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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김씨 김일제(신라는 흉노의 후예)
신라 흉노설의 시원이 된 김알지의 한반도 이동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
그의 조상이라고 알려진 흉노출신의 한(漢)나라 귀족 김일제의 생을 되짚어 본다.
본시 김알지와 김수로 부족들은 그 근원이 같았고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지역을 향해 동진해 왔다.
낙동강 유역에 선착한 김수로세력이나 경주지역에 도착한 김알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선주민들속에서 융화되고(김알지)
또는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국가창설(김수로)에 나서면서 고대 한반도 역사의 주역들로 등장하게 된다.
한서(漢書)’의 김일제 전(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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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해 이르기를(贊曰), 김일제는 이적(夷狄)의 사람으로 그의 모국을 잃고 한의 궁중에 매인 노예였으나
임금을 독실하게 공경하고 타일러, 스스로 충성스러움과 믿음이 나타나 공적에 의해 상장(上將)이 되고 나라를 후사에 전해
자손은 대대로 충효로 이름나고 7대 왕에 걸쳐 궁중을 돌본 일, 어찌 그리 성했는고.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翁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어머니 알지?閼氏?와 동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을 길렀다. 이때가 나이 14세였다.
그 뒤 무제는 잔칫날에 말을 검열하였다. 거기엔 후궁의 여인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차례로 말을 끌고 어전 아래를 통과했는데 여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일제는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 용모는 엄숙하고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지고 훌륭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곧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에 올랐다.
일제는 임금에게 가까워진 이래 전혀 과실이 없어 임금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 누천금이나 되었다.
임금이 밖에 나갈 때는 함께 타고 갔으며 안에 있을 때는 좌우에서 모셨다.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한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리니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후하게 대하였다.
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일제와 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
일제는 그 초상을 뵐 때마다 예배하고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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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후 벼슬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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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임금은 좌우에서 모신 지 수십년에 이르렀다(이 사이에 일제는 임금을 암살하려 하는 자를 잡아내 더욱 임금의 신뢰를 받았음).
임금은 일제에게 궁녀를 주었으나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의 딸을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그의 독실과 근신이 이와 같아 임금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이 앓아 눕게 됐다. 무제는 모하라(임금을 암살하려 한 자)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투후(?侯)’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임금(昭帝)이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어린 임금을 보조한 지 1년 쯤 지나서 일제는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이 임금께 진언하여 일제는 드러누워서 열후(列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하루가 지나서 죽었다(나이 50세로 추정).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주고 묘지를 주어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군대의 진을 펴고 무릉에 이르렀다.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하였다.
―일제의 두 아들 상(賞)과 건(建)은 원래 시중(侍中)이 되고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해 함께 기거했다.
상은 봉거도위(奉車都衛)로,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되었다.
상이 투후를 계승하여 두 개의 인수(印綬)를 차게 돼 임금이 곽장군에게 이르기를
“김씨 형제가 모두 두 개의 인수를 달게 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으니
곽광이 대답하기를 “상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했다. 그때 나이 모두 8, 9세였다.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 상은 태복(太僕)이 됐다. 그런데 곽광 장군이 모반의 낌새를 보이자 상서하여 곽씨의 딸인 부인과 이혼을 했다.
임금도 이를 애처롭게 여겼으며 이로 인해 상은 연좌되지 않았다.
원제(元帝) 때 광록(光祿)의 훈(勳)을 받고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나라는 없어졌다.
선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일제의 차남인 건(建)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하여 일제의 뒤를 잇게 했다.
다시 당의 아들인 성(星)이 투후를 계승한다.
정리하자면 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이라는 성을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된다.
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나라 제후국의 왕인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는다.
일제의 아들 상(賞)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星)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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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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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김일제 일가에 자주 등장하는 ‘투후’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비문에서 다시 나타난다.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비석은 윗부분 전체가 없어져버렸고 비의 아래 둥치만 남아 있다.
현재 탁본으로 남아 있는 비문의 글자는 원래 비문의 일부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계보가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신라 왕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문무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다.
