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회 모임에서 2018년 5월19일 경기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
감고당.봉미산 신륵사.광주 곤지암읍 화담숲 등을 여행했다.
경북 칠곡휴게소.한티가는 길.여주의 한가한 길(사인보드)1
칠곡 한티가는길은 힐링의 길로 1돌아보는 길(10.5km). 2비우는 길(9.5km)
3뉘우치는 길(9km). 4용서의 길(8.5km). 5사랑의 길(8.1km)로 이루어졌다.
가실에서 한티까지 1가실성당. 2신나무골성지. 3금낙정. 4원당공소.
5한티순교성지로 구성되어 있다.
1돌아보는 길에는 가실성당-임도입구-3숲길-4숲갈림길-5전망데크-6바람쉼터
7금무봉 나무고사리 화석산지-8연화예술원.9도암지-10성모상
2비우는 길-2-11신나무골성지-2-12임도입구-2-13숲갈림길-2-14전망쉼터-2-15댓골지
2-16징검다리-2-17양떼목장-2-18산길갈림길-2-19숲갈림길
3뉘우치는 길-3-20창평지-3-21쌀바위-3-22금낙정-3-23비탈길-3-24여부재-3-25송산지
4용서의 길-4-26동명성당-4-27동명수변공원-4-28창신농원-4-29팔각정-4-30원당공소
5사랑의 길-5-31진남문-5-32소나무골목입구-5-33마당재(평산아카데미)-5-34한티순교
성지-5-35숯가마터-5-36한티마을사람로 구성되어 있다.
왜관(호국의 다리.호국평화기념관)(사인보드)2
왜관 호국의 다리에서 바라본 2대교와 낙동강방어선 전투를 재조명한 호국 평화기념관이다.
명성황후 생가유적지(사인보드)3
여주 명성황후 생가(사인보드)4
여주여행(사인보드)5
英陵은(4대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며,(寧陵)은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쌍릉이다.명성황후생가(26대 고종의 왕비로 출생에서 8세까지 살던집).신륵사(남한강과 봉미산
남쪽의 절).고달사지(석조유물이 가득한 옛 사찰터).황포돛배(조선4대나루인 이포와 조포나루에서
이용했던 배).서희장군묘(고려전기의 정치가 및 외교가).목아박물관(무형108호인 목아 박찬수유물과
조각전시장).여주 프리미엄 아울렛(한국 최초의 명품 아울렛).이포보(16개의 보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로 선정).여주보.강천보.파사성.폰박물관.흔암리 선사유적지 등 볼거리가 있다.
명성황후 생가 앞 연못(동영상)6
여주 명성황후 생가(유46호)7
이 집은 조선 고종(1863년-1907년)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여덟살까지 살던 집이다.
민치록의 딸로 1851년(철종2년) 태어나 열여섯에 왕비가 되었다.그후 1895년(고종32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게 살해당하였다.능은 청량리에 있다가 나중 1919년 홍릉에 합장
되었다.생가는 1687년(숙종13년) 처음 지어진 집으로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 남아 있다.
1996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이곳은 조선중기의 살림집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옆에는 感古堂이 있다.이곳은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해 서울 안국동에 지
은 건물로 여흥민씨 후손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살았던 집으로 2008년 이
곳으로 이전했다.그밖의 시설로는 명성황후 기념관과 문예관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유46호)(여주 능현동)8
건축년도는 조선 숙종13년(1687년)숙종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다.
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1852년-1919년)(재위1863년-1907년)의 비로 개화기
때 국정에 참여했다.
명성황후 생가(사인보드)9
안채(1)는 몸채.내당채로 불리며 주인마님 등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에서 가장 안쪽에 있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임종.출산 등이 이루어 졌던 곳으로 당시 외부
추입을 재한했던 사회상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랑채(2)는 남자주인과 손님이 생활했던 공간이다.이곳은 숙식을 대접하고 친목을 도모했
으며 학문을 교욱하던 장소이기도 하다.조선시대에는 사랑방문화가 발달하였다.
별채(3)는 몸채의 곁이나 뒤에 따로 지은 집이다.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의 다목적 용도로
쓰이거나 미혼자녀나 노모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행랑채(4)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집안팎의 일을 하는 하인들이 생활했던
공간으로 곡식을 저장하던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이곳에서 하인들은 농한기에 새끼를 꼬고
가마니 짜는 일을 하였다.
명성황후 탄강구리비(5)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4년(고종41년) 명성황후의
고향집에 세운 비석이다.이 비가 있는 곳은 명성황후가 어린시절에 공부한 별당이 있던 자리
라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행랑채)10
명성황후 생가(사랑채)11
바깥주인이 거쳐하는 공간으로 주택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다.안채와 바깥행랑채사이에
위치하며 사랑방.대청.침방으로 구성된다.사랑방은 남자주인의 일상 거처를 말하고 침방
은 남자주인이 잠을 자는 곳이다.조선시대 내외법은 따로 자도록 되어 있다.
