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장흥부
경계까지 24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7리, 서쪽은 해남현 경계까지 25리, 북쪽은 영암군 경계까지 4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리이다. 【건치연혁】 도강현(道康縣)은 본래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양무(陽武)로 고쳤고,
고려 때에 도강현으로 고쳐 영암군에 예속시켰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 탐진현(耽津縣)은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탐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군에 예속하였다가 뒤에 장흥부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17년에 병마도절제사의
영(營)을 도강(道康)의 옛 치소(治所)에 옮겨 두 현을 합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탐진을 치소로 하였다. 세종 11년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겼다가 성종 6년에 탐진의 옛 치소로 돌아왔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도강(道康)ㆍ도무(道武)ㆍ양무(陽武)ㆍ금릉(金陵)ㆍ탐진(耽津)ㆍ동음(冬音)ㆍ오산(鷔山). 【성씨】 도강(道康) 김ㆍ조(趙)ㆍ황(黃)ㆍ임(任)ㆍ표(表)ㆍ박ㆍ현(玄)ㆍ허(許). 탐진(耽津) 최(崔)ㆍ조(曺)ㆍ유(兪)ㆍ안(安)ㆍ정(鄭)ㆍ하(河), 강(康)ㆍ박(朴) 모두 내성(來姓)이다. 평덕(平德) 안(安)ㆍ박(朴).
대구(大口) 서(徐). 대곡(大谷) 조(曺).
칠양(七陽) 백(白). 영가(永可)
신(申)ㆍ김(金). 수운(水雲) 조(曺)ㆍ오(吳)ㆍ최(崔). 【산천】
보은산(寶恩山) 현의 동쪽 7리에 있는 진산이다. 월출산(月出山) 현의 북쪽 40리. 영암과의 경계에 있다. 만덕산(萬德山)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의 중 혜일(慧日)의 시에, “앞 봉우리는 돌 창고[石庫]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도다.”
하였다. 좌곡산(佐谷山) 현의 서쪽 65리에 있다. 수인산(修因山)
도강에 있다. 현에서의 거리가 동쪽으로 30리. 마점(馬岾)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바다 서남쪽이 모두
바다이다. 송계(松溪) 송계부곡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고현(古縣)을 지나는데, 곧
작천(鵲川)의 상류이다. 구십포(九十浦)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현 서쪽의 물과 합쳐 구십포가 된다. 탐라(耽羅)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에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耽津)이라
하였다. ○ 고려의 박충좌(朴忠佐)가 일찍기 승평군(昇平郡)에서 놀 때 기생 벽옥(碧玉)과 정분이 있었는데, 안렴사(按廉使)가 되자 벽옥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구십포에 이르러 슬퍼하면서 시를 짓기를, “구십포에 밀물이 지려는데, 푸른 솔 붉은 나무는 지난해에 지나간 곳이로다.
지금 부질없이 깃발에 싸여 지나가는데, 누각 위에는 이 행차를 바라보는 사람 없도다.” 하였다. 남원포(南垣浦) 현의 남쪽 57리에 있다. 작천(鵲川) 현의 북쪽 15리, 옛
도강현 땅에 있다. 자세한 것은 장흥부에 적혀 있다. 감물천(甘勿川)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마점(馬岾)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완도(莞島) 현의 남쪽 60리 되는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는 2백 90리이고 자세한 것은 해남현에 있다. 고이도(古爾道) 둘레가
1백 5리이며 목장이 있다. 조약도(助藥島) 둘레가 95리이며 목장이 있다.
신지도(新智島) 둘레가 90리이며 목장이 있다. 가배도(加背島) 둘레 30리. 소흘도(所訖島) 둘레 20리.
다야도(多也島)ㆍ동량도(銅梁島) 모두 둘레가 4리. 부인도(富仁島) 둘레 5리. 은파도(恩波島) 둘레 6리.
