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5. 24
- 진보의 '새 길' 모색한 노무현, 시장·경쟁 중시하는 조언 남겨
- 盧는 DJ 실용주의 계승했건만 文 정부 '진보 원리주의' 빠져
어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열정을 쏟았던 일은 진보 진영의 새 길 모색이었다. 급작스러운 서거 후 측근들이 노 전 대통령 구술, 메모, 토의 내용을 엮어 만든 책이 그의 유작(遺作)이 됐다. '진보의 미래'라는 책이다. 노 전 대통령이 이상과 현실의 접점을 찾기 위해, 진보 진영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현 집권 세력이 노무현 승계자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시장 메커니즘'과 '경쟁'을 중시했다. 그는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해 생산직 노동자 임금 올려주면, 그 인건비 때문에 제품 경쟁력이 떨어지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 하는 문제가 있다. … 각국이 세금 낮추기 경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 개별 국가가 그 선택(증세를 의미)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국제 경쟁'이란 개념은 아예 머릿속에 없는 듯 최저임금과 법인세 인상을 밀어붙인 문 정부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노 전 대통령은 '좌파 신자유주의자'란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시장 메커니즘이 존재하게 해야 한다"면서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를 반대했다. 반면 문 정부는 프렌차이즈 본사가 가맹점 필수 품목 원가를 낱낱이 공개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경쟁은 중요하다. 사회적 생산력을 위해서도 그렇고,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도 그렇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역사적으로도 그랬다"고 했다. 반면 문 정부는 최고 금리, 카드 수수료 인하, 제로페이 도입, 편의점 출점 규제 등 시장 자율성을 저해하고 경쟁을 제한하는 정책을 잇따라 시행하고 있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탈(脫)원전을 바보 짓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세계 6위 원자력 발전 국가인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건설 기술과 운영 노하우를 갖고 있다. … 도시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안정성을 갖고 있다." 적폐 몰이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한때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각기 역할을 이루려고 했는데, 저항의 시대를 넘어서고 건설의 시대로 가니까 바닥이 보인다. … 우리는 착한 사람이고 뭔가 미래를 위해 기여한 것처럼 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노 전 대통령이 가장 경계한 것은 '진보 원리주의'였다. 그는 "보수주의는 규제 완화, 작은 정부, 정부 혁신, 구조조정, 민영화, 노동의 유연화, 이런 명제를 보수주의의 논리로 당당하게 주장한다. … 타당성을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진보 진영도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타협할 것은 타협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 아닐까?"라고 했다. 그러면서 '진보주의의 대안은 뭐냐. 진보 원리주의냐, 제3의 길이냐'는 화두를 던졌다. 그의 답은 다음 말에 녹아 있다. "(유럽 진보 진영에선) 경쟁과 성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노동에 대한 태도도 상당히 양보하고, 작은 정부, 민영화, 개방 등에 대해서도 수용하는 전략이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보편적 세계주의를 지향하며, 효율을 중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실용주의 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이라크 파병은 그런 철학 승계의 결과물이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인은 무엇이 바른길인지 선비처럼 올곧게 따지는 서생적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에만 매달리면 완고함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언제 물건을 구매하고 언제 팔지를 생각하는 상인들의 현실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보 선배들의 유훈을 깡그리 잊은 듯한 문 대통령에게 다시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김홍수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