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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會上
법화경일일법문 종지용출품 제15: 이 불사(佛事)는 생각으로 거론키 어렵나니,
이 불사(佛事)는 생각으로 거론키 어렵나니
어찌 이 일을 믿을 수 있으리오!
부처님의 득도(得道)는 매우 가까운데-1
성취(成就)하신 바는 매우 많으시니
원컨대 대중(大衆)의 의혹(疑惑)을 없애
분별(分別)해 진실(眞實)을 말씀해주소서!15-75,2
시사난사의 운하이가신 불득도심근
是事難思議 云何而可信 佛得道甚近
서성취심다 원위제중의 여실분별설
所成就甚多 願爲除衆疑 如實分別說
是事難思議이라 云何而可信이리오
佛得道甚近인데 所成就甚多하시니
願爲除衆疑하사 如實分別說하소서
1-“是事難思議 云何而可信 佛得道甚近”은! 석존을 원교여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미륵보살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불사(佛事)는 생각으로 거론키 어렵나니 어찌 이 일을 믿을 수 있으리오! 부처님의 득도(得道)는 매우 가까운데..”
2-만약 석존을 대통지승불 당시에 16명의 왕자시절에 입각하여, 지금 영산회상에 모든 성문과 연각을 위해 교화영역을 처음 만들었다고 보았을 경우라도, 이 16명의 왕자는 모두 원교여래의 계위에 오른 부처님이 되신다.
3-석존의 교화영역 안은 넷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석존의 사종교화영역(四種敎化領域)이라 한다. 첫째 방편교화영역. 둘째 진실교화영역. 셋째 결집교화영역. 넷째 유통교화영역. 이다.
4-첫째 방편영역이란! 무량한 겁을 걸치며 교화영역 안에 삼승인을 위해 보살도를 행한 시절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모든 부처님은 비록 이미 불과에 올랐다고 해도 중생을 교화할 때에는 보살도(菩薩道)라 부른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 보살이 닦는 보살도와 시방제불이 신분을 숨긴 채 보살도 행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2-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보살이 보살도를 닦는 것은 중생을 교화해 해탈의 경지에 올려놓는 것이지만, 부처님이 행하는 보살도는 중생을 교화해 불도에 올려놓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3-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내가 무량한 겁을 걸치면 너희들 성문과 연각을 교화하였느니라.”하시었고, 성문 역시 이르시길, “저희들은 무량한 겁을 걸치며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시었다.
4-둘째 진실교화영역이란! 교화영역 안에 모든 제자들을 법화경의 회상에 참석을 시키는 일을 말한다. 법화경에서 석존이 이르시길, “삼승의 계위는 모두 방편이고 일승만이 진실이다.”하시었고, 또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과 보살승(菩薩乘)은 모두 방편승(方便乘)이고, 오로지 여래승(如來乘)만이 진실승(眞實乘)이다.”라고 말씀을 하시었다.
5-셋째 결집교화영역이란! 부처님 당시에 두 부류의 신분을 가진 제자가 있다. 일(一)은 사리불과 목건련과 아난과 같이 이미 큰 보살의 계위에 올랐으나, 성문의 근기를 위해 신분을 숨긴 채, 성문의 근기를 가진 중생을 위해 성문이 되는 과정을 함께 밟아가는 제자를 말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르시길, “나의 제자들은 이미 큰 보살이나 성문의 근성을 가엾게 여겨 신분을 숨긴 채 나의 불사를 돕고 있다.”하시었다.
6-이(二)는 실제에 있어 무량한 겁에 석존에게 교화를 받았으나, 아직도 성문의 계위에 오르지 못한 제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실제로 석존의 출현으로 인해 다시 가르침의 교화영역 안에 왔으나, 아직도 계위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확실하게 계위에 올려놓기 위해 석존의 출현의 혜택을 보게 되는 제자들이다. 열반경에서 이르시길, “저 선인(仙人)은 나의 마지막 제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난이여! 저 선인을 교화하기 위해 그대가 찾아가 데리고 오라. 내가 저 마지막 제자를 위해 설법을 해주리라.”하시었다.
