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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지상천국을 만들겠다’는 左派 지식인이 바로 악마!
Ⅰ. 지식인이란?
지식인들은 인류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한다. 지식인들은 인류의 미래를 豫見(예견)하는 선지자나 시대를 앞서가는 先覺者(선각자)로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 지식인들은 항상 인류와 노동자와 민중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들이 일반 사람과 접촉하는 일은 드물었다.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 나오며 일반 사람들을 동등한 친구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섬겨야 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중산층을 부르주아로 취급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들은 그들이 인민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무한의 매력을 느낀다.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非폭력적이지만 폭력에 매력을 느끼는 경향도 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공산 테러리스트들을 옹호하였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살인마 스탈린도 예찬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사상을 지도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오만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의 법칙과 대대로 물려받은 지혜와 종교에 등을 돌린다. 가장 영향력이 큰 지식인일수록 종교에 도전적이며 무신론자나 無정부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력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神(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며 誤謬(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며 전지전능의 완전한 존재는 神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神에 근접하는 神人’(demigod)일지라도 치명적인 인격적 결함 (비극적 결함, tragic flaw)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특히 계몽시대 이후 성직자 대신 사회적 스승의 자리에 오른 현대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과거의 집단지혜와 전통과 조상들의 경험수칙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완전히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담무쌍하게도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그들이 사회적 병리를 진단할 수 있고 자신들만의 知性(지성)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세속적 지식인들은 사회구조는 물론, 인간의 습관까지도 변형시킬 수 있는 공식을 고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영웅은 神命(신명)을 무시하고 天上(천상)의 불을 훔쳐서 인간 세상에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였다.
그들은 이전의 지식계급인 성직자들과는 달리 神의 從僕(종복)이거나 神의 통역자이기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이 神이 되거나 神의 兄(형)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세속적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신념에 오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자신들을 그 누구의 통제나 간섭도 받을 필요가 없는 절대적 존재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천상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고 머리 숙일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사상의 호로 자식’과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저술가인 폴 존슨(Paul Johnson)은 자신의 저서인 《지식인(Intellectuals, 1988)》에서 이들 현대 지식인들의 악마적 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지식인은 주로 인간의 생존조건에 바탕을 둔 現實(현실, reality)과 遊離(유리)된 이상주의를 유아독존적으로 강변하는 좌파 지식인이다. 이들은 루소(Rousseau), 칼 마르크스(Karl Marx), 입센(Ibsen), 톨스토이(Tolstoy),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브레히트(Brecht),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sel), 사르트르(Sartre), 촘스키(Chomsky) 등 현대의 정치 경제 문학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至大(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식인들이다.
이들 중 루소와 마르크스에 대한 폴 존슨의 비판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두 지식인이야말로 1억의 인류를 학살하며 20세기 현대에 極惡(극악)의 재앙을 끼진 공산주의의 원조이며 좌파 지식인들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Ⅱ. 僞善(위선)의 天才(천재) 루소
루소(Rousseau)는 이런 반역적 현대 지식인의 始祖(시조)이고 元型(원형, archetype)적인 인물이며 영향력이 가장 큰 지식인이었다. 그는 현대적 프로메테우스의 모든 특징을 결합한 첫 번째 지식인이었다. 즉 자신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자신이 창안한 원칙에 따라 사회 전체를 밑바닥부터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이러한 개조는 정치적인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고 인간 행동에 있어서 본능과 直觀(직관)과 충동의 역할이 至大(지대)하다고 확신하였다. 루소는 프랑스 대혁명 10년 前에 죽었지만 다수의 同시대인들은 루소가 대혁명과 舊체제(ancien regime)의 전복에 원동력을 제공하였다고 믿었다.
루소는 사회가 자연의 원시 상태에서 도시적 세련된 문명사회(sophistication)로 진화함에 따라서 인간은 부패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기심은 훨씬 더 사악한 본능으로 변형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려는 허영심에서 서열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돈과 권력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기심은 경쟁적이 되고 탐욕스러워졌으며 타인을 형제로서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적 스승이었다.
