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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夏나라 시대 - 주지육림, 걸주
역사란 게 본디 그렇다. 워낙 망상과 조작으로 직조된 것이라 그것들을 싹 걷어내고 생生으로 마주하여 위인이라든지 영웅이라든지 하는 이들의 날것을 보게 되면 우리 민중들과 다름없다. 이들이 꼭 남(백성)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거품을 걷어내고 역사를 날것 그대로 보고자 했던 대표적인 이가 루쉰(노신魯迅)이다. 중국 현대문학의 시조새 격으로 <아큐정전> <광인일기>등의 대표작을 통해 봉건적 중국사회와 유교적 도덕관을 비판한 사람 아닌가? 그의 작품 중에 <고사신편古事新編>이란 게 있다. 옛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목적으로 쓴 글로서, 고사의 허구성을 찾아내어 신랄하게 비판했다.
루쉰은 그 작품을 통하여 우禹 임금의 기록에 대해서도 난도질을 했다. 우가 천하의 평화를 위해 애쓰느라 7년만에 자기 집 앞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장면. 역사에서는 이를 감동적 교훈적으로 표현했다. 과연 실제로 우의 부인이라면 어찌했을까? 루쉰은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집나간 지 오래된 남편을 찾아간 부인에게 궁지기는 우가 여자와 아이는 궁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면서 가로막는다. 기가 찬 우의 부인, 어찌 이런 쌍소리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쳐 죽일 것들아! 제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와 보지도 않는 놈이 무슨 벼슬이냐? 이런, 양심도 없는 놈! 아비(곤)처럼 유배 가서 연못에 빠져 거북이나 되어라!”
루쉰은 여성적 시선을 통해 신화의 거룩한 이면을 까발리고 있는 데, 이러한 역사에 대한 애티튜드 때문에 나는 루쉰을 존경한다. 신라와 백제의 전투를 그린 영화 <황산벌>에서도 이준익에 의해 위인의 민낯 까발리기가 유사하게 전개된다.
“임자, 살아서 치욕을 당할 껴? 명예롭게 죽어야제.”
'잊어블만 허믄' 한번씩 집에 들어오는 주제에 뜬금없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전쟁터로 떠나야겠단다. 척하면 척, 여자가 아이 낳고 결혼생활 몇 년 하다 보면 촉이 장난 아니다. 계백이 폼 잡아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란 철없는 작자가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표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다.
“거기 뜻이 정 그러다믄 거시기해야제 어짜겠소.” 하고 목을 내놓을 줄 알았는가? 바로 쌍욕이 날아든다.
“씨만 뿌려놓고 밤낮 칼쌈이나 하러 싸돌아다니던 니가 시방 그게 할 말이여? 자슥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집에 코빼기 한번 내밀지 않던 넘이 인자사 와 갖고서는 뭐시 어쩌구 어쪄?”
계백에게는 삶보다 이름이 우선이었다. “호랭이는 말이여…” 계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인은 그의 고귀한 철학을 간단하게 뒤집어 버린다.
“지럴! 아가리는 비뚤어졌어도 말을 똑바로 씨부려야제. 호랭이는 가죽 땜새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뒤지는 거여!”
김유신은 철든 즉 정치를 아는 장수, 계백은 명분만 중시하는 단순한 장수였다. 김유신이 계백을 한 수 아래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계백이 절마(저 놈)가 항우라 카믄, 나는 유방인 기라.”
우리가 칭송하는 역사적 사실 특히 인물들을 이렇게 한 꺼풀 벗겨보면 그리 대단한 신념이나 이념을 가진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에서 든 예이다. <황산벌>에서 내뱉은 백전노장 김유신은 연출자이자 작가인 이준익의 생각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다.
“강한 눔이 살아남는 기 아잉기라. 살아남은 눔이 강한 기라.”
무슨 말인가? 그는 살아서 정권을 잡은 자가 전쟁의 서사를 제 마음대로 쓰고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패자는 서사의 기술에서 배제되거나 축소 또는 왜곡되어 남게 된다. 왜?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그들에게는 자기변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 역사에서 대의, 명분, 정통성 같은 모든 것들은 대체로 그렇게 꾸며져 왔다.
어쨌거나, 우는 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우 역시 요순시대에 비할 만큼의 선정을 베풀었다. 우의 휘하에 든 구주九州(아홉 부락) 수령들도 힘을 실어주었다. 구주가 뭔가? 온세상이다. 바깥세상이 얼마나 큰 지 나가보지 않아 알 수 없었으니 당시 개념으로서는 구주九州란 곧 천하天下(온 세상)라는 뜻이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우의 고향 부락 하夏도 본디 구주 중 하나였다. 이 시점에서 똑똑한 백성들은 이미 임금이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쉽지만, 우는 스스로 지위를 낮추어 자신을 신(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로 포장하는데 이 개념은 중국사의 큰 뿌리 역할을 하게 된다.
지위는 낮추었지만, 우는 천자인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구주 수령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구리를 상납 받아 다리가 아홉 개 달린 구정九鼎이라는 큰 솥을 만들었다. 우리는 이 구정이 어느 순간 사라질 때까지 향후 한동안 중국사에서 천자의 상징물로 존재함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시대에 각종 영농법이 개발되어 생산물, 특히 농산물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잉여생산물은 곧 기득권자의 힘이 되고, 새로운 신분사회의 탄생을 유도한다. 신분사회는 아홉 부락을 포함, 주변 곳곳에 미미한 세력을 가졌던 여러 부락들이 힘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우 임금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관계가 점점 느슨해져 갔다.
