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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집회.
1장 1절-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땅이 있기는 있는데 혼돈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명확하지를 않다. 밝든지 어둡든지, 높든지 낮든지, 물이든지 땅이든지 뭔가가 구별이 있어야 할 텐데 도무지 혼돈이다. 명확하지를 않으니까 형태도 안 보이고, 가치도 없고, 쓸모가 없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만드셨으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깨닫는다면 이게 무슨 뜻일까? 땅이 혼돈하고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이 되느냐? 혼돈하고 쓸모가 없는 이것을 쓸모 있게 하려면 뭐가 필요하냐? 빛이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거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상태로 되어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면서 쓸모가 있도록 하시려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로 가면서 땅 위에 뭘 만드시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고, ‘공허’란 빈 공간을 말하는데, 이 빈 공간에 아무 것도 없으면 뭔가 아쉽지 않느냐? 하늘에는 뭔가 날아가는 것도 있어야 하고, 물에는 물고기도 있어야 쓸모가 있게 된다. 그러니까 첫 날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쓸모 있게 만드시는구나’ 이 뜻이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한 이 말 속에는 그 뒤에 나오는 것들을 다 만드시겠다고 하는 뜻이 들어있는 거다. 이게 이해가 되느냐?
성경은 다 비유요 비사이니, 그리고 만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신앙의 깨달음의 비유요 비사로서,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마음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어서 아무런 생명조달이 없다. 이런 사람의 심령에 창조적 요소가 들어가려면 그 마음 밭에 복음의 빛이, 말씀의 빛이 비춰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창조의 사람으로 나온다. 이 사실을 지금 비사로 보여주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드시고자 하는 역사를 창조 시부터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다. 인간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이런 존재임을 알고 절대로 쓸데없는 생각, 악한 생각, 허망한 생각은 갖지를 말아라. 미움 걱정 근심은 전부 어두움에 속하는 거다. 의미가 없는 거다. 이게 있으면 망하고 파멸이고 심판밖에 없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공허’란 텅 비어있는 거다. 뭣과 같으냐 하면 사람의 머리로 비유한다면 머리통이 비어있는 사람과 같다. 그러니 아무 생각도 없는 거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허튼 짓을 하면 ‘너 머리통이 비었느냐?’ 라고 한다. 이런 텅 비어있는 머리통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필요한 거다. 그래야 쓸모 있는 머리통이 되는 거다. 믿던 안 믿던 사람이라면 이걸 시인할 줄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쓸모가 없다.
또 땅이 흑암이라고 했는데, 흑암은 어두움이요, 무지하고 파멸적인 것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도덕성이 보이지를 않는다. 예수를 믿는데도 도덕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신적인 도덕성이 참으로 고상한 건데, 이게 없는 사람에게는 빛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빛이 필요하다. 땅에 빛이 필요하듯이 이 땅을 비사로 해서 우리에게 말씀의 빛이, 복음의 빛이, 진리생명의 빛이 필요하다고 하는 걸 말해주고 있다. 그래야 사람이 되어 들어간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의 깊음을 말하는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그 깊이를 자로 잴 수 없다. 그래서 ‘심연’이라고 한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아무 생명적 공급처가 없는 것을 말하는 거다.