루소의 이런 思想(사상)은 현실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였더라면 實證的(실증적) 근거가 전혀 없는 완전한 허구이며 루소 자신의 비뚤어진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경쟁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생존조건이라는 것은 현대 진화생물학자나 인류학의 이론을 빌릴 필요조차 없는 실재(reality)이다. 경쟁을 惡(악)으로 보는 이런 시각은 루소로 하여금 자연히 사유재산권을 사회악의 원천으로 보게 하였다. 그는 재산과 재산의 획득을 위한 경쟁이 타락한 인간문화를 낳았으며 그는 사회적 공작(social engineering)에 의해서 이런 문화를 개선하고 전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견해는 사회적 공작에 의해 기존사회를 평등사회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지배계급인 부유층과 특권층은 국가로 대체해야 하며 국가는 모든 국민이 복종하기로 계약을 맺은 總意(총의, General Will)의 집행기관이 된다. 총의는 항상 옳기 때문에 국가는 조직적인 문화적 공작을 통해서 국가에 대한 복종이 본능적이고 자발적이 되도록 국민을 교육시키고 세뇌시켜야 한다. 국가는 아버지이고 국민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新人間(신인간)을 창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여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도 국가가 원하는 類型(유형)의 인간을 양육해야 된다. 이것은 조지 오웰의 《1984》의 소름끼치는 전체주의 국가의 원형이 된다. 그리고 《1984》이 현실화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이고 소련이었고 과거의 중공이었다.
루소는 후안무치한 위선자였다. 그의 도덕적 허영심은 狂氣(광기)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은 비열한 감정은 전혀 나타낼 수 없는 至善(지선)의 사람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나는 너무나 우수한 인간이어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내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다… 나는 증오의 열정을 결코 가진 적이 없으며, 질투와 사악함과 복수심이 내 마음에 들어온 적이 없다… 가끔씩 화는 내지만 결코 교활하지도 않고 결코 원한을 품은 적도 없다” 등등의 낯 뜨거운 自讚(자찬)의 말을 수시로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자주 원한을 품고 간교한 술수로 원한을 풀곤 하였다. 그는 무수한 여인들을 농락하고도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일종의 괴물이었다.
루소는 자신이 인류의 친구라고 공언한 최초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류 전체를 사랑하였지만 사람들 개개인들과는 수시로 싸움을 自招(자초)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동거하는 여인을 하인처럼 혹사하고 학대하였고, 그 여인이 낳은 자식 다섯 명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 죽게 하였다. 그는 유아독존적 이기주의자여서 자신에 대한 증오는 진리와 도덕에 대한 증오와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敵에 대한 형벌은 아무리 가혹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敵들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간주하고 이들은 지옥에 영원히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틈만 나면 인류애를 나팔 불고 다니는 者가 반대세력에는 무자비했던 것이다.
Ⅲ. 증오의 化身(화신) 마르크스
칼 마르크스는 자신을 학자이고 과학자라고 하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학자도 아니고 과학자도 전혀 아니었다. 그는 진실을 발견하는 데 보다는 진실을 선포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는 詩人(시인)과 저널리스트와 도덕가의 성분이 있었다. 이 세 가지 소질이 그의 엄청나게 강령한 의지(will)와 결합하여 그를 가공할 저술가 겸 예언자로 만들었다. 실로 그는 反과학적이었다. 그는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詩를 썼고 젊은 시절에는 스스로 神의 입장이 되어서 ‘나는 인류에 엄청난 저주의 소리를 퍼붓겠노라’(I shall howl gigantic curses at mankind)라며 세상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의 ‘현존하는 모든 것은 마땅히 멸망해야 된다(Everything that exists deserves to perish)’ 같은 詩句(시구)를 즐겨 인용하였다. 現存(현존) 체제는 거대한 재앙에 직면해 있다는 이런 종말론적 세계관은 일생동안 마르크스를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다. 이런 종말론은 그의 詩에 담겨 있었고 1848년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의 배경이고 《資本論(자본론)》의 클라이맥스이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는 경제학자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 작가였다. 그는 ‘최후의 심판일’(Doomsday)이 임박하였으며 ‘역사가 심판관이고 집행관은 프롤레타리아’라고 공언하였다. 이런 詩的(시적)인 斷言(단언)은 자본주의의 죽음과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싶은 급진주의적 독자들에게는 매혹적인 예언으로 들렸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최후의 심판’ 개념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료가 아니고 詩的인 영감의 소산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개념은 예술적 비전이지 과학적 비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詩的 비전을 학문적 전문용어를 이용하여 정교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다.