7-따라서 2500년 전 당시에 석존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팔만사천의 모든 경전의 가르침을 펼친 것은.. 모두 실제에 있어 계위에 오르지 못한 제자들과 이미 계위에 올라 석존의 불사를 돕기 위해 출현한 제자들을 모두를 더 높은 계위와 공덕에 올려놓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결집교화영역이라 한다.
8-다시 말해 무량한 겁 전에 시작한 교화영역의 끝을 보기 위해 석존이 2500년 전에 출현하신 것이고, 이때 부왕과 어머니와 사촌과 보살과 백마와 성문들 중에 일부분은 모두 석존의 불사를 돕기 위해 함께 출현한 제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9-따라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경전을 결집할 당시에 아난을 중심으로 경전을 결집하였다고 하여 아난을 성문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 아난은 이미 무량한 겁 전에 큰 보살이시고, 성문의 신분을 한 것은 삼승인 중에 성문의 근기를 교화하기 위한 것일 뿐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10-또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고, 경전을 결집할 때에 성문의 계위에게 그 큰 불사를 맡기는 법이 없다. 따라서 아난과 결집 당시에 성문의 계위만 있는 줄로 알면 안 된다.
11-법화문구에서 결집 당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천태대사가 말씀을 하시었다.
「내가 듣자오니」는 혹 「듣기를 이 같이 하오니」로 하는 수도 있는데, 대개 경본(經本)이 같지 않은지라 앞뒤를 서로 바꾸어 든 것뿐이다.
이제 예를 따라 네 가지 관점에서 해석컨대 대론(大論)에 이르되, 「이근(耳根)이 파괴되지 않아 멀쩡한 터에,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곳에 있고 거기에 마음을 일으켜 듣고자 하는 작용이 발동해서, 이런 여러 연(緣)이 결합되어 듣는다는 일이 성립한다.」했으니, 그러므로 「내가 듣자오니」라 한 것이다.
질문. 「응당 〈귀로 듣자오니〉라 해야 할 것인데 왜 〈내가 듣자오니〉라 말했는가.」
대답. 「나는 이근(耳根)의 주인이므로 〈나〉를 들어 여러 연을 그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이는 세계실단(世界悉檀)의 해석이다.
我聞者.或聞如是 蓋經本不同 前後互擧耳.今例爲四釋.大論云.耳根不壞 聲在可聞處.作心欲聞.衆緣和合 故言我聞.問.應言耳聞.那云我聞.答.我是耳主.擧我攝衆緣.此世界釋也.
아난(阿難)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으니 대중이 다 슬퍼 부르짖어, 전에 여래를 뵙더니 이제는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음을 듣는다 하여 무학(無學)들이 하늘에 날아올라 게송(偈頌)을 설했다 한다. 또 불화경(佛話經)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문수보살이 결집(結集) 때 먼저 제목을 부르고, 다음에 「이 같이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으니 때에 대중들이 실피 부르짖었다 했다. 이는 위인실단(爲人悉檀)의 해석이다.
阿難登高稱我聞.大衆應悲號.適見如來 今稱我聞.無學飛騰說偈.佛話經明.文殊結集先唱題 次稱如是我聞.時衆悲號 此爲人釋也.
아난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어 대중의 의혹을 제거했다고도 해석된다. 아난의 몸은 부처님과 아주 닮았으나, 부처님보다 키가 작음이 세 손가락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대중이 의혹하되, 석존께서 거듭 출현하심인가 여기기도 하며, 혹은 다른 세계의 부처님께서 이곳에 오심인가 하기도 하며, 혹은 아난이 성불함인가 여기기도 했는데, 만약 아난이 「내가 듣자오니」라 말한다면, 이 세 가지 의혹이 제거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대치실단(對治悉檀)의 해석이다.
阿難登高稱我聞遣衆疑.阿難身與佛相似.短佛三指 衆疑釋尊重出.或他方佛來.或阿難成佛.若唱我聞 三疑卽遣.此對治釋也.