이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년)에게 보고됐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문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비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출자(出自)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득공 (柳得恭·1749∼?)이 그의 저서 ‘고예당일기’에서 언급한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러나 유득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대(先代)가 누구 누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 선대를 표시하는 글자들은 ‘화관지후(火官之后)’니 ‘투후’니 ‘성한왕(星漢王)’이니 해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무슨 암호처럼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무왕 비문에 남아 있는 글자를 조립해 분석을 해보면
과거의 많은 금석문에서처럼 조상을 미화해서 신화로 꾸미는 가식이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
비문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7단계 인맥 계보를 구체적 역사에 잇대어 설명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르지 못한 고조선이나 삼한 등이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도 풀릴지 모른다.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
④ 투후(?侯): B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옆에 덧붙인 연도는 문자학회 김재섭씨가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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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은 소호김천씨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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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역사서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존재한다.
신라 6촌장들이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 즉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도 있고,
점필제 김종직의 ‘이존록(훙尊錄)’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끝머리에 붙여진 김부식의 논찬과 같이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김씨의 선계가 소호씨 계열임을 말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중국이 신화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삼황오제시대의 한 사람인 소호김천(少?金天·재위 7년, BC 2474∼2468년)은
진나라와 연관된다. 진나라가 세워질 때 서방의 신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백제사(白帝祠)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白帝)는 소호김천을 가리키며 백제사는 소호김천을 위한 사당이었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족 계열인 휴도가 서쪽 돈황으로 피난 가서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
금인제천(金人祭天)의 금인(金人)도 소호신(少?神)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문무왕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侯祭天之胤)’는 글이 등장하게 된다.
또 한나라 무제가 일제에게 성을 내리면서, ‘제천금인’한 휴도왕의 왕자니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④의 투후와 ⑥의 성한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관직 명칭으로 나온다.
실제로 ②의 진백과 ④의 투후 사이의 역사 기년을 추적해보면 진나라 멸망과 투후가 생긴 내력이 중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사항은 ⑥의 성한왕이 과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문무왕 기록은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왕조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당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기원후 5년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왕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물론 왕망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외가인 김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만에 망했다.
이렇게 됐으니 신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따라서 문무왕 비문과 왕망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성한왕,
즉 일제의 5대손인 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일제의 자손 중 또다른 김씨들이 가락으로 대거 이동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핵심으로 꼽히는 사람이 김일제와 같이 포로로 잡혀온 동생 윤(倫)이다.
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안상(安上)이 투후 벼슬과 동격인 도성후(都城侯)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윤의 4대손이자 안상의 3대손 탕(湯) 역시 왕망의 실패 이후 이 땅으로 망명해 오는데, 바로 그가 김수로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투후 일제의 5대 자손이 신라 김씨계이고 윤의 5대 자손이 가락김씨계가 된다는 것이다.
가락의 시조 김수로의 직계가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가계라면
가락 김씨의 시조할머니 허왕후는 인도에서 온 공주라는 설도 설득력이 없어진다.
허왕후의 인도 아유타 공주설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양자강 상류 보주에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김해로 왔다는 설 등 그야말로 설왕설래다.
문정창씨는 “허왕후의 유입과정과 그 상황 등에 비추어 김수로 일문은
신제국이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아성이 무너졌으므로 유랑하여 한반도에 온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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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실에 등장하는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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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허왕후의 출자 또한 뒤바뀔 공산이 많다.
‘한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언은 할 수 없을지언정 허왕후가 한 왕실 출신이라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한 왕실에서 김씨계와 허씨계 두 집안은 초창기부터 강하게 얽혀 있었다. 허씨는 9대 선제(宣帝)의 황후였다.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아들 도성후(都成侯) 안상(安上)과 황후 허씨의 아버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은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이후 왕실의 외척으로서
당대를 주도한 곽씨 일파와 정권경쟁의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곽씨 일파의 허황후 살해음모를 들춰내 공을 세우게 된다.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와 신제국 왕망의 멸망시기까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외척과 공신의 후손으로
황제의 부마인 허광한과 안상의 자손이 서로 혼인한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허광한의 경우는 황후가 된 딸만 있었고 그의 두 동생도 각각 박망후(博望侯) 요성후(樂成侯)가 되었다.
마지막 신제국에서 허광한을 이은 경(敬)과 박망후를 이은 병(竝), 또 병을 이은 보자(報子), 요성후를 이은 상(常) 등을 보면
김수로가 되어 가는 도성후 탕(湯)의 왕후인 허씨의 출자가 어느 곳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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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요 한 권의 책이라고 합니다.
얼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네요.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 그려가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시간시간 들로 채워가는 고운날 되시길요~