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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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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상 스크랩 우리 역사의 인물들 106 - 금석학자 김정희
보성(甫性) 추천 0 조회 0 11.10.29 20:2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 역사의 인물들 106 - 금석학자 김정희

 

 

 

금석학자 김정희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는 이르는 곳마다 유적유물이 있고 가는 곳마다 역사적 사화전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오늘에까지 잇닿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역사학자들의 노력과 연구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야기하려는 김정희 역시 민족의 이 귀중한 것들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양심적인 인간이었고 재능 있는 고고학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8세기 실사구시를 위주로 하는 실학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던 김정희(金正喜)1786628일 충청남도 예산군 용단에서 호조판서를 지내던 김노경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에 재미있는 일화를 가지고 있는데 어머니배속에 다른 애기들보다 두 곱 절이나 더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 유 씨는 첫 번째로 하는 해산이라 근심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열 달이 훨씬 넘도록 애기는 배속에서만 꿈틀거릴 뿐 기척이 없으니 유 씨는 남편을 부여잡고 자기의 무거운 마음을 터놓았지만 남편 역시 무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큰 장수가 태어날 모양이지.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남편은 아내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기는 14개월만에야 출생했습니다. 온 집안이 그대로 경사이고 웃음이었습니다. 모두가 장수감이라고 좋아 하며 야단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쓰고 그림 또한 잘 그려 뭇사람들의 칭찬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무엇을 하나 잡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기어이 파고 드는 직심스러운 성격으로 하여 부모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정희는 유학과 문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아버지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18세기 이름 있는 실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박제가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호를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추사(秋史)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희는 어렸을 때부터 탐구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벌써 젊은 나이에 민족은 자기 인민이 걸어온 과거를 잘 알아야 하며 그 빛나는 역사를 밝혀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가졌으며 그로 하여 온 생애를 여기에 바쳤습니다.

 

16살 되던 해 그의 스승인 박제가가 중국에 다녀오면서 그 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곳 소식을 들려주자 자신도 그들과의 열렬한 토론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이름난 선비들이 천하에는 많다네

내 이제 그들 속에 지기를 맺으련다

서로 마음 맞으면 목숨인들 아끼랴

 

 김정희는 24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를 지냈고 규장각 대교(궁정기록편찬을 맡은 직무)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린 것을 변호했다 하여, 그리고 친구인 권돈인의 무죄를 나서서 증명해주었다 하여 정배살이를 강요당한 결과 13년간의 고생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정희는 유배지에서나 벼슬을 사는 기간이나 추호의 동요와 변함이 없이 고고학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24살에 처음 나라일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으로 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당시 중국의 대학자였던 78살의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의 학자들과 안면을 익혔고 그들 속에 조선학자의 기풍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한 달 남짓한 체류기간 김정희는 여러 분야의 학문과 시문, 서예에 대하여 그들과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누었고 특히 고고학문제에서 뚜렷한 주장을 가지고 당당하게 논쟁하여 중국의 학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옹방강은 그 시기 중국의 으뜸 가는 학자로서 특히 금석학(돌이나 쇠붙이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뛰어난 인재로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김정희의 깊은 지식에 놀라 경술문장이 조선이 제일이라고 찬양했으며 그를 환영하고 대접했습니다. 옹방강은 자기의 두 아들을 김정희와 친교를 맺게 하고 앞으로 학술적인 면에서 서로 도와줄 것을 굳게 약속하게까지 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서면을 통해 자기들의 연구 성과에 대한 토론을 진지하게 계속해나갔고 글씨를 보내고 받으면서 서예문제도 논의했습니다.

 

그의 고고학과 금석학에 대한 연구 성과는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라에서 연구조건을 보장해주는 것도 없는 당시의 실정에서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고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거나 높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비석들이나 가지고 황당한 전설들로 미화 분식된 미지의 세계에 파묻힌 자료를 찾아내고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야 하는 이 분야의 과학연구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료수집정리에 정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궁전의 서고는 말할 것 없고 나라지경을 벗어나 중국의 옛 문헌들도 낱낱이 뒤지었으며 은, 주나라 시기, , 진나라 시기의 생활도구, 옛 비문, 그 탑본들, 옛 돈, 막새와 벽돌, 옛 무기, 불상, 거울, 인장들을 직접 보고 확인했습니다.

 

그의 연구 성과에서 특별히 지적해야 할 것은 ?석노가?(石?歌),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등의 저서들입니다.

 

?석노가?에서 김정희는 그때까지만 해도 귀신의 조화로만 보아오면서 제사를 지내고 받들던 돌도끼, 돌활촉들을 처음으로 옛 사람들이 쓰던 생활도구이고 무기라는 데 대하여 고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도 지금 부르는 것처럼 돌도끼’, ‘돌활촉으로 새롭게 지어 붙였습니다.

 

그는 석기유물과 토성유적들을 반드시 갈라 보아야 하며 이것은 시기적으로 다르다는 데 대하여 증명했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김정희의 공적은 ?신라진흥왕릉고?를 밝혀낸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것은 모두 일반적으로 신라의 왕과 대신들의 무덤으로만 보았지 누구의 무덤인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에 기록된 왕릉의 위치와 사적들을 모두 대조 확증하여 이것은 진홍, 진지, 문성, 헌안 등의 왕릉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 냈습니다.