아난은 학인(學人)이라 세속의 도리를 따라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었던 것이나, 절대적 도리 속에는 「나」도 없고 「들음」도 없다고 해야 한다. 고래의 여러 해석들은 똑같이 인연의 한 가지 해석만을 써왔을 뿐이라 할 것이다.
阿難學人.隨俗稱我聞.第一義中無我無聞.古來衆釋 同是因緣一意耳.
가르침의 종류에 입각해 해석컨대, 석론(釋論)에서 이르되 「범부에 세 가지 아(我)가 있으니 견아(見我) 만아(慢我) 명자아(名字我)를 이른다. 그리하여 학인(學人)에게는 두 가지 아(我)가 있고, 무학(無學)에게는 한 가지 아(我)가 있는 것이 된다.」고 했다. 아난은 학인이기에 사아(邪我)는 없고, 능히 만아(慢我)는 누르는 터이나, 세속의 명자(名字)를 따라 아(我)라 일컫는대도 허물될 것은 없다. 이는 삼장교(三藏敎)의 취지를 써서 아(我)를 해석함이다.
約敎解釋者.釋論云.凡夫三種我.謂見慢名字.學人二種.無學一種.阿難是學人.無邪我 能伏慢我.隨世名字 稱我無咎.此用三藏意釋我也.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 이르되, 「사구(四句)에서 아(我)라 일컫는다면 다 사견(邪見)에 떨어진다. 부처님의 정법(正法) 중에는 본디 아(我)라는 것이 없거니,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랴.」했다. 이는 통교(通敎)의 취지를 써서 아(我)를 해석함이다.
十住毘婆沙云.四句稱我 皆墮邪見.佛正法中無我 誰聞.此用通敎意也.
대경(大經)에 이르되, 「아난(阿難)은 다문(多聞)한 사람이라, 아(我)와 무아(無我)가 불이(不二)임을 알되, 아울러 아와 무아를 분별한다.」하셨다. 이는 별교(別敎)의 취지로 아(我)를 해석한 것이다.
大經云.阿難多聞士.知我無我而不二.雙分別我無我.此用別敎意也.
또 아난은 아(我)와 무아(無我)의 불이(不二)임을 알되, 방편으로 시자(侍者)가 되어 여래의 무애(無애)한 지혜를 전했으니, 자재한 음성으로 방편의 가르침을 전하며 진실의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서 무슨 불가(不可)함이 있었으랴. 이는 원교(圓敎)의 취지를 써서 아(我)를 해석함이다.
又阿難知我無我而不二.方便爲侍者.傳持如來無 智慧.以自在音聲 傳權傳實.有何不可.此用圓敎釋我也.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 세 가지 아난(阿難)을 밝힌 것이 있다. 아난타(阿難陀)라 함은 여기서 번역해 환희(歡喜)라 말하니 소승의 가르침을 수지하며, 아난발타(阿難跋陀)라 함은 여기서 번역해 환희현(歡喜賢)이라 말하니 뒤섞인 가르침을 수지하며, 아난사가(阿難娑伽)라 함은 여기에서 번역해 환희해(歡喜海)라 하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지한다 하여 구별했다. 여기에다가 아함경(阿含經)에서는 전장아난(典藏阿難)이 있어서 보살의 가르침을 수지한다 했으므로 대개 한 사람인 아난이 사덕(四德)을 구비하고 있음을 가리키며, 네 가지 법문(法門)을 전하여 수지함이 되니, 그 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 할 수 있다…….
又正法念經.明三阿難.阿難陀 此云歡喜.持小乘藏.阿難跋陀 此云歡喜賢.受持雜藏.阿難娑伽 此云歡喜海.持佛藏.阿含經有典藏阿難.持菩薩藏.蓋指一人具於四德.傳持四法門 其義自顯(云云).
본적(本迹)에 입각해 해석컨대, 만약 회입(會入)하지 못했다면, 아난이 세속의 관례를 따라 나〔我〕라 불렀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만약에 수적신(垂迹身)임을 털어놓고 본신(本身)을 드러낸다면 공왕불(空王佛) 계신 곳에서 동시에 발심(發心)한 사이건만, 방편으로 법을 전하는 사람이 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어찌 못하는 일이 있으시랴.
