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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미문 성전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40년 동안 일어서 보지 못했던 이 앉은뱅이 병인이 베드로에 의해서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예루살렘은 떠들썩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사건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베드로에게 또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당국자들이 몹시 당황해서 또 분노해서 그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오늘 1절 2절에 보면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왜 사두개인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또 당국자들이 이렇게 베드로의 메시지, 사도들의 메시지, 사도들의 이 행적을 싫어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기득권에 위협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사실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그 사람을 일으켜서 새로운 인생을 줬으니까 축복하고 찬양해야 될 텐데 왜 분노할까? 그 사건으로 인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모여들어서 지금 베드로가 외치는 메시지 때문에 이 사람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로마는 어느 지역을 점령한 다음에 그것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다스리도록 했어요. 직접 다스리면 인력도 부족하고 또 반감이 더 일어나기 때문에 어렵단 말이에요. 그래서 현지인들로 하여금 다스리면서 그 완충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대신에 그렇게 해서 위임을 받고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 지역을 안정시켜야 돼요. 평화롭게 만들어야 돼요.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은 평화와 그들의 정치적 안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얼마 전에 예수라고 하는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그를 십자가에 잡아 죽였는데 또 부활했다는 얘기가 나오더니 그 제자들이 다시 일어나서 활동을 하면서 예수가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있다 이거예요.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당국자들 기득권 세력들은 이렇게 되면 로마로부터 문책을 받게 되고 또 해임되는 결과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두려운 거예요. 자신들의 기득권 자리를 잃기 때문입니다.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유대 민족은 로마가 다스렸던 어떤 민족보다도 다스리기가 가장 골치 아픈 민족이에요. 이 사람들 자체가 아주 독특하다 이거예요. 마치 이 중동 지역에 이스라엘이 있었다면 아시아 극동에는 코리안이 있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이 유대인들하고 비슷한 그런 면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골치 아프다 이거예요. 뭐가 골치 아프냐 힘이 없어서 당할 때는 당하는데 일단 당하고 나면 그냥 당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보면 옛날 몽골이 유럽을 다 휩쓸 때도 얼마나 무시무시했습니까? 칭기스칸의 그 몽골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그냥 당하지 않았어요. 마지막까지 항전하고 그리고 삼별초라는 부대가 끝까지 항전을 하다가 그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쉽지 않은 민족이에요.
근데 일본이 사실은 중국을 먹고 태평양을 먹고 나중에 미국과도 전쟁을 하는데 그 과정으로 우리나라를 식민 강제 점령을 했습니다. 점령하는 과정은 쉬웠지만 그리고 36년 동안 우리도 고통을 당했지만 이 사람들도 우리나라 먹은 것 때문에 되게 힘들었어요.
제가 볼 때는 참 불쌍해요. 중국은 30만 난징 대학살이 일어났는데도 그것 때문에 그거 가지고 별로 항의도 못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임시 정부를 상해 만들고 막 여기저기서 독립운동가들이 일어나고 그렇죠 막 총 들고 가서 이도 휘로부에 막 쏴버리고 어떤 사람은 도시락 도시락에다 폭탄 넣어가지고 가서 던져가지고 하는 의사도 있고 그래서 지금도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남한의 도시락을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제가 군대에 지금은 그게 그 부대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방위병이라는 게 있었어요. 이분들이 사실 북한 당국을 가장 두렵게 하는 한다고 그래요. 아침에 일어나가려고 윤봉길 의사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 같은 거 하나씩 들고 갔다가 또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데 그게 겁나게 무서웠다. 유머로 하는 얘기지만 어쨌든 우리 민족이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우리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아주 까다로운 힘이 없어서 당하지만 그대로 있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저항하고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독립지사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쉘로땅 열심당 이런 사람들은 몸에 칼을 품고 달리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요인을 암살하고 이게 골치 아픈 민족이 바로 이 로마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근데 이스라엘은 유대가 망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딱 두 번 독립을 했어요. 지금 현재는 현재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고 이스라엘이 20세기에 독립하기 전까지 유대가 망한 다음부터는 거의 다 외세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그중에서 특별히 셀리우쿠스 시리아 왕조가 다스릴 때 그때 마카비라고 하는 그 제사장가에서 이제 그들이 볼 때는 반란이죠. 그걸 일으켜서 혁명을 일으켜서 나라를 되찾아요. 그래서 103년 동안 마카비 혁명을 통해서 103년 동안 왕조가 생기고 독립을 유지합니다.
그때도 그 어마어마한 제국을 이기고 또 독립을 한 거예요. 그다음에 폼페이우스 로마 장군에 의해서 망하고 AD 70년에는 타이투스 장군, 티투스 장군이 와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예수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망가뜨렸을 때 그게 로마와의 전쟁입니다. 그때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어요. 끝까지 저항하다가 저항하다가 완전히 예루살렘이 그렇게 됐을 때는 사회 근처까지 갔어요.