치수에 전념하느라 건강을 잃은 탓인지, 오래지 않아 우는 세상을 뜬다. 죽기 전 그는 독자적이고 세습적인 왕국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아들인 계啓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힘을 가진 부락 제후들이 견제하고 나섰다.
“법대로 해유. 선양 말유!”
그 중 호씨扈氏 부락 수령의 볼멘소리가 제일 컸다. 명이 오늘내일 했지만 우의 명석한 두뇌는 여전히 정상 작동한다. 비교적 호락호락한 동이東夷 부락의 백익을 후계자로 삼고는 눈을 감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가 깜냥이 되남유? 걍 거기가 임금 하셔유.”
계략이 딱 맞아떨어졌다. 백익이란 자가 본디 우유부단한데다가 권력 욕심이 없다는 것을 우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거참, 할 수 없지 뭐. 대안도 마땅찮고 하니….”
계는 못이기는 체하고 잽싸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중국사에서 허울 좋은 선양제는 자취를 감추고 본격적인 세습제가 시작된다. 계는 나라 이름을 ‘하夏’로 명명했다. 그러고는 힘 센 부락들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해 비교적 약한 부락들과 연맹을 강화했다.
예상대로 호 부락이 세습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썩어도 준치다. 제 아무리 강한 군사력을 가졌다지만 호는 연맹체인 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계는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호 부락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수령은 살해되었고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만들어 버렸으니, 중국사에서 노예제가 시행된 최초의 예였다.
하의 역사에는 ‘최초’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갑옷도 이에 해당한다. 한때 하나라가 힘을 다해갈 무렵 나라의 중흥을 이끈 왕 소강小康 때의 일이다. 당시 이민족들과의 전쟁이 잦았는데, 소강은 명궁을 육성하여 이들을 물리친 바 있다. 그의 아들도 적의 화살을 막을 수 있는 호신복이란 것을 발명했는데 이를 ‘갑甲’이라 했다. 갑옷의 원조인 셈이다.
하나라 부흥도 잠시, 17대 걸제傑帝에 이르러 몰락하고 마는데, 중국의 사학자들은 하의 멸망 시기를 기원전 1600년 정도로 본다. 하의 몰락은 걸제의 패악과 상商 부락이 힘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사마천을 위시한 사학자들은 걸제에게만 이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천자 아닌가? 천자는 하늘의 아들이요, 유학자들이 하늘처럼 숭상해야 될 존재가 아닌가? 속죄양이 필요했다. 만만한 게 여자였다. 그리하여 등장시킨 여인이 말희末姬(시말희施末姬)였으며, 억울하게도 그녀는 중국사 최초로 나라를 망치는 여성으로 기록되고 만다.
말희는 누구인가? 인근 시施나라 부락 수령의 여동생으로서, 하나라가 시나라를 침략하여 굴복시킨 다음 공물로 빼앗아온 여자였다. 걸제가 ‘뿅’ 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말희의 미모는 빼어났었나 보다. 하지만 망국의 한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도무지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걸제는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연못을 파서 술로 채우고, 정원의 나무마다 고기를 걸어놓고는 매일 잔치를 벌였으니 문자 그대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아닌가. 이 말은 훗날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된다. 그뿐 아니었다. 비단 찢는 소리를 들으면 웃는 모습을 보이는 말희를 위해 걸제는 귀한 비단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시녀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그것을 찢게 했다. 당연히 휘하 부락에 부과되는 세수의 양도 점점 커졌으며, 세수의 양에 비례하여 각부락의 불만도 커져 갔다.
걸제에게도 독특한 취미가 하나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 구리기둥을 걸쳐 달구어 기름을 바른 다음,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을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이었다. 무사히 건너면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기름 발라 미끄럽고 달구어진 둥근 기둥을 어찌 건널 수 있겠는가? 서너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다 떨어져 불에 타 죽었다. 이 잔인한 행위를 ‘포락형炮烙刑’이라 한다.
이처럼 성격이 포악한 걸제에게도 바른 말 하는 충신이 있었다. 관용봉關龍逢이란 신하였다. 나라 살림은 엉망인데도 주지육림에만 빠져 있는 걸제에게 간언했다.
“그라믄 안 돼!”
안 되기는? 이런 말은 조폭영화에서 ‘오야붕’이 철없는 ‘꼬붕’을 질책할 때나 쓰는 말이다. 설마 그런 투로 했겠냐만, 감히 걸주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한 것이다. 그는 즉시 포락형을 당하고 만다. 이처럼 걸제의 패악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 시기에 하나라를 받들고 있던 부락 중 상商의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수령 자천을이 민심을 얻어 흥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휘하 부락의 융성은 곧 하나라에게 위협이 된다. 걸제는 자천을을 소환하여 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돌아선 민심을 거를 수는 없었다. 자천을은 하나라를 탈출하여 힘을 모았고, 걸제의 흉포함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급기야 상부락을 중심으로 하는 제후 세력에 의해 하나라의 운명은 다하고 만다.
중국 최초의 국가 하나라는 400년 간 지속되다가 17대 걸제를 마지막으로 그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는 은(상)나라의 주紂왕과 함께 ‘걸주桀紂’라는 이름으로 ‘폭군의 대명사’로 중국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
#계속해서 상나라 편이 이어집니다.
첫댓글 역사를 사투리를 넣어서 이야기하니 넘 재미 있습니다.
계속 읽을개요. 오늘 주일이라서 이만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