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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19. [역경의 열매] 서봉남 (1-11) “너의 달란트가 무엇이냐” 꿈속 음성에 화가로
인생의 방향을 바꾼 두 번의 꿈이 있다. 무의식 상태의 꿈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첫 번째 꿈은 1970년 2월 4일. 그러니까 기자생활을 하던 26살 때다. 밤에 잠을 청하자 이내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하얀 띠가 내려와 그 띠를 붙잡았고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하늘에 닿았을 때는 찬란한 빛이 눈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황금색으로 물든 금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건물 앞에 백발의 노인 아브라함이 한 손으로 커다란 지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을 흔들며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잠을 깼다. 자연스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고 무릎을 꿇고 베개맡에 엎드렸다. 베개는 눈물로 얼룩졌다. 때마침 교회당의 새벽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교회로 달려갔다. 기도하는데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며 머리 위로 '퐁'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이 상쾌했고 사탄 마귀가 몸에서 빠져 나갔다는 것이 느껴졌다. 죄 짐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6년 뒤 나는 또 하나의 신기한 꿈을 꿨다. 화가로 살게 된 계기가 된 꿈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전투기에서 기관총을 쏘듯 총알이 주위에 쏟아졌고, 순간 불어온 회오리바람이 나를 공중에 띄워 깊은 절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아래를 보니 뾰족한 바위들이 노려보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아 초조하게 떨며 떨어지는데 갑자기 커다란 두 손이 나타나 나를 받아주었다.
그때의 황홀경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를 손으로 받아준 분을 똑똑히 봤다. 30대쯤 돼 보이는 허약하게 생긴 청년이었는데, 얼굴에 광채가 발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 발밑에 넙죽 엎드렸다. 이유 모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눈물 콧물이 예수님 발등에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봉남아, 너의 달란트가 무엇이냐."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허리의 창 자국과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셨다. 그때 한 어린아이가 노란 그릇이 있는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왔다. 예수님은 수저로 무엇인가 젓고 계셨다. 예수님은 내게 한 모금의 물을 먹여 주시면서 "이제부터는 너의 달란트를 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꿈에서 깨어보니 6년 전 꿈처럼 내가 무릎을 꿇고 베개맡에 엎드려 있지 않는가. 신기했다. 시간대도 같았다. 교회의 새벽종소리가 들려왔던 바로 그때다. 곧바로 교회에 달려가 달란트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그땐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너의 달란트가 무엇이냐"는 그 음성은 며칠 동안 귓전에 맴돌았다. 일주일 뒤 새벽기도회에서 갑자기 "기독교미술, 기독교미술"이란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랬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다니던 직장을 사직했다. 그리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갈 계획을 세웠다. 1977년, 33살 때다. 예수님께서 33세까지 공생애를 사신 것을 생각하며 새 각오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 [역경의 열매] 서봉남 (1) "너의 달란트가 무엇이냐" 꿈속 음성에 화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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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서봉남 (3) 쌀독 빌 때마다 "그림만 그려라" 주님 도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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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크리스찬신문, 월간 미술과생활, 월간 미술 기자 및 편집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국제예술올림픽 유화 심사위원장 △국내 개인전 16회, 국외 개인전 7회, 대한민국 회화제 등에 400여회 출품 △서울 연동교회 안수집사 △저서 '기독교미술사' '성화해설' '서봉남작품집' 등
***[역경의 열매] 서봉남 (2) 주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제주 한라산기도원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충격이었다. 한 가족의 가장이기 때문에 화가라는 직업의 선택을 무척이나 주저했는데 예수님을 만난 뒤 용기가 생긴 데 놀랐던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위해 기도원에 가려고 짐을 쌌다. 아내는 내심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기도원에 갈 거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얼른 "응, 한얼산기도원에 다녀올게요"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내가 탄 버스는 녹색들판 가운데로 뚫린 길을 달렸다. 산들바람에 앞으로의 인생도 이 바람처럼 시원하고 상쾌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한얼산기도원과는 다른 방향인 부산행 고속버스를 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부산까지 내려갔다. 어디든 어쩌랴. 기도드리는 그곳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실 것이니 말이다.
