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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가는 길
사도행전 28:11-16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출생 신분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출생 신분이 나빠서 불행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험난한 인생 길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언제나 조건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 여정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는 일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오직 그분의 은혜 안에서 인도하심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십시오.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을 인도하여 주신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문제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나를 기대하십시오. "나는 일평생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 꿈을 꾸십시오. 환상을 보십시오. 그리고 도전을 하십시오.
지금 우리는 어디론가를 향해서 끝없이 가고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닌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가능성과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기회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는 인생 여정에는 도처에 환멸과 낙심과 절망으로 가득찬 상황이 나를 짓누르기도 할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우리는 더욱 답답해합니다. 어디로 갈까, 어떻게 가야 하나?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어떤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할 때에 세 가지의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금 여러분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둘째로, 나는 지금 그분이 원하는 길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길을 그분이 수용하고 지켜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내 인생의 절대적인 인도자로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인생의 짐이나 날라주는 짐꾼으로 알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러한 혼란의 문제에서 먼저 벗어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잘못된 인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극에 휘말리게 합니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엄청난 고난과 문제를 가지고 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인도하심만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 요셉을 보십시오. 사실 요셉만큼이나 험난한 인생 여정을 걸었던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그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이것이 형제들에게 미움이 되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디발의 신임을 얻었는데, 이제는 여주인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죄 아닌 죄로 지하 감옥에 갇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 길을 걸었던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창세기 39장 23절에 보니까 요셉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니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되게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일들을 다 잘되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건성으로 교회를 다니는 종교꾼이 되지 마십시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냄새나는 종교꾼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찬양할 때마다 성령의 감동으로 흥분이 되는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를 만난 경험을 안고 살아가는 소문난 교회에서 소문난 사명자가 되십시오. 믿음의 길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습니다. 내가 강하게 믿으려면 그만큼 강한 저항이 나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종교꾼에게는 이런 저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꾼은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저항을 피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이런 종교꾼은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가만히 놔두어도 저 혼자서 넘어지고 쓰러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사랑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 안에서 좋은 나를 만들어 가는 꿈을 가진 꿈쟁이가 되십시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꿈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십시오. 오늘 우리 영신교회 성도들과 함께 말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여러분, 너와 나를 비교하려는 어리석음에서 자유하십시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대적으로 비교하려는 유혹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발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위축되는 나 자신 때문에 열등감만 더해 갈 뿐입니다. 패배감을 느끼면서 상처투성이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언어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공격적입니다.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남을 지도하는 일에 욕심을 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남을 지도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보면 남을 지도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는 이러한데, 저기는 왜 저러하냐?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하느냐? 이것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성령의 감동 감화로 모든 것을 비교하려는 유혹에서 자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나를 가르치고 나를 지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가 바른 믿음의 사람입니다.
세상은 상대평가를 가르치지만, 성경은 절대평가를 가르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와 나를 비교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나 한 사람만을 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는 이 땅에 하나밖에 없는 아주 소중한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나에게 주실 만큼이나 값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무너진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용기와 신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솔직히 이러한 것에 얽매였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야만 했습니까? 이런 것 때문에 지금 이 나라가 얼마나 어두운 수렁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정의니 의리니 원칙이니 용기라는 것을 믿지 마십시오. 때에 따라 이런 것들이 무섭게 잔인해 질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만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환경이 어떻게 해도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른 믿음의 길이요, 사명자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로마로 들어가는 바울의 마지막 항해 일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멜리데를 출항한 '디오스구로'호는 석달 후에 로마를 향해 출항을 합니다. 이 배는 연안 항해를 150km하다가 '수라구사'항에서 사흘을 정박합니다. 그리고는 빙 둘러서 '레기온'항에 이르렀고, 다시 하루를 보낸 후에 레기온에서 340Km 떨어진 보디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보디올에 도착함으로써 긴 바다 여행을 끝마치고 마침내 로마를 목전에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 로마까지는 불과 220Km 밖에 남지를 않았습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건강한 장정이라면 오 일이면 넉넉히 갈 수가 있는 그런 여정이라고 합니다. 바울 일행은 이렇게 육로를 따라 걷다가 압비오 광장에서 귀한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노 사도 바울이 로마로 잡혀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마중을 나온 로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렵고 힘들 때에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힘들고 지친 믿음의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에게 다가가십시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런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제로 무슨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 옆에만 있어주십시오. 그러면 오늘 사도 바울이 그들을 보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던 것처럼 그들도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용기를 주는 소중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힘들고 아파하면 그에게 먼저 찾아가 주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이었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있었던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에게는 로마를 향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 선교의 비전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전은 바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비전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은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로마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로마를 향한 선교의 비전을 처음으로 밝히게 됩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는 이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는 예루살렘은 고난과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폭동이 일어납니다. 위태로운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로마를 향한 사명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그것이 23장 11절에 기록된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렇게 소망하든 로마로 가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항해를 시작합니다. 