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넥센 히어로즈 4번 타자 박병호(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누군가의 성공담은 평범한 이들에겐 가장 소중한 삶의 희망이자 위로다. 사람들은 나만의 성공담을 꿈꾸고, 나 먼저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사실이다. 성공담은 ‘나도 언젠간 저렇게 되겠지’하는 기대를 심어주고, ‘지금 실패가 내일의 성공이 될 수 있다’는 위로를 제공한다.
하지만, 성공담은 판타지 영화가 아니다. 나무 위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차라리 성공담은 눈물과 환희, 좌절과 극복, 시련과 꿈의 특이한 잡탕이다. 실패를 딛고 성공을 맛본다는 건 진흙을 뚫고 꽃을 피우기보다 어렵다.
26살의 넥센 4번 타자 박병호는 늘 성공을 꿈꿨다. 고교 시절 4연타석 홈런을 치고, LG에 1차 지명자로 호명됐을 때만 해도 그는 이미 성공을 손에 쥔 사내처럼 보였다. 2005년 프로야구 개막전에 고졸 신인이 6번 타자로 출전하자 언론과 야구계는 그를 ‘성공한 야구선수’라고 평했다.
그러나 곧바로 10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2군으로 내려가자 박병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손에 쥐었던 건 성공이 아니라 허망한 기대와 그보다 허망한 야심뿐이었다는 것을.
‘2, 3년 안에 LG 4번 타자를 꿰찰 것’이라던 박병호는 프로 7년 차가 될 때까지 4번 타자는 고사하고 1, 2군을 맴도는 그저 그런 선수로 남았다. 실제로 박병호는 2005년 LG 입단 후, 한 시즌도 100경기 이상 출전하지 못했다. 규정타석은 항상 미달이었고, 타율 역시 1할대를 맴돌았다.
박병호는 LG 팬들에겐 ‘너무나 유명한 만년 기대주’였으나 ‘모든 이가 그의 이름을 알지만, 아무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프로 7년의 암흑기를 보내면서도 박병호는 항상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언젠가 기회가 찾아오겠지’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결국. 지난해 넥센으로 트레이드되며 기회가 찾아왔다. 올 시즌 박병호는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로 우뚝 섰다.
지금부터 펼쳐질 박병호의 이야기는 단순한 야구이야기가 아니다. 한 젊은이의 좌절과 고뇌, 그리고 실패를 교훈 삼아 성공가도를 달리기까지의 인생 기록이다. 박병호는 말한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짧지 않다"고.
올 시즌 개인성적이 대단히 뛰어납니다. 타격 전 부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요. 홈런, 타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도루까지 두자릿수 이상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야말로 ‘박병호 신드룸’이 한국 프로야구를 휘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과찬이세요. 저보다 뛰어난 선수가 정말 많아요. 저는 그 선수들 사이에 살짝 이름을 올려놓은 정도에요.
살짝 이름을 올려놨다라, 과연 그럴까요. 올 시즌 개인 기록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8월 20일 기준 홈런은 24개로 단독 1위, 2루타도 26개로 1위, 볼넷은 59개로 2위, 타점은 79개로 삼성 박석민에 이어 2개 차로 2위, 장타율은 5할6푼2리로 3위, 출루율은 3할9푼5리로 6위, 타율은 2할8푼1리로 20위, 도루는 11개로 공동 25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을 말하다가 숨이 다 찰 정도예요.
듣고 보니까 올 시즌 기록이 좋긴 좋은 것 같네요(웃음). 솔직히 요즘은 개인 기록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진짜 팀 순위만 생각하면서 뛰고 있습니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흔히 갖는 야구관이지요. 등에 새겨진 자신의 등번호보다 가슴에 새겨진 팀명에 집중하는 것. 올 시즌 병호 씨를 보면 개인보다 팀을 위해 뛴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하지만, 8월 7일 이후 넥센과 병호 씨 모두 활약이 다소 주춤한 게 사실이에요. 넥센은 7일부터 20일까지 3승 6패를 기록하고 있어요. 병호 씨도 최근 5경기에서 16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 중입니다. 페이스가 썩 좋다고 볼 수 없어요.
8월 들어 장타력이 살아나서 자신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7일부터 시작한 광주 KIA 3연전에서 김진우, 윤석민 선수를 만나고, 목동 한화전에서 류현진을 만나면서 좀 꼬이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최고 투수들을 차례로 만난 셈이죠. 후회하는 건 어차피 최고 투수들과 만났으니까 ‘못 쳐도 본전’이란 생각으로 편안하게 스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거예요. 4번 타자고, 가뜩이나 팀이 연패 중이라, 한방을 쳐야 한다는 부담이 심해지면서 더 부진했던 것 같아요. 8월 중순엔 뭐 (목소리가 작아지며) 완전히 맛이 갔죠(웃음).
일부 야구전문가는 “박병호가 올 시즌 처음 풀타임으로 뛰는 통에, 체력적으로 힘든 것 같다”는 말로 최근 부진을 평가합니다.
사실 (체력적으로) 힘든 건 있어요. 나름대로 2군 생활을 많이 했고, 낮경기 경험도 많아서 체력적으로 괜찮겠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확실히 1군은 다르더라고요. 8월 이후 체력이 떨어지니까, 타격 밸런스가 무너지고, 스윙 스피드도 조금 느려지지 않았나 싶어요. 스스로 그런 기분을 두 번 정도 느낀 것 같아요.
고교야구 4연타석 홈런의 주인공 성남고 시절 박병호. 그는 고교생으론 믿기 힘든 파워로 프로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았다(사진=박병호)
박병호는 괴력의 타자다. 힘이 세고, 손목이 무척 강하다. 프로에 간다면 시즌 30홈런 이상은 떼놓은 당상이다. - 2004년 성남고 감독 이희수 -
병호 씨, 야구는 언제부터 시작한 거예요?
초교 1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에 있는 광명 리틀야구단이 제 첫 소속팀이었습니다.
야구를 시작한 계기가 있어요?
그 당시 정부에서 체육 꿈나무를 육성하는 분위기였어요. 어머니께서 보시기에 형보다 저를 운동시키는 게 성격적으로 맞는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저는 당시만 해도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아이였거든요. 뭐, 시키는 대로 하기만 했는데, 해보니까 은근히 야구가 재밌더라고요(웃음). 그러다 4학년 때 리틀야구단이 해체하면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초교 야구부를 찾다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던 영일초교로 전학 갔어요.
그때 실력은 어땠어요.
리틀야구단에 있을 땐 창단 멤버라,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어요. 영일초교로 전학 와서도 4번 타자로 뛰었던 것 같아요. 아주 못한 것 같진 않아요(웃음).
초교를 졸업하고, 서울 영남중학교로 진학했어요.
초교 감독님이 영남중 감독으로 가시면서 자연스럽게 따라갔어요.
중학교 때부터 거포 타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생애 첫 홈런도 그때 친 겁니까.
아니요. 첫 홈런은 초교 때 기록했어요. 중학교 때도 곧잘 홈런을 친 것 같아요. 당시 잘 나가던 양천중 임효상(작고) 투수한테 홈런 쳤던 게 기억에 남아요.
사실 ‘박병호’란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린 건 성남고 때입니다. 원래는 경기고 진학이 유력했지요?
항간의 소문에 경기고 야구부는 회비를 안 낸다고 했어요. 부모님 부담을 덜어 드리고 싶어서 경기고로 진학하려 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이미 성남고 진학을 결정하셨더라고요.