벽랑도(碧浪島) 둘레 4리. 죽도(竹島) 둘레
6리. 재마도(載馬島) 둘레 15리. 이상 여러 섬은 모두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증』 연기산(煙氣山)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이발산(離鉢山)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주작산(朱雀山) 현의 서쪽 35리에 있다. 불용산(佛湧山)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금천(錦川)ㆍ용하지(龍下池)ㆍ합지(蛤池) 모두 현의 동쪽 20리에
있다. 【토산】
인삼ㆍ지치[紫草]ㆍ석류ㆍ유자ㆍ송이ㆍ표고버섯ㆍ차ㆍ비자ㆍ감태(甘苔)ㆍ김ㆍ매산(苺山)ㆍ황각(黃角)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ㆍ낙지ㆍ조개ㆍ소금ㆍ숭어ㆍ우뭇가사리ㆍ참가사리ㆍ전복ㆍ굴ㆍ홍합ㆍ안식향ㆍ자연동(自然銅)ㆍ꿀ㆍ미역ㆍ대,
죽전(竹箭) 남쪽 바다 가운데 15리에 있는 죽도(竹島)에서 나온다. 『신증』
방풍(防風)ㆍ해삼ㆍ황어(黃魚). 【성곽】 읍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6천 8백 2자,
높이가 9자인데 안에 우물이 여덟, 못이 하나 있다. 성종 6년에 쌓았다. 【관방】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옛 도강의 작천위에 있는데 현에서 27리이고, 돌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2천 8백 20자이며,
군창(軍倉)이 있다. 마도영(馬度營) 옛 탐진에 있는데, 현의 남쪽 64리에 있다. ○
수군만호 1인. 『신증』 가리포진(加里浦鎭) 완도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3리이다. 금상 16년에 왜구의 요로이므로 비로소 진을 설치하였다. 첨사(僉使) 한 사람을 두고 합달량(合達梁)의 수군을 아울러
관장케 한다. 【봉수】 좌곡산(佐谷山) 봉수 서쪽으로 영암군의
갈두산(葛頭山)에 응한다. 수인산 봉수 동쪽으로 장흥부의 억불산(億佛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병마 절도사영에 응한다. 남원포 봉수 동쪽으로 장흥부의 천관산(天冠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좌곡산에 응한다. 『신증』【궁실】 연희당(燕喜堂) 병영에
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세류영(細柳營) 안 사압당(射鴨堂)에 장군과 함께 걸상에 기대었네. 하늘 가 인일(人日 음력 정월
초이렛날)에 안개가 짙었는데, 막 밖에 군대도 강하여라. 다만 강산이 귀한 손에게 바치는 것 사랑스럽고, 풍악소리로 하여금 이별의 시름을
자아내지 말게 하라. 내일 아침에는 또 승평군(昇平郡)으로 향하리니, 원추리 동백꽃이 석양에 아리따우리.”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장군의 정사(亭舍)가 천간(天慳)을 깨뜨리는 것이 마땅하니, 푸른 산과 맑은 물결이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있구나. 이 풍경 거두어다가 기쁜
잔치에 바치니, 이제부터 초목도 한가롭지 못하리.” 하였다. ○ 또 “장군이 구마(毬馬)로 나와서 손님을 맞으니, 우선(羽扇)에 조포(雕袍)가
늦은 봄에 번쩍이누나. 한낮 봄바람에 깃발이 늘어졌고, 장막 앞에는 날쌘 기병이 구름같이 모여 있네.”
