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이프문화 일반
모두가 널 버려도 내가 곁에 있어줄게, 영화 ‘바튼 아카데미’
[그 영화 어때]
신정선 기자
입력 2024.02.19.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46번째 레터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바튼 아카데미’입니다. 그래, 사람과 사람 사이 온기가 이런 거였지, 잊고 있던 마음의 화로에 소중한 불씨를 지펴주는 작품입니다. 2시간 보고 나면 연말 성탄절까지 품고 갈 따뜻함이 충전될 이 영화, 이번 주 극장에서 한 편 보신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크리스마스에 모든 교사와 학생이 집으로 떠나고, 덩그마니 남겨진 교사 폴(가운데)과 학생 앵거스(왼쪽),
주방장 메리. 세상에서 어디에도 없는 따뜻한 성찬의 시작입니다.
‘그 영화 어때' 45번째 레터에서 말씀드린 애니메이션 ‘스미코구라시’ 기억하시나요. 혼자 남겨진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버려진다는 것. 그 쓸쓸함을 온화한 파스텔 동화로 그려냈죠. ‘바튼 아카데미' 역시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원제부터가 그래요. The Holdovers., 즉 남겨진 자들입니다. 1970년대 금수저 학생들이 다니는 기숙사가 배경인데요, 성탄절을 맞아 모두가 긴 명절을 쇠러 집으로 떠납니다. 다들 신나보여요.
아, 그런데 여기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네요. 주인공 폴(배우 폴 지아마티. 이름 똑같죠. 일부러 그렇게 지었대요)과 학생 앵거스, 그리고 기숙사 주방장 메리입니다. 폴은 학생도 싫어하고 동료 교사도 싫어하는 비호감 교사인데요, 고대문명사 전공입니다. 학생들에게 날리는 학점은 죄다 F, C뿔, D뿔, C마이너스. 한 명 예외가 앵거스인데, 사실상 최고점인 B뿔을 받죠. 앵거스는 엄마가 재혼하면서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메리는 아들을 잃은 상처를 품고 있고요. 모두가 떠나는데 남겨진 세 사람은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다’는 그 기분, 입 밖으로 꺼내면 간신히 봉해둔 상처에서 피가 흐를 것 같아 말로는 못하는 그 느낌을 말없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서러움, 분노, 서글픔, 쓸쓸함, 우울함, 자괴감, 체념. 세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감정들은 함께 밥을 먹고, 어거지를 받아주고, 고함을 지르고, 소동을 피우는 사이 서로를 향한 신뢰로 바뀌어 갑니다. 그리고 정말로 바뀝니다. 폴도 앵거스도. 왜냐면 둘은 완전히 다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이거든요. 같은 우울증 약을 먹고, 같은 상처를 숨기고. 아는 척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고. 사랑이 뭔지, 사는 게 뭔지.
내가 너의 손을 잡아줄게. 퇴학 위기에 처한 앵거스에게 손을 내미는 주방장 메리.
각본, 연기, 연출 모두 빼어나고 OST도 잘 고른 영화입니다. 크리스마스 배경인 영화라 캐롤이 많이 나오는데, 앤디 윌리엄스, 템테이션즈, 스윙글 싱어즈 등 예전 가수 버전이라 훨씬 더 따뜻하게 들리더군요.
혹시 2005년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 기억하시나요? ‘바튼 아카데미'의 알렉산더 패인 감독과 폴 지아마티가 같이 만든 와인 로드무비죠. 패인 감독과 한때 부부였던 배우 산드라 오도 출연했고요. 세상이 아무리 나를 거부해도, 아니라고 해도, 날 향해 손내밀어줄 단 한 사람.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어떤 마음. 안 보였다면 꼭 보시길.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엔딩이 기다리는 작품입니다. 저는 ‘바튼 아카데미'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봤어요. 어떻게 이런 엔딩이, 다시 감탄했습니다. 디즈니플러스에 있어요.
다음 레터에선 화제작 ‘듄2′로 찾아뵙게 될 거 같습니다. 내일(월요일) 시사회인데, ‘그 영화 어때' 고정 요일인 목요일이 마침 리뷰 엠바고 풀리는 날이네요.
덧붙여. ‘바튼 아카데미' 초반에 폴의 방을 보여주는데요, 햇살을 타고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2악장 연주 영상을 아래 붙입니다. 정명훈 지휘, 조성진 연주 버전입니다. 5번 2악장이 들어간 영화는 많지만, ‘바튼 아카데미’는 특히 잘 어울리더군요. 베토벤이 무척이나 가난하고 귀도 잘 안 들리던 시절에 만든 이 협주곡에서 그 어떤 고통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들을 때마다 경이롭네요. 마감은 닥쳤는데 하나도 안 써져서 머리를 깨버리고 싶을 때, 저는 5번 2악장을 듣습니다. 다 되게 돼있어, 다 괜찮아진단다, 라고 말해주는 거 같아서요. 여러분도 다 괜찮아지는 월요일 시작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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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 어때#뉴스레터
신정선 기자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영화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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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4
too dull
2024.02.19 02:13:16
‘바튼 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사이드웨이'도 꼭 봐야겠네요.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듣는 베피협 5번 2악장이네요. 소싯적에 워낙 강렬한 느낌의 1악장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지친 마음을 위무해주는 듯한 잔잔하고 아름다운 2악장의 선율에 매료되어 한동안 입속으로 흥얼거리기까지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휴대폰을 통해 유튜브로 들으니 당시 성음사의 LP 음반이긴 했지만 스테레오 스피커로 듣던 그 때의 감동만은 못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래도 신정선 기자님 덕분에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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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육
2024.02.20 07:11:08
글을 참 잘 쓰는 기자분중에 한 분이라고 저는 그껴져서 항상 첨부터 끝까지 정독을 하고 문장마다 맛이 배어 있어서 음미하게 됩니다.이렇게 가슴속 느낌을 머리에 정리해서 손으로 나타내는지 재주가 경탄스럽습니다. 듄2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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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입니다만
2024.02.20 09:22:17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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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검무정
2024.02.20 09:07:21
기자님, 좋은 영화 평론 감사 드립니다. 다만,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넷플릭스인지, 디즈니인지 등등..보고 싶은데 어디에서 봐야 할지 찾는게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