마르크스는 돈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돈이 세상의 神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세계와 인간과 자연이 고유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돈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정치 권력도 金權(금권)을 섬기는 채무자의 위치로 전락하였으며 그래서 그의 도덕적 사명은 금권을 가진 有産階級(유산계급, bourgeois)의 타파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헤겔(Hegel)의 변증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한쪽에는 재산과 자본과 금권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이 있고 다른 쪽에는 새로운 구원세력인 無産(무산, proletariat)계급이 있다. 혁명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계급을 완전히 해체하고 계급 없는 사회를 창출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이 아니고 계급을 해체하는 구원과 재생의 세력이기 때문에 역사도 없고 역사법칙에 지배를 받지도 않으며 궁극적으로 역사를 終焉(종언)시킨다. 이것은 유태교의 메시아 개념과 동일하다. 말세에 구세주가 나타나서 모든 악의 세력을 제압하고 1000년 왕국을 건설하여 영원무궁토록 福樂(복락)을 누리게 할 것이라는 기독교적 종말론과도 판에 찍은 듯이 유사하다. 프롤레타리아는 메시아이고 구세주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종말론은 反과학적이며 實在(실재)와는 거리가 먼 허구이다. 그의 詩的인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가 현실과의 접촉이 거의 차단된 상아탑 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교정 불능의 완전한 책상물림이었다. 세상의 그 누구도 그를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한 번도 공장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의 평생 동지이자 그를 평생 먹여 살린 엥겔스(Engels)도 그를 노동 현장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연구나 저술에서 事實(사실, facts)은 중요하지 않았다. 事實은 그가 이미 想定(상정)한 결론을 보완하는 부수적 자료에 불과하였다.
그의 저술 활동의 완결판인 《자본론》도 경제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으로서가 아니라 도덕철학의 표출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산업과정과 소유원칙에 대해 이성을 초월하여 거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한 인간의 조리가 없고 모순에 가득찬 說敎(설교)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본론》은 자본의 순환, 특히 1860년대의 경제이론을 원칙도 없이 너절하게 늘어놓은 지루한 600페이지의 경제평론집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대부분의 통계자료나 事例는 5~10년 심지어 수십 년 전의 낡은 것들이고 論證(논증)에 반대가 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사실이나 사례는 완전히 생략해 버렸다. 더구나 자신의 論旨(논지)에 맞추기 위해 대부분의 자료를 거두절미하거나 왜곡시키거나 압축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의도적 속임수이고 거짓말인 것이다.
《자본론》의 핵심이 되는 8章(장) 전부는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僞造(위조)이다. 이런 진리에 대한 범죄는 네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최신 자료가 그의 주장에 부합되지 않으면 낡은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 그는 자본주의의 전형으로서 근로조건(conditions)이 특별히 열악한 산업을 선택한다.
이 속임수는 마르크스에게 특별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속이지 않으면 8章 자체를 쓰는 게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열악한 근로조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의 命題(명제)였다. 그래서 자본이 많이 투입될수록 충분한 이윤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처우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가 장황하게 인용하는 증거자료는 대부분 소규모이고 非능률적이며 자본투입량이 불충분한― 도자기, 의류, 대장간, 제빵, 성냥, 벽지― 같은 산업화 이전의 전통 산업의 小企業(소기업)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상 마르크스는 산업화시대 이전의 근로조건을 취급하면서 자본이 많이 투자될수록 노동의 고통은 줄어든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 부족으로 기계화를 할 수 없는 업체나 업종은 근로조건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그는 자본이 축적될수록 생산수단의 기계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줄어들고 생산성 향상으로 임금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어 근로조건이 향상된다는 ‘산업 현장’의 사실을 고의적으로 외면한 것이다.
셋째는 간혹 일어나고 있던 노동자 학대나 한 열악한 노동조건의 사례를 마치 자본주의 제도의 불가피한 현상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런 현상들은 악덕 기업주들의 책임이고 노동조사관들이 이들을 탐지하고 처벌하면서 이런 사례들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넷째, 마르크스는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자 복지를 위해 영국의회가 공장관련법(Factory Acts)을 제정하고 국가기관이 이를 강력히 집행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교정이 불가능하며, 국가는 자본계급의 협력자라는 자신의 선입관에 병적으로 집착하였다. 사실상 《자본론》의 자료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국가기관(검열관, 법정 등)들에서 나온 것이다. 정부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책임이 있는 악덕업주들을 찾아내서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료를 만들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더라면(그래서 자료를 수집하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스의 推論(추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그는 《자본론》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현장 연구를 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바르게 고치려고 노력하는 소위 지배계급의 정부가 만든 증거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료를 왜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론》이 구조적으로 不정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Ⅳ. 악마는 최초의 좌파지식인
폴 존슨은 《지식인들》의 結末(결말)에서 “지식인을 경계하라”(Beware intellectuals)고 충고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수천만의 무고한 인민을 학살한 20세기 공산주의의 원흉들이 바로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권력에서 멀리 떼어놓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집단적으로 충고하고 행동하려 할 때는 특별히 의심해야 한다. 지식인들의 위원회와 회의와 연맹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의 집단이 발표하는 聲明(성명)은 믿지 말라. 이들이 정치지도자나 중요한 事案(사안)에 대해 내리는 판정은 믿지 말라.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고도로 개인주의적이지도 않고 附和雷同(부화뇌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아니며 특정 행동 패턴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쉬운 집단주의적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집단화되면 이들은 그들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집단(circles)에 극렬하게 동조한다. 그래서 그들이 집단화되면 너무나 위험하게 된다. 집단화는 그들로 하여금 정통적인 관행을 만들고 주도적인 여론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비이성적이고 파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식인들이 습관적으로 잊고 있는 것 즉 이념이나 개념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모든 독재 중에도 사상(ideas)의 냉혹한 독재가 가장 나쁘다.>
우리는 知的으로 겸손하고 神 앞에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낮추고 전통을 존중하고 발전시키려는 지식인은 믿어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어떠한 지식인, 특히 좌파 지식인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神과의 평등을 미끼로 이브를 유혹하여 에덴을 파멸시킨 최초의 좌파 지식인이 바로 악마였기 때문이다.
