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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성장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은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처녀의 난자에 성령의 Touch 즉 성령의 접촉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마리아의 몸 안에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난자의 크기는 대략 200㎛인 1㎛은1/1000㎜라고 하면 200㎛이면 0.2㎜뿐이 안 되는 것으로 눈으로도 식별하기 어려운 크기입니다. 거기에 성령이 천둥번개를 동반한 우렁차고 강한 힘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성령의 만짐이 나타나며 예수님의 생명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내 귀를 타고 마음에 들어올 때 성령의 만지심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탄생된 것이지요. 임신한 분은 처음에 아기가 잉태하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어 성령이 내 안에 생명으로 임하신 것도 전혀 의식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담겨질 때 하나님 아버지는 그 분의 생명이 내게 주어진 것을 보시고 나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생명은 그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자라도록 하여야 합니다.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내 안에서 자랄 때 지혜도 자라고 성숙해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갑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받은 믿음의 성도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말하는 것과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일관되었는데 이제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의 초청입니다. 구원받으면 즉시 하나님 나라로 초청을 받습니다.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최종 도착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그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들어갈 준비를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체는 이 땅의 생명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늘의 생명체로 변화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응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주님은 내게 오셔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럼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여 문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교회 안에서 엄청나게 많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시는데 도무지 그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세상에 속하여 있는 문화와 안일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가치 있고 화려해 보여서 그것을 깊이 사랑합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착각으로 돈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보십시오! 그 음성에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음성을 들으려 합니까? 저의 둘째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그 아이이게 전화가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매일같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몇 시간씩 통화를 하고도 그 이튿날 역시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합니다. 뭐 대단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이기에 그 음성에 목말라 하고 있는 겁니다. 아침에는 깨워도 잘 일어나지 않는 아이인데 남자를 만나러 갈 때는 새벽에도 벌떡 일어나 씻고 단장하고 즐겁게 나갑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해 보십시오! 당연이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분의 음성에 목말라하고 그 음성에 나도 모르게 순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고 마음의 문이 닫혀 있습니다. 이 문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죄입니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왜 성한 사람 데려다가 별 것을 다 죄로 몰아 죄책감을 갖게 하냐고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처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연약성은 한번 들어 온 죄는 절대로 내 힘으로 처리 못합니다. 죄는 점차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약 1: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욕심이라는 별거 아닌 것이 내게 기회를 틈타 들어옵니다. “나도 저거 갖고 싶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자연스런 욕구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욕심이 되어 이제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욕심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곁길로 가게 됩니다.
저도 군대 있을 때 저녁에 양말을 빨아 빨랫줄에 걸어 놓으면 그 다음 날 가보면 누가 훔쳐갔습니다. 그러면 저는 또 다시 다른 사람의 양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훔쳐 신었습니다. 이것이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군수과에서 1종계를 보면서 부식으로 오는 닭을 빼돌려 친구들과 끓여 먹고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탄약고에 저장되어 있는 탄약을 다른 대대에게 넘겨주는 죄까지 저질렀습니다. 양말 훔친 것을 회개하였더라면 더 이상의 죄는 옮겨 붙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는 내 힘으로 절대로 옮길 수도 없고 씻어낼 수도 없습니다. 오직 씻을 수 있는 비결은 갈보리 예수님의 피 앞에 가져 나와 회개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했음을 그대로 고백하고 죄 사함 받아야 합니다. 회개는 정죄의식을 불러일으키려고 외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회개는 죄를 이기는 비결이요. 자유케 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통로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것이라도 성령의 조명을 받아 회개할 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통한이 여겨 보십시오! 내가 주를 사랑하기를 원하는데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음에 대한 애통의 마음을 가져 보십시오! 주님을 사랑할 때 나의 문이 열려지고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와 더불어 먹고 나는 주와 더불어 먹는 친교의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신앙을 이론도 아니고 사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내게 다가 오셔서 그 분의 인격을 나누게 하십니다. 이런 교통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화평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성장하게 됩니다.
둘째는 영광의 주를 바라보며 즐거워 할 때 생명이 성장합니다.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다’는 헬라어로 ‘카우카오마이’(kaucavomai)는 ‘자랑하다, 뽐내다, 자랑으로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내 삶의 표지(標識)로 삼고 자부심을 느끼십니까?
돈 많은 과부 두 분이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가진 재산 다 합하면 얼마정도 되니? 한 50억 될까?” 그랬더니 상대방 과부가 “얘! 그 정도 가지고 어떻게 노후를 보내니? 적어도 그것보다 5배는 더 돼야지!”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너는 얼마 정도 갖고 있니?”그랬더니 으쓱대면서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 같은데”그럽니다. 이 분들은 많은 재산이 자기들의 자랑이고 자부심입니다. 누가복음12장에서는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그해에 대풍(大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이 많은 곡식을 어떻게 하지 하다가 Idea가 떠올랐습니다.
(눅 12:18)“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다짐합니다. 이에 대하 예수님의 지적이 아주 절묘(絶妙)합니다. (눅 12:20)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자랑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랑도 자부심도 될 수 없습니다. 없어지지 않는 영원히 빛나는 것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자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생명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보물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니까 정작 내 안에 있는 보배를 놓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보배를 인정하고 사십니까?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제대로 성찰(省察)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내 안에 예수 생명이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고후 4:7~9)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환란을 겪는데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답답해야 하는데 답답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영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서 활성화되므로 낙심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절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계서 보배로 내 안에 계시므로 소망의 불꽃이 삭으려 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를 점검하여 보십시오!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면 낙심되십니까? 그렇다면 내 안에 내가 나의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앞길을 설계하고 준비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그래서 나온 것이 안심보험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들어놓아도 또 다른 염려가 생기지 않습니까?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예수님의 영을 온전히 왕으로 모셔 들이면 어떤 환란이 오더라도 낙심하거나 뒤로 후퇴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내 마음을 지배하며 기뻐하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나의 기쁨을 내 안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잠 24: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고 형통한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밖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톱스타인 가수 비와 배우 김태희가 올해 결혼할 것이다 아니다 설왕설래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왜 관심이 이렇게 클까요? 부러워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돈 많고 인기 있고 남자는 잘 생긴 훈남에 노래도 잘 부르고 여자는 천하절색의 미녀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고 있다면 밖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입니다.