깨끗한 벽이 있으면 어린아이들은 그곳에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한다. 하얀 종이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그리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농사 전문가는 넓은 들판을 보면 무엇을 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 ‘산세가 어떠니, 저기는 비탈이니 무엇을 심으면 좋겠고, 여기는 평지니 무엇을 심으면 잘 자라겠다’ 라고 한다. 농사 전문가는 땅을 보면 이런 걸 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쓸모없이 놓여있는 땅을 쓸모 있게 만들고자 하신다. 이게 하나님의 본심이다. 즉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쓸모 있게 만들고자 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심의 소원성이 우리의 온전을 위한 목적이 들어있는 거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에 대해 많이들 말하기를 지구가 원래는 물로 되어있었는데 하나님의 신이 활동을 하면서 빛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말씀은 이것대로 보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은 이 말씀대로 보면 하나님의 신이 ‘땅 위에 운행하시니라’가 아닌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했으니까 진리가 없으면 없는 곳에는 성령님께서 활동을 하지 않으신다.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과 의사단일이다. 이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령님이 활동을 안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야 성령님께서 활동을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서 활동을 하신다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은 물을 근거로, 물을 전제로 활동을 하신다는 게 무슨 뜻이냐? 우리의 구원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된 것’이라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신이 활동을 하시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지세계 속에서 예정 계획 설계된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에 근거를 두고, 염두를 두고 역사를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 근거를 놓고 보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비하신 영원 궁극적인 우리의 구원에서 빗나간 채 육적이고 마귀적이고 세상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을 사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한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거고, 근거가 없는 신앙이다. 근거가 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근거가 있다면 신앙이 자라야 할 텐데 근거가 없이 믿으니 신앙이 자라는 것이 없이 자기 일생이 깡그리 날아가 버리는구나.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현재 자기가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 어디에 집중적으로 들어가 있고, 무엇을 목적으로 신앙을 하고 있는지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보면서 과거처럼 아무 교회나 가서 말씀을 듣고 한 시간 때우는 식으로 믿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신은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생명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역사를 하는 거다. 이 생명의 말씀의 근거가 아니면 역사를 안 하는 거다. 역사가 없는 거다. 2절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의 구원을 근거한 땅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장소로서의 땅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이 땅에 삼위일체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거고, 되어야 하는 거다.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이 있으라.’ 이 빛은 넷째 날에 만들어진 해와 달의 그 빛이 아니다. 그러면 무슨 빛이냐? 말씀의 빛이다. 말씀으로 만들어진 빛이다. ‘빛’이라고 할 때 말씀으로 알게 하는 것도 빛이요, 무지에서 알게 하는 것도 빛이요, 이 빛은 자연의 빛도 아니요, 인간이 만든 빛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든 빛이다. 말씀의 빛이다. 여기에서 성령님은 역사하신다. 활동하신다.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인간의 무지와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있은 후에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다. ‘인간 보기에 좋았더라’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만드심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고, 만들어 놓은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모든 게 인간기준이 아닌 하나님 기준이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빛을 원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빛, 아름다운 빛은 신령세계를, 하나님의 의지세계를 볼 수 있는 빛이다.
사물을 육신의 눈으로 보고 알려면 물질의 빛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신령세계를 비춰주는 빛이 필요하다. 물질세계에서는 자기 마음을 비춰주는 빛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생명의 빛이라야 자기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말씀에 근거된 빛은 모든 만물은 물론이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과 결과를 알게 한다.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부른 대로 되었다. 이렇게 해서 된 것은 사람이 뜯어 고칠 수 없다. 인간 자기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살고 쓰는 거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빛이 좋으냐, 어두움이 좋으냐? 빛이 좋다. 말씀으로 만든 빛은 물론이고 물질세계의 빛도 좋다. 그러면 빛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느냐? ‘빛’이라고 하는 이 말 속에는 어떤 뜻들이 함유되어 있느냐? 빛이 있으므로 어느 면에 좋고, 효력이 있고, 아름다우냐를 생각해 보자는 거다.
빛이 있음으로 해서 구별도 되고 분별도 된다. 외모 모양 크기도 구별 분별이 되고, 색깔 색체가 구별 분별이 되고, 활동도 볼 수 있고, 건설을 할 수 있고, 멀고 가까운 것도 잘 보이고, 빛이 있어야 생명이 자라게 된다. 자라는 것은 빛이고, 생명이 못 자라면 어두움이다. 멀고 가까운 것이 분별이 안 되면 어두움에 속한 거다. 그러니까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이니 빛 아래 있으면 아무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거다.
느낌과 감성적으로 말을 하면 오각의 오감성을 가지고 느끼는 것도 빛에 속하는 거다. 이걸 못 느끼면 어두움에 속한 거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뭘 느끼지 못하게 되면 둔해빠지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한 거다. 사람이 느끼는 면으로 밝으면 시원스럽고 활달하지만 어두우면 항상 느려 터져서 게으르고 사는 맛도 없다. 이러면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 이걸 보는 사람도 ‘아이고, 속 터져’ 라고 한다. 사람은 기쁘고 즐겁고 하는 것을 오각의 오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거다.
