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 사이 글발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동안 자기검열의 수렁에 빠져서 기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멈칫하다보니 입이 얼어붙었었다. 그런데 말과 글은 마음 아닌가? 아무리 지성과 상상력, 글재주까지 뛰어나도 마음이 위축되면 말을 하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한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무엇인가에 위축된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 아닌가? 아니 벗어나라고 강권하는 글이다.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말문이 열렸다.
처음 책을 잡고 십여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작가가 어린 시절 남자 친구와 그 일당들에게 윤간을 당한 고백은 상업적 퍼포먼스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고문 형사가 여성 시국사건 혐의자를 성추행했던 사건이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니까 강간이다. 공권력이 살아있는 신성한 공간에서 말이다. 그 사실을 변호사에게 말해서 바깥사람들이 경찰서 안에서 성고문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형사가 묻는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려 할 때 성추행했으니까 분명한 성고문이다. 여성 경찰관이 고문할 일도 없겠지만 여성이 남성을 성고문한 예는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인권 문제만이 아닌 페미니즘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때도 군부 정권에 부역하는 보수 언론들과 동조하는 사람들은 운동권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다고 비난했었다. 지금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중간에 힘들 때가 있었다. 책을 덮을까도 망설였다. 작가가 책에서 다루는 영화나 소설들이 내가 보거나 읽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임에서 함께 얘기하려면 읽기를 멈추는 것은 곤란했다. 계속 읽었다. 이번에는 이해하고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그냥 느끼기로 했다. 그게 도움이 됐나? 뒤로 갈수록 작가의 처음 했던 고백이 진실함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쁜 페미니스트라니? 세상에서 진실을 말하면 진실을 덮으려 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억압하는 세력이 항상 있다. 하지만 그들도 진실을 완전히 덮지는 못한다. 그들의 수법은 말하는 사람의 도덕성을 긁어서 훼손한 다음 진실을 말한 사람의 의도를 묵살하고 진실 자체의 신빙성을 망가뜨리는 수법을 쓴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세계 공통이고 역사적으로 꾸준했다. 그래서 작가는 진실을 말하려고 할 때 나쁜 사람이 되라고 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미국 대선이 있었다. 결과는 처음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첫 여성 대통령을 기대했었고 나는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인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야 약소국인 우리나라가 덜 힘들지 않을까 해서 힐러리를 기대했었다. 힐러리가 진 것은 힐러리 말대로 유리천장 때문인가? 힐러리가 기득권층의 아이콘으로 보여서인가? 트럼프가 일자리 만들어준다는 말에 미국 국민들이 현혹되어서인가? 마이클무어 감독에 말에 의하면 모두 맞는 것 같다. 미국 남성 백인들은 지겨울 거라고 했다. 흑인이 8년간 대통령을 했는데 거기다 여성까지 대통령을 하면 미국 남성 백인들은 무엇이냐는 말이다.
이 책은 읽을수록 심각해진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을 읽으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거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와 몇 개의 대목만 골라서 함께 얘기해보자. 2016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