하였다. 【누정】 청조루(聽潮樓) 객관 남쪽에 있다. 현감 오순종(吳舜從)이
세웠다. 『신증』 진남루(鎭南樓) 곧 병영의 망보는
망루이다. 【학교】 향교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진원역(鎭原驛) 옛 이름은 통곡(通谷)인데 병영의 성 밑에
있다. 통로역(通路驛)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월남역(月南驛) 현의 북쪽 35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다. 고야현원(古也峴院)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가정원(稼亭院)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석교원(石橋院)
현의 서쪽 17리에 있다. 『신증』 금천원(錦川院)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고알원(高謁院)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불우】 월남사(月南寺) 월출산 남쪽에 있다. 고려의 중
진각(眞覺)이 처음 세웠으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비문이 있다. 무위사(無爲寺) 월출산에
있다. 개운(開運) 3년에 중 도선(道詵)이 처음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으므로 이제 중수하였고, 인하여 수륙사(水陸寺)로
하였다. 백련사(白蓮社) 만덕산에 있다. 신라 때에 세우고 고려의 중 원묘(圓妙)가
중수하였고, 우리 세종 때에 중 행호(行乎)가 다시 중수하였다. 탑과 비와 세 부도(浮屠)가 있으며, 또 만경루(萬景樓)ㆍ명원루(明遠樓)가
있다. 남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온 골짜기가 모두 소나무ㆍ잣나무이고, 가는 대ㆍ왕대와 동백나무가 어울려 사시를 한결같이 푸른빛이니 참으로
절경이다. ○ 윤회(尹淮)의 기문에 “전라도 강진현 남쪽에 우뚝 솟아 맑고 빼어난 산이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만덕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부처의 궁전이 있어 높고 시원하게 트이어 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니, 백련사가 곧 그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처음 세웠고,
고려의 원묘대사(圓妙大師)가 새로 중수하였는데, 전해 내려와 11대의 무외대사(無畏大師) 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법화도량(法華道場)이 되어 동방의
이름난 절로 일컬어졌다. 왜적이 날뛰게 되자 바다를 등진 깊은 지역이 폐허가 되어버렸으며, 절도 그 성쇠를 같이 하였다. 우리 조선에 와서는
거룩하신 임금이 서로 이어 나시니, 바다와 산이 평안하고 풍진(風塵)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천태종(天台宗)의 여수
행호(行乎)대사가 이 절에서 놀다가 그 황폐한 것을 보고 석장(錫杖)을 머무르고 길이 탄식하고 발분 서원(誓願)하여, 그의 제자 신심(信諶)
등에게 일러 여러 시주들에게 권유하여서, 경술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병진년 봄에 준공하였다. 불전과 승방 등을 거의 태평하였던 지난 날의
모습과 같이 복구하였고 불공으로 나라의 축복을 비는 행사가 옛날보다도 더 성하였다. 대사의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인데, 문헌공(文獻公
최충(崔冲))의 후손이요, 황해도 해주의 사족(士族)이다. 젊은 나이에 출사하여 계행이 높이 뛰어났고, 묘법을 깨달아 불도들이 우러러보았다.
성품이 순수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살았을 제 봉양하고 죽어서 장사 지내는 데 힘써 정성을 다하였으니, 다른 불도들의
비길 바가 아니었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의 금대(金臺)ㆍ안국(安國)ㆍ천관산(天冠山)의 수정(修淨) 등은 모두 그가 새로 지은 것인데,
백련(白蓮)이 그 최후의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 중 혜일(慧日)의 시에, “대낮에 고요히 베개에 의지하고 있으니, 해어진 돗자리와
명아주 평상이로다. 대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니, 모골이 서늘하구나. 일어나 앉아 남쪽 포구를 바라보니, 석양에 산 그림자가 길다. 잠시 저녁
종이 울리고, 불전에서는 예불하는 향냄새 흘러나오네. ○ 또 “머물고 떠나감이 다만 인연에 달렸으니, 도 한 해를 이럭저럭 보내고, 작은 뜰에는
단풍 잎에 비 내리고, 고요한 방에서는 백단향(白檀香)의 연기로다. 평상이 차가와 새벽 공부 게으르고, 창은 밝은데 낮잠이 오네. 어찌 늙은
눈으로, 다시 백련사를 볼 줄 기약하였겠나.” 하였다. ○ 앞사람의 만경루 시에, “백련사 경치도 좋고,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문은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닫혔는데, 객이 와서 풍경 소리 듣는구나. 돛은 바다를 따라서 가고,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을
잊으니, 티끌 세상 전혀 생각 없네.”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찬 바람 찬 눈 속에 꽃이 피니, 절 문 동쪽에는 숲이 짙게
붉어라. 사시에 봄빛을 홀로 차지하였으니, 조물주도 여기서는 공평치 못하구나.” 하였다. ○ 김뉴(金紐)의 시에, “명원루 높아 눈앞이
새로우니,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 없는 겨울이네. 울 옆의 긴대 바람에 소리내고, 난간 앞의 그윽한 꽃 눈속의 봄이라. 나그네 시 읊어
시편(詩篇)은 흥겨운데, 중은 다과를 내어 사람을 만류하네. 한나절 동안 놀다 돌아오니, 이로부터 구름안개 꿈속에 자주 드네.”
