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월 대보름 무렵, 쌀쌀한 날이었다. 겨우내 닫혔던 종가의 대청마루 문이 활짝 열렸다. 넓은 마루에는 여인들이 둥글게 모여 윷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부엌에서는 녹두부침이 지글거리며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마당에는 김이 오르는 떡시루가 놓여 있었다.
2 동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처음 이었다. 몰래 구석에 자리 잡고 눈으로 엄마를 찾았다. 조무래기들과 내 또래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며 놀고 있었다. 낯익은 언니들 두엇은 음식 접시를 들고 왔다갔다 했다. 마치 잔칫 날 같았다.
3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뒤 쪽 별채로 가 쪽마루에 앉았다. 친구 소현이와 놀던 곳이다. 언덕에는 사금파리와 누런 풀이 널려 있었다. 이따금 마루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와 공기를 온화하게 만들었다. 올려다본 하늘과 산은 황량했다.
4 내려오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황량한 기운을 물리치려는 부지런한 낌새가 있었다. 앙상한 가지에 잎도 없이, 대여섯 송이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단번에 눈이 동그레졌다. 신기하고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유년시절에 각인된 꽃이었다.
5 세월이 흘러, 타향의 아파트에서 똑같은 꽃나무를 발견했다. 이름이 '산당화'인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오며 가며 관심을 가지고 살폈다. 이른 봄에 진홍색으로 피는 꽃이 처녀를 설레게 한다고 하여 '아가씨 나무'라고도 부른단다. 꽃잎은 매화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붉은색이 진하고 훨씬 두껍다. 후에 수목원에서 '명자나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모습을 봤다.
6 정초 집에만 있던 터라 운동삼아 동네 공원을 가로질러 역으로 가고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죽은 듯이 서있었다. 갈라진 나무껍질이 바람에 날려 대롱거렸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에 거리는 한적했다.
7 무심코 바라본 길 옆 낮은 울타리에, 빨간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어쩌다 철없는 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온 나무에 작은 분홍빛 봉오리들이 맺혀 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같이 줄 서있는 예닐곱 그루가 다 같은 모양이었다. 하늘도 쨍하고 코 끝도 쨍했다.
8 꽃이 궁금해 며칠 뒤에, 그 후에도 가보았다. 꽃잎은 보름 넘게 피어있었다. 봉오리들도 좀 자랐겠지만 그대로였다. 산당화 꽃은 4-5월에 핀다. 나에게는 어여쁜 1월의 꽃이다.
9 식물은 온도와 일조량 등 자기 조건이 되면 개화한다. 바로 옆의 매화나무도 주위의 다른 나무도 아무 변화가 없다. 산당화는 왜 벌도 나비도 없는 엄동설한 1월에 꽃을 피우려 할까. 조금씩 단련하여 자기 리듬으로 시간을 앞당겨 추운 겨울의 불꽃이 되고 싶은 건가. 외롭고 위험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사처럼 산화하고 싶은가!
10 산당화는, '발전하는 삶을 살면 자신을 얽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라는 '로랑 구넬'의 말을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주위의 방해를 의식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하여 자유로워졌다.
11 그 꽃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어? 노력은 해 봤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거야?
12 산당화는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알게 해 준 나무였다. 채송화, 분꽃이 피고 감꽃, 살구꽃이 흔한 시절, 추운 겨울에 진한 빛으로 청초하게 피어 나에게 온기를 준 꽃이다. 어려워도 물러서지 않고 제 속도로 나아가는 꿋꿋한 꽃이다. 나도 용쓰고 있다. 보상이 없어도 꿋꿋하게 노력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26.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