한때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선교사역의 동역자였던 데마(Dema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세계 선교 사역을 위한 신실한 조력자였고,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개하고 신앙을 열렬하게 고백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도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진리의 말씀, 권면 및 훈계를 늘 들으며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세상을 사랑하면서부터 영적인 스승 사도 바울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의 영향은 집요하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마귀는 밀 까부르듯 하면서 할 수 있으면 믿음의 사람들을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도록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데마도 처음에는 남다른 각오를 지니고 주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상의 번득거리는 화려함이 그의 마음을 휘젓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더 커보였기에 생명이신 예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갔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아차 하는 순간에 세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랑을 찾지 마십시오 오직 내 안에서 자랑할 것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갈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보배는 밭을 갈지 않으면 숨겨진 보화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호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밭은 기경하라는 것은 묵은 땅을 갈아서 뒤엎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면서도 도무지 회개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십니까?
저의 큰 형님 가정이 지금 별거 중에 있습니다. 형제들과 모이면 언제든지 신앙 이야기로 자기들의 신앙이 온전함을 은근히 자랑했던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지방교회에서 30년 넘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지방교회는 회개에 대하여 가르치지도 않고 회개라는 용어 자체를 이해치 못하는 곳입니다. 예수만 믿고 그 분만 믿으며 자동으로 모든 죄가 용서함 받는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입니다. 내 신앙이 제일이고 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착각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50년 가까이 살아 왔으면 서로가 용납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나오는 정상적이 마음 아닙니까? 그런데 서로 용서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내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굳어버리게 함을 여실히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마음을 갈아엎는 기경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은 들어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생활 속에 정용되지도 못하고 형식적인 예배와 헌신으로 바리새파 사람과 서기관들의 위선처럼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교만의 성을 쌓고 삽니다. 마음의 밭을 가십시오! 회개하십시오! 나의 죄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세상의 사람들이 부러워 마음을 곤고한 것이 있다면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내 안에 보배로운 예수 생명을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안에 있는 예수 생명으로 기뻐하십시오! 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면 즐거워 할 때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자랍니다.
태중에서 모든 외형과 성품을 갖추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세상에서도 지혜와 총명이 있으면 대우를 받습니다. 탁월한 외모를 갖고 있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습니까? 얼굴만 예뻐도 이영애 같은 배우는 1년 광고모델료를 12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명성도 오래 못갑니다. 지혜를 얻으십시오! 영원한 나라에 Star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 나라의 스타는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왕성하게 나타날 때 가능합니다. 하늘의 스타는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합니다. 그 아름다움과 영광은 말로 표현치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이 생명이 잘 자라기 위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어떤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이를 즐거워하십시오!
세 번째는 사랑하므로 생명이 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게 된 시점은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이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죄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요청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미리 예정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했습니다. 연약할 때의 단어는 강함의 반대로 철저한 무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하더라도 거기에 반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는데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스(Narcisse)는 미소년을 에코라는 요정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자기 외모에 스스로 반해 에코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 에코는 실의에 잠겨 죽어 메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어도 반응할 줄 모르는 처절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하나님은 미리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때가 차매 예수님을 사랑의 징표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철저한 죄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서 몸을 깨뜨려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중한 고통 속에서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였고 죄인되었던 저와 여러분을 지독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본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이 성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성장합니다. 믿음의 행함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부딪힌 환경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이신 인천주안교회 주승중 목사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들과 똑 같은 연약함이 있으셨다고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7년 동안 감옥을 5번 끌려갔다 나오시기를 반복하면서 만 5년 4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며 모진 고문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하여 그 시신을 보니 손톱과 발톱이 모두 빠져있고 대나무를 얇게 짤라 손톱과 발톱에 쑤셔 넣고 나중에는 벤치를 뽑아서 손톱과 발톱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발은 망치에 맞아서 뭉그러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주기철 목사님의 가족들의 생활도 비참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모진 환경에서 인내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하지 않았던 비결은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있었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할때 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녹아지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닥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십자가입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쁘고 나에게 잘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용납하고 더 나가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실제로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하여 이뤄진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질 때 그 사랑을 힘입어 가능해집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그 앞에서 기도하십시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왔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깨닫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용납하게 하옵소서!” 말로 표현 못할 수치를 당하여 고통당하십니까? 그 수치가 십자가의 벌거벗긴 수치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모진 수치에서 건지심 받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혼돈의 어둠이 생각을 지배하고 감정을 흩트려 놓습니까? 주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 쓰시고 옆구리 창자국 받으신 것은 그 혼란과 어둠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에서 나의 죄인 됨을 처절하게 깨닫고 십자가에 나를 못 박으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각오할 때 살리는 영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용납지 못할 환경도 사람도 없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므로 내 안에 담겨 있는 생명을 더욱 거룩해지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영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시오! 성령이 내 안에 계신 보배십니다. 보배 되신 성령으로 즐거워하며 나의 자부심의 표지를 삼으십시오! 이제는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나의 목숨을 내놓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