하였다. 수인사(修仁寺) 수인산에 있다. 금곡사(金谷寺) 보은산에 있다. 백운사(白雲寺)ㆍ수암사(秀巖寺) 모두 월출산에
있다. 운제사(雲際寺) 만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동쪽에 있다. 호국신사(護國神祠) 현의 남쪽
칠장리(七長里)에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모시는 신은 송징(宋徵)이다.” 한다. 아래의 사현(射峴) 편에 보라.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양자암(養子巖) 월출산 동쪽에 높이 솟은 한 바위가 있는데, 그 위가 넓고 평평하다. 옛날 왜란 때에 근처 고을 백성들이 처자를
데리고 바위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난을 피하여, 모두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므로 이름을 양자암이라 하였다. 청해진(淸海鎭)
완도(莞島) 안에 있으며, 신라 때에 설치하였다. 궁복(弓福)으로 대사(大使)를 삼았는데, 문성왕(文聖王)
때에 궁복이 모반하여 죽음을 당하고 진은 폐지하였으며, 그곳 사람들은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기었다. 고강진(古康津) 송계(松溪)에 있다. 선산도(仙山島)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고려의 정언 이영(李穎)이 완도에 귀양을 왔는데, 그의 작은 아버지인 중 혜일(慧日)이 따라와서 찾아보고 곧 섬으로 들어가 절을
세우고 살았다. 그 시에 이르기를, “산의 사면이 구름 연기에 싸였는데, 솔문을 깊이 닫고 늙으막에 거처하네. 찬 바람만 처마 끝을 울릴 뿐,
암자 앞에 와서 노니는 나그네 다시 없구나.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한가히 사는 낙이요, 목마르면 마시고 배고프면 먹네. 이미 성글고 게을러
남이 돌아보지 않으니, 수행은 대략 마쳤고 인연은 반이로다.” 하였다. ○ 또 “이른 새벽에 한가로이 책상에 의지하니, 귀와 눈이 절로 산들
하구나. 부슬부슬 공중에 내리는 비요, 구름 밖에서 쩡쩡하는 나무꾼의 도끼 소리네. 산색을 보이려고 대[竹]를 숙이게 하고, 약밭에 물대려고
샘을 멀리 끌고 오네. 좁은 길에 이끼도 낡았는데, 누가 와서 이 적막한 곳을 두들기려나.” 하였다. 법화암(法華菴)
완도 안에 있다. 이 절이 있는 골짜기에 전석계(全石溪)ㆍ천연대(天然臺)ㆍ상왕봉(象王峯)이 있다. ○ 중
혜일(慧日)의 전석계 시에, “온통 돌로된 시내 밑바닥, 맑게 잠긴 물상(物像) 좋기도 하여라. 봄 꽃은 빨간 비단을 씻는 듯, 가을 잎은
단사(丹砂)를 잠가 놓은 듯. 물가는 따뜻하여 고기들이 모여 놀고, 물결은 맑아서 제비가 스쳐간다. 나도 가끔 와서 세수하고 가사(袈裟)의 붉은
그림자 비쳐보네.” 하였다. ○ 천연대 시에, “낡은 돌사다리에 이끼가 얼룩지니, 티끌 묻은 발자취 왕래가 끊어졌네. 추켜든 수염을 흔드는양
소나무는 우쭐하고, 조잘거리는 물은 졸졸 흐르네. 생김새는 세 층으로 나뉘었고, 그윽하고 기이함은 만 가지로다. 자연히 귀와 눈이 맑아지니,
평생의 한가로움을 여기에 붙일까보다.” 하였다. ○ 상왕봉 시에, “푸릇푸릇 나무들이 우거졌으니, 구름과 안개는 몇 해나 지냈는고. 달이 뜨니
부처의 백호(白豪 부처의 양미간의 흰털)가 밝고, 탑이 구르니 코끼리 머리가 도는구나. 시냇물은 불경을 외우는 듯, 바위의 꽃은 범연(梵筵)을
꾸몄구나. 아름다운 이름이 스스로 원묘(圓妙)라, 부질없이 전한다고 이르지 말라.” 하였다. 사현(射峴) 완도에 있다. 전설에 이르기를, “옛날에 섬 사람으로 이름을 송징(宋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용을 당할 사람이
없고 활을 쏘면 60리 밖에까지 미치고 활시위를 끊으면 피가 나왔다고 하며, 지금도 반석에 활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사현이라
부른다.” 한다. 회선정(會仙亭) 도강현에 있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산과 시내는
바로 그림 같고, 환영 같은 누대는 귀신의 솜씨를 빌렸는가. 타는 듯한 붉은 작약 푸른 섬돌을 밝히고, 묶은 듯한 푸른 대나무 붉은 난간을
어둡게 하네. 끊어진 구름은 홀연히 사람을 만류하는 비를 보내고, 키가 큰 나무는 멀리서 나그네에게 바람을 보내네. 이 풍경 누구를 의지하여
흥을 돋우는고, 가정(柯亭)의 기이한 대와 역양(嶧陽)의 오동이네.” 하였다. ○ 채보문(蔡寶文)의 시에, “분주히 다니는 나그네 길은 예나
이제나 같고, 근심을 깨뜨리는 데에는 술이 공이 있네. 바람은 물소리를 이끌어 베갯머리에 오고, 달은 꽃 그림자를 옮기어 구슬 난간에 떠오른다.
섬돌 가의 온갖 풀은 봄빛을 다투고, 난간 밖의 쌍솔은 온종일 바람이라. 자리 위의 여러 신선은 모두 덕이 있어, 시를 읊고 노래 부를