그 저항군이 사회에는 지금도 뭐가 있냐면 마사다라고 하는 요새가 있어요. 이 요새는 헤롯 대왕이 자기 별장 궁전으로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저도 몇 번 방문을 했는데 이렇게 깎아지른 산 위에다가 궁전을 만들었어요. 3년 동안 살 수 있는 양식을 비축하고 거기서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다 받아서 저장하고 정결 의식을 하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요새를 만들어놨는데 거기로 가서 3년을 저항을 합니다.
그런데 로마가 가만히 있을 로마가 아니죠. 어떻게 했냐면 거기를 공성전 하는 그런 방식으로도 거기를 부수기가 어려우니까 어떻게 했느냐 올라갈 수는 없고 지금도 우리가 올라갈 때는 그냥 걸어서 올라가기가 힘들어요. 케이블 타고 차를 타고 올라갑니다. 근데 거기 한쪽 벽을 한쪽 면을 흙을 쌓아가지고 거기까지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쌓아 올라가는데 그것을 유대인들을 잡아다가 유대인들이 쌓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올라와도 공격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 민족이니까. 그래서 결국은 거기가 함락이 되고 함락됐을 때 우리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적들에게 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전원이 자결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일을 했던 사람은 자기가 자결을 하고 그런데 몇 사람이 살았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당시의 상황을 얘기를 해서 이 마사다의 그 저항 그것이 지금 역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이 독립한 다음에 장교들이 임관을 할 때 여기에 가서 마지막 훈련을 하고 그 정신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장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마사다예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얼마나 이런 민족을 지배하고 다스리기가 어렵겠어요. 그래서 로마가 늘 여기에 관심을 갖는 거예요. 혹시 폭동이 일어나는지 어떤 문제가 없는지 그래서 만약에 그 평화로운 그 상태가 무너져버리면 해임을 시킬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심기 때문에 거기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쨌든 소동은 막아야 된다. 폭동을 막아야 된다. 사람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왜 내가 기득권을 잃으니까 지금 그래서 여기 보면 성전 맡은 자 제사장 사두개인 사두개인은 그 바리새파와 달리 바리새파는 일반 서민 운동이라면 사두개인들은 기득권자들입니다.
그 종파 중에서도 지금 기득권 세력들이 아주 불리하게 달려온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가 믿는 신앙생활이 이 사회의 어떤 기득권 세력에게 타격을 주면 반드시 보급을 받는 거예요. 왜 자기들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죠. 그다음에 사도들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또 와서 박해를 합니다.
종교적인 이유예요. 여기에 보면 특별히 여러 분파 사람들이 지금 달려왔지만 바리새인이 빠져 있어요.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달려왔는데 바리새인은 지금 빠져 있어요. 바리새파도 상당히 골치 아픈 사람들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은 비교적 호의적이었어요. 왜냐하면 지금 이 베드로와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나중에 바리새인들이 이제 또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그때는 율법 문제로 가 이 사람은 율법주의예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도바울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받는 것이다. 율법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러니까 그때부터 이 종교적인 이유로 아주 본격적으로 박해를 시작하지만 오늘 이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이 빠져 있는 거예요.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얼마 전에 잡아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 그가 부활했다. 우리도 다시 부활한다. 부활을 믿는다 하는 이 메시지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활동하실 때도 바리새인들은 반은 예수님에 대해서 반감, 반은 호의적이었어요. 그중에서 니고데모 가말리엘 나중에 사도 사도의 사도로 들어온 바울 사도 바울도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내 새를 믿고 천사를 믿고 그리고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 기독교 신앙과 연속선상에 있어 어느 정도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오늘 여기 나온 기득권 세력들은 신앙적으로도 달랐어요. 부활 그런 거 없다 이거야 내세 그런 거 없다 그런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부딪혔을 때 또 엄격하게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가르치고 믿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때로는 이렇게 반대에 부딪히거나 저항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아간다고 할 때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모든 것이 잘 되고 다 그냥 탄탄대로가 열린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그렇게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이 비진리의 세상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진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늘 우리는 그 저항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길은 하나님의 인도와 더불어 또 세상으로부터의 저항도 있다. 그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돼요.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을 헐렁하게 생각하고 뭐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하나님이 잘 인도해 주셔서 헐렁하게 생각해도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멀리 못 가요. 처음부터 단단히 허리띠를 동여매고 신발끈을 강하게 묶으고 말이죠. 가다가 풀어지면 안 되니까 그렇게 출발하셔야 돼요.