8-1-42
Liberals believe that things tend to get better. Wealth grows, science deepens understanding, wisdom spreads and society improves. But liberals are not Pollyannas. They saw how the Enlightenment led to the upheaval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murderous Terror that consumed it. Progress is always under threat.
And so liberals set out to define the conditions for progress to come about. They believe that argument and free speech establish good ideas and propagate them. They reject concentrations of power because dominant groups tend to abuse their privileges, oppressing others and subverting the common good. And they affirm individual dignity, which means that nobody, however certain they are, can force others to give up their beliefs.
In their different ways Rousseau, Marx and Nietzsche rejected all these ideas. Rousseau doubted that progress takes place at all. Marx thought progress is ordained, but that it is generated by class struggle and revolution. Nietzsche feared that society was descending into nihilism, but appealed to the heroic übermensch in each person as its saviour. Those coming after them did terrible things in their name.
자유주의자들은 세상사는 더 잘되어간다고 믿는다. 富(부)는 늘어나고 과학은 지식을 심화시키고 지혜는 확산되고 사회는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극단적 낙천주의자(Pollyanna)는 아니다. 그들은 계몽운동(the Enlightenment)이 어떻게 프랑스 대혁명의 봉기와 그 혁명을 消盡(소진)시킨 살인적 공포정치(Terror)로 이끌어 갔는지를 보았었다. 진보는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진보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define)를 시도한다. 그들은 논쟁과 자유언론이 훌륭한 사상을 확립하고 보급시킨다고 믿는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한(dominant) 집단이 그들의 특권을 남용하고 타인들을 억압하고 공동의 이익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권력의 집중을 배척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존엄성을 지지하며(affirm), 이것은(which) 그 누구도, 아무리 확신하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소신(beliefs)을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Rousseau와 Marx와 Nietzsche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모든 사상(자유주의사상)을 거부하였다. Rousseau는 진보가 조금이라도(at all) 일어난다는 것을 의심하였다. Marx는 진보는 일어나지만(ordained), 그것은 혁명과 계급투쟁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생각하였다. Nietzsche는 사회가 허무주의로 퇴락하고 있다고 두려워하였지만 사회의 구원자로서 각 개인 속에 내재하는 超人(초인, übermensch)에게 호소하였다 (구원을).
8-2-43
Rousseau(1712-78) was the most straightforwardly pessimistic. David Hume, Voltaire, Denis Diderot and Rousseau’s other contemporaries believed the Enlightenment could begin to put right society’s many wrongs. Rousseau, who in time became their bitter foe, thought the source of those wrongs was society itself.
In “A Discourse on Inequality” he explains that mankind is truly free only in the state of nature. There the notion of inequality is meaningless because the primitive human being is solitary and has nobody to look up to or down upon. The rot set in when a person first fenced off some land and declared: “This is mine”. “Equality disappeared, property was introduced, labour became necessary, and the vast forests changed to smiling fields that had to be watered with the sweat of men, where slavery and poverty were soon seen to germinate and grow along with the crops.”
Rousseau’s political philosophy is an attempt to cope with society’s regression from the pristine state of nature. He opens “The Social Contract” with a thundering declamation: “Man is born free, and everywhere he is in chains.” Mankind is naturally good, but political society corrupts him. Social order does not come from nature, it is founded on conventions. The social contract sets out to limit the harm.
