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10/170306]내 친구 ‘공부박사’
그러니까,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게 딱 40년 전(1977년), 딱 요맘때였다. ‘시골’에서 대망의 ‘서울’, 그것도 제법 명문대학교 명문학과(영어영문학)에 운좋게 편입을 하는 바람에 새학기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주춤주춤 앞에 나가 몇 마디를 해야 했다. “저는 전북 임실産으로 전형적인 농사꾼 자식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전라북도 사투리가 잔뜩 묻어 있었다는 게 그 친구 말이었다. 수업을 하면서 알게 된 동기들은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경북고, 신일고, 용산고, 부산고, 광주일고, 광주고, 대전고 등 하나같이 당시 명문고 출신이었다. 후기 고등학교를 겨우 나온 나로선 저절로 기(氣)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소개를 마치고 자리에 앉는데, 그 친구가 다가왔다. “야, 이 촌놈아, 우리 친구허자” “아, 예. 예- ” “하따, 이 자식 봐라. 친구허자니까 존댓말을 혀부리네” “그래, 좋아” 그렇게 광주일고를 나온 그 친구와 그렇게 만났다. 학창시절에야 붙어 살았지만, 그리고 40년. 1년에 잘해야 한두 번 만난다. 전화로, 카톡으로 여전히 낄낄거리는, 철없는 아이들같은 것을. 아내들은 시대에 뒤진 ‘아재’인 우리를 보고 박꽃처럼 웃는다. 저렇게 ‘천진’하기가 쉽지 않다고.
친구부인은 남편의 유일무이한 친구로 언제나 나를 꼽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큰놈-작은놈 연달아 결혼할 때 금일봉을 두 번이나 하사한 것은.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제 큰딸 결혼할 때 완벽하게 비밀로 했다. 나쁜 놈. 매친 놈. 부인은 남편의 완고한 의지 때문에 "사람 도리가 아닌 줄 알명서 알리지 못했다"며 부인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당연히 “절교(絶交)”, 하지만 절교는 오래 가지 못하고 어영구영 화해를 하고 말았다.
2월말, 난데없는 전화. “야, 너 중화산동 아냐. 그 근처에 원룸을 얻으려한다” 모 사립대 교수인데, 연구년을 맞아 모대학 한의대에 편입했단다. 세상에나. 도올 김용옥 선생이 50줄에 원광대 한의대를 편입해 다녔다던가. “야, 너 도올 코스프레허냐?” “대학 정년을 앞둔 나이에 한의대를 다닌다고?” “이 형아의 깊은 뜻을 막내동생인 네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나저나 조카와 손주는 잘 있냐?” 늘 이런 식이다. 내 표현으로는 “진짜 공부박사”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공부하기가 재미있을까? 몇 년 전에는 ‘윤선생 영어대학원대학교’를 2년간 죽을힘을 다해 다녔다. 어디 그뿐인가. 전주에서 방 얻어 혼자 공부하며, 평일에 한번은 또 서울 모대학의 대체의학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올라온다고 한다. 오, 마이 갓!이 따로 없다.
80년 2월 졸업 후, 나와 길이 달랐다. 나는 곧바로 입대, 제대 후 언론사 시험을 봐 기자가 되었다. 그 친구는 행정대학원을 1년 다니다 군대를 가고, 제대 후 서울대 언어대학원을 가는데 프랑스어가 필수라고 그 공부를 하더니, 대학원을 졸업한 후 전공을 또 중문학으로 바꿔 모교에서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었다. 영어영문학(학사)→행정대학원→언어대학원(석사)→중어중문학(박사), 이런 친구 흔치 않을 터. 방학만 되면 중국으로 날아가 ‘만주어’를 공부한다던가. 복충빌라 2층은 완벽한 개가식 도서관, 족히 1만권은 되었으리라. 한국어책이 한 권도 없는 것에 분개한 나는 양장본 ‘한국한시문학전집’ 5권을 소포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책벌레’가 따로 없던 그, 무슨 생각으로 국립도서관에 그 많은 장서를 기증하고, 한참 ‘영어공부’에 매진하더니, 평생 전공을 ‘한의학’으로 하겠다고 작정했을까? 작정을 하면 실천하는 자(實踐躬行), 그대 복 있을진저!
딸 둘에 늦둥이 아들 하나. 모두 조기유학을 시킨다며 ‘왕수선’을 떨던 ‘열렬 학부모’가 아닌가. 세상과 초연해 보이는 듯한 못말리는 ‘개똥철학자’, 내 친구 유박사. 술 한잔도 못마시는 친구, 1일(日) 1식(食)한 지도 십수년, 자기가 무슨 함석헌 선생님이라고? 그뿐인가. 수염을 길다랗게 길러 쓰다듬는 게 취미이고,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가 하면 총장이 삼고초려를 해도 보직 한번 맡지 않은, 이른바 ‘괴짜교수’. 어쩌면 그렇게 세상을 ‘자기식(式)’대로 자신있게 살 수 있을까? 우리같이 간이 콩알만한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대학 정년을 앞두고 어느 세월에 한의대 5년을 다니고, 대체의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예전에 목표를 두었던 허준의 『동의보감』을 제대로 완벽하게 영역(英譯)하는 작업을 할까?
친구의 그 지칠 줄 모르는 정열(情熱)이 부럽냐고? 천만에. 나는 눈곱만큼 부럽지 않다. 하이고, 그 하기 싫은 공부를 어떻게 흰머리가 되고 칠순, 팔순까지 헌대-? 나는 죽어도 못혀. 사람이 ‘멋과 맛’을 알아야지. 나는 이래 봐도 최소한 풍류맨(風流man)이라고. 알아? 풍류남아? 풍류남아, 웃기고 자빠졌네. 풍류의 발뒤꿈치도 못따라가는 녀석이 늘 말은? 니가 풍류를 알아?(나의 끝도 없는 혼잣말이자 그 친구의 어필이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그 친구의 열정(熱情)이 무지무지하게 부럽다. 어디에서 그 에네르기와 스태미너가 샘솟는 것일까? 건강이 받쳐줘야 하는 것은 기본인데, 평소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 친구, 탄탄하다. 아프다, 아팠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같다. 마른 장작이 화력(火力)이 좋다던가. 거기에 비하면 나는 ‘골골 80’을 갈까?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전립선비대증, 석회성건염, 동결견에 목-허리디스크…, 이런 놈이 말은 잘한다. 금명간 시골에 낙향해 농사를 짓겠다고. 그 친구는 나를 볼 때마다 “아나- 콩떡이다. 니가 시골에서 잘 살겠냐? 막걸리는 어떻게 만들지 모르지만” 참, 약이 바짝바짝 오른다. 나는 무엇을 하며 노년의 삶을 살까? 그래도 시시껄렁한 책 읽기라도 좋아하는 나로선, 그렇게 어려운 학문을 밥 먹듯 즐기는 평생친구를 가진 것으로 ‘대체만족’을 해야 될까 보다. “야, 너, 몇 살까지 그렇게 어려운 공부들을 헐래?” 정말 너무 하는 넘이다. 야,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새학기에 불쑥 네가 생각나, 내 나름대로 씨부렁거리는 덕담(德談)이다.
첫댓글 시상에!
우천 찜쪄먹는 사람도 있었는게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