다른 여러 죄수들과 276명의 승객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호를 타고 로마로 가던 중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살아서 돌아갈 희망을 잃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이다" 이제 그는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로마를 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로마를 볼 수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로마를 향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거룩한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29장 18절 말씀에 보면 꿈이 없으면 방자해 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꿈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내 가정을 향한 거룩한 믿음의 비전을 품으십시오. 내 교회를 향한 위대한 비전을 품으십시오. 비전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과 야곱, 다윗 등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전은 인간이 만든 허황된 꿈과는 다릅니다. 비전은 곧 주께로부터 받은 구체적인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녀를 기다린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비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인내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야 한다는 비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바울로 하여금 발걸음을 로마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믿음의 여정에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꿈이 무엇입니까? 꿈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의미 없이 살지 마십시오. 장차 10년 후에, 아니면 1년 후에 내 가정과 교회에 일어날 위대한 날을 마음에 품고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로 가게 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주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능력 있는 사명자로 살아갈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서 위대한 비전을 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바울에게도 로마로 가는 길에 유혹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전진하다가도 세상 유혹에 흔들리거나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데마가 달리 데마입니까? 그가 세상의 유혹에 흔들려 넘어갔기 때문에 데마입니다. 데마(Demas)를 영어에 보니까 아주 재미있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에서 데마라고 하면 '아주 남성다움이 없다'는 뜻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개가 없고, 결단력이 없고, 마음이 옹졸하고, 쉽게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켜서 남성답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남성다움이 없는 사람, 성도다움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데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데마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세상을 사랑해서 거룩한 믿음의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름은 거창하게 성도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성도답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거룩한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이 도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유혹들을 어떻게 할까?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단호하게 거절하십시오. 유혹의 씨앗은 뿌리부터 잘라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도 두 가지 방해 요소가 있었습니다. 불순종과 졸속의 유혹이었습니다. 미항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겨울을 나고 떠나자는 바울의 제안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왜 그들이 바울의 제안을 무시했습니까? 조그마한 항구 미항에 있는 것보다는 쾌락과 경제적인 번영이 있는 뵈닉스가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은 쾌락의 도성인 뵈닉스로 가야한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바울의 권면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바다에 다 던져야만 했습니다. 생명까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말씀에 불순종했다가 절대절명의 어려움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모름지기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는 열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밀보리를 추수하기 위해서는 일곱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는 때와 기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일을 성급하게 졸속 처리하려고 할 때에는 실패와 어려움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주 앞에서 거룩한 비전을 받았다면 불순종과 졸속의 유혹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도 마십시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십시오. 오직 우리의 시선을 주께로만 향하십시오. 비전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결코 중도하차 하거나, 어렵다고 물러서는 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 앞에서 비전을 품었다고 한다면 그 비전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사명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원하고 소망했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로마에 가야 하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는 로마에 도착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바울이 생각하고 원했던 그러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바울 편에서 생각하면 너무도 예상외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고생도 많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더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바울의 여정을 받아들인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나 자신이 좀 수고가 되고, 고생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여기에서 나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렵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좀 지치고 피곤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신다면 충성되게 사명을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풍랑도 있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에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있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지중해에서 태풍 유라굴로 때문에 바다에서 수장될 뻔했습니다. 당시 바울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그는 바다에서 죽을 뻔했노라고 사도행전에 기록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눈 앞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풍랑도 로마를 향한 비전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모든 난관을 믿음으로 극복을 하고 지금 로마의 문턱에 의연히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을 죄값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성경 욥기 5장에 보면, 고난은 인생에게 언제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교정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성품을 주시려는 건설적 고난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천성을 향해 나그네 길을 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잠시 당하는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지 마십시오. 안타까운 것은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가 없는 영광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난의 십자가가 없는 영광은 거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하는 고난이 힘들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풍랑이 있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가는 거룩한 믿음의 여정에서도 얼마든지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풍랑을 넉넉히 이기고 주 앞에서 영광의 그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온갖 소동 중에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일관되게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죄수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사명을 붙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개개인에게도 특별한 사명을 주셨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바울이 탔던 배와 같이 흔들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는 것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고난도 유혹도 풍랑도 모두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어느 듯 바울은 초로의 나이로 접어들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렇게도 그 자신이 가기를 원하던 로마를 멀리서 바라다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망망한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 로마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과 험한 풍파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광신적인 유대인들의 끈질긴 추적과 핍박이 있었는가 하면,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여러 번 그를 제거하려고도 했습니다. 그 숱한 여정을 지나 이제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승리의 행진을 하는 압비오 광장을 걷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걷는 압비오 광장의 길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걷고 있는 이 압비오 광장은 동방을 정벌한 로마의 개선 장군들이 당당하게 개선을 하는 장소입니다. 속국을 때려부수고 압비오 광장을 통과해서 로마로 개선하는데, 이 아름다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황제의 사절단이 압비오 광장까지 영접하러 나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개선 장군 즉 정복하고 오는 장군과 황제의 특사가 만나는 자리가 압비오 광장입니다. 압비오 광장에서 만나서 북을 치면서 황제의 특사들의 인도를 받아가며 개선장군이 당당하게 로마 시내로 입성하는 장소가 바로 압비오 광장입니다.