만하네.” 하였다. 안우택(安祐宅) 옛터가 읍성 남쪽에 있다.
평덕향(平德鄕)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운수부곡(雲水部曲) 현의 동쪽 20리에 있으며, 수운(水雲)이라고도 한다. 대구소(大口所)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대곡소(大谷所)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칠양소(七陽所) 현의 동남쪽 15리에 있다. 산계소(山計所)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산심소(山深所) 현의 서북쪽 35리에
있다. 종옥소(種玉所)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구계소(舊溪所) 현의 남쪽 37리에 있다. 부원소(富元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영가부곡(永可部曲)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송계부곡(松溪部曲)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미포부곡(彌浦部曲)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좌곡부곡(佐谷部曲) 현의 서쪽 60리에 있다. 수인산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7백 56자, 높이가 9자이다. 고려 말에 도강ㆍ탐진ㆍ보성ㆍ장흥ㆍ영암의 백성들이 모두
여기에서 왜구를 피하였다. 【명환】 신라 궁복(弓福) 《당사(唐史)》에 장보고(張保皐)라 일컬었는데, 일찍이 당 나라에 들어가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으며,
말타기와 창쓰기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뒤에 나라에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중국 도처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으니, 원컨대
청해(淸海 완도)를 평정하여 도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서쪽으로 납치하여 가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왕과 모든 사람이 그로 하여금 진을 두어
지키게 하였더니, 그 뒤로부터는 우리나라 사람을 잡아다가 파는 일이 없어졌다. 신무왕(神武王)은 그의 아버지 균정(均貞)이 김명(金明
민애왕(閔哀王))에게 피살되자, 처자와 더불어 궁복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김명이 왕위를 빼앗자
정년(鄭年)ㆍ염장(閻長)ㆍ장변(張弁)ㆍ낙금(駱金)ㆍ장건영(張建榮)ㆍ이순행(李順行)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신무를 받들어 김명을 쳐서
죽이니, 궁복은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어 식읍(食邑) 이천호(二千戶)를 봉하였다. 뒤에 문성왕(文聖王)이 복의 딸을 맞아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간하기를, “복은 섬 사람인데 그 딸을 어떻게 왕비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복이
왕을 원망하여 진을 근거로 하여 배반했으나 염장에게 피살되었다. 정년(鄭年) 정년이
잠수(潛水)를 잘하여 물속에서 50리를 가도 숨이 막히지 아니하였다. 궁복과 함께 당 나라로 들어가 무령 소장(武寧小將)이 되었는데, 궁복은
나이로 정년은 재주로 서로 막상막하였다. 궁복이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정연이 돌아와서 그를 찾았는데, 궁복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술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김명이 왕위를 빼앗었다는 소리를 듣고, 군사 5천 명을 갈라서 정년에게 주며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아니고서는 이 화란을 평정할 수 없네.” 하였다. 정년이 나라로 쳐들어와 김명을 죽이고 뒤에 궁복과 교대하여 청해진을
지키었다. 고려 박원계(朴元桂) 수령이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다. 민상정(閔祥正) 문인공(文仁公) 지(漬)의
아들이다. 김유(金儒) 김인경(金仁鏡)이 김태수(金太守)를 회고하는 시에, “감당(甘棠
팥배나무)은 바로 이것이 사람을 생각하는 나무며, 현수(峴首)는 의연히 눈물 흘리는 비석이로다.”