本跡釋者.若未會入.可言阿難隨世名我.若發迹顯本.空王佛所 同時發心.方便示爲傳法之人.何所不能.
관심(觀心)에서 해석컨대, 인연에서 생겨난 사물들을 관(觀)하면, 그 모두가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임을 알게 된다. 즉공이란 아(我)가 무아(無我)임을 말하며, 즉가란 아(我)를 분별함을 말하며, 즉중이란 진묘(眞妙)의 아(我)다.……
觀心釋者.觀因緣所生法.卽空卽假卽中.卽空者 我無我也.卽假者 分別我也.卽中者 眞妙我也(云云).
「이 같이 내가 듣자오니」의 「듣는다」는 말을 해석컨대, 아난은 부처님께서 득도(得道)하시던 날 밤에 태어나 부처님에게 이십여 년이나 시중든 사람이므로, 부처님에게 시중들지 않았을 때의 설법은 응당 듣지 못했을 것이다. 대론(大論)에서 이르되, 「아난이 법을 결집(結集)할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부처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은 내가 그때 뵙지 못했으니 이 같이 내가 외우는 가르침은 차례로 전하여 들은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마땅히 그 모두를 들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釋聞者.阿難佛得道夜生.侍佛二十餘年.未侍佛時 應是不聞.大論云.阿難集法時自云.佛初轉法輪.我爾時不見.如是展轉聞.當知不悉聞也.
옛사람의 해석에 이르기를 「아난은 불각삼매(佛覺三昧)를 얻었기에, 그 힘으로 보아 스스로 능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舊解云.阿難得佛覺三昧 力自能聞.
보은경(報恩經)에 이르되, 「아난은 네 가지 소원을 들어 주시도록 요구하여, 제가 듣지 못한 경을 원컨대 부처님께서 거듭 설해 주소서 하고 말씀드렸다.」하고, 또 이르되 「부처님께서 은밀히 그를 위해 이를 설해 주셨다.」고 했다. 또 태경(胎經)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금관(金棺)으로부터 금비(金臂)를 내사, 거듭 아난을 위해 입태상(入胎相)을 나타내 보이셨다.」했다. 이리하여 초기의 여러 경도 다 들을 수 있었거니, 하물며 그 후 다른데서 설해진 경들이겠는가.
報恩經云.阿難求四願.所未聞經 願佛重說.又云 佛口密爲說也.胎經云.佛從金棺出金臂.重爲阿難現入胎之相.諸經皆聞 況餘處說耶.
이 글에서 이르되, 「아난이 기(記)를 얻고 나서, 곧 자기의 본원(本願)을 생각해내어 옛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기억함이 다 오늘에 들은 것과 같았다.」했다. 이는 인연석(因緣釋)이다.
此文云.阿難得記 卽憶本願 持先佛法 皆如今也.此因緣釋也.
만약 가르침의 종류에 입각해 해석한다면 환희아난(歡喜阿難)의 경우, 얼굴은 청정한 보름달 같으며 눈은 푸른 연꽃같아, 친히 부처님의 뜻을 받자옴이 입을 위로 하고 있는 성한 그릇과 같으며, 이를 전하여 사람을 교화함이 다른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으니, 이는 문문(聞聞)의 법을 전함이다.
환희현(歡喜賢)은 학지(學地)에 머물어 공(空) 무상(無相)의 원(願)을 얻어, 안(眼) 이(耳) 비(鼻) 설(舌)의 여러 감각기관에 더러움이 없으니, 문불문(聞不聞)의 법을 전함이다.
전장아난(典藏阿難)은 포함해 받은 바가 많아 큰 구름이 비를 간직한 것 같으니, 이는 불문문(不聞聞)의 법을 전함이다.