부산 용두산공원에 올라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부산에 처음 왔습니다. 아는 곳도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바다에 크고 작은 배들이 떠 있는 것을 보면서 문득 제주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주행 배에 탔다. 작은 호수에서 보트는 타보았지만 그렇게 큰 배를 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배 갑판에 나와 망망대해를 봤다. 미지의 세계는 희망찬 미래만을 안겨줄 것 같았다.
이튿날 아침 도착한 '한라산기도원', 옥빛으로 물든 하늘은 높고 맑았다. 투명한 햇살이 빛나는 남태평양 바다를 바라보면서 인생계획을 세우는 일주일 동안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또 한번 감사기도를 드렸다.
지난 30여년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던 간절한 소망을 이루지 못해 방황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나타나 직접 확실한 달란트를 확인해 주신 것에 더없이 감사하고 감사했다. 화가로서 사람들에게 유익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꿈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흥분됐다.
그동안 다른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 일들에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의지력까지 상실한 형편없는 내 모습에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원하던 '화가'라는 달란트를 확신해주시다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희망과 희열감을 느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본 기도원이었다. 하지만 그때 기도했던 일주일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땅에서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알게 해주었던 것이다.
기도원에서 나온 뒤 본격적으로 '기독교미술'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이미 아내와 아들, 딸 세 식구를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었다. 벌어놓은 돈은 많지 않았지만 아이들도 튼튼하게 자라고 있었고 미래의 삶에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으로 확신하니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화가로서 여러 계획과 새 달란트 실현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피 끓는 30대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기독교미술이었기에 강한 힘이 솟구쳤다. 더욱 강한 선과 색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면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창조행위, 이런 것들이 큰 감동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강한 신앙심을,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더욱 밀착시켜주는 원동력이 됐다.
하나님과 관계를 새로 정립해 가면서 '성화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던 화가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역경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3) 쌀독 빌 때마다 "그림만 그려라" 주님 도움이
"심심하지도 않아? 혼자 무슨 재미로…." 화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성서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시작한 후 혼자 조용히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명상하며 기도생활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화실에 들어오면 시간이 왜 그렇게 잘 가는지, 금방 저녁때가 됐다. 어떤 때는 밤이 지나 아침이 될 때도 있었고, 점심과 저녁을 먹었는지조차 모를 때도 간혹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아내는 쌀독의 쌀을 모두 긁어 아침상을 차렸다. 우리 네 식구가 점심부터 굶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작업실에 들어왔는데도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굶어도 괜찮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됐다.
무작정 작업실을 나와 아무 버스나 올라탔다. 버스 의자에 앉아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종점까지 왔다갔다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인간은 육의 양식을 쫓아가기 마련이지 않은가. 하지만 물질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영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저녁 늦은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저녁이 되니 낮에 힘을 얻었던 생각들은 어디로 가고 다시 맥이 풀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내가 환한 표정으로 저녁 밥상을 내놓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내게 아내는 "낮에 시동생이 어깨에 쌀을 메고 왔었어요"라며 고마워했다. 동생은 이상하게 우리 집에 가고 싶었고 뭐 사갈 게 없나 생각하다 쌀을 사왔다고 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에 즐거웠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어떤 때는 누군가 그림을 사러 오기도 했다. 어떤 때는 교회에서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시곤 했다. 하나님께서 수입이 없는 우리 가족에게 생활에 필요한 만나를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힘을 얻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졌다.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러니 매일 읽는 성경 내용들이 그동안 멀리 있는 스크린으로 보였던 게 바로 옆에서 실재하는 듯 살아 있는 말씀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영적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눈에선 마치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어떤 강한 힘이 뿜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성서 속 인물들이 순교를 하고, 감당했던 사역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임을 깨달았다. 작업에 몰두할 때는 잡음은 물론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전통적인 종교와 사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독교 미술이 융화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교리적인 영향으로 미술품들을 우상시하는 특성을 갖고 있어 기독교 미술에 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한국적인 기독교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모태신앙인으로 그동안 교회일이라면 우선 발벗고 나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새 달란트를 주시고 나서부터는 기독교 미술 공부를 해야 했기에 교회일보다 성서 그림 작업에 몰두하곤 했다.