2004년 4월 29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1회전 용마고와의 경기에서 고교야구 전국대회 사상 5번째로 3연타석 홈런을 쳤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틀 후 열린 16강 휘문고전 첫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치며 고교야구 사상 처음으로 2경기에 걸친 4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는 겁니다.
저도 기억이 나요. 용마고전에서 첫 번째, 두 번째 타석은 볼넷이었어요. 그러다 세 번째, 네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쳤어요. 다섯 번째 타석 땐 좀 욕심이 나더라고요. 스트라이크 존 바깥으로 빠지는 공을 억지로 끌어당겨서 홈런으로 연결했어요(웃음).
4연타석 홈런도 특별히 의식해서 친 겁니까.
저는 3연타석 홈런으로 기록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이틀 후 열린 휘문고전에서 홈런을 쳤지만, 그게 4연타석 홈런으로 이어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때 휘문고한테 져서 혼자 ‘씩씩’ 거리고 있는데, 대회본부에서 “4연타석 홈런 시상을 할 테니까 나오라”고 연락 와서 알았어요.
당시 프로 스카우트들 말을 들어보면 ‘고교생 심정수’였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힘이 장사였다는 뜻인데요.
저는 초교 때부터 힘이 좋았어요. 체구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컸거든요. 돌아보면 체구가 컸던 게 야구선수로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다른 아이들보다 야구 기술도 빨리 익힐 수 있었고. 어릴 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웨이트 트레이닝은 언제부터 시작한 거예요?
중학교 때부터요. 당시 제 또래 중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한 선수도 없었지만, ‘프로틴’ 같은 단백질 보충제를 먹는 선수도 거의 없었어요. 저는 우연히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알게 돼서 매일같이 1시간씩 근력 운동하고, ‘프로틴’도 꾸준히 먹었어요.
그렇게 운동하니까 효과가 있던가요.
다른 친구들보다 바벨을 들어도 30, 40kg은 더 들었어요. 중 3 때 벤치프레스 무게가 150kg까지였는데 그걸 번쩍 들고 했으니까요.
4연타석 홈런도 홈런이지만, 2004년 청룡기대회에서 성남고 우승에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당시 결승전 상대팀은 한기주가 버틴 광주 동성고였습니다.
고교 졸업반 때였어요. 그때 성남고 멤버가 꽤 좋았어요. 김민수, 김현중(삼성), 박가람, 박재성 등 한방 있는 타자들이 즐비했어요. 투수는 좀 약한 편이어서 청룡기 때 모든 경기를 역전승으로 장식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동성고와의 결승전도 역전승으로 우승했을 거예요.
그 대회에선 1루수로 출전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포지션은 포수였지 않나요?
네, 맞아요. 전 초교 5학년 때부터 포수로 뛰었어요. 고교 진학할 때까지도 포수였죠. 그러다 동기 김현중이 포수를 맡으면서 제가 1루수로 출전하곤 했어요. 고 1 때 투수도 해보고 싶어서 한 번 도전해봤는데 확실히 포수가 재밌더라고요(웃음).
‘고교 최대어’ 박병호, LG 유니폼을 입다. 1994년 청룡기대회 우승 후 성남고 선수단이 기념촬영하는 장면(사진=박병호)
박병호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최고의 타자다. 장래 LG의 4번 타자가 될 것이다. - LG 스카우트팀 -
‘거포 포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병호는 매력적인 선수였습니다. 고려대나 연세대, 한양대 같은 야구 명문대에서 군침을 흘릴 법도 했는데요.
그렇잖아도 신인지명회의에서 2차 2번 밑으로 지명받으면 고려대에 입학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2004년 5월 8일 LG의 1차 지명자 신분으로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지금도 날짜를 기억해요. 5월 7일이었어요. 청룡기대회를 앞두고 LG 유지홍 스카우트께서 학교에 오셨어요. 그때는 그분이 누군지 전혀 몰랐어요. 한창 운동하고 있는데 절 부르시더라고요. 대뜸 “나 LG 스카우트다”하시면서 이야기를 꺼내셨어요.
무슨 이야기였습니까.
“병호야, 오늘 난 너와 계약을 맺고 싶어서 찾아왔다. 솔직히 LG에서 나 말고는 다 휘문고 김명제를 원한다”고 하셨어요. (눈을 크게 뜨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가슴이 철렁? 왜요?
저나 부모님이나 LG팬이었거든요. LG에서 유 스카우트님 빼고 다 (김)명제를 원한다고 하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
그해 신인지명은 6월 5일까지 하게 돼 있었습니다.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LG와 두산은 2000년부터 신사협정을 맺어 먼저 선수와 계약하면 우선권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LG 스카우트가 찾아온 것도 병호 씨를 두산에 뺏기지 않으려고 먼저 찾아온 것일 수도 있었어요. 사실 LG는 2001년 이동현, 2002년 박경수와 우선 계약하며 두산을 허탈하게 만든 바 있습니다.
유 스카우트님이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하고 물으셨어요. 당시 아버지는 전북 익산에 계셨거든요. 제가 초교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말 부부셨어요. “아버지 당장 서울로 오실 수 있는지 여쭤보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께 연락 드리고 전 기분 좋게 운동하면서 아버지가 오시기만을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그날 올라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때 전 청룡기대회를 준비해 합숙하고 있었거든요. 친구들한텐 “저녁 먹고 온다”고 나가서 아버지, 감독님과 함께 유 스카우트님을 만났어요.
평소 가고 싶던 LG라, 무척 기뻤겠습니다.
정말 정말 좋았어요(웃음). 전 중학교 때까지 어떻게 프로에 가는 줄 몰랐어요. 그러다 고교 2년 위였던 박경수 선배가 LG 입단하는 거 보고 대강 알게 됐어요. 무엇보다 제가 정말 존경하던 박경수 선배의 뒤를 따라 LG에 입단한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어요.
성남고 시절 박경수는 병호 씨만큼이나 주목받는 유망주였어요.
박경수 선배 1년 위인 고영민(두산) 선배도 무척 잘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중 3 때 고 선배가 고 3이라, 함께 뛴 적은 없어요. 하지만, 박경수 선배와는 함께 뛰면서 바로 옆에서 플레이를 지켜봤죠. 정말 그때 박 선배는 ‘야구의 신’이었어요. 저학년생들이 우러러보는 스타였죠(웃음).
고교 선배 박경수와 한 팀에서 뛰게 됐다는 것도 기뻤겠지만, ‘라이벌’ 김명제 대신 LG의 낙점을 받았다는 게 더 기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사실 중학교 때부터 (김)명제와는 라이벌 의식이 있었어요. 중학 시절부터 프로 때까지 맞대결 성적을 따지면 제가 늘 졌던 것 같아요. 홈런 2개인가 친 걸 제외하곤 죄다 삼진으로 물러났으니까요. 프로 와서도 명제와 만나면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던 게 사실이에요.
당시 병호 씨가 꼽는 ‘라이벌’ 고교 타자는 누구였어요?
서울에선 없었던 것 같아요.
지방까지 합치면?
아무래도 수원 유신고 최정, 부산고 정의윤 같은 선수들이었겠죠. 그런데 그 선수들과 직접 경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특별히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LG한테 계약금으로 얼마나 받았지요?
3억 3천만 원이요.
꽤 큰돈이었어요.
적은 돈은 아니었죠.
계약금 문제로 옥신각신하진 않았겠어요.
아니요(웃음).
그럼요?