명성황후(행랑채)하인들의 일상12
명성황후 생가(안채)13
안채는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주택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몸채.내당으로
불린다.안방.대청.건넌방.부엌으로 구성된다.안방은 직계존속 이외의 남자는 출입이 금
지된다.대청은 우물마루바닥.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으로 되며 여름에는 거처로도
사용된다.건넌방은 며느리방으로 많이 사용된다.
명성황후(안채)부엌.명성황후(행랑채)헛간14
부엌(廚房)은 음식을 만들고 난방을 위한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부뚜막이 있고 무쇠솥이 3개-5개정도 걸린다.
헛간(堆房.物置)은 농기구나 여러가지 생활용구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명성황후 생가(사인보드).명성황후 초상화15
명성황후 생가(별당)16
명성황후 생가(명성황후탄강구리비)17
명성황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1904년(고종41년) 고향집에 세운 비이다.이곳은
별당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1851년(철종2년)에 태어나 1866년(고종3년) 왕비로
책봉되었다.그후 1895년(고종32년) 일본 자객에 의해 시해 당하였다.1897년(고종
34년)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면서 명성황후로 추
봉 되었다.비의 앞면에는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마을 이라는 뜻으로 明成皇后誕降
舊里碑 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904년 5월 어느날 두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
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 라는 뜻으로 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 라고 새겨
져 있다.글씨는 황후의 아들이자 27대 황제인 순종의 친필이다.비각은 1970년 보수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明成皇后殉國崇慕碑.明成皇后追慕碑18
명성황후는 개화기에 개혁을 추진하던 중 1895년 10월8일 새벽 경복궁에 있는 건천궁 내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 당하였다.1981년 건천궁 동쪽에 있던 것을 시해 112
주기를 맞아 2007년 10월8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설치했다.
명성황후 추모비는 황후의 애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두개의
직사각형은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기둥이며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비문으로 표현하였고 조각 상층부는 빛의 표현으로 우리민족사에 길이 빛날 명성황후의
상징으로 표현하였다.글(김남조).글씨(구자송).조각(이영섭.신건화)
명성황후 생가(민유중 신도비.민유중 묘)19
閔維重(1630년-1687년)은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19대 숙종의 장인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 이시다. 신도비는 묘로가는 길목에 세워져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1650년(효종1년)과거에 급제후에 승문원.예문관.충청도관찰사
대사성.호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묘는 민유중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으며
봉분주위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다.우측은 민유중선생의 묘의 문인석과 망주석이다.
묘앞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신은 거북이 모양이며 머리는 용의 모양이다.용모양의 머리는 묘를 바라보도록 오
른쪽으로 틀어져 있다.신도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민유중선생의 묘가 있다.
명성황후 생가(민유중선생의 묘)(향토유적5호)20
이 묘는 민유중선생의 묘소이다.
묘앞에 세워진 신도비에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내용은
국구여양부원군시문정민합유중지묘(國舅驪陽府院君諡文貞閔合維重之墓)
증해풍부부인이씨부우(贈海風府夫人李氏祔右).증은성부부인송씨부좌(贈恩城府夫人宋氏祔左)
상점21
명성황후 생가옆 감고당(感古堂)22
감고당은 조선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1667년-1701년)가 장희빈과의 갈등속에서 왕비
에서 물러난뒤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이곳에서 거처하였다.명성황후
(1851년-1895년)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후 1866년 왕비로
간택.책봉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
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 부터이다.원래는 서울 종로 안국동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이후 철거될 위기에 있었지만 2006년 명성황후 성
역화사업으로 여주시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감고당은 조선시대 중부
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 구조와 형태를 보여준다.
감고당(사랑채)(우측)23
사랑채는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거처하는 공간이다.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위치하며 대청.사랑방.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이곳은 외부사람과의 친목을
도모하고 자녀들에게 학문을 교육하던 곳이기도 하다.사대부들의 학문을 토론
하던 곳이기도 하고 거문고를 타거나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던 공간이다.조선
시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발전되었다.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집안에서 신분이 낮은 머슴
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며 곡식을 저장하던 곳이기도 하다.하인들은 농한기에
새끼를 꼬거나 가마나를 짜기도
감고당24
감고당25
2018.05.19
첫댓글 명성황후 생가는 오래 전에 두어 번 갔었는데 상세한 설명과 사진을 보니 다시 새롭게 역사 공부를 잘 하였다네.
이 더위에 건강 잘 지키시게.
옛날에 명성황후 생가는 봤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이번에 보니
주위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고나 할까? 기념관도 감고당도 새로 봤다네~많이 단장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