화실 안에서 혼자 명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 단계 한 단계 차근차근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성장시켜 주셨다. 헌신하는 자세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성경 내용은 주인공 위주로 기록돼 있었다. 그래서 성서 외에도 주변 환경과 정세, 성서 속 역사에 관한 책을 많이 연구하다 보니 더딘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경은 사명을 가진 내게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와 기독교 미술작품을 한 점 한 점 완성해 나갔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4) "기독미술 불모지 한국을 깨워라" 15년만의 기적
기독교미술에 대한 공부를 깊이 있게 해보려고 여기저기 알아봤다. 전국 대학을 찾아보니 '불교미술과'는 있는데 '기독교미술과'는 단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는 수 없이 독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저곳 서점에 들러 기독교미술에 관한 서적을 찾았다. 하지만 관련 책이 없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도서관이나 서울 청계천 인근 헌책방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기독교미술'이란 책이나 글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옛 직장인 신문사에도 들러 창간호부터 샅샅이 훑어봤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명화를 소개하는 글은 있었지만 기독교미술에 대한 기사나 서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이 때문이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본격적으로 기독교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미술에 관련되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자료를 구할 때면 뛸 듯이 기뻤다. 사진도 찍었다. 특별히 일본과 중국, 인도,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해외에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15년 뒤 드디어 '기독교미술사'(도서출판 집문당, 1994)라는 제목의 책을 국내 최초로 발간했다.
자료수집 과정에서 외국 자료가 필요할 때가 많았다. 경제력이 없는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찾아가게 하시고 자료를 마련해주셨다.
예를 들면 모 봉사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대회에 각 문화대표를 선정했는데 내가 화가 대표로 선정됐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모든 비용은 주최 측에서 부담했다.
일본에서 룸메이트는 남자 무용수 H선생이었다. 오전에는 회의를 하고 세미나 등 스케줄대로 진행하는데 H선생이 어느날 "서 선생님, 오늘은 세미나 빠지고 나하고 시내구경 갑시다. 갈 곳이 있는데…."
둘은 의견이 잘 맞았다. 세미나장에 가질 않고 뒷문으로 나가 택시를 탔다. H선생은 일본에 몇 번 와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 어느 극장 앞에서 내렸는데 "서 선생님, 내가 갔다 올 곳이 있으니 지금부터 각자 시내구경하고 2시간 뒤 극장 앞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낯선 일본 땅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한데 건너편에 헌 책방 골목이 있어서 그곳을 둘러보게 됐다. 절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터져 나왔다. 바로 많은 책 속에 '그리스도미술'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 관련 책을 열 권이나 샀다.
1987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고 첫 문화교류가 있을 때 방송과 문학, 미술, 음악, 무용 등 나를 포함한 예술가 20여명이 초대를 받았다. 대우그룹에서 비용을 지원해 20일 동안 중국을 방문했다. 시안 등에서 경교비(景敎碑)를 비롯해 13세기 기독교미술 자료를 수집했다.
이 무렵 28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예술올림픽이 인도 델리에서 열렸다. 한국대표로 심사를 한 뒤 여유시간에는 인도의 기독교미술 자료를 수집했다. 시간이 부족해 미비한 점들이 많았는데, 하나님께서 이후에 두 번을 더 가게 해 주셨다. 인도미술협회 초청이어서 비용 한 푼 들지 않고 기독교미술 자료를 구했다.
이런저런 일로 32개국을 다니며 기독교미술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교회에 기독교미술의 필요성을 알리는 글들을 교계 신문 잡지에 기고했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5) 1984년 4000호 大作 '영광' 2년 반만에 완성해
1981년, 3년 뒤면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100주년, 가톨릭이 들어온 지 200주년이 된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이를 기념하는 작품을 제작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작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아뿔싸, 작품 제작비용이 집 한 채 값이라니…." 비용 문제로 고민하고 기도하다 결국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작업을 하기로 했다.