‘옥신각신’까진 아니고요. LG에서 처음에 계약금으로 3억 원을 불렀어요. 그런데 이희수 성남고 감독님께서 “그러지 말고 기분 좋게 3억 3천만 원 주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계약액이 조금 뛰었어요. 그때 저는 옆방에서 어른들 말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 아버지께서 제 방에 들어오시면서 물으시더군요.
뭐라고요?
“병호야, LG에서 3억 3천만 원을 이야기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해요. 정말 조금만 버티면 더 받을 수 있었거든요(웃음). 그런데 당시 제가 아버지께 드린 대답은 “아버지 무슨 소리세요. LG가 계약하자고 하는데, 빨리해야죠”였어요(웃음).
미래의 4번 타자 박병호의 등장, 그러나 엄혹했던 현실 LG 2군 4번 타자 시절 박병호. 그는 팀 동료 김상현과 함께 '2군 본즈'로 불렸다. 1군에선 죽을 쑤다가 2군만 가면 '배리 본즈'처럼 홈런포를 가동했기 때문이다(사진=LG)
박병호가 개막전 주전 1루수다. 이 선수를 계속 주목해야할 거다.
- 2005년 LG 이순철 감독 -
2005년 LG 입단 시 병호 씨를 주목하는 야구 관계자와 팬이 많았습니다. 모두 병호 씨가 ‘장래의 LG 4번 타자’가 될 것이라는데 의문을 나타내지 않았어요. 특히나 당시 LG 사령탑이던 이순철 감독의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저도 기대가 크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헛기침을 하며) 하지만, 프로는 확실히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었어요. 일단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2004년 11월 LG 마무리 훈련이 호주에서 열렸는데 거길 따라갔어요. 12월엔 재활조를 따라 미국령 괌으로 날아갔어요. 다음해 1월엔 호주 스프링캠프에 합류했고요. 2월엔 일본 오키나와로 날아가 후반기 캠프에 참여했어요. 고교도 졸업하지 않은 완전 애가 거의 4개월을 외국에서 보낸 셈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솔직히 숫자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요.
숫자에 대한 부담?
LG에 입단하고 (박)경수 형이 그러더라고요. “LG가 너한테 바라는 건 홈런 15개, 70타점”이라고요. 고교 때는 생각하면 70타점은 꿈에서도 나오기 힘든 숫자인데, 그걸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부담이 됐어요.
기대와 부담 속에서 2005년 시즌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개막전에 6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전합니다.
원래 주전 1루수였던 서용빈 선배님이 1군 엔트리에서 빠지면서 제가 개막전에 6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전했어요. 그때는 하도 긴장이 되니까 뭘 하는지도 모르고, 공만 보다 끝난 것 같아요(웃음).
결국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3타수 무안타로 부진했습니다. 이후에도 안타를 치지 못해 10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2군으로 내려갑니다.
그땐 꿈에 그리던 LG에 입단했다는 게 감격스러웠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은 부족했어요. 가뜩이나 1루에 서용빈, 최동수 선배가 버티고 있었기에 프로 2년 차까진 ‘도전’, ‘경쟁’같은 말은 정말 모르고 살았어요. 이순철 감독님도 저만 보시면 “웃으면서 해라, 되레 안 웃으면 2군에 보낸다”는 식으로 제게 용기를 많이 주셨어요. 돌아보면 그때도 ‘야구’의 ‘야’자도 모른 상태에서 프로에 뛰어든 것 같아요.
프로 첫해 79경기에 출전해 163타수 31안타 3홈런 21타점 타율 1할9푼을 기록했습니다. 19살의 루키치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해에도 타율은 1할6푼2리로 부진했다는 겁니다.
정말 프로는 고교야구와는 많이 달랐어요. 일단 제가 너무 많이 긴장했어요. 나이도 어리고, 상대하는 투수들이 죄다 TV에서 봤던 사람들이라, 다 유명하고 잘하는 투수들처럼 보였어요. ( 머뭇거리다 조용한 목소리로) 다들 알고 계셨어요. 제가 마인드가 약한 선수라는 걸. 여리다, 그게 맞는 표현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 하는 걸 보면 ‘마인드가 약하다’는 평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잘한다’는 소릴 듣고 커서 그런지 몰라도, 조금 부진했을 때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쉽게 상처받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랬어요.
과거 어느 야구인은 “부유하게 자란 탓에 세상 풍파를 잘 견디지 못한다”고 평하더군요.
그건 정말 그분들이 모르고 하신 말씀이세요. 집이 부유했다? 정말 오해에요.
오해?
이건 제가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요. 아버지가 줄곧 익산에서 일하시는 통에 어머니와 형 그리고 저만 서울에서 살았어요. 그때 세 식구가 살던 집 평수가 15평이었어요. LG에서 받은 계약금으로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집’이라는 걸 가져봤습니다. 상무 시절 박병호(사진=박병호 / 김수홍 작가)
2006시즌이 끝나고 입대를 선택합니다.
그해 6월인가 이순철 감독님이 사퇴하시고, 양승호 수석코치님이 감독대행을 맡으셨어요. 양 감독님은 절 3루수로 키우려고 하셨죠. “앞으로 3루수 수업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절 참 예뻐해 주셨어요. 그러다 시즌 막판 손목이 좋지 않아 2군으로 내려가려는데 양 감독님이 절 부르시더군요.
무슨 일로?
양 감독님도 그해 시즌이 끝나면 LG 감독에서 물러날 거라는 걸 아셨나 봐요. “병호야, 나도 올해가 마지막인데, 네게 뭘 해주고 싶다. 혹시 넌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니”하고 물으셨어요.
그래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가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군에 다녀와서 다시 도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양 감독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래 그럼 어딜 가고 싶니”하시더군요. 그래 “상무에 가고 싶습니다”했어요. 양 감독님께서 “알았다” 하시면서 2군 매니저님을 부르곤 “애 오늘부터 몸 잘 만들어서 상무갈 준비시키라”고 하셨어요. 양 감독님 덕분에 일찍 군에 갈 수 있었어요. 지금도 양 감독님껜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웃음).
당시 팀 사정도 입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그랬죠. 그때 LG 1루수였던 서용빈, 최동수 선배는 제 15년 선배였어요. 그즈음 LG 유니폼을 입은 마해영 선배는 16년 선배였고요. 그 선배들과 지금 경쟁하는 것보다 군에 다녀와 승부하는 게 좀 더 1루 포지션을 차지하기엔 수월하다고 판단했어요.
포수는 언제 그만둔 거예요? LG 입단 때만 해도 포지션은 포수였는데.
프로 들어오자마자 포수 수업을 받지 않았어요. 신인 때 경기 막판에 2, 3번 출전한 게 전부였어요. 그때 LG엔 ‘조인성’이란 걸출한 포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1루수 수업을 받았어요. 이순철 감독님도 “너의 타격을 살려주겠다”며 1루수를 적극 권장하셨죠.
사실 포수는 매우 고된 포지션이지만, 경쟁력을 갖추면 롱런이 보장되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1루수 전향이 섭섭하진 않았을까 궁금해요.
그렇죠. 포수는 한 번 자리 잡으면 10년은 ‘쭈욱’ 가죠. 요즘 우리 팀 포수가 펑크나면 코치님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래요. “강정호, 이택근이 있으니까 염려 없다”고요. 그럼 제가 그래요. “코치님, 저도 있거든요”(웃음). 지금 다시 포수 하라고 하면 못 하겠지만, 솔직히 포수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3번 이택근, 4번 박병호, 5번 강정호가 모두 포수 출신입니다.