Rousseau는 가장 직설적으로 비관적이었다. David Hume과 Voltaire와 Denis Diderot와 Rousseau의 다른 同時代人(동시대인)들은 계몽운동이 사회의 많은 악(wrongs)을 바르게 고치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in time) 그들의 격렬한 敵(적)이 된 Rousseau는 그 악의 원천은 사회 자체라고 생각하였다.
“불평등에 관한 講話(강화)”에서 그는 인류는 자연상태에서만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 원시 인간은 홀로이고 그래서 우러러보거나 내려다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는 불평등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부패(사회적, 정신적)는 한 개인이 어떤 땅에다가 처음으로 울타리로 막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선포하였을 때 생기게 되었다(set in). '평등은 사라지고 가난이 들어 왔으며 재산권이 도입되었고 노동이 필수적이 되었고 광대한 삼림지대는 노동자(men)들의 땀으로 물을 대야 하는 청명한(smiling) 농경지로 변하였으며 그곳(fields)에서는 곧 노예제도와 가난이 싹이 나서 농작물들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 보이게 되었다.“
Rousseau의 정치철학은 자연의 원시상태로부터 사회가 퇴보하는 것에 대처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사회계약론”을 천둥소리 같은 열변으로 시작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서도 사슬에 묶여 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지만 정치적 사회가 그를 타락시킨다. 사회질서(오늘날의)는 자연에서 오지 않고 관습(제도가 인위적으로 만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회계약론은 그 해악을 제한하려고 시도한다.
8-3-44
Sovereignty, he says, wells up from the people—as individuals. Government is the servant of the sovereign people and its mandate needs to be renewed periodically. If the government fails the people, they can replace it. Today that may seem like common sense. In a society founded on monarchy and aristocracy, it was revolutionary.
But society makes people selfish. “The laws are always useful to those with possessions and harmful to those who have nothing.” Religion adds to its ills. “True Christians are made to be slaves.”
Equality, though not an end in itself, thus needs to be enforced as a way to counteract the selfish desires and subservience that society breeds in individuals. “For the social compact not to be an empty formula...whoever refuses to obey the general will shall be constrained to do so by the entire body: which means nothing other than that he shall be forced to be free.”
Revolutionaries have seized on that formula as justification for the tyrannical use of violence in pursuit of a Utopia. Scholars generally dispute this reading. Leo Damrosch, in his biography, couches the notion of the general will in terms of Rousseau’s pessimism. People are so removed from the state of nature that they need help to be free. Anthony Gottlieb, in his history of the Enlightenment, quotes Rousseau as having “the greatest aversion to revolutions”.
Yet that unbroken train of thought from regression to coercion, even in its milder form, rubs up against liberalism. Whenever a person in a position of power compels someone else to act against their free, unimpeded will for their own good, they are invoking the ghost of Rousseau.
통치권은 개인으로 구성된(as individuals) 인민으로부터 솟아 나온다고 그는 말했다. 정부는 주권자인 인민의 하인이고 정부의 통치권한(mandate)은 定期的(정기적)으로 更新(갱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정부가 인민들을 실망(fail)시키면 인민은 정부를 교체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는 것(that)이 상식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군주와 귀족정치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는 그것은 혁명적이었었다.
그러나 사회는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법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有産階級(유산계급)]에게는 항상 유익하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無産階級(무산계급)]에게는 害(해)가 된다.” 종교는 사회의 병폐를 증가시킨다. “참된 기독교 신자는 노예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사회가 개인에게 增殖(증식)시키는 이기적인 욕망과 비굴함을 저지하기(counteract)위한 방법으로서 강화될 필요가 있다. “사회계약이 공허한 형식(formula)이 되지 않기 위해서 總意(총의, general will)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전체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를(개인이) 강제로 자유롭게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nothing other than=only)이다.”
혁명가들은 유토피아의 추구에 있어서 폭력의 독재적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justification) 이 방식(formula)을 이용해 왔다. 학자들은 이런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Leo Damrosch는 그의 Rousseau의 傳記(전기)에서 총의의 이념을 Rousseau의 비관주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연상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Anthony Gottlieb는 그의 계몽운동 역사에서 Rousseau를 혁명에 대해서 가장 강한 혐오감을 가진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퇴보부터 강압(정치적)에 이르기까지 저 중단 없는 일련의 사상(루소의)은 보다 부드러운 형태라도 자유주의를 억압한다(rubs up against).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는 의지에 反(반)해서 행동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사람들은 Rousseau의 유령을 연상하게 된다.