 

그는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고 거기에 새겨진 글들을 파고들어 읽어냈으며 진흥이라는 칭호가 죽은 후의 시호가 아니라 바로 살아있을 때의 칭호였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이것이 확증됨으로써 후신라 전후의 왕릉제도에 관한 문제, 벽화를 통한 삼국시기의 미술문제, 서예문제 등 많은 문제들에 명백한 대답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공적 중에서도 큰 공적으로 됩니다.

 

?예당금석과안록?에서는 주로 비문들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입니다.

 

현재까지 전해진 삼국시기 비석 중에서 온천군에 있는 ?점제비?(??碑)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것이 마운령비, 황초령비, 북한산비, 창녕비 등이 있습니다.

 

이 비문들을 통해 그 시기 신라의 경계를 증명하고 있는데 황초령비와 북한산비는 김정희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고 고증되었으며 마운령비는 1829년에 발견되었습니다.

 

김정희는 이 비문들을 찾아내고 고증하기에 자기의 정력을 다했습니다.

 

북한산비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를 고증해내기 위해 수십 차례에 걸쳐 험한 산발을 오르내렸고 힘이 진하여 어떤 날에는 산중턱에 주저앉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그는 자기의 머리를 쳤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아직 못 찾은 비들이 수다한데

 

그는 완강한 의지를 가지고 또다시 일어나 살펴 나갔습니다. 그리고 비문에 새겨진 한 자 한 획에 이르기까지 수백 번에 걸쳐 들여다보고 또 보면서 철저히 고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에는 해가 지는 것도 모르고 열중해 있다가 앞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무거운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여 마을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문검토를 하면서 사고를 집중하려고 문을 닫아 매고서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학구적이고 탐구적인 노력에 의해 바로 고고학의 일정한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연구 사업은 비록 철저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벼락귀신의 조화로만 보아오면서 두려워하고 무서워서 감히 만지기도 어려워하던 돌도끼, 돌활촉 등을 석기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생활도구로 보고 증명해낸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의 조화로만 보아왔다면 이와 같은 연구 성과를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해 여름 가물이 들어 밭에서는 곡식이 탄다고 아우성치는데 사람들은 물을 끌어다 댈 생각은 하지 않고 밤낮으로 하늘에 비를 오게 해달라고 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김정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허허허, 여보시오. 그렇게 자꾸만 빌지 말고 빨리 웅덩이를 파고 물차를 만들어 물을 끌어다 밭에다 대어야 하지 않겠소.”

 

그는 자신이 먼저 마을 앞에 저수지를 팠습니다. 그리고 물을 끌어다 밭에다 대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을 먹은 밭에서는 강냉이가 푸르싱싱하게 자랐지만 온 종일 빌고만 앉았던 사람들의 밭에서는 거둘 것이 한 이삭도 없이 모두 말라서 죽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세계관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김정희는 서예에서도 이전에 없는 독특한 성격의 것을 창조했습니다. 그의 글씨는 신라의 김생 이후의 가장 이름난 것으로서 추사체라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김정희의 글씨는 획 하나, 점 하나에도 특색이 있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노력만이 아니라 고고학을 연구하면서 많은 비문들을 다루고 옛 문자들을 보면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글씨는 곱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운차고 활달하여 사람들이 쥐고 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그가 7살에 나던 때의 일입니다.

 

입춘이 되면 사람들은 입춘서(입춘 때 벽이나 문짝에 붙이는 글)를 써서 대문들에 붙였습니다.

 

김정희 집에서도 그가 입춘서를 써서 들어오는 바깥 큰 문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앞을 지나가던 좌의정 채제공이 이것을 보더니 그 글씨가 하도 마음에 들어 그의 집을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김정희의 집에서는 대감을 맞은 것으로 하여 들썩했습니다.

 

그래, 이 입춘서를 누가 썼는가.”

 

채제공이 그의 아버지에게 물어왔습니다.

 

제 아들 녀석의 변변치 못한 글이옵니다.”

 

그는 황송스럽게 대답을 올렸습니다.

 

좌의정은 김정희를 불러 의미 있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야 떠나갔습니다.

 

과연 기특하다. 글씨는 명필이로다.”

 

이렇게 김정희는 고금에 없는 독특한 성격의 서예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예에 관하여 중국의 학자인 이월정(李月汀)에게 보낸 서한에서

 

옛을 배우되 옛에 빠져서는 안된다.”

 

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제주도 유배 시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해적선들이 계속 기어들어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하자 해안방어를 강화할 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정부에 건의서를 내었으며 백성들에게는 그에 대처할 필요한 것들을 힘자라는 껏 해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적선들과의 싸움에도 앞장 섰습니다.

 

김정희는 7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저서들로는 ?완당척독?(阮堂尺牘) (22), ?담연재시고?(覃?齋詩藁)(72), ?예당금석과안록?, ?완당집?(55), ?완당선생전집?(105) 등이 있습니다.

 

김정희는 이와 같이 고고학자로서 또한 서예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그밖에도 문학예술분야에 특색 있는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추사 김정희 초상화와 세한도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는 김정희가 제주도 대정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4(헌종 10년)에 그린 문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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