마침 남산 밑 서울 후암동에 있던 학교 하나가 수색 쪽으로 이사를 가면서 교실이 비어 있었다. 역사자료부터 수집했다. 프랑스에 그림 재료도 주문했다. 주문한 재료가 6개월 만에 도착해 작업이 지연되기도 했다.
작품 제목은 연구 끝에 '영광'이라 지었다. 주제를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누었다. 과거는 조선시대 의상으로 순교자들을 표현했다. 또 미래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한국으로부터 세계로 뻗어가는 내용으로 그렸다. 현재 부분은 남과 북의 5000만 인구를 500명의 합창단으로 배치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 내가 학교 강사를 맡고 있었기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케치할 수 있었고 500명의 합창단을 그려낼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암울한 과거를 밝고 투명하게 그리고 싶었다. 한국교회가 희망의 빛이 되길, 고통과 환란 속에서도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뚝 일어서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1984년, 신앙고백적인 작품을 2년 반 걸려 완성했다. 4000호의 대작 '영광'을 부활절 아침에 완성하고 마침내 사인을 했다.
'영광' 작품이 KBS TV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방영됐다. 방영 후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 작품을 기증해주길 원했다. 모 이단 교회에서는 집 네 채 값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가 몇 년 동안 그린 성화를 이단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대형 작품이라 국내에서는 전시할 공간이 없었고 창고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그 흔한 발표회도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20년쯤 지난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한국 정부의 문화부에 연락하니 미술협회를 소개해줬고 미술협회에서 내 주소를 알려줘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한국인인 그 젊은 청년은 프랑스 정부에서 왔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자신은 전통 있는 루브르박물관 대학을 나왔으며 파리 인근에 있는 국립 에브리 미술관 측의 심부름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에브리 미술관 관장이 어느 날 60 평생 처음 보는 훌륭한 동양 성화를 봤다며 그림책을 보여주고는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당신나라 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자세히 살펴보고 "한국사람 작품이 맞다"고 답하니 "프랑스 정부 이름으로 초대할 테니 한국에 가서 찾아보라"고 했다. 그 청년은 실제 초청장까지 가지고 왔다.
2006년 4월 1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국립 에브리 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성대하게 가졌다.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과 공무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사람은 나를 포함해 주프랑스 대사 부부와 통역 등 4명뿐이었다. 이 전시는 미술관 측의 요청으로 같은 해 12월 30일까지 연장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국내에 소장되지 못했다. 전시회를 장기간 열어주는 바람에 지금까지 프랑스 국립 에브리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6) 형편 어려워 '畵家의 꿈' 접은 이들 위해 미술강좌를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릴 때마다 그림 그리는 것이 곧 '내 마음의 일기'라는 생각을 갖곤 했다.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수련하고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깨닫게 되길 바랐던 것이다.
나도 30대 초반에 비교적 늦게 그림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가졌으나 환경이 여의치 못해 미술을 전공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생각을 갖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달란트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다. 또는 알고 있어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주어진 재능을 발휘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까지 도달하게 됐다.
우선 그림이라는 달란트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다. 여기에다 이웃의 행복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사는 의미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하니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힘이 미약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원조차 없었다. 며칠 생각하고 연구한 끝에 '미술 강좌'를 생각해 냈다.
1980년대 초 기독교방송국 안에는 영어강좌를 하는 문화센터가 있었다. 그곳 원장에게 이 같은 계획을 말하니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곧바로 교실 2개를 마련했고 '미술 문화 센터' 강좌를 개설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20명씩 모집 광고를 신문에 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놀랍게도 200명 이상의 수강생이 몰려들었다. 화가의 꿈을 여러 가지 형편으로 인해 접었던 사람들, 미대를 가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꿈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2년 과정으로 서양화반(소묘, 수채화, 유화)과 동양화반(사군자, 수묵화, 채색화)을 운영하며 강사를 초청했다. 나도 서양화반 대표 지도 교수로 유화를 가르쳤다.
