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히 방향을 바꾸어 날아가는 새떼처럼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아침에 하늘로 날아가던 새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어 급선회하는 그 삽상한 변화를. 까맣게 사라져가던 점들이 황금빛으로 번뜩이면서,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 그 긴장. 그때 당신은 한 세계가 바뀌고 운명이 달라지는 새로운 순간의 자세를 볼 것이다.
남루한 거지들이 제왕 같은 황금빛 관을 쓰고, 옆으로 기어가던 게들이 이제는 똑바로 집게발을 세워 수평선을 향해 꼿꼿이 앞으로 나가고, 흩어졌던 꽃잎들이 다시 본래의 나뭇가지로 돌아가 제자리를 찾고, 늑대와 토끼가 나란히 누워 초원에서 낮잠을 자고, 월요일 다음에 일요일이 오고 목요일 다음에 예고 없이 토요일이 오는 놀라운 달력, 그리고 별안간 장송곡이 결혼 행진곡으로 바뀌고, 도시가, 우울한 우리들의 육중한 그 도시가 마법의 융단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르는 경쾌한 변모.
당신은 그 순간에 그러한 환각을 볼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도 그렇지 않은가? 새들처럼 떼지어 날아간다.
상상력으로 부푼 깃털을 세우고 끝없이 날개를 펄럭이면서, 지상의 중력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구름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 방향을 잡는다. 언어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파충류처럼 배를 땅에 끌면서 ‘높이’가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평면’ 속에 영원히 갇혀 지냈을 것이다.
우리를 감금하고 제압하는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서 우리들의 사고와 행동은 날개를 갖고 있는 언어로 바뀐다. 역사(轢死)하지 않는 도시의 새들처럼 신호등 없는 하늘을 자유로이 건너며 굴뚝보다 높은 자리에서 거리의 지도를 굽어본다. 시인은 언어의 새떼에게 모이를 주고 있기 때문에 사자나 코끼리를 키우는 사육사보다 강하다.
3차원을 나는 도시의 새들아. 벌써 여름이 지나갔다. 제비처럼 신속히 날아가는 비상법(飛翔法). 발톱을 숨기고 침묵처럼 조용히 떠 있는 소리개의 비상. 날개를 펴고 무지개처럼 내려오는 공작새의 화려한 비상.
시인의 새들아! 여름의 긴긴 대낮 속에서 우리는 그 비상법을 터득했다. 이제는 떼지어 날아가던 새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어 급선회하는 눈부신 순간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정체하지 말거라. 여기는 땅이 아니다. 동과 서, 남과 북이 훤히 뚫려 있는 입체의 공간.
언어는 시인의 새. 높고 빠르게 그리고 유유히 새로운 방향을 여는 비상법으로 돌연히 다가오는 상쾌한 너의 깃소리를 들리게 하라.
지은이: 이어령
출 처 : 『문학사상』 1977. 10
아 람
가을 숲을 걷는 걸 참 좋아한다. 색채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이다. 시월이면 온 세상이 색을 바꾸고 십일월이면 찬란하게 흔들린다. 그러고 보면 시월이란 말도 참 좋다. 수월하게 들리는 시월이라는 말. 술술 지나가는 가을이다. 서늘해지는 십일월이 되면 가벼운 코트를 챙겨 입고서 캠퍼스를 오래도록 산책하곤 했다.
내가 다닌 대학은 전국에서 캠퍼스가 두 번째로 큰 곳이었다. 규모만큼이나 학교 안에는 거대한 호수와 넓은 숲길이 있었다. 사실 그 숲 덕분에 그때를 견딜 수 있었다. 대학원을 다니기가 참 빠듯했던 시절, 시 쓰는 게 너무 좋아서 매일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쓰고 읽으며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시를 쓰다가 막히면 외투를 걸치고 도서관 뒤 숲길로 향했다. 그 숲을 걷고 돌아와서 다시 시를 쓰려고 했다.
참 많은 것을 그 숲에 묻었다. 사랑하는 이의 부고를 듣고 그 숲을 걸었고, 장례를 다 마치고 와서도 그 숲을 걸었고, 엄마가 아플 때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도 그 숲을 걷고 또 걸었다. 형편이 어렵고 눈앞이 캄캄해도 가을 숲만큼은 정말이지 온갖 것들로 넉넉한 품을 열어주었다.
한번 세상에 뿌리를 내리면 수백 년을 산다는 은행나무, 정갈한 중국단풍나무, 갈색으로 물든 토종 상수리나무, 건물보다 거대한 메타세쿼이아. 온갖 나무의 물든 잎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 아름다워’라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푸름 속에 그토록 맹렬한 색채가 조용히 엎드려 있었던 걸까.
그 시절,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라는 개념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도토리라는 작은 씨앗 속에는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말을 참 좋아했다. 비록 지금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하지만 언젠가는 내 키보다 큰 사랑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엄마도 나아질 거라고, 시도 환해질 거라고 그렇게 소망하는 것들을 오래 믿었다. 단지 지금 우리는 도토리니까 우리 속에 묻힌 미래를 믿어보자고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걷곤 했다. 눈앞이 숲과 꿈으로 일렁거렸다.