하였다. 【인물】 고려 최사전(崔思全) 탐진(耽津) 사람. 내의(內醫)가 되어 여러번 승진하여 소부 소감(少府少監)에 이르렀다.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했을 때, 사전이 건의하기를, “자겸은 오직 척준경(拓俊京)을 믿고 있으니, 만약에 준경을 얻으면 자겸은 다만 한낱
범부일 뿐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서로 더불어 계책을 결정하여 자겸을 제거하였다. 공에 의하여 병부 상서로 뽑히었고, 벼슬이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尉柱國)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경(莊景)이고,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최열(崔烈) 사전의 아들이다. 사전이 일찍이 최열의 형제에게 금잔 한 벌씩을 주었는데, 사전이 죽은 뒤에 첩이 그 하나를 훔쳤다.
형 변(弁)이 노하여 채찍으로 치려 했으나 최열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던 사람이니,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서라도 도와
주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이 물건쯤을 가지고 그럴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받은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고, 그 형에게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실을 듣고 가상히 여겨, “효성이 있고 어진 사람이라 하겠다.” 하고, 어필로 이름을 써주기를 효인(孝仁)이라
하였다. 조정(曺精)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민간의 전설에 조정이 늙어서 집에
있을 때, 한 머리가 센 늙은이가 날마다 찾아와서 바둑을 두었는데, 그 온 곳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취를 찾아 보았더니 바다로
들어갔는데, 그는 곧 용이었다고 한다. 우리 세조 때에 이 현 사람 김극화(金克和)가 밭을 갈다가 큰 그릇을 얻어서 바치었는데, 그것은 조정이
쓰던 그릇이었다. 안우(安祐) 공민왕 때에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시켰는데, 안우가
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와 함께 쳐서 평정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세 원수(元帥)라고 일컬었으며, 벼슬이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이르렀으나, 얼마 뒤 김용(金鏞)에게 피살되어, 여론이 그를 아깝게 여겼다. 최표(崔彪) 원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본조 안지(安止)
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조주(趙注)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지사간(知司諫)에 이르렀다. 자세한 것은
나주(羅州) 우거(寓居) 편을 보라. 【우거】 본조 김돈(金墩)
자세한 것은 안동부(安東府) 인물 편에 있다. 『신증』【효자】
본조 고수정(高守精) 어머니가 죽으니, 죽을 먹고 시묘하면서
상을 마쳤다. 제찬을 몸소 장만하여 바치었으며, 남과 이야기하다가 간혹 부모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소리내어 슬피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상(今上) 7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황폐한 산과 물 중
혜일(慧日)의 시에, “황폐한 산과 물, 몇 겹이나 눈앞에 들어오나.” 하였다. 몇 곡조 노젓는 소리 쓸쓸한 물가에서 들려 오네.