8-4-45
Marx (1818-83) believed that progress was produced not by inquiry and debate, but by class struggle acting across history. Like Rousseau, he thought that society—in particular, its economic underpinnings—was the source of oppression. In 1847, shortly before a wave of unrest swept across Europe, he wrote: “The very moment civilisation begins, production begins to be founded on the antagonism of orders, estates, classes and finally on the antagonism of accumulated labour and immediate labour. No antagonism, no progress. This is the law that civilisation has followed up to our days.”
The surplus created by labour is seized by capitalists, who own the factories and machinery. Capitalism thus turns workers into commodities and denies their humanity. While the bourgeois sate their appetite for sex and food, the workers must endure the treadmill and rotten potatoes.
Marx는 진보는 질문과 토론에 의해서가 아니고 역사 전반에 걸쳐서 작용하고 있는 계급투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도 Rousseau처럼 그는 사회가 —특히 사회의 경제적 토대는—압제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유럽을 휩쓴 불안의 파도 직전인 1847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문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생산은 질서에 대한, 소유지에 대한, 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축적 노동과 즉시 노동에 대한 적대감을 바탕으로 해서 건설되기 시작한다. 적대감이 없으면 진보도 없다. 이것이 문명이 오늘날까지 따라온 법칙이다.
노동에 의해서 창출되는 잉여가치는 공장과 기계를 소유한 자본가들에 의해서 수탈당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원자재로 변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인간성을 부정한다. 자산가들이 성욕과 식욕을 滿喫(만끽)할 동안 단조롭고 고된 일(treadmill)과 썩은 감자를 견뎌내야 한다.
8-5-46
For this reason, capitalism contains the seeds of its own downfall. Competition compels it to spread: “It must nestle everywhere, settle everywhere, establish connections everywhere.” As it does so, it creates and organises an ever-larger proletariat that it goes on to immiserate. Capitalists will never willingly surrender their privileges. Eventually, therefore, the workers will rise up to sweep away both the bourgeoisie and the proletariat and create a new—better—order.
This revolutionary job does not fall to a heroic leader, but to the workers as a class. “It is not a question of what this or that proletarian, or even the whole proletariat, at the moment regards as its aim,” Marx wrote with Friedrich Engels, his collaborator, in 1844. “It is a question of what the proletariat is, and what, in accordance with this being, it will be historically compelled to do.” Four years later, in the opening of “The Communist Manifesto” they predicted revolution: “A spectre is haunting Europe—the spectre of communism.”
이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는 몰락의 씨앗을 자신 안에 내포하고 있다. 경쟁이 자본주의가 확산하도록 강요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 둥지를 지어야 하고, 모든 곳에 정착해야 하고, 모든 곳에 관계를 맺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하면서 자본주의가 착취해서 비참하게 만드는(immiserate) 프롤레타리아를, 계속(ever) 더욱더 비대해지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를 창출하고 조직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결코 자발적으로 그들의 특권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유산계급) 둘 다를 소탕하고 새롭고 더 좋은 질서를 창조할 것이다.
이 혁명과업은 한 명의 영웅적인 지도자가 아니고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에게 맡겨진다. “그것(혁명 과업)은 현 時點(시점, moment)에서 이 프롤레타리아 또는 저 프롤레타리아, 심지어 全 프롤레타리아가 목표로 간주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Marx는 그의 협력자인 Friedrich Engels와 함께 1844년에 썼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무엇이냐의 문제이고 이 존재(being,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부합해서 그것이 역사적으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4년 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그들(Marx와 Engels)은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고 있다―공산주의 유령이(라고 선언하였다).
8-6-47
Liberals believe that all individuals share the same fundamental needs, so reason and compassion can bring about a better world. Marx thought that view was at best delusional and at worst a vicious ploy to pacify the workers.
He scorned 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 manifesto for the French revolution, as a charter for private property and bourgeois individualism. Ideologies like religion and nationalism are nothing more than self-deception. Attempts to bring about gradual change are traps set by the ruling class. The philosopher Isaiah Berlin summed it up in his book on Marx: “Socialism does not appeal, it demands.”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은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理性(이성)과 同情(동정)이 보다 좋은 세계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Marx는 그런 관점은 기껏해야 망상적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한 사악한 책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선서인 인권선언을 사유재산과 부르주아 개인주의를 위한 헌장(charter)이라며 비웃었다. 종교나 민족주의같은 관념(ideologies)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점진적 변화를 일으키려는 시도는 지배계급에 의해 설치된 덫이다. 철학자 Isaiah Berlin은 그의 Marx에 관한 저서에서 “사회주의는 간청하지 않는다. 그것은 요구한다(당연한 권리로서)”라고 사회주의를 요약하였다.