또 있어요. 박헌도, 오윤 선수도 포수 출신이에요.
넥센이야말로 ‘포수 천국’이 따로 없군요(웃음). 야구계에서 흔히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포수 출신이 상대 배터리의 수를 잘 읽는다고요. 포수 출신으로서 실제 그런 것 같습니까.
그런다고들 하는데, 전 솔직히 지난해까지 그럴 여력이 없었어요. 당장 타석에서 투수 공 치기 바쁜데, 상대 배터리의 수까지 읽는다는 건 무리였어요. 그나마 상무에서 조금 좋아진 것 같아요.
![]() LG 1루수 경쟁을 펼치던 베테랑 3인. (좌로부터) 서용빈, 최동수, 마해영(사진=LG) |
병호 씨 야구인생에서 상무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오는데 60% 정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성격이 달라졌고, 군에 있으면서 지난날을 뒤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상병 때부터 2군리그에서 풀타임으로 뛴 게 큰 도움이 됐어요. 그때가 제 야구인생에서 첫 풀타임이었거든요.
맞습니다. 프로선수에게 풍부한 실전 경험만큼 중요한 성장촉진제도 없습니다. 병호 씨는 2008년 2군 북부리그에서 홈런과 타점 2관왕에 오릅니다. 상무에서 풍부한 경기 경험을 쌓았고, 성격도 변했습니다. 여기다 2군 북부리그 홈런, 타점왕 출신이었습니다. 많은 LG 관계자가 2008년 11월 병호 씨가 제대하자 “각성한 박병호를 기대하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하지만, 2009년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68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1푼8리, 9홈런, 25타점을 기록했어요.
(침착한 어조로) 역시 멘탈이 문제였어요. 타석에 설 때마다 늘 조급했어요. 대기 타석에서 ‘그래, 치러 가자’와 ‘어떻게 쳐야 하나’하고 생각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전 늘 후자였어요. (뭔가 생각난 듯) 박 기자님. 제가 타격폼을 자주 바꾼 건 아시죠?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특정 코치님을 거론할 생각은 없습니다. (표정이 어두워지며) 다만, 한 달에 한 번, 많으면 2주에 한 번씩 제 타격폼을 타격코치님 마음대로 바꿨어요. 하도 자주 바뀌다 보니 타격폼 수정에 대한 스트레스가 말도 못하게 심했어요.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표현하지 그랬어요?
물론 싫으면 싫다고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제가 살아남으려면 그분들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경기에 출전하려면 그분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야구계의 불편한 진실이지요. ‘선수의 생사 여탈권을 손에 쥔 지도자의 사적 감정이 개입될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 수도 없이 지켜봤습니다. 한국 지도자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저 선수는 내가 만들었다’는 이른바 ‘작품론’에 집착하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지도자분들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왜냐? 그렇게 지도받아서 잘하는 선수는 잘하니까요. 하지만, 전 아니었어요. 타격폼 수정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했고, 무엇보다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타석에 서면 늘 체크스윙을 하기 바빴어요. 저 정말 체크스윙 많이 했어요.
그 역시 잘 기억하고 있어요. 오죽하면 모 야구해설가가 “박병호 선수는 귀신이 뒤에서 잡아끄는 모양입니다. 매번 저렇게 배트가 나가다 멈추니 말이에요”라고 했겠습니까.
(한숨을 길게 내쉬며) 승부가 기울어진 9회 말 2아웃에 대타로 타석에 서곤 했어요. 보는 분들은 승패와 상관없이 부담 없이 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만약 그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나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글쎄요.
(어두운 표정으로) 그 경기를 저 때문에 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전히 저 때문에….
“야구를 그만두면…극단적인 생각마저 했다.” LG 시절부터 박병호(사진 좌로부터), 이택근(사진 맨 오른쪽)은 절친한 사이였다. 두 이는 넥센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다. 넥센에서 이택근은 4번타자 박병호에게 기회를 넘겨주기위해 희생번트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사진=LG)
올 시즌 우리 팀의 주전 1루수감은 많다. 그 가운데 박병호가 주전 1루수를 꿰차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스프링캠프에서 몸놀림만 본다면 박병호가 주전 1루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2010년 LG 박종훈 감독 -
2010시즌을 앞두고 LG 박종훈 감독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당시 박 감독은 “올 시즌 LG 주전 1루수를 누구로 예상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박병호가 주전 1루수를 꿰차는 게 팀을 위해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박 감독은 수차례 병호 씨의 출전기회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발 나아가 4번 타자 기용도 약속했습니다. 실제로 이해 병호 씨는 4번 타자로 48번 타석에 섰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쉬움의 연속이었어요. 그해 78경기에 출전해 타율 1할8푼8리, 7홈런, 22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삼진은 여전히 많았고, 볼넷은 적었어요. 그런 병호 씨를 LG 팬들은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장 속상했던 말이 무엇이었나요?
가장 속상했던 말은…전 사실 프로 2년 차 때부터 인터넷을 보지 않아요. 선수가 잘했을 땐 칭찬하는 글도 있지만, 못했을 때 어떤 욕이 쏟아질지 잘 아니까요. 정말 큰 충격을 받은 건 경기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누군가 바로 앞에서 “병호야, 2군 가야지”하는 말이었어요. 가족을 위협하는 이야기와 정말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야구와 선수에 대한 애정이 깊은 건 이해하지만, 간혹 ‘이분들이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남기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한숨을 내쉬며) 인터넷 악성댓글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구단의 압박은 없었습니까.
구단의 압박이라기보다 제가 1차 지명자다 보니까 뭔가 보여줄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해야만 했어요. 그런 스스로 만든 압박감이 굉장히 심했죠.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이 사랑하던 일과 멀어진 이들이 많습니다. 야구선수뿐만 아니라 많은 직장인이 업무 스트레스와 부담을 이기지 못해 직장을 그만둬요. 병호 씨는 어땠습니까. 야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
당연히 있었죠. 정말 많았어요. 말씀드려도 되나 모르겠는데…(크게 숨을 들이켜고서) 전 야구를 그만두면…죽으려고 했어요.
네?
(눈이 붉어지며) 야구를 그만둔다 생각하면 초교 1학년 때부터 절 뒷바라지 해주신 부모님께 너무 죄송할 것 같았어요. 정말 부모님 뵐 염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야구를 그만두느니 차라리 죽는 게…죽는 게 낫다’고요.
무슨 말이에요. 그럴 땐 야구를 포기해야지 왜 생명을 포기합니까. 야구는 과정과 결과로 판단되지만, 생명은 존재 자체로 규정돼고, 아름다운 겁니다. 아마 병호 씨 부모님도 인생의 9이닝 가운데 2, 3이닝 비중밖에 되지 않는 야구를 포기하길 더 바라셨을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7이닝의 인생을 아들이 멋지게 살길 바랐을 겁니다.
네.
선수들 이야기를 들으면 한창 부진할 때 집에 돌아가는 발길 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고 하더군요.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한 어조로) 그래서 전 집이 서울인데도 상무에서 제대하고서 혼자 자취했어요. 야구를 못했을 때 부모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는 게 정말 괴로웠어요.
야구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했어요?
저는 술을 못해요. 그리고 친구도 많지 않아요. 유일한 해소법은 솔직히 집에서 혼자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하는 게 전부였어요.
게임이라, 야구게임을 했겠군요.