여러분께 좋은 말 아주 마음을 위로하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지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좁은 문이다. 이 길은 좁은 문이다. 그리고 협작한 길이다. 사람들이 그래서 첫 길을 싫어한다. 예수 믿고 복음을 따라 사는 길은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입니다. 저항 박해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이 의 진리를 붙들고 진리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결단이 있어야만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현대인들은 너무 나약해요. 특별히 크리스천들이 나약해요. 마치 온실에서 자란 사람들처럼 또 교회에 오면 혹시 이 사람이 떠나지 않을까 겁나가지고 훈련을 못 시켜 조금 강하게 조금 강하게 훈련이 들어가면 이게 시험이 들어요. 그 신학적 용어로 시험이고 삐진다 이거야 그래가지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오냐오냐 이렇게 하다 보니까 우리 자신이 훈련이 안 되고 너무 약해.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만날 때는 그냥 한 방에 날아가는 거예요.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예수 제대로 믿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목숨을 거는 일이었어요. 오늘 사도들이 그런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흔들리지 않아서요. 그들의 위협에도 그들이 감옥에 가둘 때도 매를 때릴 때도 뭐 목숨을 위협하죠. 죽이겠다고 그래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아서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복음의 길을 걸어갔더니 그때부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사도들의 말에 힘이 생긴 거예요. 크리스천의 말에 힘이 안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붙들고 치열하게 살지 않기 때문이에요. 어떨 때는 예수 믿는 것 같은데 어떨 때는 주님 안 믿는 것 같고 그런 공개 커밍아웃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그런 상태로 살아가면 크리스찬으로서 말의 힘이 없어. 저 사람은 누가 봐도 크리스찬이야. 저 사람은 절대 꺾을 수 없어. 그런 정도가 될 때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힘 있는 거예요.
오늘 이렇게 위협을 당했지만 사도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말씀을 전했어요. 그랬더니 말씀이 그전보다도 더 힘을 얻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4절에 보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만 5천 명이었더라.
여러분 하루에 5천 명이 예수 믿고 거꾸러졌어요. 한국교회가 막 부흥이 일어나고 막 기도원에서 막 사람들이 뒤집어지고 할 때도 하루에 한 5천 명 이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남자만 5천 명, 여자가 원래 더 많습니다. 어디든지 아이들도 있었을 거예요. 예루살렘에 그럼 만 명 1만 5천 명이 하루에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게 힘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면서 적당하게 살아가면 이런 힘이 생기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받은 복음을 따라서 정말 목숨 걸고 힘 있게 살아가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위협을 받은 이 사람들이 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행적을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에요. 새로운 구원의 길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으로 선택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율법을 잘 지키면 자기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사도들은 전혀 다른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달려와서 신문을 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로 지금 이 일을 행하고 이렇게 가르치느냐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얼마 전에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지금 이 일을 행하고 이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건물의 모퉁이에 모퉁이돌이 됐다. 하나님은 그 예수를 통해서 지금 세상을 구원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선을 그어버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한마디 합니다.
그게 11절에서 12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진모퉁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니라
다른 구원이 없다. 구원받는 길은 너희들이 십자가에 죽인 너희들이 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 이름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어요. 이단도 이런 이단이 없는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선민으로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충실하며 살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전혀 다른 구원을 얘기하고 있는 율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죽으신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이 이름 외에 어떤 방식으로도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이런 청천병력 같은 말이 어디 있어요? 2천년의 역사를 싹 부인하는 거예요. 1500년의 역사를 부인하는 거예요. 이것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선을 긋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와 선을 그은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는 출발부터 배타적입니다. 배타적인 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원래는 진리는 배타적인 거예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자기 입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저것 다 섞으면 섞어서 믿는 것은 그 식당에서 먹는 섞어찌개나 그런 것처럼 우리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잡탕이 되면 안 된다 이거예요. 여러분 내가 믿는 다른 건 몰라도 다른 건 다 똘레랑스가 있어야 돼요. 다 포용 있고 다 하지만 내가 본 믿는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해야 되고 거기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되고, 그리고 배타적이라고 혹시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이 배타적이라고 말할지라도 그걸 감수할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따라가는 건 그런 거예요. 이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그 후로부터도 끊임없이 이거에 대한 도전을 받았어요. 그러다가 20세기에 와서 아주 큰 신학적인 도전이 왔는데 그게 종교 다원주의라는 겁니다. 뭔 소리냐 기독교가 뭐 맨날 그런 것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느냐 우리가 좀 폭을 넓게 생각하고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은 크신 분이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니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는다. 그런 말하지 마라. 구원이라고 하는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다. 오솔길도 있고 돌아가는 길도 있고 그중에 직선 길도 있는데 천주교회는 직선 길이고 개신교회는 약간 덜 직선 길이고 대종교 그다음이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잡탕 종교들은 다 오솔길 겁나게 고생하지만 마지막 가보면 다 구원받았더라 이거야 이런 가르침이 나왔어요.