8-7-48
Yet Marx underestimated the staying power of capitalism. It avoided revolution by bringing about change through debate and compromise; it reformed itself by breaking up monopolies and regulating excesses; and it turned workers into customers by supplying them with things that in his day would have been fit for a king. Indeed, in his later years, as Gareth Stedman Jones, a recent biographer, explains, Marx was defeated by the effort to show why the economic relations between capitalist and worker necessarily had to end in violence.
Marx nevertheless stands as a warning against liberal complacency. Today outrage is replacing debate. Entrenched corporate interests are capturing politics and generating inequality. If those forces block the liberal conditions for general progress, pressure will once again begin to rise.
Whereas Marx looked to class struggle as the engine of progress, Nietzsche (1844-1900) peered inward, down dark passages into the forgotten corners of individual consciousness. He saw a society teetering on the brink of moral collapse.
그러나 Marx는 자본주의의 耐久力(내구력)을 과소평가했었다. 자본주의는 논쟁과 타협을 통해서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혁명을 피하였다. 자본주의는 독점을 분쇄하고 과욕(excesses)을 규제함으로써 자신을 개혁하였으며 Marx의 시대에서는 王이나 누릴 수 있었을 물품들을 공급함으로써 노동자들을 고객으로 변화시켰다. Gareth Stedman Jones가 최근의 Marx 傳記(전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Marx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경제적 관계가 반드시 폭력으로 결말나야 한다는 이유를 보여주려는 노력 때문에 패배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arx는 자유주의의 자기만족에 대한 경고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stands). 오늘날 폭력이 논쟁을 교체하고 있다. 확고부동한(참호 안에 있는 것처럼) 회사의 이익추구 활동이 정치를 점령하고 불평등을 생성하고 있다. 그런 세력들이 전체적 발전을 위한 자유주의적 조건들을 봉쇄하면 사회적 압력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Marx가 계급투쟁을 발전의 動力(동력)으로 간주한 반면에 Nietzsche는 인간의 내면을 향해서(inward), 개인의 의식의 잊혀진 구석 안으로 가는 캄캄한 통로 아래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8-8-49
The will to power
Nietzsche sets out his view of progress in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written in 1887, two years before he was struck down by insanity. In writing of extraordinary vitality, he describes how there was a time in human history when noble and powerful values, such as courage, pride and honour, had prevailed. But they had been supplanted during a “slave revolt in morality”, begun by the Jews and inherited by the Christians under the yoke of the Babylonians and later the Romans. Naturally, the slaves elevated everything low in themselves that contrasted with their masters’ nobility: “The miserable alone are the good… the suffering, deprived, sick, ugly are also the only pious, the only blessed…”.
The search for truth remained. But this has led ineluctably to atheism, “the awe-inspiring catastrophe of a 2,000-year discipline in truth, which in the end forbids itself the lie involved in belief in God.” “God is dead…” Nietzsche had written earlier. “And we have killed him.”
권력의지
Nietzsche는 정신이상으로 쓰러지기 2년 전인 1887년에 쓴 “도덕 혈통論(론)”에서 진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특별한 활력이 있는 글에서 그는 인류 역사에서 어떻게 용기, 자부심, 명예와 같은 그런(such as) 고귀하고 강력한 가치가 지배적이었던 때가 있었는지를 記述(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들(they)은 바빌로니아人들과 그 후 로마人들의 멍에(속박) 아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되고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물려받게 된 “도덕에 있어서 노예들의 반란”기간 동안에 찬탈되어 버렸다. 자연히 노예들은 주인의 고귀함과 대조되는, 그 자체로 저열한(low) 모든 것을 高揚(고양)시켰다: “鄙陋(비루)한 것만이 善(선)이고… 가난하고 병들고 추악한 자들이 또한 유일한 신앙인들이고 축복받는 사람들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피하게 무신론과 “2000년간의 진리 훈련의 장엄한 파멸적 대재앙(catastrophe)으로 이끌었고 (2000년동안 단련되어 온 진리가 파멸되는 재앙) 이 재앙은 결국 神에 대한 믿음에 포함되어 있는 거짓을 밝히지 못하게(forbids itself) 하고 있다. '神은 죽었다…” Nietzsche는 이전에 썼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8-9-50
It takes courage to stare into the abyss but, in a life of pain and loneliness, courage was something Nietzsche never lacked. Sue Prideaux, in a new biography, explains how he tried desperately to warn the rationalists who had embraced atheism that the world could not sustain the Christian slave morality without its theology. Unable to comprehend suffering in terms of religious virtue or the carapace of virtue vacated by religion, humanity was doomed to sink into nihilism, in a bleak and meaningless existence.