빛에 거하는 자는 해가 중천에 높이 뜬 것처럼 점점 존귀 영광스러워진다. 말씀에 거하는 자는 점점 밝아져서 존귀 영광자가 되는 거다. 사람들이 ‘요즘 저 사람 참 잘 나간다’ 라고 하는 것은 해가 중천에 떴다는 의미가 되는 거다.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어두움은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느냐? 어두움은 밝은 것과는 정 반대인데, 어두움은 무지하고 아는 게 없다는 의미가 된다. 어두운 사람은 아는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으니 슬픔이고, 파멸이고, 고독하고, 생산이 없고, 죽음이다. 그러다가 그대로 죽는 거다. 사람이 이렇게 산다면 어디에 쓰겠느냐?
사람이 이처럼 어둡게 사는 것을 다 싫어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도 어둡게 사는 사람을 보면 ‘너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나를 따라가자’ 하고서 점심도 같이 먹고,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산천초목도 같이 보고 한다. 밝게 살자 그 말이다.
낮과 밤은 대조적이다.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나눠놓은 것은 그냥 ‘밝고 어둡다’ 이게 아니라 ‘너는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느냐?’ 이걸 알게 하려는 거다. 사람이 어둡게 살면 이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다. 이런 사람은 미리 부정적으로 생각을 해서 좋은 일도 하지를 못하게 되니 기쁨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일지라도 생명의 빛을 받아서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면 긍정적인 그 마음으로 제 멋대로 해 놓고서 그것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 우리가 매사에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빛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빛을 가진 빛의 자녀들이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빛을 만드는 첫 날부터 낮과 밤으로 갈라놓는구나.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기는 어느 쪽으로 소속이 되고 입장에 되어야 하는 것인지가 나오는 거다. 창세기에서 첫 날에 빛을 만들 때 이게 이미 되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의례히 ‘엿새 중에 첫 날에 빛을 만들었다고’ 하고 넘어가 버리니 이 속에 들어있는 귀한 맛들을 모르는 거다.
낮은 햇볕이 있어서 따뜻하고, 밤은 햇볕이 없어서 춥다. 생명의 빛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펴지고 활발하다. 그러나 생명의 빛이 없으면 사람의 정신 사상 마음이 펴지지를 못한다. 넓지 못하고 자꾸 오그라진다. 그래서 빛 가운데 사는 게 좋은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살려고 한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도 하고, 부자가 되기 전에 죽는 사람도 있고, 부자가 됐다가도 망해서 죽는 사람도 있다. 부자가 되면 오래 살 것 같으냐? 그건 인간 자기 생각이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런 삶은 전부가 어두움에 사는 거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했는데, 저녁은 밤이 되는 시작점이 된다. 그러니까 저녁이 되면 점점 캄캄해진다. 사람으로 본다면 그 마음이 어두우면 아까도 말했지만 오그라진다. 절대로 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침은 낮의 시작이다. 정신세계로 본다면 사람이 생명의 세계에 사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면 생기가 생기고 활발해지는 거다. 점점 존귀 영광스러워지는 거다. 인격 면에서 이 성품이 미남이고 미녀다. 욥에게 딸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그같이 아름다운 딸이 없었다고 했다. 이런 면을 말하는 거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이는 첫째 날이니라.’ 밤과 낮을 나누어 놓고서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했다. 그러니까 첫째 날 속에 나누어진 것이 들어있는데, 생명세계의 빛 속에서 낮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이것이 없이 어두운 밤의 세계에 들어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여기서 어두움에 사는 사람은 불택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믿는 사람이라도 정신과 사상 면에서 이런 것이 있으니 너는 어느 쪽에 소속이 되고, 어느 입장에서 살래?’ 하고 물으면서 우리로 바른 선택을 해서 살라고 밤과 낮을 정해놓은 거다.
그리고 이 낮과 밤이 한 날 속에 들어있듯이 우리를 존재적으로 볼 때도 나의 한 존재 속에 이 두 가지 요소가 들어있으니 자기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모르고 그냥 덤벙덤벙 살 거냐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날을 보고 그 안에서 그 분의 마음을 보고, 또 내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땅에 만들어 놓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살라고 창세기에 천지창조를 기록해 놓은 거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와 만물을 지어놨으니 나는 만물을 잘 쓰면 되지’ 하는 정신으로 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삶이 안 나온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