아난해(阿安海)는 다문(多聞)한 사람이라 저절로 상(常)과 무상(無常)을 이해하게 마련이니, 만약 여래께서 항상 설법하시지 않는 줄 안다면, 이를 보살로서 다문을 갖추었다고 부를 만하다. 불법의 대해(大海)의 물이 아난의 마음속에 저절로 흘러 들어옴이니, 이는 불문불문(不聞不聞)의 법을 전함이다. 지금의 경은 해아난(海阿難)의 불문불문의 묘법(妙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若約敎者.歡喜阿難.面如淨滿月.眼若靑蓮華.親承佛旨 如仰完器.傳以化人 如瀉異甁.此傳聞聞法也.歡喜賢.住學地得空無相願.眼耳鼻舌 諸根不漏.傳持聞不聞法也.典藏阿難多所含受.如大雲持雨.此傳持不聞聞法也.阿難海.是多聞士.自然能解了是常與無常.若知如來常不說法.是名菩薩具足多聞.佛法大海水.流入阿難心.此傳持不聞不聞法也.今經是海阿難.持不聞不聞之妙法也.
본적(本迹)에 입각해 해석컨대, 위의 네 가지 문(聞)에 대한 약교석(約敎釋)이 다 응적신(應迹身)의 인도이시되, 그 본지(本地)는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本跡解者.如上四聞皆迹引.而本地不可思議(云云).
관심(觀心)에 입각해 해석컨대, 인연법(因緣法)을 관(觀)함은 문문(聞聞)을 관함이요, 공(空)을 관(觀)함은 문불문(聞不聞)을 관함이요, 가(假)를 관함은 불문문(不聞聞)을 관함이요, 중(中)을 관함은 불문불문(不聞不聞)을 관함이다……. 여기서 일념(一念)의 관(觀)이란 묘관(妙觀)을 이름이다……. 이원섭보살 번역을 참고하였습니다.
觀心釋者.觀因緣法 是觀聞聞.觀空 是觀聞不聞.觀假 是觀不聞聞.觀中 是觀不聞不聞(云云).一念觀者 妙觀也(云云).
12-넷째 유통교화영역은! 만약 일월등명불의 시절이라면 당연히 당시에 가장 큰 보살 중에 한 명을 지목하여 유통의 책임을 받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시방삼세의 모든 원교여래는 모두 무량한 겁에 교화를 하시고, 교화가 끝나는 지점에 세상에 출현하여 가르침을 펼치고 가르침을 모두 끝내면, 열반에 드시고 열반에 드시면 결집교화영역 안에서 큰 보살이 신분을 숨긴 채 결진을 모두 끝내고, 이렇게 결집이 끝나면 유통교화영역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13-하지만 오늘날 석존의 출현은 영산회상에서 법화경의 설법을 끝낸 것 중에 적문은 모두 원교여래의 신분에서 교화를 하신 것이고, 본문에서는 법신여래의 신분에서 지용보살을 불러내 법화경의 유통교화영역을 선언하신 것이다.
14-영산회상 당시에 모든 대중은 법화경의 유통교화영역을 보도 듣지도 못한 지용보살이 부촉을 받는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고, 또 결집교화영역이 끝났을 때에도, 결집교화영역에 참석을 한 문수보살 등 모든 보살과 성문들은 바람이 지나가듯이 모조리 열반에 들고 말았다.
15-지금 미륵보살의 의문은 도대체 삼승의 수레를 탄 것 같지도 않은 저 모든 지용보살은 도대체 방편의 교화를 거지치 않은 것 같고, 방편을 거치지 않은 채 백우대거를 타고 있으니, 이 일이 어찌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한 것이다.
16-“所成就甚多 願爲除衆疑 如實分別說”미륵보살의 의문은 “부처님이시여! 저 많은 모든 지용보살을 언제쯤부터 교화를 하였다는 것입니까!”하고 물은 것이 아니라, “저 많은 지용보살은 어떻게 교화를 받은 것입니까! 저 많은 지용보살을 보건대 확실히 우리들 삼승인이 교화를 받은 것과 다른 부분이 있음을 분명하게 관찰이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이시여! 저 많은 지용보살을 어떠한 법을 가지고 교화를 한 것입니까! 그 교화한 내력을 지금 말씀해주소서!”하고 의문의 게송을 읊은 것이다.