Nietzsche’s solution is deeply subjective. Individuals must look within themselves to rediscover noble morality by becoming the übermensch prophesied in “Thus Spake Zarathustra”, Nietzsche’s most famous work. Characteristically, he is vague about who exactly an übermensch is. Napoleon counted as one; so did Johann Wolfgang von Goethe, the German writer and statesman. In his lucid survey of Nietzsche’s thought, Michael Tanner writes that the übermensch is the heroic soul eager to say Yes to anything, joy and sorrow alike.
深淵(심연)을 응시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Nietzsche는 고통과 고독의 삶 속에서도 용기는 그의 삶에서 결코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Sue Prideaux는 새로운 전기에서 Nietzsche가 무신론을 포용한 이성주의자들에게 기독교적 노예도덕은 신학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종교적 도덕의 관점에서(in terms of), 혹은 종교에 의해서 텅 비게 된 도덕적 껍질의 관점에서(관점 때문에), 고통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음울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살면서 (in existence) 무의미한 허무주의 속으로 침몰할 운명이었다.
Nietzsche의 해결방식은 매우 주관적이었다. 개인은 Nietzsche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Zarathustra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예언된 超人(초인)이 됨으로써, 고귀한 도덕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특징적으로, 그는 초인이 정확히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Napoleon이 초인으로 간주되었다. 독일의 작가이고 정치인인 Johann Wolfgang von Goethe도 그렇게 간주되었다. Nietzsche의 사상에 대한 명쾌한 조사에서 Michael Tanner는 초인은 슬픔이든 즐거움이든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Yes라고 기꺼이 말하는, 영웅적인 혼이라고 쓰고 있다.
8-10-51
Nietzsche is not susceptible to conventional criticism—because ideas pour out of him in a torrent of constantly evolving thought. But both left and right have found inspiration in his subjectivity; in linguistic game-playing as a philosophical method; and in how he merges truth, power and morality so that might is right and speech is itself an assertion of strength. He is father to the notion that you cannot divorce what is being said from who is saying it.
The illiberal view of progress has a terrible record. Maximilien Robespierre, architect of the Terror, invoked Rousseau; Joseph Stalin and Mao Zedong invoked Marx; and Adolf Hitler invoked Nietzsche.
The path from illiberal progress to terror is easy to plot. Debate about how to improve the world loses its purpose—because of Marx’s certitude about progress, Rousseau’s pessimism or Nietzsche’s subjectivity. Power accretes—explicitly to economic classes in the thought of Marx and the übermenschen in Nietzsche, and through the subversive manipulation of the general will in Rousseau. And accreted power tramples over the dignity of the individual—because that is what power does.
Liberalism, by contrast, does not believe it has all the answers. That is possibly its greatest strength.
Nietzsche는 전통적 비판에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그로부터 사상들(ideas)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사상의 急流(급류) 속에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급히 흐르는 강물처럼 많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좌익과 우익 둘 다 그의 주관성에서 영감을 발견해왔다. 철학적 방법으로서의 언어적 게임에서; 그리고 어떻게 진리와 권력과 도덕이 융합하여 힘이 정의(right)가 되고 언어(speech)는 그 자체로서 힘(strength)의 주장이 되는가에서(좌우 모두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는 말해지고 있는 것(내용)과 그것을 말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개념의 아버지이다.
진보에 대한 반자유주의적(illiberal) 관점은 가공할 역사(record)를 가지고 있다. 공포정치(Terror)의 설계자인 Maximilien Robespierre는 Rousseau로부터 영감을 받았다(invoked). Joseph Stalin과 Mao Zedong은 Marx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Adolf Hitler는 Nietzsche로부터 배웠다(invoked).
반자유주의적 진보로부터 공포정치(terror)로 가는 길은 음모하기가 쉽다. 세상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은 그 목표를 상실하게 된다 —진보에 대한 Marx의 확신감, Rousseau의 비관주의 혹은 Nietzsche의 주관주의 때문에(목표를 상실하게 된다). Marx의 사상에서는 권력은 중산계급과 결탁하여 커지고, Nietzsche의 사상에서는 초인과 결합하여 커지고 Rousseau에서는 국민총의(general will)의 顚覆(전복)적인 조작을 통해서 커진다. 그리고 증폭된 권력은 개인의 존엄을 짓밟는다 —그것이 권력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유주의는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도 자유주의의 가장 위대한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