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존재공(백규) 유작, 21-⑨]
(3) 上疏文 (상소문)
존재공은 위유사(慰諭使)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정조로부터 부사용에 이어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전라감사에게 선소(宣召)에 미치지 못하면 해당부처의 당상관을 논죄하라고 하교하니 하는 수 없이 70세 되던 1797년(丙辰) 3월 3일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한지 4일 만인 1797년 3월 6일에 입궐했다. 존재공은 정조를 만나 상소문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린 후 선공감부봉사를 제수하셨으나 '늙고 병들어 공직에 나갈 수 없음을 밝히고 귀향하게 해 달라' 고 아뢰었다. (지장록 p. 934)
■ 萬言封事 (만언봉사)
伏以皇天眷佑大東付畀 殿下嗣無彊大曆服當三才交泰之期膺萬物昭蘇之運自 御極初載宵旴軫憂勵精圖治思兼百王待周公之朝總攬萬機惜大禹之陰屢下求言之旨虞舜之達四聰也屢施蠲恤之典漢文之賜田租也警懼災祥追商宗反修之德嚴飭科規體周官賓興之義致敬于 宗廟園寢盡職于承事 兩宮達孝維則爲仁有本德音不瑕萬民孚顒然而再過宣尼有成之期尙遲周邦維新之效敎化未興至治未形朝廷則少耈德宿望係國家之安危者山野則無學問操守爲一時之著龜者古人所謂國空虛者不幸近之因以學校弛廢士無首善之習軍政惰壞國無控弦之卒兵器鈍敗庫無變之貯漕運則年年敗沒儲蓄則時月告磬民無恒産而流散逐末人心浮亂而逆獄歲興水旱疾疫而邑里殘破山童澤涸而庶物耗絶因之以達官無匪躬之義牧伯無分憂之念上自卿士大夫下至庶人皀隸咸曰利吾盻盻相讎雖漢唐末弊不甚於此時然而食 聖朝之食衣 聖代之衣而保家室長子孫者無一人以此言爲 殿下直陳於前陛者臣實痛心焉爲今日言者若指事論事而己雖一日萬言固無益於國也若反本而論大要有六臣請歷擧其條竊望
聖明少垂察焉
〈해설〉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우리 임금님을 보위에 앉게 하시고 끊임없이 대를 이어 큰일을 하도록 하시었고, 하늘․땅․사람이 돕고 온갖 만물들로 하여금 혜택을 입게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보위에 오르신 처음부터 밤낮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시고자 옛 왕들의 어지신 치적을 적은 책들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현군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주공(周公)이 잠자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노력한 일과 우(禹)임금이 여러 가지 덕목 중 가장 시간을 아끼던 뜻을 배워 헤아렸습니다. 순(舜)임금께서 널리 사방 백성들의 말을 들어 정사(政事)에 가림과 막힘이 없도록 하였듯이 우리 임금님께서도 사리에 밝으셨습니다.
백성들이 어려울 때마다 여러 가지 시책을 실시하였음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한(漢)나라 문제(文帝․179~157)가 백성들에게 세금(田租)을 면제하여 준 것과 재앙을 만나 놀라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 것은 모든 일이 왕의 잘못으로 생긴다는 상(商)나라의 세 임금인 중종(中宗)과․고종(高宗)과 조갑(租甲)의 덕을 쫓으신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규제를 엄하고 바르게 한 것은 주나라 때 사람을 고르게 골라 썼던 일이요, 종묘(宗廟)와 왕릉(王陵)에 공경함을 다하고 양궁(兩宮)을 받들어 섬김에 도리를 다함은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효행의 법도입니다. 인(仁)을 행하심에 근본이 있다고 하신 임금님의 말씀에는 잘못이 없으시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하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학문을 숭상한지 오래되고 주나라가 폐습을 고쳐도 효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교화도 되지 않고 태평성대를 누리지 못한 것은 나라의 안위(安危)를 함께하는 덕망 있는 신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글 읽고 이웃을 바르게 지도할만한 사람이 없는 탓입니다. 나라에 인재가 없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이로 인한 폐해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학교는 해이해지고 선비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며, 군인은 무기를 다룰지 몰라 녹슬고, 군량은 바닥나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고, 조운선은 파손이 심합니다. 백성들은 생업이 없어 떠돌며 못된 짓을 일삼고, 인심은 흉흉하여 옥사(獄事)가 늘고, 가뭄과 전염병으로 집이 비고, 백성이 떼죽음을 당합니다.
그러나 관리들은 방관하고 있습니다. 감사나 수령도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줄 걱정조차 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장관이나 아래로 서민이나 천민까지도 서로 원수 대하듯 하며 자기만 살려 합니다. 아마 한(漢)․당(唐)나라 말기의 폐단도 이보다는 적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금님에게는 바른 말을 하는 신하가 없으니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오늘 아뢰는 말씀은 있는 실상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말씀을 아뢴다 하드라도 당장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지만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뢰올 내용의 큰 뜻을 요약(要約)하자면 여섯 가지입니다. 조목마다 낱낱이 예를 들어 아뢰오니 전하께서 조금이나마 살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장흥위씨대종회 홈피에 실린 '만언봉사' 소개글]
(144-072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71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71일차에도 '존재공(위백규)의 유작'이
※ 주) 63~83일차(21일차)에는 '존재공(백규)'의 유작이 계속 이어집니다.
(존재공 유작 게재 9일차 입니다)
/ 무곡
드디어 존재공의 '만언봉사' 편입니다.
존재공은 1794년 어사 서영보의 천거로 정조대왕 앞에 나아가 명을 받는다. 위백규 저서 24권을 바치게 하고 그에게 국정의 자문을 구한다. 존재공께서 정조에게 올린 정책건의서는 바로 '만언봉사'다. 만언봉사에는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시라, 어진 사람들을 발탁 등용 하시라, 염치를 장려하고 기강을 회복하시라, 선비의 습관을 바르게 제어하시라, 탐관오리를 의법처리하시라, 옳은 제도를 살려내고 폐단 법제 고치시라"등에 대한 실천 논리가 담겨 있다. 정조는 이에 감탄하여 "그대의 건의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는 요지의 답서를 내렸다.
(헤럴드경제 함영훈기자, 2021.4.6 기사에서 발췌)/ 무곡
만자로 씌여진 상소문의 내용이 문제제기와 함께 정책방향을 제시한 실학자다운 글입니다./ 벽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