네, 야구게임하면서 신 나게 홈런 치고(웃음).
어느 캐릭터로 신 나게 홈런포를 날린 거예요?
일본 야구게임 중에서 ‘프로야구 스피릿츠’라고 있어요.
압니다.
그 게임에서 좋은 선수는 죄다 트레이드 시켜서 라인업을 짰어요. 당시 일본에서 뛰던 이승엽 선배 캐릭터도 트레이드로 영입해서 넣었죠(웃음).
인생은 참 변화무상해요. 병호 씨가 대리만족하던 이승엽이 한국 무대로 돌아왔고, 병호 씨는 올 시즌 이승엽보다 더 많은 홈런을 치고 있습니다. 게임 말고는 다른 여가생활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LG에 있을 때 월요일에 쉰 기억이 없어요. 야구를 아무리 못해도 집에 있으면 불안했어요. 쉬면 더 야구를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월요일에도 야구장에 나갔어요. 경기 있는 날엔 정오부터 구장에 나가 혼자 웨이트 트레이닝하고, 경기 끝나면 자정까지 개인훈련 끝마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어요. 야구장에서 12시간씩 살았던 것 같아요. 그땐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생각했는데, (창문을 바라보며) 돌아보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인 게 아닐까 싶어요.
![]() 2011년 트레이드 되기 얼마 전. 넥센 오재일과 대화를 나누는 박병호(사진 좌로부터). 이때만 해도 박병호는 자신이 넥센 유니폼을 입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사진=LG) |
2011년 7월 31일 오후 9시. 트레이드 마감일을 불과 3시간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LG와 넥센 명의가 보도자료가 이메일로 왔습니다. 내용인즉슨, LG 투수 심수창과 내야수 박병호가 넥센으로 가고, 넥센 투수 송신영과 김성현이 LG로 이동하는 2대2 트레이드를 실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마’하던 깜짝 트레이드가 실제로 실행된 순간이었습니다. 당사자인 병호 씨는 트레이드 소식을 언제 처음 들었습니까.
저도 트레이드는 당일에 알았어요. 소문이 있긴 했어요. 저와 넥센의 모 투수가 트레이드 될 것이란 소문이었죠. 그런데 트레이드 마감일 오후 9시까지 별 연락이 없었어요. 그때 박경수 선배와 밥을 먹고 있었는데, 제가 그랬어요. “형, 트레이드 이야기가 있었는데, 소식이 없네요. LG에서 열심히 해야겠어요”라고요. 그러다 밥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리는 거예요. ‘딱’ 보니까 LG 운영팀장님 성함이 찍히더라고요. 바로 경수 형한테 보여주고, 전화를 받았어요. 순간, 감이 왔어요.
운영팀장이 ‘트레이드가 됐다’고 하던가요.
“여보세요”하니까 “병호야, 트레이드됐다”하시더군요. “어느 팀이에요?”하니까 “넥센이다”하셨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숙소에서 바로 짐 정리하겠습니다”했어요.
함께 있던 박경수가 뭐라고 하던가요.
경수 형은 상당히 아쉬워했어요. 그러면서도 “병호야, 네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주셨어요.
병호 씨 자신은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궁금합니다.
지난해 인터뷰에서 “그동안 성원해주신 LG 팬분들께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음해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론 ‘잘 됐다’는 생각도 했어요. 트레이드가 제 야구인생에 큰 변화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당시 경기 일정을 보니까 넥센의 잔여경기가 두 번째로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우천으로 취소된 경기가 많았던 까닭인데, 그만큼 출전할 기회가 다른 팀보다 많이 남아있다는 소리였죠.
병호 씨 자신에겐 분명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트레이드였어요. 그러나 LG와 넥센팬, 그 가운데 넥센팬에겐 당시만 해도 분노를 일으킨 트레이드였습니다. 그도 그럴 게 LG는 17연패 중인 투수와 1.5군 만년 기대주를 보낸 대신 평균자책 2점 초반대의 특급 셋업맨과 22살의 젊은 선발투수를 영입했어요. LG와 넥센의 트레이드를 저울에 올려두면 확실히 LG쪽으로 기울어진 게 사실이었어요. 그래서일까요. 트레이드되고나서 자릴 잡기 전까지 넥센팬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습니다.
언뜻 보면 확실히 넥센이 손해였죠. 특히나 4명의 선수 중에서 제가 가장 퀄리티가 떨어졌죠(웃음).
하지만, 넥센 김시진 감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병호 씨가 트레이드되서 오자마자 붙박이 1루수와 5번 타자 기용을 약속했습니다. “아무리 부진해도”라는 단서를 달면서까지요.
당시 김시진 감독님이 말씀하신 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이전 트레이드들은 모르겠지만, 이번 트레이드는 감독인 내가 요청한 거다. 너와 (심)수창이는 아프지 않는 한, 계속 경기에 출전시킬 것이고, 너는 5번 타자로 잔여경기에 뛰게 할 생각이다”라고 하셨어요.
왜 그렇게 김 감독이 병호 씨에게 기회를 줬다고 봅니까. 당시 김 감독은 예전부터 병호 씨를 지켜봐 왔다고 했습니다.
저도 감독님이 줄곧 저를 주목하고 계셨다는 걸 기사를 통해 알았어요. 트레이드 전까진 감독님께 제대로 인사 드린 적도 없는데요. '왜 감독님께서 날 주목하셨을까', 아직도 미스터리에요(웃음).
26살, 신화의 시작 '준비된 4번 타자' 박병호(사진=넥센)
박병호는 앞으로 우리 팀 중심타자로 뛸 것이다. 아프지 않는 한, 경기에서 빼는 일은 없다.
- 2011년 넥센 김시진 감독 -
넥센 유니폼을 입고 4경기 만에 이적 후 첫 홈런을 기록합니다.
8월 2일부터 4일까지 대구 삼성 3연전에 출전했어요. 그땐 안타만 2개 치고 끝났어요. 그러다 목동으로 돌아와 두산과의 3연전을 치렀는데 첫날(8월 5일) 경기에서 홈런을 때렸어요.
다음날인 6일 두산전에서도 홈런을 쳤습니다. 결국 지난해 8월 이후 51경기에서 12홈런을 기록하며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가능성을 현실화합니다. 그리고 올 시즌은 가능성을 뛰어 넘어 리그 최고의 타자로 발돋움한 상태입니다. 이렇듯 병호 씨가 극적으로 변한 이유, 무엇이라고 봅니까. 역시 자신감 회복인가요?
그렇죠. 2군에서 전 굉장히 잘하는 선수로 알려져 있었어요. 그땐 그 자신감으로 뛰었어요. 결과도 좋았고요. 하지만, 1군에선 자신감이 사라지며 좋지 않은 결과를 냈어요. 이것도 지금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요. 박흥식 타격코치님께 부탁드린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지난 2월 스프링캠프에서 박 코치님을 처음 뵙습니다. 서로를 잘 몰랐죠. 하루는 박 코치님께서 절 부르시더니 대뜸 “병호야, 넌 타격폼을 좀 수정하면 좋겠다”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기분이 그랬어요. 왜냐하면 타격폼 수정에 대한 스트레스가 원체 심했으니까요. 그래서 하루 정도 코치님과 말도 안했어요.
음.
그런데 ‘그건 답이 아니다’ 싶더군요. 코치님께서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는 게 예의지 싶어요.
그래서 박 코치를 찾아갔습니까.