왜 하필이면 압비오 광장 이야기를 자꾸 하는가?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어쩌면 누가는 바울이 압비오 광장을 걷는 이 상황을 영적인 면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바울이 지금 죄수로서 로마에 왔지만,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아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지금 바울을 하나님의 복음의 개선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표들이 그를 압비오 광장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이제 함께 로마를 정복할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복음의 장군으로서 로마로 입성하는 바울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압비오 광장에 나와 있다는 사실은 먼 여행길에서 지칠 대로 지친 바울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로마로부터 69킬로나 떨어진 먼길을 달려왔습니다. 사실 지금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죄수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오는 바울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복음의 불모지인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오는 바울을 격려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지어서 바울의 로마 입성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압비오 광장을 걸으면서 낯익은 얼굴들로 인해서 더욱 용기를 얻게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는 뵈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그가 알면서 이름을 직접 부른 26명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도 그 무리들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바울에게 사랑과 섬김으로 헌신을 다 했던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에 에배네도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 얻게 된 수많은 믿음의 형제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마지막 주 앞에 섰을 때에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상급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명이 끝나고 주 앞에 섰을 때에 바울처럼 우리를 맞이할 믿음의 상급들이 있습니까?
로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은 바울을 마중하기 위해서 압비오 광장과 삼관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맞으러'라는 단어는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나,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을 기나긴 믿음의 여정을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으로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핍박자들은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그 길을 걷게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기 위한 영광의 길로 바꾸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서 존경과 사랑으로 뜨겁게 환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가 긴 믿음의 여정을 마치고 주 앞에 서는 그 날을 사모하면서 오늘 이 말씀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조롱하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에는 수많은 고난과 유혹이 가로막을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절망적인 순간이라고 느낄 그런 암울한 때를 지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의 인생 장막이 무너지고 주 앞에서 서는 그 날을 잊지 마십시오. 그날에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보고 기쁘게 일어나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천군 천사들이 좌우에 서서 우리를 뜨겁게 환영해 줄 것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훗날 주 앞에 서게 될 그날을 사모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가 끝날 존재가 아니라 주 앞에서 영원을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앞에 서게 될 영광의 그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저는 금년 첫 주일부터 계속해 왔던 사도행전 강해를 마치려고 합니다. 금년 표어를 '사도행전적 교회로 부흥하는 교회'로 정하면서 사도행전을 강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년 가까이 사도행전만을 강해하다 보니까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습니다. 절기에 상관없이 사도행전만을 고집하다 보니까 성경의 다른 부분도 설교하고 싶은 유혹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사도행전 설교를 마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에는 끝내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분명히 바울의 순교를 보았을 터인데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마지막 끝맺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바울의 죽음을 좀 더 기록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복음 전파는 바울의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에 끝맺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도 여러분들이 사도행전을 계속 기록해 나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도 여기 언양 땅 한 모퉁이 영신교회에서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행전을 기록해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가지고 사도행전을 기록해나가는 이런 영광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로서 사도행전 강해를 마치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영신교회가 기록해 가는 신사도행전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 사명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이 사명을 붙잡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새로운 사도행전의 역사를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 영신교회를 통해서 기록해 나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