갑자기 이렇게 숲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놀라운 리듬을 선물하고 싶어서다. 오늘은 가을 숲을 만끽할 수 있는 예 쁘장한 비법을 공유해 보려고 한다. 준비물은 돗자리와 넉넉한 장우산, 그리고 가볍게 먹기 좋은 견과류. 보온병이 있다면 녹차나 둥굴레차를 챙겨도 된다. 이렇게 몇몇 준비물을 들고 숲으로 간다. 인적 드문 숲의 중심 쪽으로. 새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는 곳으로. 그렇게 고요에 도달했을 때 상수리 나무를 찾아서 그 아래에 가만히 서는 것이다. 한국에는 상수리나무가 아주 흔한데 그 아래에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아마 하늘에서 잎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청설모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것처럼 가볍고 청신한 소리가 들릴 것이다. 십일월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그게 바로 아람 떨어지는 소리다. 대부분은 도토리이거나 잘 익은 밤일 것이다. 간혹 모감주 열매가 섞여서 떨어질 때도 있다. 그 작고 경쾌한 소리를 실컷 듣다가 돗자리 위에 앉아서 우산을 펼친다. 생각보다 많은 도토리가 우산 위에 ‘톡톡톡’ 하고 떨어져 내릴 것이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도토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가벼워서 맞아도 깜짝 놀랄 뿐이지 아프진 않으니까.
포근한 가을 햇살에 충분히 익은 열매가 스스로 몸을 벌린다. 그렇게 떨어질 준비를 마친 씨앗을 아람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은 그런 상태나 그런 열매를 아람이라고 귀여운 이름을 붙였다. 떨어질 준비가 다 된 상태라니! 어떻게 떨어지는 일이 이렇게 설렐 수 있을까. 견과류를 오도독 씹으며 생각한다. 이제 이 아람들은 땅에 묻혀서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로 솟거나, 다람쥐의 몸을 데울 연료가 되거나, 때로는 어느 할머니의 검지손가락에 집혀서 쌉쌀한 도토리묵으로 거듭나겠지.
비나 눈을 제외하고도 이토록 아름다운 추락이 세상에 있다는 게 너무 예쁘다. 아람이라니, 어쩜 이름도 이렇게 귀여울까. 아담하고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다람쥐를 자꾸만 연상시킨다. 나무 아래 가만히 앉아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아람을 보게 될 것이다. 너무너무 가볍고 귀여운 열매가 노크하듯 몸을 톡톡 두드릴 거다. 몇 개쯤은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 와도 좋다. 볕 좋은 자리로 옮겨도 좋다. 그대로 둬도 좋다. 아람이니까. 스스로 솟는 꿈이 될 테니까.
나는 항상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 떨어지거나 탈락하기 일쑤였다. 신춘문예에서는 10년 넘게 떨어졌고 작은 시험에도 자주 낙방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좋아하니까! 기도하듯 매일매일 사랑하면 스스로 충만해 질 거라 믿었다.하지만 가장 큰 좌절감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장례가 끝난 몇 달 후에 찾아왔다. 당신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그때가 아마 십일월쯤이었을 것이다. 혼자 숲을 걷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혼잣말로 “보고싶어요”라고 읊조렸다. 그때 아주 작은 도토리가 톡 떨어졌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귀여운 도토리. 그 최소 단위의 우연을 응답이라고 믿고 손에 꼭 쥐고 돌아왔다.
아람은 그렇게 우아하게 떨어지는 것.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찾아오는 것. 고요한 숲에 아주 작은 바람이 불거나 고라니가 뛰기만 해도 아람은 떨어진다. 충분히 갖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스스로 열고 세상을 맞이한다. 나는 시도 꿈도 그런 아람이라고 믿는다. 때가 되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서 당신을 꼭 안아줄 것이다.
지은이: 고명재(시인) @snowypoetry
<십일 월>
이 시영
누가 마당을 쓸고 있다.
낙엽 흩날리고 날은 벌써 저무는데
바람 속에서 누가 자꾸 마당을 쓸고 있다.
<상한 갈대를 위하여>
고 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초록이 지친 곳에서 화사한 주홍과 주황과 갈색들이 피어나는 계절입니다.
시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가을은 이제 그 절정을 햫해 치솟기 시작한 듯 -
가을은 가슴에 그리움의 물결을 불러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계절에 책을 읽고 그 감동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유정독서 모임, 10월 22일 오후 6시부터 커먼즈 필드에서 시작됩니다. 이번에 읽을 작품은 <두꺼비> 입니다.
함께 읽을 작품은 아직 끝내지 못한 한강의 < 작별하지 않는다>입니다.
오는 11월 7일 토요일 '제 2회 유인순 촌장과 함께 하는 실레이야기길에서 김유정과 친구맺기 행사가 ' 진행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서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유인순 촌장과 함께 하는 <실레이야기길 걷기> 참가 모집(2026. 11) > 공지사항 | 김유정문학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