17-따라서 지용품의 앞에서 미륵보살이 “부처님이시여! 저 모든 지용보살은 누가 교화를 하였고, 누구의 교화를 받은 것입니까!”하고 22가지의 의문을 한 것이다.
18-지금 지용품은 삼승의 제자 외에 실제에 있어 일승의 제자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삼승의 제자란! 성문승과 연각승과 보살승을 가리키고, 일승의 제자란! 여래승을 가리킨다. 보통 삼승인들은 법화경의 회상에 참석을 하고서 여래승의 자리에 오르는 줄로 알고 있는데.. 지금 지용품에서 듣지도 보도 못한 지용보살의 출현으로 인해 의문을 한 것이다.
19-다시 말해 지용보살이 영산보살처럼 맨 처음 화엄경 등의 온갖 회상에 함께 참석을 하였다면, 이와 같은 의문을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미륵보살의 의문은 도대체 우리들과 함께 교화를 받지 않은 저 모든 지용보살은 도대체 무슨 교화를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저 모든 지용보살이 삼승의 교화를 받았다면, 비록 저 모든 지용보살이 무량한 겁 전에 미륵보살 자신보다 먼저 큰 보살의 계위에 올랐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의문을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일찍 교화를 받아 부처님이 되었건, 지금 교화를 받아 부처님이 되건, 미래에 교화를 받아 부처님이 될지라도, 부처님이 되는 법만 알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미륵보살이 의문한 것은 자신들이 교화를 받아 부처님이 되는 과정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저토록 의문을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21-우리들은 지용보살의 교화를 받아 불도에 드는 종족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법화경에서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법화경을 지닌 사람들이여! 법사를 공경하고 가르침을 받으면 무량한 부처님을 뵐 수가 있다.”하심에 있어, 이 법사는 바로 법화경 유통교화영역 안을 책임지는 지용보살을 가리킨다.
是事難思議 云何而可信 佛得道甚近
所成就甚多 願爲除衆疑 如實分別說
-偈頌-
사리불과 목련과 아난 등은
모두 성문의 교화영역
안에 근기이고,-1
선인 등은 연각의 교화영역
안에 든 근기이고,-2
문수와 관세음 등은
보살의 교화영역
안데 든 근기이고,-3
지용보살과
우리들은 여래의 교화영역
안에 든 근기이다.-4
따라서 지금 석존이
우리들의 근기를 드러내기 위해
지용보살을 불러내신 것이고,
지용보살이 드러나야
과거세상에도
이와 같은 무리의 여래근기가
존재하였음을
증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5
우리들이 만약에
삼승의 근기 중에 하나일 경우라면,
당연히 문수나 관음 등이
유통교화영역을
책임지게 될 것이나,-6
우리들의 근기가
여래의 근기에 해당이 되다보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 당시에
모든 큰 보살에게
유통교화영역의
부촉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우리들과 동일한 근기를 지닌
지용보살을 불러내신 것이다.-7
따라서 보운지용보살이
“우리들은 중생일 때부터
여래의 이름을 가진
여래의 근기이다.-8
따라서 저 영산에
하열한 보살에게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9
경전회상에
모든 여래인들이
불도를 닦을 줄을 몰라
헤매는 것도 아니고,
지혜가 얕아
헤매는 것도 아니고,
공덕이 없어
헤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분을 몰라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10
이제 보운지용보살이
우리들의 신분을 드러내주었으니,
자신감을 자기고
법화경을 읽고 외우며
널리 유통하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맹서를 하게 되면,
어느 날 저절로 경문의 글이
모두 환하게 보이게 될 것이다.-11
왜냐하면 법화경의 유통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과 목숨을 걸지 않고
불도를 닦는다고 여기는 일은
마치 일도 하지 않은 채
수확을 하겠다는
게으른 농부와 같은 것이다.-12
목숨을 걸면 반드시
법화경의 경문에서
시방삼세의 제불의 가피와
자신이 지용보살의
후예임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13
-寶雲地湧 可信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