그게 종교 다원주의 우리의 배타성을 기독교의 배타적인 모습을 벗어버리자 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이런 생각을 가졌던 이 종교 다원주의적인 신앙을 가졌던 분들이 선교사로 나갔던 적도 있어요. 인도라든가 이런 데 선교사로 나가서 보니까 복음은 몰라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몰라. 근데 사는 걸 보니까 꼭 크리스천 같아요. 기도하고 경건하고 남을 돕고 힌두교라든가 이런 데서 그 수도생들이 얼마나 훈련을 하며 삽니까? 막 고행하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지만 꼭 크리스천 같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어나니머스 크리스천이에요.
익명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지 않았지만 마치 그리스도인 같아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는다. 이게 종교 다원주의 칼라너라고 하는 분이 이 신학자입니다. 캐톨릭 신학자가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을 했어요. 그들 속에도 복음은 듣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파편이 있어서 그들도 결국은 구원받게 된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오늘 이 베드로의 초대교회의 이 출발을 부인하는 거예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이게 막 한국교회에 바람이 불었어요. 많은 논쟁을 하고 학교에서 계속 이런 신학자들 간에 신학생들 간에 이 논쟁이 많았어요. 물론 다수는 보수적입니다. 근데 일부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주장하는 경우가 있어서 많은 우리가 논쟁을 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그중에서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폴리터라고 하는 교수가 쓴 책 중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이라는 책이 있어요.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쓴 거예요. 근데 거기다 퀘스천마크를 이렇게 했어요. 우리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는데만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서 이번은 나중에 마지막 자기가 후에 쓴 책은 어떤 책이냐 부처 석가모니가 없었다면 나는 크리스찬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이방종교의 이제 긍정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하는 말이 우리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도 일으키고 또 마녀 사냥 중세 시대 때 무시무시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이 기독교 카톨릭 세계에서 그다음에 제국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또 선교 또 인종차별 여러분 인종 차별이 기독교 세계에서 한 거예요.
노예 다 잡아다 팔고 이렇게 한 사람들이 기독교 이 유럽 세계가 한 겁니다. 그게 백인들이 또 더 나아가서 전통 문화 파괴 그건 우리나라가 많이 하죠. 그래가지고 막 법당 가서 불지른다든가 단군복을 자른다든가 뭐 이렇게 하면서 하는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뭐냐면 우리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다. 배타성 때문에 온 것이라고 이분들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넘어서야 된다. 근데 저는 이 부분이 생각이 달라요.
이건 기독교의 진리가 배타적이고 우리가 그걸 믿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내가 믿는 진리가 정말 참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거 별로 신경도 안 써 아직 덜 성숙하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상대를 공격함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거예요.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라든가 마녀 사냥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사실 기독교 신앙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의 죄성과 탐욕입니다.
그 안에는 다 경제적인 정치적인 문제가 있는 거예요. 기독교라는 이름만 가지고 자기들의 그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일으킨 것들이 인류의 비극이 된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대성 이것 때문에 이 이걸 이 배타성 때문에 일으킨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돼요. 신앙은 진짜 신앙은 원래 보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고 이렇다면 우리가 꼭 예수 믿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오늘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 베드로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구원의 길을 여시지 않았다.
우리가 이것을 믿기에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이 좁은 거예요. 협작한 거예요. 그래도 끝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욕도 먹는 거예요. 그러나 그 욕 먹는 거 가지고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진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비진리의 세계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줄로 믿습니다.
흔들리면 안 돼요. 흔들리면 그렇다고 해서 너무 이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너무 다른 사람에 대해서 공격적으로 될 필요도 없어요. 그건 비성숙입니다. 그냥 놔둬요. 그 사람도 아직 모르니까 그렇게 믿는 거예요. 가서 막 불지르고 막 그렇게 해가지고 기독교 이미지를 그렇게 하지 말아요.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이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아멘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십니다. 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신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혹시 누군가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졌을지라도 그가 죄 없는 자기 죄로 죽은 거예요. 죄 없는 자가 죽으신 분은 예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붙들고 우리는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요. 인간적으로는 참혹한 사건이에요. 여러분 보고 지라고 해보세요. 누가 말 한마디 해도 마음의 상처를 받는데 매마저 아니 십자가에 못 박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매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수없이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할 수만 있으면 2천이 되서 떠나게 해달라고 할 만큼 고통스러운 그 십자가를 우리 주님이 지셨어요. 심장이 터지셨어요. 그 심장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어요. 그렇게 함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안다면 이 신앙에서 조금 더 양보하면 안 돼요.
현대 정신은 자꾸 양보하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만 여러분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2천년 동안 이 믿음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치며 순교의 길을 걸었고,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았어요.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길을 걸어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끝까지 오직 예수 이 신앙을 붙들고 달려가셔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