네,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어요. “앞으로 코치님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뭔가를 찾고 싶습니다”라는 의사도 밝혔죠.
박 코치 반응은 어땠습니까.
코치님께서 “네 생각은 잘 들었다. 하지만, 난 네 타격폼을 송두리째 손 보려는 게 아니다. 내가 봤을 때 손 위치가 좀 낮게 보여 이 위치만 높이면 스윙궤도가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라고 하셨어요.
박 코치 의견을 수용했나요.
박 코치님 지적이 맞았어요. 당연히 수용했죠. 올 시즌 효과를 보고 있어요(웃음). 하지만, 올 시즌 제 타격폼이 바뀐 건 그게 유일합니다.
요즘도 박 코치가 타격폼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이 없습니까.
예전 코치분들 같으면 요즘처럼 안 맞을 땐 “뭐가 문제고, 뭘 고쳐야 하고”하면서 타격폼을 바꾸려고 하실 거예요. 하지만, 박 코치님은 전혀 말씀이 없으세요. (뭔가 생각난듯) 아, 코치님께 부탁드린 게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뭘까 궁금한데요.
“코치,님 제가 부진할 때 야단치시기보다 ‘병호!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전 ‘잘한다, 잘한다’ 소리 들으면 제가 정말 잘하는 줄 알아서 더 신이 나서 뛰는 놈입니다”라고요.
좋은 말이에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때론 단점을 극복하는 것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더 유효할 수도 있어요.
박 코치님과는 성격도 잘 맞고, 정말 코치님이 선수들을 편하게 해주세요. 연세도 저보다 두 배 가까이 많으신데 때론 큰 형님으로 생각될 정도로 제말에 늘 귀를 기울여주세요. 요즘도 제가 힘들어 하고 있으면 “병호야, 너 정말 완전 잘하고 있어. 괜찮아”라고 격려해주세요. 제가 심리적 안정을 찾는데, 김시진 감독님과 박흥식 타격코치님이 큰 도움을 주셨어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 박병호는 LG에서 KIA로 이적한 김상현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KIA에서 황병일 타격코치를 만난 게 행운이었다"는 것이었다. "황 코치를 만나 자신이 원하던 스윙을 하게 됐고, 프로에서 드디어 지도자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단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박병호도 내심 황 코치 같은 사람을 꿈꿨다. 그리고 그 역시 결국, 국내 최고의 타격전문가 박흥식 코치를 만났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더 주안점을 두는 박 코치는 선수들을 동반자로, 자신을 조언자로 규정하는 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올 시즌 팀이 치른 99경기에 모두 4번 타자로 출전했습니다. 풀타임 출전에 전경기 4번 타자 출전이라면 대단한 피로감과 압박감을 느낄 텐데요.
지난해 넥센으로 트레이드됐을 때 제 타순은 5번이었어요. 처음은 5번으로 시작했지만, 시즌 종료땐 4번 타자로 마감했습니다. 그 경험이 상당히 값졌던 것 같아요. 시즌 전 많은 분이 “올 시즌이 첫 풀타임 4번 타자로 뛰는 해인데,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어요. 솔직히 그땐 질문을 받기 전까지 제가 첫 풀타임 4번 타자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속으로 ‘아, 그러네’했으니까요.
돌아보면 제게 풀타임과 4번 타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위치는 아니었어요. LG 2군 시절 제가 매일 경기에 나오고, 4번을 치는 건 당연했거든요. 요즘은 솔직히 압박감 같은 것도 느끼지 않아요. 그냥 LG 2군에서 4번을 맡았을 때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있어요. 100경기 가까이 치른 지금도 똑같은 마음이에요.
병호 씨가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는 덴 팀원들의 도움도 컸을 듯싶어요.
아무래도 트레이드돼 새로 들어온 선수는 팀 동료와 코칭스태프의 배려를 기대하게 마련이에요. 넥센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절 한식구로 만들려고 정말 많이 배려해주시고, 도와주셨어요. 제가 빨리 팀에 동화된 것도 그분들의 노력 때문이었어요. 다행히 성적이 좋아지면서 넥센에 적응하는 게 훨씬 수월해졌죠.
넥센 유니폼을 입은 후 홈런을 ‘펑펑’ 치고 있습니다. 구장 효과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만.
전 솔직히 목동구장 덕도 크다고 봐요. 잠실구장에선 외야플라이로 잡힐 타구가 목동구장에선 홈런이 되니까요.
과거 해태에서 LG로 이적했던 홍현우 씨를 만나니까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광주구장을 홈으로 쓸 땐 잘 맞으면 홈런이 됐는데, 잠실구장에선 홈런이 될 타구가 펜스 앞에서 자꾸 잡혔다”고요. “그 바람에 장타 자신감을 잃고, 결국엔 타격 자신감까지 잃었다”고 했습니다.
맞아요. 아시다시피 저는 안타를 많이 치는 선수는 아니에요. 장타력으로 승부하는 선수라, 홈런이 제때 나와줘야 장타 자신감이 생겨요. 그런데 잠실구장에서 우중간으로 날아가는 잘 맞은 타구가 외야수한테 잡힌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온몸의 힘이 빠져요(웃음). 아, 홈 관중 덕도 본 것 같아요.
홈 관중이요?
목동구장에서 홈 경기를 하는데, 한 번은 관중석을 봤어요. 관중분들이 별로 없으시더라고요. 선수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무슨?
관중이 적은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고요.
장점은 뭡니까.
선수들이 욕을 덜 먹는다는 거죠.
단점은?
다른 구장보다 야구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거죠.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군요.
넥센으로 트레이드 돼고 처음으로 수훈선수에 뽑혀 단상에 오른 적이 있어요. 관중석을 보니까 정말 팬들이 소규모였어요. 그때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트레이드로 인해 주축선수들이 LG로 가서 얼마나 속이 상하고, 불편하시겠느냐”고요. “제가 그 선수들의 빈자리까지 채우긴 힘들겠지만, 죽을 힘을 다해 여러분의 응원을 받는 선수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요.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날 이후 많은 넥센팬이 절 응원해주시고, 지지해주셨어요. 저를 좋아하는 팬들도 많이 늘어났어요(웃음). 이전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웃음).
박병호 인생의 가장 화려하고 내실 있는 홈런, 결혼 박병호, 이지윤 부부(사진=박병호)
야구보다 소중한 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바로 아내다.
- 2012년 넥센 박병호 -
아내와는 어떻게 만난 거예요?
2010년이었어요. 처음 본 건 2009년이었고요. 상무 제대하고 목동구장에서 지인이 야구를 한다기에 우연히 찾아갔어요. 당시 아내도 육군에서 제대해 ‘막’ 방송국에 들어갔을 때에요. 제 기억에 그때 KBS N SPORTS에서 ‘그녀가 돌아왔다’는 타이틀로 아내의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어요. 그걸 봤던 기억이 나서 속으로 ‘아, 저 분이 군대 갔다 온 여자구나’했어요(웃음). 가만히 보니까 좋은 사람 같았어요. 그러다 2010년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 KBS N SPORTS 촬영팀이 왔어요. 저는 솔직히 인터뷰 할만한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만 아내를 바라봐야 했어요. 그때부터 속앓이를 했습니다(웃음).
속앓이, 짝사랑의 대표적인 증후지요. 제가 알기로도 이지윤 아나운서는 참 괜찮은 분이었어요. 야구장에서 볼 때마다 절제있고, 기품 있는 태도가 돋보였지요. 그래도 그렇지, 체구가 이렇게 큰데 속앓이만 하다니, 실망인데요.