앞 사람의 시에, “몇 곡조 노젓는 소리 쓸쓸한 물가에서 들려오네. 때때로 또 다시 누각에 올라 푸른 물을
굽어보노라.” 하였다. 산빛은 변함없이 여전한데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 누각이 천만
가지 경치인데, 그윽한 절경에 티끌이 깃들이지 않았네. 산빛은 변함없이 여전한데, 풍경은 언제나 새롭게 바뀌이네. 고운 꽃은 아리따운 기생보다
낫고, 긴 대는 좋은 손님을 대하는 듯하네. 날마다 마음껏 읊조리며 완상하노니, 모든 것이 참으로 사람에게 알맞구나.” 하였다. 한
구역의 소나무와 대는 성긴 연기 밖이요 김돈(金墩)의 시에, “한 구역의 소나무와 대는 성긴 연기 밖이요,
십 리나 펼쳐 있는 뽕과 삼밭은 가는 비 속이로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도강(道康)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본래 백제 도무(道武)였는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양무군(陽武郡)으로 고치고 영현(領縣)인 삼침연(三浸演)ㆍ안고(安固)ㆍ황원(黃原)의
탐진(耽津)은 무주(武州)에 예속시켰다. 고려 태조 23년에 도강(道康)이라 고치고 현종 9년에 영암군(靈岩郡)에 예속시키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7년에 탐진에 합하고 강진(康津)이라 이름하였으며, 병영(兵營)을 본현의 땅에 설치하였다. ○
읍호를 금릉(金陵)이라 하였다.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이다. 고읍(古邑) 옛 송계부곡(松溪部曲)인데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고군내(古郡內) 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35리이다.
열수(列樹) 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나주(羅州) 북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0리이다. 이음(梨音) 북쪽으로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15리이다. 초곡(草谷) 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35리이다. 오천(梧川) 북쪽으로 처음이 2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지전(知田) 서쪽으로 처음이 5리이고, 끝이 50리이다. 화구(火口) 본래 대구소(大口所)인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60리이다. 칠양(七陽) 본래는 칠양소(七陽所)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5리이다. 파지대(波之大) 서쪽으로 처음이 7리이고, 끝이 30리이다. 보석(寶石)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40리이다. 안주(安住)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45리이다. 백도(白道)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80리인데, 탐진(耽津)의
서쪽으로 해서 완도로 들어간다. 군영(軍營) 남쪽으로 처음이 30리이고, 끝이 90리인데
탐진의 동쪽으로 해서 이곳 조약도(助藥島)에 들어간다. 고금도(古今島) 완도의 동쪽
장흥(長興) 회령포(會寧浦)의 남해(南海)에 있다. 신지도(薪智島) 고금도의 남쪽에
있다. 완도(莞島) 남쪽으로 1백리에 있다. 청산도(靑山島) 남쪽으로 2백리에 있다. 조약도(助藥島) 남쪽으로 1백리. 고금도의
동쪽에 있다. ○ 평덕향(平德鄕)은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운수부곡(雲水部曲)은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좌곡부곡(佐谷部曲)은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미포부곡(彌浦部曲)은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영가부곡(永可部曲)은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부원소(富元所)는 남쪽으로 15리에
있다. 구계소(舊溪所)는 남쪽으로 37리에 있다. 종옥소(種玉所)는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산심소(山深所)는 서북쪽으로 35리에 있다.
소계소(小計所)는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성지】 읍성(邑城) 성종(成宗)
6년에 쌓았는데 둘레가 8천 4백 2척이고, 곡성(曲城)이 8개, 성문(城門)이 4개, 우물이 8개, 못이 하나 있다.
