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 Japanese Torreya , 榧 , カヤノキ榧の木
분류학명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은 좋은 바둑판 하나 갖는 것이 평생 소원이다. 이들은 은행나무나 피나무로 만든 바둑판 하나가 서재에 놓여만 있어도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러나 최고급품은 비자반(榧子盤)으로 친다. 나무에 향기가 있고 연한 황색이라서 바둑돌의 흑백과 잘 어울리며, 돌을 놓을 때 들리는 은은한 소리까지 그만이란다. 처음에는 표면이 약간 들어가 있는 듯하지만 바둑을 다 두고 돌을 바둑판에서 치우고 나면 다시 회복되는 탄력성은 다른 나무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자랑거리다.
비자나무는 현재 남해안 및 제주도에서 드물게 자라는데,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비자나무 바둑판을 전혀 만들 수 없다. 보존상태가 좋고 잘 다듬어진 비자나무 바둑판은 소위 명반(名盤)이라고 알려져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한다. 1994년 일본의 한 소장가가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피살되기 직전까지 가지고 있던 바둑판을 한국기원에 기증했다. 이 바둑판은 최고급 비자반은 아니고 중질 정도이나 역사성 때문에 명반의 대열에 들어 있다.
지금은 이렇게 귀한 나무이지만 옛날에는 남해안에서 흔히 자라던 나무였다. 이는 문헌이나 출토유물에서도 확인된다. 《고려사》에 보면 원종 12년(1271)에 원나라의 궁궐을 짓는 데 필요한 비자나무 판자를 보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비자나무의 분포지역과 조정에 바치는 세공(歲貢)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1983년 완도 어두리에서 인양된 고려 초기의 화물운반선 선체의 밑바닥 일부와 완도 장좌리 청해진 유적지의 나무 울타리, 4~6세기 무덤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관재의 대부분은 비자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비자나무는 부드럽고 연하면서도 습기에 잘 견디므로 예부터 바둑판 이외에도 관재나 배의 재료로 널리 이용된 좋은 나무다.
이처럼 고려 이전만 해도 비자나무는 널리 자라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으나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벌써 세종, 예종, 성종 때 여러 번에 걸쳐 비자나무 판자의 수탈에 관한 지적이 있었으며, 영조 39년(1762)에는 제주도에서 바치는 비자나무 판자 때문에 백성들의 폐해가 심해 일시 중지시킨 기록도 있다. 그래서 우리와 가까이서 삶을 함께해 온 비자나무 숲은 안타깝게도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몇 곳만이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남해안 섬 지방과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육지는 전라남북도의 경계에 있는 백양산과 내장산이 비자나무가 살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고,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서울 창경궁 온실 옆의 비자나무는 10년 넘게 잘 자라고 있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비자나무는 늘푸른 바늘잎을 가진 큰 나무로 어릴 때 생장은 매우 느리나 크게 자라면 두세 아름에 이른다.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고 잎은 납작하며 약간 두껍고 끝은 침처럼 날카롭다. 암수가 다른 나무이고 봄에 꽃이 피어 열매는 다음해 가을에 익는다. 크기는 손가락 마디만 하며 새알모양으로 생겼다. 껍질을 벗겨내면 연한 갈색에 딱딱하고 얕은 주름이 있는 씨가 들어 있다. 아몬드와 닮았는데, 맛은 떫으면서 고소하다. 그러나 함부로 먹을 수는 없고 예부터 회충, 촌충 등 기생충을 없애는 약으로 쓰였다. 《동의보감》에는 “비자 열매를 하루에 일곱 개씩 7일 동안 먹으면 촌충은 녹아서 물이 된다”라고 했다.
비자나무는 개비자나무와 잎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손바닥을 펴서 잎의 끝 부분을 눌러보았을 때 딱딱하여 찌르는 감이 있으면 비자나무, 반대로 찌르지 않고 부드러우면 개비자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