어떻게 연락처를 알아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래요?
절 모를까봐 저를 소개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죠.
답장이 오던가요?
‘누나, 동생으로 지내자’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렇게 지내기로 했습니까.
아니요. 바로 문자를 다시 보냈어요. (양팔을 벌리며) 이렇게 긴 문자를 보냈어요.
내용이 뭐였습니까.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판단해달라’고 했어요.
아내도 고민이 됐겠습니다.
‘장난칠 거면 다시는 문자 보내지 마라’는 답장이 왔어요. 그래 ‘딱 한번만 뵙고 싶다’고 다시 문자를 보냈죠.
만남에 성공했습니까.
네.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헤어졌어요. 그날 이후 사귀자는 말 없이 사귀고, 결혼하자는 말 없이 결혼한 것 같아요(웃음).
얼마나 흘렀을까. 두 사람의 열애설이 기사화 됐어요.
열애설이 처음 기사로 나왔을 때 전 LG 2군에 있었어요. 그 기사 나가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왜요?
다들 절 보고 하는 첫마디가 “아니 네가?”였어요(웃음). 그렇게 뛰어난 여성이 저같은 2군 선수와 사귈 리 없다는 뜻이었겠죠.
저도 지금의 아내와 만날 때 병호 씨와 같은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휴우-.
그런데 제 아내는 연애 시절 제가 잘 이해 되지 않았나 봐요.
어째서요?
아내도 당시 방송 일이 많아 월요일만 쉬었어요. 저도 월요일이 휴식일이었고요. 그럼 월요일 오전부터 봐야 하는데, 우린 항상 월요일 오후에만 봤어요. 제가 오전엔 운동을 해야 했거든요. 오후에 만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밤 8시쯤에 꼭 헤어졌어요. 처음엔 아내가 ‘내가 싫어서 일찍 가는구나 생각’했대요.
그건 저와 다르군요. 전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시간을 끌었는데요. 그런데 왜 일찍 데이트를 끝낸 거예요? 일주일에 고작 한번 보는 건데.
다음날 아침부터 운동을 해야 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미련했죠. 진짜 무슨 CF처럼 ‘밥 먹고, 영화 보고, 차 마시고,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밥 먹고’만 하다가 헤어졌어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숨겨진 이유가 있었어요.
숨겨진 이유?
(진지한 표정으로) 아내의 위상을 올려주려면 제가 야구를 잘하는 길밖엔 없었어요. 그래서 야구에 더 매진하려고 했어요. 솔직히 제가 LG에 계속 있었으면 결혼을 하면서도 심적으로 힘들었을 거예요. 정말 제 아내는 어디에 내놔도 절대 꿀릴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게 살 사람이었어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초라해질까 봐 항상 미안했어요.
음.
아내를 만나고 많은 게 바뀌었지만, 정말 바뀐 게 하나 있어요.
궁금하군요.
한 번은 제가 LG에서 야구가 되지 않아 무척 고민하고 있을 때에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병호 씨. 자기가 초교 때부터 야구만 한 건 알지만, 야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야구 못한다고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 거면 야구를 그만두는 편이 나요. 앞으로 남은 인생이 훨씬 기니까요. ‘딱’ 한번 사는 인생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만 살려고 해요.”
음.
(두 눈을 크게 뜨며) 저는 ‘딱 한번 사는 인생’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넥센에 온 이후부턴 월요일에 운동?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야구에 대한 생각을 갖고 집에 간 적? 단, 한 번도 없어요. 대신 월요일이면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요. 물론 주변에선 ‘그래도 지금껏 훈련한 게 있으니까 지금 그 노력이 꽃을 피운다’고 해요. 하지만, 그것보단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다음부터 스트레스를 덜 받아 야구를 더 잘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박병호의 호쾌한 스윙(사진=넥센) |
그렇군요. 그나저나 요즘 병호 씨가 남성들의 공적(公敵)인 거 알아요?
'공공의 적'이요? 왜요?
어느 분이 그러더군요. “나는 아침밥 얻어먹기도 어려운데, 박병호는 아내가 해준 10가지 채소가 든 주스를 날마다 마신다‘고요.
아, 그래요(웃음). 저도 그 기사 봤어요. 최근에 아내가 회사를 그만뒀어요. 아내 자랑 좀 해도 됩니까?
그럼요.
아내는 굉장히 능력이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이에요. 잘하는 것만 이야기하면요. 기타, 그림 그리기, 요리 그리고 음, 뭐가 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아, 요가, 사무적인 일도 있다. 정말 다 잘해요. 물론 아내는 그래요. “그렇다고 다 완벽한 건 아니다”라고(웃음). 아, 노래도 잘해요. 그림은 처음인데 한번은 제 커리캐처를 그리는데 정말 똑같은 거예요. 건강주는 해독주스라고, 아내가 건강에 좋은 주스를 찾다가 발견한 모양이에요.
이제 서서히 아이도 생겨야지요?
네, 아직 아이가 없어요. 선수들 아이들 보면 참 부러워요. 한편으론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나’ 걱정도 됩니다.
올 시즌 끝나면 아내에게 꼭 주고 싶은 선물이 뭐에요? 가령 정규 시즌 MVP나 골든글러브라든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선물은 여행이에요. 제 아내는 명품 가방, 보석 이런 걸 좋아하는 여성이 아니에요. 아내도 20살 때부터 저처럼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어요. 지금은 회사를 그만뒀다지만, 절 챙긴다는 게 어느 회사 일보다 어렵고 힘들 거예요. 시즌 끝나면 가까운 동남아에 가서 아내가 편하게 쉬도록 도와줄 겁니다(웃음).
저도 제 아내 자랑을 좀 하고 싶은데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오늘도 참 날이 덥네요. 무슨 말씀 하셨죠?
“어느 순간, 투수들이 날 피했다.” 넥센의 중심타선(사진 좌로부터) 박병호, 이택근, 강정호(사진=넥센)
박병호는 아직 완성된 타자가 아니다. 올 시즌이 1군 첫 풀타임이니 만큼 더 성장하는 단계다. 만약 박병호가 완성된 타자가 됐을 때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 2012년 넥센 박흥식 타격코치 -
지금 추세라면 홈런 30개는 물론이려니와 35홈런도 가능하단 분석입니다. 자신이 예상하는 홈런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28개 정도요?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팀이 지금도 4강 싸움을 하고 있어요. 홈런 욕심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전 오히려 타점에 신경쓰고 싶어요.
그래요? 현재 24홈런과 79타점 가운데 어느 기록이 더 가치가 있다고 봅니까.
당연히 후자죠. 저는 솔직히 홈런은 그만 쳐도 됩니다. 대신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고 싶어요. 그게 팀을 위하는 길이니까요.
요즘 들어 투수들의 견제가 무척 심합니다. 자신도 느끼나요?
LG 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르죠(웃음).
투수들이 그러더군요. “올 시즌 가장 무서운 타자가 박병호”라고요. 이유는 “몸쪽 공도 홈런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랍니다.
저도 갈수록 힘들어요. 상대팀마다 저를 상대로 공배합을 달리해서 힘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에요.
홈런, 타점도 대단하지만, 출루율이 매우 높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타율(0.281)과 출루율(0.395)이 1할1푼4리나 차이 납니다. 이는 선구안이 매우 좋다는 뜻입니다.
제가 봐도 지난해보다 볼넷이 상당히 늘었어요. 이유가 있는데요.