수인산성(修因山城) 동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병영(兵營) 동쪽으로 10리이다. 둘레가 3천 7백 5척이고
병영에서부터 성의 남문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좁은 길이 빙 돌아서 문 밖의 성세(城勢)가 핍박하여 두 사람이 함께 설 수 없으며, 북문은 더욱
험절하고 동문은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으로, 문 밖에 수덕인산세(修德因山勢)가 절벽져 있다. 서ㆍ남ㆍ북 3면은 천연적으로 험준하다. 동문은 옛성
밖에 별도로 빙둘러 개천을 만들어 쌓았다. ○ 고려 말에 도강(道康)ㆍ탐진(耽津)ㆍ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영암(靈巖)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서
왜구의 침범을 피하였다. 【영아】본조 태종조(太宗祖) 때에 병마도절제사영을
광주(光州)에 설치하였다가 17년에 영을 도강현(道康縣) 작천(鵲川)의 위에 이주하였다. 다시 선조 32년에 장흥으로 옮겼다가 37년에 다시
구성으로 돌아왔다. ○ 성의 둘레는 2천 8백 20척이고 성문이 4개, 옹성(甕城)이 12개, 우물이 5개, 못이 2개이며,
진남루(鎭南樓)가 있다. ○ 남쪽으로 본현까지의 거리는 27리이다. 관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都使)ㆍ중군(中軍) 우후(虞侯)가 겸한다. 심약(審藥) 각 1인. 속영 전영(前營)이 순천(順天), 좌영이
영봉(靈峯), 중영(中營)이 전주(全州), 우영(右營)이 나주(羅州), 후영이 여산(礪山)에 있다. 산성 입암(笠巖)ㆍ장성(長城)ㆍ금성(金城)ㆍ담양(潭陽)ㆍ적상(赤裳)ㆍ무주(茂朱)ㆍ교룡(蛟龍)ㆍ남원(南原)에
있다. 【진보】 가리포진(加里浦鎭) 완도(莞島)에 있으며 현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중종 17년에 왜구의 요충지에 진을 처음 설치하여 달양수진(達梁水鎭)에 합하였다. ○ 성의 둘레는 5천 3백 80척이고 곡성(曲城)이 6개이다.
○ 수군첨절제사가 1인. 고금도진(古今島鎭) 남쪽으로 90리에 있으며 일진(一津)에 넘어
들어가 있다. 선조 31년에 이순신(李舜臣)이 진을 이곳으로 옮기니, 백성들이 진에 모여 농사를 지어 드디어 큰 진이 되었다. 숙종(肅宗)
7년에 진을 설치하였다. ○ 수군동첨절제사 1인. 마도진(馬島鎭) 옛 탐진(耽鎭)의 남쪽
50리에 있으며 둘레가 8백 70척이고 곡성(曲城)이 6개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 신지도진(新智島鎭) 남쪽으로 1백리에 있으며 이진(二津)에 넘어 들어가 있다. 숙종 7년에 진을 설치하였다. ○ 수군만호
1인. ○ 청해진(淸海鎭) 완도에 있다. 당 보역(寶曆) 연간에 당나라 사람이 신라의
변방 백성을 많이 약탈하여 노비로 삼으니, 흥덕왕(興德王)이 장보고(張保皐)를 대사(大使)로 삼아 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청해(淸海)에서 중국의
약탈하는 사람을 방어하였다. 문성왕(文聖王) 8년에 장보고가 원수를 갚았으나 왕은 여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 진을 근거로 하여 반란하니
13년에 진을 파하였다. 청산진(淸山鎭) 옛날에는 별장을
설치하였다. 【창고】 창(倉)이 3개 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목장】 신지도(薪智島)ㆍ고금도(古今島)ㆍ조약도(助藥島)ㆍ완도(莞島) 이상
네 곳은 폐지하였다. ○ 단종(端宗) 원년에 계점곶(界岾串)에 토비(土肥)를 주어 풀이 잘 자라게 하여 목장을 만들었다. 목장 둘레는
90리이다. 【교량】 석교(石橋)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작천교(鵲川橋) 북쪽으로 20리 병영 아래에 있다. 배전각홍교(拜箋閣虹橋) 북쪽으로 30리에 있다. 【단유】 청해진(淸海鎭) 신라 사전(祀典)에 이르기를, “청해진은 조음도(助音島)에 있다.”고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묘전】 탄보묘(誕報廟) 고금도(古今島)에 있으며 선조(宣祖)
정유년에 도독 진린(陳璘)이 건축하였고 중종(中宗) 신축년에 게액(揭額)하였다. 관우(關羽) 경도(京都) 동묘(東廟)에 보라. 진린(陳璘) 자는 명작(明爵),
호는 용애(龍崖)며 광동(廣東) 사람이다. 정유년에 수군도독으로서 왜구를 정벌하였다. 등자룡(鄧子龍) 풍성(豐城) 사람이며 무술년에 부총장(副摠壯)으로서 왜구를 정벌하다가 남해에서 전사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70세였다. 이순신(李舜臣) 아산(牙山) 편에 보라. 이상의 세 사람은 숙종 경인년에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