서양화반은 소묘과정에서 6개월 동안 석고와 정물을 주로 그리고 수채화 과정에서 정물과 꽃 등을 6개월 동안 배웠다. 1년 동안은 유화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동양화반은 사군자과정에서 1년을 수업한 뒤 수묵화와 채색화 과정으로 나눠 1년을 교육받은 뒤 수료할 수 있었다.
수강생은 30대에서 6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는데 미술 강좌가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 주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어린아이처럼 감격하며 고마워하는 이들과 만남을 통해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 할 사명을 느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새벽 일찍 집을 나선 학생도 있었고 하루 전에 서울로 올라와 여관에서 자고 다음 날 수업을 마친 뒤 내려가는 학생도 있었다. 성인 대상 미술문화센터는 대성공이었다. 큰 보람을 느끼면서 그림을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언론사에도 문화센터가 생겨났다.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도 이런 강좌가 생겼고, 구청이나 동사무소 등에서도 크고 작은 강좌를 진행했다. 그러다보니 미술애호가에서 더 나아가 직접 그림을 그리며 창작까지 하는 인구가 크게 늘어나 사회 이슈가 될 정도였다.
그동안 그림을 가르친 학생이 2000여명에 달한다. 그중 100여명의 학생들은 늦게나마 전업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선생으로서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7) 귀와 입만 있고 눈은 홀대 받아온 한국 기독교
기도원에서 ‘기독교미술’에 대한 소명을 받은 뒤 관련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 대학에 기독교미술과가 없는 데다 관련 서적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 공부하기 무척 힘들었다.
어느 날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출석교회의 교단 목사님과 신학교 교수님들이 말씀해 주시는 유럽교회에 관한 것이었다.
목사님과 교수님에 따르면 유럽은 예로부터 신학생에게 말씀(문학)과 찬양(음악). 예배(미술) 등 3대 예술을 공부시켰다고 했다. 중세 교회에는 말씀을 전하는 교육전도사실, 찬양을 책임지는 성가대실, 교회환경과 미술을 담당하는 공방이 있었다. 특별히 음악과 미술 책임자는 ‘준성직자’ 자격을 주었다고 하셨다. 현재도 가톨릭이나 불교에서는 성화를 그리는 화가는 성직자처럼 대접해준다는 것이다. 목사님들은 한국의 대학에도 기독교미술과가 신설돼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전공교수가 부족해 쉽지 않다는 점을 무척 아쉬워했다.
대부분 종교는 예배의식에 3대 예술을 활용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도 ‘단을 쌓고’라고 간단하게 쓰여 있지만 그것은 그냥 돌 몇 개를 쌓아놓고 제사 드린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드려 공사를 했고, 많은 치장을 했으며, 그림을 그린 다음에야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한국은 200년 전 가톨릭이 전래되고 130년 전 개신교가 전래될 때 사실 눈에 보이는 유형예술, 즉 미술을 홀대했다. 무형예술인 성경(문학)과 찬송가(음악)만 신학생들에게 가르쳤고 미술(유형예술)이 빠진 상태에서 신학교육을 진행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세계 각 국가에서 3대 예술 중, 음악과 문학은 ‘문화재’라고 하고, 미술은 ‘보물’이란 이름을 붙인다. 미술은 없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남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200여 년 동안 귀(음악)와 입(말씀)으로만 전래돼 아직 국가적인 보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은 중요한 눈(미술)이 빠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보물은 단 한 점도 없는 상황이다. 지금부터라도 신학대학 등에 기독교미술과가 설치돼야 100년 후 기독교 보물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게다가 미술품을 우상시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 미술을 활용하도록 말씀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다만 형상(조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한국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우상이라고 잘못 가르친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미술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91년, 어느 목사님이 만나자고 해 갔더니 ‘한국예술신학교’를 설립하려 하는데 ‘기독교미술과’를 설치하자고 제의했다. 너무 반가웠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준비해 놓았던 자료를 토대로 4년 과정의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또 강사를 배치해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미술과’를 신설했다. 학생모집 광고가 나갔는데 음악과와 문창과 등은 정원이 꽉 찼으나 미술과는 한참 미달이었다. 학생 수보다 교수 수가 더 많았다. 하지만 교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다.