네.
지난 2월 일본 가고시마 스프링캠프에서 이택근 선배가 그런 조언을 해주더라고요.
어떤?
두산과 연습경기를 하고 있었어요. 2아웃 주자 2루였는데, 볼카운트가 투볼 노스트라이크였어요. 투수가 유인구를 던지는데 그만 제가 따라 나가다 헛스윙했어요. 4구째도 유인구인데 또 속아 헛스윙했죠. 5구째도 역시 유인구였지만, 헛스윙하는 바람에 삼진을 당했어요. 그때 (이)택근이 형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병호야, 투수가 너와 승부하지 않으려고 자꾸 도망가는데, 넌 왜 쫓아가니?”라고요.
음.
그때까지 저만 몰랐던 거예요.
무슨?
투수들이 절 피한다는 걸요. 결과적으로 그때 선구안에 눈을 떴습니다.
이택근의 조언으로 선구안에 눈을 떴다고 했습니다. 박흥식 타격코치는 “박병호의 수 싸움이 늘었다”고 평하던데요.
올 시즌 달라진 게 있다면 타석에 들어설 때 ‘투수가 승부를 하겠다, 안하겠다’는 예상을 미리 한다는 겁니다. 예전엔 투수가 무슨 생각을 하든 초구부터 치려고만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공을 보는 여유도 생기도, 스트라이크를 하나 일부러 먹을 줄도 알게 됐어요. 확실히 선구안은 개선된 것 같습니다.
올 시즌 도루가 11개나 됩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도루를 곧잘 했어요. LG 2군에선 사인 없이 뛰기도 했고요. 넥센 와선 전적으로 사인에 의해 뛰는데요. 상대 팀 배터리 입장에선 제가 도루하면 “쟤, 뭐야?”할 거예요(웃음). 주로 배터리가 방심할 때 뛰니까요. 올 시즌 팀이 원체 도루를 많이 시도하다 보니까 저도 11개나 기록하게 됐어요(웃음).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하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아 보여요.
주변 분들이 ‘20-20’ 이야기를 간혹 하세요. 하지만, 제가 도루하다 다치면 팀에 마이너스가 될 게 분명해요. 그래서 ‘20-20’은 욕심 내지 않고 있어요.
![]() 1루 수비 중인 박병호(사진=넥센) |
전 개인적으로 병호 씨의 1루 수비를 칭찬하고 싶어요. 올 시즌 병호 씨의 수비율은 9할9푼3리입니다. 지난해 9할9푼1리보다 좋아졌습니다. 특히나 허슬플레이가 늘어나고, 수비 범위와 테크닉이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저도 수비가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론 경기가 길어지면서 수비에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이전엔 공격할 때만 집중력이 무너진다고 생각했거든요. 요즘엔 경기 후반부에도 수비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어요.
병호 씨, 어때요. 올 시즌 성취한 것들이 만족스럽습니까.
솔직히 전 지금 성적만으로도 만족해요. 지금같은 성적을 내리라곤 저도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시즌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만족합니다라고는 말씀 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남은 경기에서 타율에 좀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요. 물론 팀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성취겠죠.
넥센은 전반기를 3위로 끝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 부진을 거듭하며 6위로 떨어진 상태입니다. 팀이 다시 반등하리라 봅니까.
지금 사실 팀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많이 빠져 있어요. 투수들도 힘들어하고. 전체적으로 과부하 상태 같아요. 일전에 송지만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난 너희들이 정말 대견스럽다”고 고요. 맞는 말씀 같아요. 올 시즌 우리가 1위까지 했지만, 여전히 우린 도전자가 아닐까 싶어요. 송 선배님이 “도전자니까 지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남은 경기 도전자의 자세로 계속 임하자”라고 하셨는데, 그 마음가짐으로 끝까지 싸운다면 팀이 계속 발전할 거라고 봐요. 올 시즌 넥센 선수들의 풀타임 경력이 8개 구단 중에서 가장 짧지 않을까 싶은데요. 역시 마지막까지 분발하면 선수 개개인의 능력치가 오르고, 올해보다 내년이 더 좋아질 거라고 봅니다.
많은 젊은 선수가 병호 씨를 롤모델 삼아 이 무더운 여름에도 2군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병호 씨의 덕담과 격려가 그 선수들에겐 사이다처럼 시원한 비전이 될 수 있을 듯싶어요.
음, 운동량만 따지자면 전 언제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선수였어요. 그점은 지금도 자부합니다. 아마 이 인터뷰를 보는 젊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가족을 떠올리면서 다시 시작하라는 겁니다. 2군 생활을 오래하면 나도 모르게 2군 선수가 돼요. 제가 겪어봐서 잘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자기가 어떤 능력의 선수인지 잊게 된다는 거예요. (단호한 목소리로)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어디선가 자신을 눈여겨 보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 박병호를 비롯한 넥센 선수들은 염경엽 주루코치를 만나 전혀 다른 주자가 됐다. 염 코치는 '두려움 없는 주루'를 위해 '두려움을 제거하는 주루 기술'을 전수했다. 강정호, 박병호 등 스스로를 도루와는 무관한 선수로 규정한 선수들에게 다가가 "일단 뛰어보라"고 용기를 심어줬다. 올 시즌 넥센은 광폭 타이어처럼 그라운드를 질주하고 있다(사진=넥센) |
고맙습니다. (창밖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LG 있을 때 욕을 하도 먹어서 대인기피증이 생겼어요. 길 가다가도 누가 절 알아본다 싶으면 고갤 숙여요. 지금도 잠실 LG 경기 끝나고 구단 버스 타려고 걸을 때 고갤 들지 못해요. 지금도 고갤 ‘푹’ 숙이고 갑니다. 결혼한 지금도 사람 많은데 가면 역시 고갤 숙여요. 아내가 눈치채고 “우리 나갈까”한 적도 많아요. 이상하게 사람 많은 곳에 있으면 항상 긴장하고, 즐겁게 있지 못합니다.
병호 씨. 이젠 그러지 않아도 돼요. 되레 이제부턴 고개를 들고 당당히 걸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병호 씨가 이젠 누군가의 우상이자 영웅이기 때문이에요. 목동구장에 갈 때마다 병호 씨 얼굴을 보려고 구장 입구에서 한참을 기다리는 어린이 야구팬들을 봅니다. 그 아이들에게 ‘박병호의 얼굴’은 자신의 미래이자 꿈이에요. 당당히 고개를 드세요. 그래야 아이들이 더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과거 실업야구선수 정현발 씨를 우상 삼아 여기까지 왔듯 지금의 아이들은 박병호를 보며 크고 있어요.
네, 꼭 새겨 듣겠습니다(웃음).
아, 맞다. 징크스를 안 물어봤네요. 손톱을 월요일에만 깎는다면서요?
제가 좀 징크스가 많은 편이에요(웃음). 손톱을 월요일에 깎는 건 그래야 다음날 손이 빨리 경기에 적응할 것 같아서에요. 제가 봐도 이상한 징크스인데요. (혼자 환하게 웃다가) 진짜 징크스는요. 소변 보려고 ‘딱’ 화장실에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전 무조건 우로부터 네 번째 소변기를 이용해요. 만약 소변기가 3개밖에 없다? 그러면 우측부터 ‘하나, 둘, 셋’ 세다가 다시 우측으로 돌아와 ‘넷’하고 소변기를 센 다음에 그 소변기를 이용합니다. 이거 혹시 ‘4번 타자 병’아닐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