장지마을은 농경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생활해온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입구 동해남부선 철로(철도공사의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인해 이전되고 현재는 그린레일웨이)를 지나 오른쪽 지점(우1동 147번지)에 선돌 3점이 있었다. 그 선돌 1점(자연석 높이 172cm, 둘레 147cm) 앞에서 선돌제를 연 2회(음력 3월 2일, 10월 14일) 지냈다. 선돌제를 지낸 연유는 선돌이 서 있는 터에 큰 묘가 있었는데 비 오는 날이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이상한 소리가 나서 선돌 앞에서 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해운정사 부근 골목길에는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4m 간격의 길에 250여 년이 된 팽나무와, 올라가면 천벌을 받는다고 금지된 400여 년이 된 누워 있는 팽나무는 동네의 당산나무 보호수였다. 마을의 역사와 쉼터의 공간의 상징인 당산나무는 1990년에 골목길 확장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가 자리한 곳은 무덤골, 어린이 무덤이 있는 애장터였다. 여기에 한독기계공업고등학교(1967년 3월 1일 개교)를 독일 뤼부케 대통령의 방한 기념으로 지어 주기로 하였으나, 동백림 사건으로 물거품이 되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적골(지금의 군인아파트 일대)에 해운대고등학교(1980년 3월 6일 개교)가 자리 잡고, 그 옆에 해운대중학교(1972년 12월 29일 개교)가 들어서 옛 서당 마을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신동아아파트(1992년 대한항공 주택조합 건립) 아래 있는 해운대교회는 1937년 9월 1일 외국 장로교 선교사가 수양관으로 쓰기 위하여 붉은 벽돌로 세운 건물이다. 교회 측은 이 건물을 허물어 다시 중건했다. 이 교회에서는 초창기에 교세 확장을 위해 시루떡을 성탄절에 나누어 주었던 일로 유명하다.
지금 신동아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 아네리세 고아원이 있었다.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노르웨이의 오슬로인 의사가 한국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는 전쟁에서 본 고아들의 참상을 어린 딸에게 이야기하였다. 이후 딸이 갑자기 몹쓸 병에 걸려서 죽게 되자 아버지에게 유언으로 ‘한국에 가서 불쌍한 고아들을 보살펴 주라’고 했다. 그 후 해운대 이곳으로 온 그는 딸의 이름인‘아네리세’를 딴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기독의원으로 운영하다 지금은 ‘꿈사랑 어린이집’이 되었다.
1904년 간행된 {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에 의하면, 우동 호수는 54호이다. 김해 김씨가 32호로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에 의하면, 1930년 당시 남면 우리(佑里)에는 49세대의 김해 김씨 동성마을이었다. 그 외 경주 최씨, 금녕 김씨 등이 이주하여 차츰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