학생이 점점 늘었다. 그래서 서울 근교에 폐교된 특수학교 건물로 이전해 제법 예술학교 면모를 갖춰 갔다. 그러나 학교 설립 5년 뒤 안타깝게도 문을 닫게 됐다, 무인가 예술신학교라는 지적에 기독교미술과 학생 5명 배출을 마지막으로 폐교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8) 아내 20여년 투병… 부부의 쉼없는 기도로 극복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화가로 전업할 때 어느 정도 힘들 것이라고 각오는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생활고에다 아내의 병 뒷바라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내는 40대부터 고혈압과 위장병으로 병원 출입을 하곤 했다. 50대에 들어서는 만성신부전증으로 혈액 투석을 하면서 본격적인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이불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옆에서 곤히 잠들었던 아내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도 혼수상태가 된 아내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던 일이 생각났다.
아내는 구급차 안에서 심하게 몸부림쳤다. 힘들어하는 아내 곁에서 “하나님, 이 풍랑을 거두어 주세요”라고 지그시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며칠 뒤 고른 숨을 쉬며 편안한 표정이 된 아내와 함께 병원 문을 나섰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어떤 때는 아내의 몸이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워졌다. 이러다간 아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연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를 체험했다. 교만해지려는 나를 하나님은 연단을 통해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별히 ‘기독교미술’이란 사명에서 이탈하지 말라고 고난을 주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아내가 아파할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아팠다. 온 신경이 곤두설 때도 있었다. 아내는 유방암 때문에 절제수술을 받았다. 아내의 계속되는 투병생활에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안정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성경을 읽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평안해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론 땀으로 흠뻑 젖은 아내를 닦아주면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친척과 교회 식구들은 심방을 왔다. 하지만 심방도 그때뿐이었다. 투병생활이 오래 지속되니 몇 년 뒤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었다. 제대로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 학원을 찾아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노인 환자들과 실습을 하면서 아내를 더욱 편히 돌봐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정성어린 간호에도 아내는 점점 청각을 잃어갔다. 설상가상 뇌출혈까지 겪었다. 아내의 말이 조금 어눌해졌다.
하지만 아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인한 신앙심 때문인지 더 이상 병이 악화되지는 않았다. 우리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돌봐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아내는 1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을 하고 있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잘 지낸다. 아멘, 할렐루야.
아내의 투병생활이 20여년 계속됐다. 고생은 했지만 우리 부부의 믿음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귀한 선물이란 것도 깨달았다.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 체험했다. 고난이라는 영적 세계에 몰입한 것이 작품의 영감을 얻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특별히 인간에게 심한 고통이 오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본능이란 것도 알게 됐다.
많은 치료비 때문에 법원에서 파산선고를 받았다. 어려움이 연속적으로 올 때는 광야에 혼자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지 못한 미안한 마음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충동이 잦았다. 하지만 성화 그리는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명감에 그만두려는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고난 가운데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고난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성경 말씀에 기초한 성화를 그리겠다는 꿈을 이뤄나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9) 전시회 못 여는 가난한 화가들 위해 미술관을
작품활동을 하면서 주위 화가들에게 소원이 무엇인가 묻곤 했다. 그러면 여류 화가들은 이런저런 소원이 많았다. 헌데 놀랍게도 남자 화가들은 대부분 개인전 한번 여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전시회 열기가 쉽지 않다는 하소연이었다.
‘화가로서 독창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전시회를 갖지 못한다면 평생 무명화가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나는 만약 내게 물질이 주어진다면 미술관을 개관해서 형편이 어려운 화가들에게 무료로 초대전을 열어 주어야겠다는 기도를 매일 드리게 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 갑자기 후원자를 만나면서 미술관을 실제 운영하는 길이 열렸다. 사연은 이랬다. 서울 신정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가 시려 집 근처의 치과를 찾았다. 치료하던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뭐하는 사람이십니까”라고 물었다.
“화가입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반가워하며 자신도 중학생 시절 화가가 꿈이었으나 부모의 권유로 의사가 됐다고 했다. 성함이 ‘노수영’인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바로 치과를 개업해 20년이 흘렀다고 했다.
우리는 이내 친구가 됐다. 또 거의 매일 점심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됐다.
어느 날 식사를 막 끝냈는데 노 원장이 “서 화백님, 시간 있으세요”라고 물어왔다.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병원을 짓고 있는데 구경 가자”고 해 같이 가게 됐다. 가보니 의원에서 300m쯤 떨어진 길가에 6층짜리 건물 내부를 꾸미고 있었다. 1층은 은행, 2층은 카페가 들어올 것이고, 3∼6층은 치과종합병원이라며 한 층 한 층을 소개했다. 노 원장은 치대 졸업 후 개업하면서 치과종합병원을 세우는 게 꿈이었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20년 만에 그 꿈을 이루는 것이라며 감격해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헌데 이야기 도중 내가 “제 꿈은 작은 미술관을 만들어 어려운 화가들에게 전시회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노 원장에게 말했다.
이튿날 평소처럼 점심이나 먹자는 전화가 왔다. 점심 주문을 해놓고 노 원장은 “서 화백님, 나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라고 말했다.
“아니, 어디 편찮으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아뇨. 미술관 때문에…”라고 근심하듯 말했다.
노 원장은 작심한 듯 “꿈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1층 은행과 2층 카페의 계약을 해지했고 내게 “1층과 2층을 미술관으로 꾸미고 관장이 되어 꿈을 펼치라”고 했다.
적잖이 놀랐다. 집세를 낼 형편도 안 된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노 원장은 “무료로 빌려드릴 테니 자유롭게 꿈을 펼치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꿈인지 생시인지…. 볼을 꼬집어 봤다. 생시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일단 노 원장과 구두로 다짐을 받았다.
첫째, 지금까지 재벌들이 새 건물을 지을 때 사회 환원의 의미로 문화공간을 만들었으나 수입이 없으면 오래 가지 않아 문을 닫았다. 따라서 문화사업은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해야 한다. 노 원장은 “오래 하겠다”고 말했다.
둘째, 문화사업은 비영리로 해야 한다. 그것도 “좋다”고 했다. “영리사업은 위층 병원에서 하니까 괜찮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술관 이름을 ‘예가족’이라고 짓고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이후 미술관 관장으로 11년 동안 재직했다. 이곳에서 무료로 전시회를 연 화가는 300여명에 달한다. 이런 공로로 2011년 한국미술협회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10)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35년만에 聖畵로
세상에 알려진 기독교 화가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지오토, 프란체스카, 그뤼네발트, 티치아노, 루오, 렘브란트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 성화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는 렘브란트다.
하지만 렘브란트도 성서 내용 중 창세기 등 구약의 앞부분만 그렸다. 더욱이 그는 성화 그리는 것을 중도에 포기했다. 성화만 그려서는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성화만 그리는 화가는 역사적으로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더욱이 성경 말씀 전체를 모두 그린 화가는 없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못한 그 일을 보잘것없는 내가 도전하고 있다니…. 나 스스로도 놀라울 뿐이었다.
성화를 그리는 많은 화가들은 성서 속의 등장인물과 비슷한 모델을 선정해 작업을 했다. 성서 인물들을 초상화처럼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1000년 전이나 현재나 미래 1000년 후의 사람이 봐도 같은 감흥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는 성서의 인물과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종교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 신앙심이 더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성화를 그릴 때 그 대상의 마음을 읽어내려 노력했다. 서구인의 사실적인 얼굴이 아닌, 동양인의 얼굴로 바꾸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예수님의 심정, 그때그때의 마음을 반(半) 추상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30대 초반부터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왜 작품을 발표하지 않느냐는 말을 주위에서 여러 번 듣곤 했다. 작품이 마무리되면 구입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작품의 구성과 내용이 연속적으로 연결돼 있는데 만약 전시회 등을 해 작품이 부분적으로 팔리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 20년 만인 1995년 나는 전시회를 가졌다.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책무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신약성서 중에 예수님의 일생만 추려 작품을 발표했다. 그런데 예상대로 염려한 일이 생겼다. 몇몇 작품이 팔리면서 마치 중간에 이가 빠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신약의 내용을 그릴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 과정을 한 폭 한 폭 나눠 그렸다. 구약은 등장인물들이 방대했다. 때문에 주요 인물 위주로 작업을 하면서 주요 사건의 줄거리를 한 폭의 그림 속에 그려냈다.
성화의 재료는 100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하다는 유화로 제작했다. 구약 창세기부터 그리기 시작해 신약의 끝부분 요한계시록까지 작품을 완성하니 2102년을 맞으면서 3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삶에 있어서 자유로움을 찾은 것은 예수님을 만나 ‘기독교미술’이라는 사명감으로 창작생활을 할 때였다. 돌이켜 보면 그림은 ‘정신의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사명감으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기쁨이 충만했다. 주께서 값없이 사랑을 주셨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더욱 실감나게 그렸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역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미술이라는 달란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림은 만국 공통의 언어다. 글을 모르는 문맹자, 또한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봐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평범한 나를 택해 그림을 그리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고난은 꿈을 이룬 과정이었다고 간증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서봉남 (11·끝) 성화 한폭 한폭… 70인생 믿음의 자화상입니다
지난 5월 1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서봉남 성화 초대전’이 열렸다. 한국성시화환경운동본부와 미술등록협회가 공동 주최한 초대전 개막식에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님은 교회 창립 55주년을 맞아 귀한 전시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고 격려해 주셨다.
지난 전시회의 특징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77점의 작품을 한 개인이 제작했다는 점이다. 무려 35년이 걸렸다. 한마디로 그림으로 볼 수 있는 성경이 나온 것이다. 작품 화풍은 순수함과 간소함, 황토를 발효시킨 듯한 갈색 톤의 된장국 색채, 한국 특유의 투박함, 백의민족 정신 등이 주된 내용이다.
방명록엔 격려의 글들이 잇따랐다. ‘장장 35년이나 걸려서 완성하셨다는 성화, 자랑스러워요’ ‘열정적 성화 감동스러웠습니다’ ‘한마디로 놀랍습니다. 성화 작품은 상상을 초월한 명작이며 감동 그 자체입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탄생시킨 작품들 존경합니다’ 등의 글귀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20일 동안 열린 초대전에 3만여명이 몰렸다.
나는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전통과 미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환희를 맛봤다. 종교적인 내용과 향토적인 그림, 그리고 삶과 자연, 한국적 정서와 풍광, 바쁜 현대생활 속에서의 편안한 화가의 생활, 다행히 미술은 혼자 하는 작업이며 이런 것들이 체질적으로 나와 맞아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성경 전체를 그리는 꿈을 이뤄서 행복했다, 특별히 이 세상에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그중 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에 감사했다. 특별히 기독교 미술가로서의 직업이니 더욱 그랬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성장했고 그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삶을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고 있다. 이제 지난 삶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고자 한다.
기독교 화가로서 정말 우둔하고도 끈질기게 매진했다. 서른셋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한 어린시절 화가의 꿈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변함없는 신앙생활, 달란트 하나만을 믿고 밀고나갔던 것, 고희가 된 지금 생각하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기독교 화가’라는 직업으로 반평생을 살았다는 것이 행복하다. 경제적으로 내내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그때그때 채워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마음속에 70%쯤 나에게 원하는 그 무엇이 들어있을 때가 제일 알맞고 30%쯤은 비워놓아야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머지 30%를 채우려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행복은커녕 더 불행해지는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다.
나는 사는 동안 30%의 부족함으로 살아 왔고 그것이 또한 마음 편하고 행복했다. 남은 생애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또 보잘것없는 제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신 국민일보 독자 여러분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이 땅에서 살면서 기독교 화가의 꿈을 이루어서 행복하다. 남은 길도 변함없이 후회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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